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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지 못하였는데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그분이 거기에 계셨다.”
- 수피즘의 창시자 메블라나 루미(Mevlana Rumî) -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
The Study of Eckhart and Islam Sufi Rumi's Mysticism
신은희 (Eun Hee Shin)
경희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전공분야: 종교철학
1. 들어가면서
이 논문의 목적은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를 통해 신과 인간의 통일적 합일에 관한 신학적 인식을 조명함으로서 기독교와 이슬람 수피즘의 종교적 대화를 모색하는 글이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일생은 ‘신과 연애하고 신이 되고자 한 신비가들’ 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을 향한 추구와 신인합일의 영성을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거의 동시대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신학의 궁극적 주제인 신과 인간, 그리고 신인합일에 관한 신학적 여정은 매우 비슷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유사성은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지니는 유대교의 모체전통에서 파생되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러운 닮음’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닮음은 에크하르트와 루미뿐 아니라 소위 ‘신비주의자’라고 분류된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신학자들은 마치 어느 시점에 만나 직접적인 대화를 나눈 후 각자 집에 돌아가 대화 내용을 저술한 것과 같은 상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메타포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둘 다 신의 ‘하나됨’의 본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데 몰두한다. 여기서 신의 하나됨이란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이며 하나됨의 상징을 지성과 영지로 각각 설명하는데 이를 위해 ‘영혼의 불꽃’이라는 메타포를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지성과 영지는 사변적 지성이 아니라 영적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신성과 신을 깨닫는 직관적 지식이다. 지성과 영지를 통해 인간은 무한한 신의 세계와 합일되고 또한 신안에서 소멸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인합일은 비움과 소멸을 통하여 신의 세계에 귀환하기도 하고 신의 세계에 취하여 침잠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신학자는 신과 신성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신인합일 과정과 귀결된 결과에 관해서도 각각의 특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존재를 초월하는 신성 안에서 인간의 생성(becoming)원인을 발견하고 신과 ‘하나됨’의 의미를 신인간의 통일성, 초존재성, 평등성 속에서 공통적으로 찾고 있다. 신이 보여주는 소멸의 첫 시연을 통해 인간 또한 소멸하며 창조하는 사랑의 창조자로 인식한다. 이는 죽는 순간 새롭게 탄생하는 역설적 이면서도 역동적인 비움과 소멸의 신학적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라고 하면 지성의 망각, 종교적 황홀경, 열락과 같은 초월의식의 상태만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신비주의에도 부분적으로 초월적 체험이 내포된 환상적 신비주의 요소들이 발견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둘의 신비주의는 종교체험을 자아강화의 수단이나 지배력의 장악도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격한 내면적 자기 비움과 변혁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룰 수 있는 신적 사랑의 극치를 수행하는 ‘윤리적 신비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본 논문은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이러한 신비주의 특징들을 비교 분석함으로 비움과 소멸의 신비주의 신학을 재조명하여 기독교 신비주의와 이슬람 신비주의를 통해 종교적 통일성, 그 신비적 만남을 확대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만남을 위해 논문은 먼저 ‘신과 연애’하고자 했던 열망을 담은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생애 및 신비체험을 시작으로 신을 ‘인간의 영혼 속에서’ 만나고자 했던 두 신학자의 핵심 주제들을 순차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신의 하나됨, 신과 신성, 통일성, 지성, 영지, 신적사랑, 자아 등이 중요개념들이다. 또한 신인합일의 과정과 함께 ‘신을 완성’하고자 시도했던 두 신학자의 인간해석을 의인학과 우주적 인간학의 개념으로 조명하고 끝으로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신비적 합일에 관한 인식론적 해석을 덧붙이도록 한다.
2. 신과 연애하는 신비가들
1) 에크하르트의 생애와 신비주의
에크하르트(Eckhart, 1260-1327)는 1260년경 독일 튀링겐의 호흐하임에서 기사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젊은 시절 그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입회한다. 사실, 에크하르트의 생애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추정에 근거한 것이 많다. 그의 신학사상을 제외한 개인사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많은 부분 전승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인 중세 독일사회는 신비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적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교황권과 황제권의 마찰과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정점을 향하면서 상호간의 추방과 파문사건이 이어지는 분열의 시기이기도 했다. 자연재해와 흑사병의 참혹한 경험은 중세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초월성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중세사회를 지배했던 이성과 내세 중심의 스콜라 신학의 담론은 조금씩 퇴색되어가고 인간의 종교적 감성과 체험을 탐색하는 새로운 신학적 화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베가르덴(Begarden)’이라는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하면서 신의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강조하고 신과의 신비적 일치와 인간의 신적 발현과 같은 자유로운 정신의 신학사상들이 퍼져나갔다.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쾰른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사상을 연구하게 된다. 그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강화』는 그의 신비주의 신학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사였던 에크하르트는 1300년경 파리 생 재크 수도원 학교에서 신학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2년 후인 1302년 그는 교수자격인 마이스터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1314년경에는 독일 신비주의 중심지로 알려진 슈트라스부르크의 도미니크 수도원의 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에크하르트의 설교와 신학사상의 자료들은 라인강 상류의 여자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13세기 중엽의 여자수도원에는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으로 귀족 가문의 미망인들이 구성원으로 입회하여 있었다. 수도원은 이들의 신비적 직관, 환영, 환시 체험의 해석과 신학적 탐구의 열정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60세에 이르기까지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신학연구와 설교에 몰두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 사이의 정치 신학적 이단 논쟁의 희생자로 어려운 말년을 보내게 된다. 1326년 에크하르는 신학적 정통성 문제에 연루되고 이단 심문을 받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자유정신’을 추구했던 많은 베가르텐 종파의 종교인들이 화형당하거나 라인강에 수장당하기도 하는 암울한 시기였다.
