♣복음말씀의 향기♣ No4008
10월12일[연중 제2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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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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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WkmjIGcPX8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서운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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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나와 그를 분리하고 배척하는 행위!>
사도 바오로의 신앙 여정을 정말이지 특별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끈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지도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으로부터 직접 선발된 직제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이후 사도로서 그의 모습은 열두 제자 못지않게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사도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는 말 마디 그대로 스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치관과 삶의 궤적, 스승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지향점 등등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충실히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오늘 갈라티아서 말씀에서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위 말씀은 수난 직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그 행동과 일맥상통합니다. 스승이며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제자요 종인 사도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 발에 입맞춤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너희는 나의 벗, 즉 친구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요. 하느님의 외아들, 만왕의 왕,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서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내가 친구 사이라니, 이보다 더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 이 세상에 다시 또 있을까요?
물론 이런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 특히 고위층 인사들에게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주인과 노예 사이에 차별이 없다니, 주인으로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게 아니라니, 남자들 모두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에게는 돌팔매질과 욕설, 매질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 하느님께서 참으로 슬퍼하실 일이 하나 있으니, 나와 다른 그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가난한 그, 나보다 못 배운 그,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투성이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그를 나와 분리하고 배척하는 행동입니다.
세례를 통해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 우리는 더 이상 그 누군가를 차별대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녀들, 제자들, 아랫사람들을 세상 절친한 벗으로 여겨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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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 놓아야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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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교우들과 함께 ‘야구장’엘 다녀왔습니다. 돔구장이기에 더운 날씨임에도 안에는 시원하고 쾌적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주일하교 학생들과 갔었고, 이번에는 어른들과 함께 갔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지난번에는 3 : 2 로 이겼고, 이번에는 2 : 0 으로 이겼습니다. 홈팀이 이기는 경기는 경기장을 찾은 관중에게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저는 사제복을 입고 갔습니다. 교우 한 분이 제게 ‘신부님은 야구장 갈 때도 사제복 입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옷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제복이 편해서 입고 다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사제복도 기능성 사제복이 있어서 땀 흡수도 잘 되고, 금세 마르기도 해서 좋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눈이 먼 소경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소경에게 ‘당신은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소경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캄캄한 밤에 등불을 보면 제가 있는 걸 알고, 피해 할 겁니다.’ 제게 사제복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된 사람이고, 사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는 걸 알려 드리는 의미도 있고, 저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것은 저처럼 사제복을 입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손에 묵주 반지를 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차에 묵주를 걸거나, 십자가를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집에 십자가 고상을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는 사람입니다. 겉옷을 빌려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기차는 연결된 객차가 많아도 늘 같은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뭔가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바벨탑’과 같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가족의 틀을 벗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를 모두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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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하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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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이 “감시자” 노릇을 하였다고 말합니다.(갈라 3,24 참조) 『200주년 신약 성서』에서는 같은 단어를 “후견인”으로 옮깁니다. ‘파이다고고스’라는 이 그리스 말 낱말은 어원적으로는 ‘파이스’ 곧 아이에게, ‘아고고스’ 곧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믿을 만한 종에게 아이의 생활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맡겼고, 그 일을 하던 사람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들은 교사 또는 스승과는 달랐으며, 어느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지 바른 생활을 가르치며 훈육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들은 종보다 신분이 높지만 감시자인 종에게 교육을 받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자유인으로서 올바로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종인 감시자에게 매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있었던 것도, 우리에게 율법이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3,24) 준비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온 낱말들로 표현하여 본다면, 율법은 한편으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서 해방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약속도 주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였던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참으로 성숙해졌다면 우리에게는 감시자가 필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멋대로가 아니라, 감시자가 없어도 자유를 사용하여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5,13 참조). 거기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아직도 감시가 필요한 미성년자라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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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과 회개에서 무임승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1)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는 말은, “선생님의 어머니는 복되신 분입니다.”라고 찬양하는 말이고, 이 말은 사실상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엘리사벳의 인사말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이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차’,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의 인간 구원 사업을 증언하고 찬양하고, 동시에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증언한 말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모님 태중의 아기는 복되신 분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해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성모님도 복되신 분입니다. ‘복되신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 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어떤 여자’의 말도 엘리사벳의 말과 같은 성격의 증언과 찬양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여자가 그런 말을 한 일에도 성령의 힘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그렇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입니다. <여기서 ‘오히려’는 ‘그렇기도 하지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행복하다.’ 라는 말은 ‘복되다.’,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도 복되신 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복되신 분이다. 