1329년 교황 요한네스 22세는 에크하르트의 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단죄칙서 『주님의 밭에서』를 공포하기에 이른다. 그의 죄목은 ‘필요이상으로 알고자 한 죄, 청중들을 허구로 인도한 죄, 법도를 벗어난 죄, 마귀의 꾐에 빠진 죄’ 등등 모두 28개의 항목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단 판정은 에크하르트가 이미 사망한 후 발표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죽음에 관한 기록 또한 분명하게 전승되는 것이 없다. 다만, 그는 1327년과 1329년 사이 쾰른지역 혹은 아비뇽 지역에서 사망하고 매장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심리적 경험에 의존하는 신비주의보다는 매우 사변적이고 이성적인 신비주의에 가깝다. 그가 실제로 신비적 직관이 있어 환영, 환시, 초월적 경험이 수반되는 신비체험을 하였는지 여부는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그의 신학사상은 신과 인간의 경계성을 용해시키며 신인합일의 신비적 관점을 강렬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가 생각했던 신비주의란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세적이며, 인간적인 신비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신비주의를 ‘사변적 신비주의’ 혹은 ‘이성적 신비주의’와 같은 역설적 표현으로 묘사해 볼 수 있겠다. 사실 그의 신학을 이단논죄에 연루시켰던 작품 『신적위로의 책』은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기본 목적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 여인과의 만남과 의미가 그의 저술에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인간의 고통과 현실적 문제를 떠나 은둔하여 깨달음을 얻는 정적주의(Quietism)를 추구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이해는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가졌으나 그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던 대표적인 이슬람 수피 사상가인 루미의 신비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루미의 생애와 신비주의
젤랄룻딘 루미(Jelalal-Din Rumi, 1207-1273)는 1207년에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아프가니스탄 발크(Balkh)에서 태어났다. ‘루미’라는 이름은 애칭에 가까운 것으로 ‘로마 아나톨리아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루미를 ‘메블라나(Mevlan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스승’이란 뜻으로 훗날 루미는 ‘메블라나’ 수피 교단의 창시자로 추대된다. 루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바하 왈라드(Baha Walad)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루미의 아버지 왈라드는 당시 저명한 신학자, 법학자, 신비가로 알려져 있었다. 왈라드의 신학적, 영적 계보는 수피즘의 거장으로 알려진 무함마드 가잘리와 그의 형제 암하드 가잘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피즘의 사상에 심취했던 왈라드는 『신적과학』이라는 뜻의 『마아리프 (Maarif)』책을 출간하면서 신과 인간의 합일을 주장하여 당시 많은 신학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219년 경 루미의 가족들은 몽골군대의 침공을 피해 발크를 떠나야 했다. 그의 가족들은 다마스커스 지역을 지나며 바그다드와 메카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루미는 신비주의 사상가와 수피성자로 알려진 이븐 아라비(Ibn Arabi)와 아따르(Attar)를 만나게 된다. 아따르는 루미의 아버지인 왈라드에게 신비의 책을 전하며 장차 루미에 관한 예언을 했다고 전한다: ‘루미는 신의 구애자로서 세상 가운데 타오르는 신의 횃불이 될 것이다.’ 왈라드는 가족들을 데리고 터키 코냐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학자들의 술탄’이라 칭송받으며 살게 된다. 루미는 아버지 왈라드의 이러한 신학사상과 신비가로서의 삶을 흡수하며 성장하게 된다. 열일곱 살의 루미는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루미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학파인 하나피(Hanafi)학파에 이름을 올리며 신학자와 법학자로서 성숙하게 된다. 아버지 왈라드가 사망한 후 루미는 코냐의 수피 공동체에서 신학자로서 영적 수행자로서의 명성을 얻어 수피 마스터의 자리인 쉐이크(sheikh)에 추대되었다.
1244년 경 학자와 이슬람 수행자로서 명성을 세웠던 루미는 근본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루미의 삶을 매혹시킨 수피 탁발승인 타브리즈 샴스(Shams of Tabriz)는 신비가로 알려진 기묘한 인물이었다. 샴스는 자신의 ‘영적 연인’을 찾으며 중동지역을 떠도는 나그네 탁발승이었다. 샴스는 수행 중에 하늘로부터 ‘영적 연인을 만나면 무엇을 주겠는가’라는 신비한 음성의 질문을 받게 된다. 그는 그 질문에 주저 없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노라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샴스는 자신의 영적 연인이 저명한 학자인 루미라는 계시를 받게 되고 코냐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마침내 루미를 만나게 된다. 샴스가 루미에게 던진 화두로 인해 루미는 찰나의 영적 각성을 맞이하는 순간을 갖게 된다. 샴스의 질문내용 일부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금욕주의 수피 신비가인 바스따미(Bastami) 중 누가 더 위대한가에 관한 것이었다. 루미는 신을 향한 정열과 신에게 더욱 가까이 가고자 노력했던 무함마드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샴스의 화두는 신을 향한 인간의 정열과 노력을 표현한 무함마드보다 이미 신과의 합일을 경험한 바스따미의 고백이 더욱 뜨겁지 아니한가를 반문한 것이다. 바스따미는 신인합일을 체험한 후 “얼마나 위대한가. 내 영광이여!”라고 고백하였다. 이 질문을 통하여 샴스는 루미에게 신과의 직접 체험의 중요성을 강렬하게 선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루미는 샴스의 영적 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그 이후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둘의 만남은 역사상 가장 신비롭고 친밀한 우정과 영적 사랑의 만남으로 전승되고 있다.
루미는 샴스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을 통해 신의 현현을 경험하게 하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루미의 신비체험이란 인간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었다. 샴스는 루미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루미는 샴스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성적 신학의 세계가 신의 사랑으로 흠뻑 취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피 신학자 나스르 (Nasr)는 이 둘의 만남의 영향력을 이렇게 묘사한다: “샴스는 마치 루미의 내면세계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시어의 바다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영적 파도와도 같았다. 그 거대한 파도의 풍력이 루미로 하여금 페르시아 문학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루미와 샴스의 만남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들의 만남과 영적 우정의 세계를 질투하던 루미의 추종자들은 결국 샴스를 우물가에 묻어 살해하고 만다. 샴스가 사라진 후 루미는 샴스의 존재를 영원한 영적 연인으로 삼게 된다. 보이지 않으나 루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영적 연인의 존재로 승화시켜 수많은 시어를 남기게 된다. 루미는 샴스의 영혼 속에서 자아의 소멸, 즉, 파나(fana)의 체험을 통하여 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되는 신비주의를 체험한 것이다.
3. 신을 영혼 속에서 만난 신학자들
1) 에크하르트의 신: '無의 신성, 하나, 신적 지성'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 후반기에 등장하면서 신의 이성적, 합리주의적인 색채를 종교적, 신앙적 차원으로 표현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에크하르트의 신학은 당대 스콜라 철학의 조직적 체계와 비교하면 다소 단조롭고 모호한 종교체험의 산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스콜라 철학의 쇠퇴기에 번져갔던 신학과 철학, 신앙과 지식의 영역에 싹터버린 ‘이중의 진리’를 종교체험의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한 신의 직접적 체험을 강조하며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의 부활을 가능케 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신관은 그가 도미니크 수도사로서 작성했던 설교집에 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의 방대한 설교 내용들이 신학적으로 뚜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에크하르트의 설교집에 나타난 자료를 기초로 그의 신관이해를 이슬람 수피 사상가 루미와의 대화를 위해 크게 세 가지 신학적 관점으로 압축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 ‘신과 신성’의 문제, 둘째, 신성의 ‘하나됨’의 단일성 문제, 셋째, 신과 인간의 ‘통일적 합일’을 위한 지성 문제를 중심으로 에크하르트의 신관 이해를 접근하도록 한다.
첫째, 에크하르트는 그의 신학세계에서 우선적으로 신과 신성의 잠정적 구별을 시도한다. 그는 신을 ‘완전한 피안’으로 이해하며 인간이 신의 본성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모습이 아님을 전제한다. 즉, 신에 관해 아무것도 분명히 말할 수 없다는 부정신학의 경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신과 신성을 구별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신성(Gottheit)은 '자연화되지 않는 자연(genaturte Natur)'으로 ‘존재’라는 술어조차 부여될 수 없기에 無의 심연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는 우주와 역사 안에서 운행하는 신과 그 이면에 창조성과 역사성으로 움직이는 신을 가능하게 했던 순수정신으로서의 신성을 구별한다. 그는 우주의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서 활동하는 신은 삼위일체의 신이라고 본다. 삼위일체의 신은 창조활동을 통하여 세계와 소통하며 성육신의 과정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는 신이다.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의 신은 그보다 우위에 있는 본원적 신성의 최초 유출(effusion)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조와 역사의 삼위일체의 신 또한 절대 無인 신성의 세계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신성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이다. 거기에 관해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신은 활동한다. 그러나 신성은 활동하지 않는다. 신성은 또한 활동할 이유가 없다....신성은 결코 어떠한 활동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신과 신성은 활동과 비활동을 통하여 구별된다."