그리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은 곧 ‘복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그 ‘복’을 받았고,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복이 ‘완성’될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어떤 특혜도 없고, 예외적인 특권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족들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신앙인 가족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얻습니다. 하늘나라 입장과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할 때,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라서 살아남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롯은 악한 사람인데도 아브라함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롯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5) 우리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고, 회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모니카 성녀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경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개와 개종은 모니카 성녀의 기도 덕분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회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 자신이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공이 컸음은 틀림없지만...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냉정한 분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또 회개를 기피한 사람들 자신들 탓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들은 다른 누구를 탓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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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가르침에 탄복한 어떤 여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어떤 대상의 일부분으로 그 전체를 지칭하는 수사적 표현을 제유법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을 배었던 ‘모태’(부분)와 젖을 먹인 ‘가슴’(부분)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전체)이신 성모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처럼 훌륭한 분을 낳아 기르신 성모님이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군중 속 여인의 찬사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 엘리사벳도 성모님을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1,42) 분으로 칭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행복한 분으로 여긴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성모님께서 행복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1,38 참조)
오늘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뿐만 아니라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이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단언하신 바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따라서 날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이 우리 신앙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성모님처럼 행복한 이로 칭찬을 받고, 또 성모님처럼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이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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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
아무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한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 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밣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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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
조금은 낯설고 쑥스러운 고백입니다. 제 엄마 돌아가신 마지막 순간에, 제 여동생이 왜 저에게 ‘오빠, 마지막으로 엄마 젖 만져’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전 제 엄마 젖가슴을 만졌습니다. 자식에게 엄마의 젖가슴은 단지 생리적인 젖가슴이 아닙니다. 제 엄마는 모태로 저를 배고 낳았다면, 사랑과 생명의 젖가슴으로 저를 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죽어가는 그 순간 엄마의 젖가슴을 만진 것은 바로 그 생명과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저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참 잘했고, 그래서 불현듯이 엄마가 그리울 땐 엄마 얼굴이 아련히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한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라고 목소리를 높여 칭송합니다. 이런 감동적이고 감탄스러운 표현은 오직 본인 스스로가 자식을 낳아 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그 어머니로부터 삶과 사람에 대한 감사와 고귀함을 듣고 배웠기에 가능하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자식의 위대함은 어머니의 위대함이기도 하며,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어머니란 존재는 세상의 가장 지혜롭고 따뜻하며 인자한 스승입니다. 세상에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저는 고백합니다. 이 여자의 고백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대한 엘리사벳의 예언(1,39-45)의 성취이며 반향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1,42) 엘리사벳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한 행복 찬양을 교회는 성모송을 통해 유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칭찬을 인정하셨지만, 혹여라도 무슨 오해나 착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 즉 여자가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차원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으며 그 완전한 전형이요 모델이 다름 아닌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정녕 복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니이시기에 복되신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참된 제자이며 신앙인이기에 복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 위에 살았고 살아가는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시며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드님 생전에 어머니의 삶은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늘 교차되는 삶을 사셨지만, 오늘 복음의 이 여자의 표현대로 이제는 성모 마리아의 육신적인 母性을 찬양한다, 고 해도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더 강조해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다시 母性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마리아의 모성을 드러내 놓고 알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이 모성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그만큼 사람 냄새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람 냄새를 잃어버리면 그만큼 세상은 살맛을 잃고 그 모성의 인자함과 자비로움과 따뜻함과 포근함을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되어 가리라 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되신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함께 따라가며 고통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와 가까운 이웃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진리인 말씀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들의 모성을 제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하고 포근해질 것이지만, 자기 자식만을 아낀 채 다른 아이들을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무관심과 냉대로 대응하고 반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오직 내 자식만이 보이고, 오직 내 자식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세상, 사람 냄새가 나는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언제나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들기도 하지만 아울러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모성의 분리의 정열 또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으로 나뉘는 사랑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입니다. 자식이 때가 되면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날아가도록 해 주는 것이 모성애임을 제 어머니는 수도원에 입회하려는 제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최종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놓아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 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칭송한 어떤 여자의 감탄스러운 찬사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합니다.”(11,28)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언급은 바로 다름 아닌 모성애의 합일의 정열과 분리의 열정을 지니신 어머니 마리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봅니다. 성모 마리아는 모든 어머니의 참 위로자이시며, 모든 어머니의 참 표본이고 표양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성모님의 참 행복을 자녀들로부터 받게 되기를 바라고 또 기도합니다. “주님, 저나 우리 각자에게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이 사랑이심을 느끼고 경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저희 각자의 살아 계신 어머니들께는 건강을, 돌아가신 어머니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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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상속 문제로 형제가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들 간의 재산 문제를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도 있었고, 상속 다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면서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더군요. 실제로 가족을 만난 적도 있지만, 첨예한 갈등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런 갈등이 생각납니다.