에크하르트는 ‘신성가운데 모든 것은 하나이다’라고 정의함으로서 신의 개념보다 더욱 완결된 신적 정신을 제시한다. 신성이란 신에 관한 모든 표상, 이미지, 메타포를 초탈하는 '순수 정신'으로 언어적 묘사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절대정신과도 같다. 이는 마치 도덕경 1장에서 정의하는 道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신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인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떠한 다수성도 (하나인) 신을 흩뜨려 버릴 수 없듯이, 또한 어떠한 것도 이 사람을 흩뜨려 버리거나 다수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모든 다수성이 거기서 하나이고 비다수성인 저 일자(一 者)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신성이란 이처럼 분열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은 본연의 순수한 신의 상태이면서 만물의 조화이고 원리이며 다수성을 포함한 비다수성의 정신, 지성, 이성인 그 자체로 만물과 구분될 필요가 없는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크하르트는 하나인 신성은 만물과 구분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신성은 수많은 은유와 이미지와 형상을 지닌 신과 구별되어 설명된다. '나는 나 스스로 있는 자'(출 3:4)라는 뜻은 신적 본연의 순수성과 스스로 있어왔음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신성의 세계를 초탈과 고요한 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無의 세계'로 표현함으로서 신성을 일종의 신비성으로 남겨둔다.
둘째, 신성의 하나됨의 의미인 단일성 문제이다. 에크하르트는 신성의 단일성을 최고의 순수한 상태로 이해하면서 그 '하나됨'을 창조와 조화의 근본원리로, 신성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최종적 목표로 인식했던 것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신성의 단일성과 하나의 개념을 숫자적으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의 의미는 숫자를 초월하는 통일성의 완결된 표현이다. 그는 하나란 "일치로 불리며 이것은 숫자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숫자들의 원천이며 근원이다. 하나는 만물의 시작이며 마침이다. 그러나 하나 그 자체는 자신을 시작과 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신에게 가장 가까이 근접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의 개념은 신플라톤적 철학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엿볼 수있는데 '유출(existus)'과 '환원(reditus)'의 역동적 존재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유출과 환원의 상관관계를 유연성이 가미된 흐름의 메타포로 표현한다. 그는 신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흘러넘침(ebbullitionis),’ ‘솟구침(Uberquellen),’ ‘녹아나옴 (Ausfließen)’으로 묘사함으로서 신의 충만한 사랑과 지성을 재구성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신성의 예로 신의 자비를 설명한다. 신성의 순수함이 자비라는 정신을 신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 움직여 인간 영혼과 만날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신을 잉태하고 신성을 체험할 수 있는 진정한 신비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은 신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신안에서 인간의 탄생’을 ‘인간 안에서 신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통일성과 일치성의 유기체적인 신론에 가깝다. 바닥없는 깊이(Abgrund)로서, 고요한 대지로서, 스스로 있는 침묵으로서, 부정의 부정(nichtes niht)으로, 형언할 수 없는 無로서 신과 인간은 신성의 호흡으로 합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크하르트는 '신성주의' 신비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의 하나됨, 그 일치성과 단일성의 신학적 중요성을 에크하르트는 그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와 함께 하나를, 하나로부터 하나를, 하나 가운데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의 하나 가운데서 영원히."
셋째, 신과 인간의 통일적 합일을 위한 지성문제이다. 에크하르트의 신 이해는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의 철학적 구분을 이미 무색하게 한다. 그는 신의 속성을 '인식' 그 자체로 이해하며 '지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성을 통하여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자체가 신과 인간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신학의 기쁨이라고 이해한다.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신이 선하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신이 지성적이고, 내가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할 뿐이다.... 지성은 신의 성전이다. 신이 자신의 신전, 곧 이성을 떠나 머물 수 있는 다른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자신의 전 존재가 인식자체인 순수지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지성을 '정신 안에 있는 어떤 힘(eine Kraft in dem Geiste)'이라고 정의하면서 ‘영혼의 불꽃’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한다. 에크하르트의 '지성으로서의 신' 이해는 신의 '단일성' 혹은 '일자성'으로서의 신관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는 '신은 하나'라고 정의한다.
“지성은 본래 신의 것이며 신은 ‘하나’이다. 따라서 인간이 지성이나 사유 능력을 가진 것만큼 신을 가지며, 그만큼 ‘하나’를 가지며, 그만큼 신과 더불어 하나됨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로서의 신은 지성이며, 지성은 하나로서의 신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신에 관한 이해는 ‘인간 영혼'의 이해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의 신학을 ‘신비주의’로 명명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신학과 인간학의 연속성에 근저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인간학은 신학의 종속적 관계가 아닌 상호적 연계성에 위치해있다. 그는 인간 영혼은 궁극적으로 신이 탄생하는 성소와 같다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영혼을 통하여 신을 알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길, 그 신적 경로는 무엇인가?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지성'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성을 통해 존재'하는 영혼이라고 정의한다. 신이 인간 안에서 탄생하기 위한 신학적 조건들, 영혼의 비움, 정신의 가난, 신성인 지성(der Intellekt als die Gotthei) 그리고 신과 인간은 모두 지성을 향유하는 영적인 실재라고 보는 관점들이다. 이 논제는 에크하르트의 인간관인 '의인학' 부분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2) 루미의 신: '통일성, 파나(Fana), 신적 사랑'
시대를 초월하여 신비주의자들의 고민은 비슷했던 것일까? 에크하르트의 표현처럼 신성에 파생된 ‘영혼의 불꽃’은 시간을 초월하여 신을 추구하는 신비가의 마음속에 영원히 타오르게 되는 것일까? 에크하르트보다 약 60여년 먼저 살았던 루미의 신학세계에서도 공통적인 주제는 이미 존재해 왔었다. 루미가 살았던 시대에도 헬레니즘의 사상적 유입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아랍철학의 세계에 헬레니즘 영향은 수피즘의 사상 체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루미의 방대한 저술에서 공통적인 나타나는 신비주의 신학 주제 또한 신, 인간, 세계 그리고 이들의 내적 연계성에 관한 궁극적 인식에 관한 것이다. 루미의 신관 논의도 에크하르트의 사상과 공통된 주제들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 신의 통일성 혹은 단일성 문제이다. 둘째, 신의 통일성을 위한 파나, 즉, 인간의 자아소멸 문제이다. 셋째, 신과 인간의 연결을 위한 신적 사랑의 문제이다.
첫째, 신에 대한 시어로 화려한 빛이 드리워진 루미 저작집의 신관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것은 무슬림의 신앙고백인 ‘샤하다(Shahada)’의 내용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신외에 신 없다(La ilaha illa' llah).” 수피 사상가들은 무슬림과 같이 이슬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 샤하다를 수피 신앙과 사상의 핵심으로 여긴다. 그러나 정통 이슬람의 신 이해와 수피였던 루미의 신 이해와 해석은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이는 신관의 해석문제에 의한 차이일 수 있겠으나 루미의 시어와 저술에 나타난 그의 신 고백은 ‘신의 통일성(God's unity)’ 혹은 ‘신의 단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통일성 혹은 단일성이란 의미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 인간의 육체, 활동, 이상, 정신, 감정, 영혼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되듯이 신에 관한 모든 본성들과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루미의 신 이해가 복합문화적인 이유는 아마도 수피즘이 다양한 종교 문화적 배경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루미의 신 이해 또한 기본적으로 꾸란, 예언자, 모슬렘 성인 전통, 페르시아 토착문화와 다양한 고대 신비주의 철학의 조화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루미의 신 이해는 신의 ‘하나됨’과 ‘통일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신의 통일성을 이렇게 비유 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표현들이 있는가! 그러나 모든 표현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물이 가득한 물병을 깨뜨려 보라. 물은 그저 하나일 뿐이다.”
둘째, 루미는 그 하나됨을 회복하기 위한 단계로 파나(fana) 즉, 자아소멸을 말한다. 파나는 수피들이 이루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 혹은 영적 목표이기도 하다. 수피들은 인간이 모든 면에서 신과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수피즘을 알 길이 없다고 말한다. 수피즘의 중요 교리 중의 하나인 ‘타우히드(tawhīd)’는 '신적 단일성' 혹은 '통일성(divine unity)'을 강조한다. 수피들은 노래한다.
“원자, 태양, 은하수, 우주는 분명히 모두 이름이며 이미지이며 형식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하나이다. 오직 하나일 뿐이다.”
수피즘의 신인합일 개념은 역설적 측면이 많은데 보통 합일의 개념은 두 개의 구분된 실재가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수피즘의 단일성은 신과 인간의 합일보다는 ‘오직 신일뿐(Only God is)’이다. 즉, 모든 피조의 세계와 유한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신의 얼굴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따라서 수피들은 신과의 합일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신 안에서 소멸하는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합일이 갖는 두 개의 실재가 공존할 수 있다는 희미한 이분적 함축성조차도 수용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신의 세계 속으로 완벽하게 ‘잠김(immersion),’ 신의 조화 속에 ‘취함(intoxication)'으로서 자아의 의식에서 떠날 수 있는 영적 질서를 루미는 최고의 승화된 상태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적 지식이며 루미는 이 영지를 통해 인간은 무한한 신의 바다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수피의 길'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적 도상에서 인간은 신의 거울이 되어 신이 스스로 자신을 비춰 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루미는 인간이 홀로 자아소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신 안에서 파나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 안에서 이루어진 파나는 바로 ‘하나됨’의 경지를 이루게 하며 신적 단일성을 회복하여 영지의 지평을 열게 된다는 것이다. 수피들은 파나의 상태 이후를 바까(baqa)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이는 신 안에서의 자아소멸을 통해 하나된 신이 그대로 머물게 하는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신 안에 녹아있는 인간의 영혼은 신의 존재론적인 차원을 공유하는 것이며 인간을 통해 신의 뜻인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만든다. 수피들은 이러한 파나와 바까의 과정을 수피즘의 핵심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원한 실재인 신은 그대를 스스로 죽게 하여 신안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한다.’
셋째, 그렇다면 루미에게 있어서 신이란 무엇인가? 그는 신은 모든 사랑의 원천이라고 정의한다. 신의 실체는 사랑이며 가장 순수한 창조의 힘이다. 루미에게 있어서 ‘사랑의 존재론’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실재’인 것이다. 하지만 루미는 신적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체험하는 것이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사랑에 관하여 천상의 표현을 빌려 그 황홀함을 설명한다 할지라도 사랑과 마주할 때면 나는 언제나 초라한 영혼이 된다.” 그는 사랑에 관해서는 오히려 깊은 침묵과 묵상을 통해 직관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인간은 사랑에 관한 사색을 침묵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하라, 침묵하라, 사랑의 암시가 사라지지 않도록. 사랑이 그대의 분주한 말 속에서 퇴색되지 않도 록.”