큰아들이 제사를 지내줄 것이라면서 전 재산을 큰아들에게만 물려준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까지 모셨던 사람은 큰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이었는데, 막내아들에게는 어떤 재산도 남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형제들은 공평한 재산 분배를 요구했지만, 큰아들은 부모님의 유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재판 이후 형제들은 서로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선언했고, 실제로 재판 이후 만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체념한 상태에서 열정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깊은 슬픔만 그 자리에 남게 됩니다. 재산이, 물질적인 재화가 과연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할까요? 사랑이 사라지고, 체념 속에서 슬픔을 간직하면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 중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의 행복이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인 것에서 온 것일까요?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만으로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혈연관계만으로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행복도 예수님을 낳고 키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속적으로 성공한 부모를 두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세속적인 성공을 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가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기준을 따르면 분명한 기쁨을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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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 처지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 음성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이고 보상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멀리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채워져서 만족하는 행복이 있겠지만,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되새기고 순종하며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이룬 영광이 어머니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머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성모님도 올바로 공경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 봉헌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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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만남>
루카 11,27-28 (참행복)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한 만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뭇사람들이
그 사람의 어머니를
안쓰러워했다네
하나밖에 없는
다 큰 아들이
제 앞가림도 못하고
천덕꾸러기 사람들과
어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난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니
저러다 일 나겠네
저러다 일 나겠어
그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무슨 죄가 있나
뭇사람들이
그 사람의 어머니를
불행하다했다네
비난과 동정을 오가는
뭇사람들의 목소리를 뚫고
한 여자가 외쳤다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선생님이 계시니
선생님의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바로 제가
선생님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많은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에
휘둘리지 않고
그 여자만은
그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네
이 여자를 만난
그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
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하신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나를
나로 보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이 사람을 만난
그 여자는
얼마나 기뻤을까
그날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행복한 만남이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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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곧 행복입니다.경청한 바를 믿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입니다.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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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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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
“아이는 세상에 나와 말을 익히고, 노인은 세상을 겪으며 침묵을 배운다.”<다산>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면서 침묵의 경청이, 침묵의 겸손이, 침묵의 관상이 참으로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을 세 번째 방문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35분동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서로 주고 받은 선물중 교황이 젤레스키 대통령에게 건넨 청동 주물에 꽃과 더불어 쓰여져 있는 글자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Peace is a fragile flower”
(평화는 연약한 꽃이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연약한 꽃과 같아 다치기 쉽습니다. 참으로 정성을 쏟아 고이 다루어야 할 꽃처럼 평화도 그러합니다. 평화만이 아니라 사랑도 행복도 그러합니다. 값싼 평화가 없듯이 값싼 사랑도 값싼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도 사랑도 행복도 선택이자 정성을 다한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평생 좌우명 같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제가 평생 쓴 시들을 요약한 소원이 담긴 글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을 평화로, 사랑으로, 행복으로 바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하루, 평화롭게 살자, 사랑의 하루 사랑하며 살자, 행복한 하루 행복하게 살자”며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행복의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매사 비판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청중으로 양분되어 있는 듯 합니다. 어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후 능란하게 대처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시종일관 목격한 어떤 여자가 군중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적 소원을 드러낸 고백입니다. 예수님같은 아들을 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입니다. 또 하나 여자들의 간절한 바램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란 말도 들은 적이 생각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의 행복, 어머니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행복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참행복입니다. 한 어머니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행복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루카 11,28)
‘오히려’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나를 낳아서 행복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마리아 성모님이 행복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믿는 모든이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삶이었음을 봅니다.