사실 루미가 신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것 역시도 신에 관한 하나의 표상에 불과한 것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사랑이 신의 본성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이 또한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랑의 부정이 아니라 사랑의 초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루미는 사랑의 ‘불연기연(不然基然)’ 논리를 통해 인간이 신을 가늠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동시에 사랑의 신, 그 자체가 또한 초월하는 실재임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신이 사랑이듯, 자비이며, 지식이며, 생명이며, 힘이며, 의지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오감과 육감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 감성, 지성을 신의 본성에 포함시키면서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초월하는 실재가 신이라고 본 것이다. 루미는 신에 관한 이러한 역설적 표현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한다:
“사랑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정신,
사랑이 신이라고 고백하는 그대 영혼은
바로 신의 사랑 안에서 탄생한 존재.
신이 그대를 사랑한다.
모든 것이다.”
루미는 또한 사랑이란 갈망과 원함의 양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고 본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의 갈망, 그 애타는 심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은 사랑하기 원했고 사랑하는 자와 하나가 되고자 희구했다. 만물을 창조한 이유는 성인(saints)과 예언자와 같은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우주만물의 창조와 조화는 신적 사랑의 질서이며 표현인 것이며 이 사랑의 원천에서 제외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루미는 강조한다.
“사랑의 율동으로 창조된 우주만물은
시작 없는 영원한 사랑의 고백.
사랑의 포옹으로 바람이 일고
나무도 그 바람에 춤을 추네.
그 바람을 타고 드는 신의 속사임이 들려온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를 비춰보는 거울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오.’
우주만물은 사랑의 본체를 비추는 거울
나의 벗이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창조를 아는가"
루미는 모든 우주만물은 신적 사랑의 표현이기에 사랑으로 또한 유지된다고 본다. 하나의 실재는 사랑의 갈망과 원함으로 다른 실재와 융합하고 신비한 인연으로 모든 생명은 사랑을 통해 하나됨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계의 생명들이 나누는 모든 사랑은 생산과 창조의 원천이 되고 신적인 요소를 지닌다는 것이다. 루미는 사랑의 신종교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생명체의 삶 속에 녹아있는 사랑의 본성을 회복시켜 신과 하나됨의 경지를 이루고자 함이다. 루미는 이러한 ‘사랑의 존재론’을 통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모든 자연의 생명체들이 합일의 상태를 체험하고 신의 세계로 녹아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루미의 사랑의 통일성은 원초적 단일성으로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며 인간과 만물이 느낄 수 있는 신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우주만물은 이러한 사랑의 질서를 통해서 형상화된 신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이러한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는 힘은 영적지식인 것이며 이는 고양된 이성과 지식을 통하여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파나를 통해 완성되는 자기희생적이며 자아초월적인 사랑이다.
루미의 사랑 존재론에는 신을 향한 사랑만큼이나 인간을 향한 사랑을 강조한다. 루미에 따르면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그림자와 같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신적 사랑이 신의 현현과 함께 인간의 수행과 수련을 통해 파나와 바카의 경지 속에서 또한 체험할 수 있음을 밝혔다. 동시에 루미는 인간과 인간의 진실한 사랑 속에서도 신적 사랑의 단계는 이루어진다고 본다. 특히 ‘영적 연인’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사랑의 신격화’는 완성된다고 본다.
루미는 실제로 이러한 사랑의 무아경에 빠지는 신비체험을 한다. 그는 그의 영적 연인인 샴스를 통해 영적 지식과 사랑을 체득하며 신비한 사랑의 영적 여행을 떠났다. 그는 샴스와의 영적 사랑을 통해 신적 사랑의 깊이를 체험하며 신과 하나됨의 신비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4. 신을 완성하는 예언자들
1) 에크하르트의 의인학: ‘비우고 떠나는 자, 신을 돌파하는 자’
에크하르트의 신 이해는 당시로는 새로운 인간학의 창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가 신을 인식 자체, 즉 순수지성으로 이해하면서 인간 또한 ‘지성’을 통해 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신성과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비유적으로 그는 신을 알아가는 지성의 상징을 ‘영혼의 불꽃’ 혹은 ‘영혼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는 신적 형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인간은 신을 느낄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그 뜻을 깨달아 인간의 영혼 가운데서 신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본다. 최고로 승화된 지성으로 신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영혼의 불꽃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영의 씨앗을 지니기 때문에 신성을 향하여 타오르기만 하면 된다. 불꽃이라는 상징이 암시하듯이 그는 인간 영혼을 신과 결합할 수 있는 영적 잠재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영혼의 신적 본성을 강조하면서도 에크하르트는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 지성의 한계점을 분명히 전제한다. 지성은 인간 영혼의 능력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으나 지성 또한 창조 세계의 시간과 질서 속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육체성, 다분성, 시간성은 인간을 자아에 집착하도록 하며 신성을 향한 장애 혹은 고통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을 본연의 순수성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해방의 노력은 철저하게 인간의 몫이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불꽃인 인간 지성의 해방은 가장 먼저 ‘비움’과 함께 시작된다고 본다. 여기에 바로 신비주의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고 태초의 신성의식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거짓 자아의 외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타인이 대신할 수 있는 ‘대리구원’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깊은 자아의 내면적 성찰과 영적 정화의 과정을 통해 신비적 일치를 체득함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노력은 '비우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정신적 가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움과 떠남은 에크하르트의 신성일치 단계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며 인식의 원인을 인간으로 이해한다.
“내가 나의 최초의 원인 속에 서 있었을 때, 나에게는 신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원인이었다...나는 비어 있는 존재였고, 진리를 향유하며 나 자신을 인식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신이 모든 존재를 넘어서 있고, 모든 구별을 넘어서 있는 그러한 신의 존재 가운데 나 자신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나 자신을 원했고, 나 자신을 인식했고, 이러한 인간인 나를 창조하고자 했다... 나는 나 자신과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만약 내가 있지 않았다면 신도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신’인 것도 내가 원인인 까닭이다. 만약 내가 있지 않았다면 신도 ‘신’이 아닐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설명하는 인간중심의 원인론은 단죄심문이 엄격했던 당시 시대 배경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중심의 원인론을 제시하는 것은 신의 상대성을 유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신성의 중요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든 신성의 ‘잠재태’를 깨워 불타오르게 하기 위한 지성적 신비주의인 것이다. 그는 인간이 지닌 참된 영혼의 본성, 근저, 영원성은 피조세계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어 피조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자의 정신으로 살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신이 존귀하게 존재 하고 운행하여도 인간의 지성이, 정신이, 영혼이 그 존귀함에 스스로 연결할 수 없다면 인간 영혼에 깃든 신성의 씨앗은 말라 죽어버리는 이치와 같다. 그는 신성을 향한 영혼의 불꽃을 점화하기 위해 스스로 신비주의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지성과 영혼을 통한 신과의 합일, 영혼과 함께 탄생하는 신을 통하여 신성의 세계에 나아갈 수 있는 길만이 진정한 신인 합일의 경지라고 강조한다.
“사람은 모든 사물들에서 신을 찾아내어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 생각, 사랑 안에서 항상 신을 현재 하시는 분으로 모시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대가 교회에 있든지 또는 골방에 있든지 간에, 얼마나 그대가 신께로 향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인간의 영혼이 신성을 향하여 뛰어오를 때 신을 ‘돌파’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돌파는 자아로부터의 ‘비움’과 ‘떠남’을 전제로 삼는데 이는 인간이 지닌 모든 신의 표상과 이미지를 떠나 순수한 신성으로 ‘돌파’할 수 있는 경지의 비움과 떠남을 의미한다. 결국 신성으로 인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되는데 그 역할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을 향한 인간의 과감한 돌파와 비상은 원래의 신성이었던 우주적 ‘나’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며 이는 에크하르트가 고백하는 바와 같이 모든 만물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유기체적인 영적 비상인 것이다. 이러한 비상과 함께 인간 영혼이 젖어드는 상태는 '초연 (Gelassenheit)'의 고요하고 자유로운 상태이다. 초연의 상태에서 인간은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신의 탄생은 이러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차원에서 신성으로의 회귀는 신으로부터의 유출보다 더욱 고귀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인간의 노력과 성화과정을 단지 ‘신의 은총’으로만 덮어두지 않고 신을 완성하기 위한 새로운 인간학의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일 신에게로 회귀한다면 나는 신과 함께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나의 회귀는 나의 유출보다 더욱 고귀하다. 나는 모든 창조물들의 영적 존재들을 나의 지성으로 초대한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창조세계와 하나가 된다. 내가 신성의 근저에로, 신성의 대지에로, 신성의 대해로, 신성의 근원으로 회귀한다면 나의 근원과 나의 존재 자체를 물을 이유가 없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내가 있음과 없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신도 거기서 해체된다."
에크하르트는 인간과 신을 모두 해체할 수 있는 경지의 인간 영혼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신성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인간을 ‘의인’이라고 칭한다. 의인은 자신보다도 의로움 그 자체를 더욱 고귀하여 여긴다. 따라서 의인의 행위는 언제나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 거룩하고 고귀한 정신, 순수인식 그 자체에서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크하르트의 의인은 종교적 무아경에 빠지거나 은둔의 삶을 추구하는 정적주의의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의 의인학은 창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신비한 일치를 실행하고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신비주의는 생성과 활동의 신비함을 강조하며 의인은 신적 진화의 리듬을 상실하지 않는 자이다. 성속을 철저히 구분했던 당시에도 에크하르트는 의인의 외적 행위는 성속의 구분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인의 모든 행동은 신성의 빛에서 파생되는 한결같은 마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꽃은 의인의 행동구성에 따라 축소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지성과 영혼을 통해 타오르는 외적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의인은 사회적인 의무과 윤리적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현실 참여형’ 신비가이다. 따라서 의인의 삶은 자신이 속한 공동 체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의인이 연결되어 있는 신성의 빛이 의인의 영혼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와 삶의 정화를 격조 높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우고 떠나는 그 영혼의 순수성에 연결된 신비가의 사회활동은 그 자체가 창조적 활동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에 참여하는 모든 의인은 신비가인 동시에 창조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버림과 떠남 그리고 돌파와 초연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에크하르트의 의인개념은 인간을 신과의 동일성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면에서 신비적이며 인간 영혼을 모든 피조물의 질서와 세계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영원한 지금’을 바로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현실적 신비주의자가 에크하르트의 의인학이다.