수태고지에서 순종과 더불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늘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예yes”로 일관했던, ‘비움의 여정’에 항구했던 마리아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이 성모님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순종의 믿음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새삼 누구나에게 열린 참행복이요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삶이 바로 참행복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선택과 노력에 따라 참행복의 꽃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며, 믿는 누구나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행복을 살 권리와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대로 참행복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편 1장도 참행복은 말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2)
시편 119장은 176절까지 시편집에서 가장 긴 장으로 참행복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로 시작하여 176절 까지 계속됩니다. 새삼 말씀은 인간의 본질이요, ‘기도하는 사람’처럼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다음 시편의 고백도 이를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 40,9)
참기쁨, 참행복은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는 인간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세상맛, 돈맛, 밥맛의 행복이 아니라, 말씀맛, 하느님 맛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과 함께 가는 믿음이니 믿음의 기초는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을 통한 공동체의 일치임을 오늘 갈라티아서가 입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갈라티아 교회 신도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6-28)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이요, 이 믿음의 일치를 견고히 해주는 부단한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말씀과 믿음의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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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히려 더 행복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결혼생활을 몇십 년 하고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다.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결혼생활은 행복하고 성공한 결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이런 부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냐는 물음에 대부분이 특히 여성들은 선택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부모 특히 엄마들은 다시 태어나도 다른 유명한 이가 아니라 자기 자식을 사랑할 거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행복한 부부관계와 부모 자식 관계는 자신들에게도 행복이고 보는 이들에게도 아름답고 귀감이 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제가 가끔 곤란한 질문을 어머니들께 드립니다. 죽어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다시 지금 내 아들의 어머니 되는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왜 이런 곤란한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하며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다시 진지하게 질문을 드립니다. 지금 내 아들과 딸의 엄마와 아버지가 되는 것 대신, 주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되시겠는지.
이렇게 질문에 많은 분이 되물으실 겁니다. 꼭 그렇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주님의 어머니도 되고 지금 내 아들의 어머니도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불가한 이유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부자 청년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팔 것을 요구하셨고,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가진 모든 것과 부모와 형제와 자녀마저 버리라 하셨고,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처럼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오셨을 때도 “내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비록 지금 육신으로는 내 아들의 어머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영적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육신의 어머니보다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더 행복한 사람들이 우리는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아들과 딸로도 나는 행복하고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두고 떠나야 하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를 돌려드렸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떠나신 것 같지만 실은 돌아가신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돌아가셔야 할 분을 제 어머니라고 붙잡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이셨겠지요. 저를 놓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가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 인생은 이 세상 소풍을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인생이고, 우리는 같이 소풍을 즐기다가 더 즐거운 하늘로 돌아갈 인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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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참 행복의 길!>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참 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어떤 여자가 행복하다고 지칭한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엘리사벳의 칭송에 드러나 있듯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오늘 복음 말씀의 요지는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이들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6-28)
어제 합천본당에 두 분의 자매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손명숙사비나(90세) 자매님과 한갑순마리아(96세) 자매님이십니다. 두 자매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입니다. 새로운 삶은 죽음 저 너머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 궁극적인 희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참 행복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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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시월의
가을 꽃길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로
행복할 수 있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행복은 분명히
있습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삶을 지키는 것은
말씀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나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말씀과
함께 살아갑니다.
행복은 실천의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행복은
기도와 깨끗한
행위로
이어집니다.
말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형제이며
모두가
어머니입니다.
매 순간을
가장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어주는
올바른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의
시간입니다.
행복의 시간은
말씀을 듣고
지키며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합니다.
듣는 행복과
지키는 행복이
하느님의
말씀에 있음을
되새기는
행복한 가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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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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