2) 루미의 우주적 인간학: ‘죽기 전에 죽어 지금 부활한 자’
루미의 인간학은 ‘우주적 인간' 개념에서 출발한다. ‘우주적 인간’이라는 용어는 루미보다 한 시대 먼저 살았던 수피 사상가 이븐 아라비(Ibn Arabi)가 고안한 것이지만 그 전부터 수피즘의 우주적 인간이해는 존재해왔었다. 루미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원형(prototype)을 우주적 인간이라고 보는데 이는 실재의 모든 단계를 통일적으로 종합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인간은 모든 신적 요소를 내면화하여 어떠한 분열과 혼돈이 없는 초월적이면서도 완벽한 내재적 조화의 상태를 지니고 있다. 루미의 우주적 인간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결합이 완성된 인간을 뜻하며 그의 작품 세계 속에 ‘인간의 신화(神化)’를 이상적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루미는 인간이 신화될 수 있는 것은 신의 사랑과 영지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신지학적인(theosophic)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수피들은 인간이 깨달음을 통해 친숙해진 영지의 세계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통일적 지식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창조했으며 우주자체가 ‘하나의 존재와 같다’는 관점을 지닌다. 따라서 우주적 인간은 ‘위대한 우주 책의 축약’이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하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자이다.
루미는 우주적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영적 지식인 영지를 통하여 신의 원초적 사랑을 깨닫게 되고 또한 닮아가게 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루미는 영지와 사랑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체적일 수 있는 속성으로 이해한다. 즉,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지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때문에 신적 사랑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미는 영지에 관해 두 종류의 지식을 말한다. 하나는 ‘부분적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지식’이다. 부분적 지식은 학교에서 학습을 통하여 배우듯이 책, 스승, 사색, 과학 등과 같은 매개체를 통하여 습득하는 지식이다. 반면에 완전한 지식은 신의 선물에 가까운 직관적 지식이다. 완전한 지식의 중심은 인간 영혼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아소멸을 통한 신적인 요소의 깨달음을 통해 ‘회복되는’ 지식이다. 루미는 신적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바로 영지의 빛을 발광시켜야 한다고 본다. 영지는 철학적 고찰이나 사변적 논리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 지식이고 직관은 인간의 영혼과 직결되는 차원이라고 이해한다. 루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신이다’라는 과학적 명제를 아는 것은 물질과학을 아는 것이며 영적 과학을 또한 통찰한 결과인 것이다.” 루미에 따르면, 신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성은 오직 영지를 통해서만 온전히 소통할 수 있다.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생각을 통해서는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불완전한 형태로 부분적인 체득일 뿐이다.
루미는 우주적 인간을 ‘왈리(Wali)’라고 부르는데 이는 ‘신의 친구’라는 뜻이다. 수피들은 왈리와 같은 신의 친구들이 신적 사랑에 기초한 창조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인물들이라고 본다. 왈리들은 신의 사랑과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영지적 존재로 인간 내면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신의 불꽃’을 현상계 속에서 타오르게 하는 창조성의 동반자이다. 신은 이러한 우주적 인간의 영지를 통하여 신의 사랑을 전이시켜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대리인 (vicegernet)의 역할을 한다.
우주적 인간은 신의 선택으로 특정한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열린 영적 삶의 양식이다. 그러나 우주적 인간으로 향하는 가장 큰 관문은 ‘거짓자아’의 소멸 과정이다. 루미는 인간에게 가장 큰 유혹은 에고 즉, 자아이며 신적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루미는 거짓자아를 뜻하는 ‘나프스(nafs)’를 인간 타락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나프스는 인간의 에고만을 신성시함으로 신의 질서에서 이탈하고 분열되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본다. 인간의 거짓 자아는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 사랑의 조화와 통일성을 상실하게 하고 현상계에 존재하여 물질세계의 지배를 받은 한시적 인간에 집착하게 만든다. 루미는 나프스의 베일을 벗어내는 인간 영혼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루미는 영지를 지닌 인간 영혼은 첫째, 악과 동거하는 영혼의 형태로 있으나 둘째,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빛의 길로 나서는 반성적 영혼의 단계를 거쳐, 셋째, 영혼의 승화된 깨달음을 얻어 신성화된 영혼이 되어 신과 합일된다고 설명한다. 루미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는 동물적 영혼의 상태로 분열적 자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혼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뜻한다. 두 번째는 내면적 세계를 성찰하는 인간의 영혼으로 보다 숭고하고 정화된 세계를 추구하는 상태이다. 세 번째는 신적 사랑의 속성과 유사한(jinsiyyat) 성인의 영혼으로 다분화된 영혼의 세계를 비로소 통일적 하나의 영(Spirit)으로 변혁시키는 고급단계이다. 루미는 우주적 인간의 영혼은 바로 세 번째 단계의 승화된 영으로 모든 태양 빛의 원천인 태양 그 자체와도 같은 하나됨의 영으로 떠오른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루미는 어떻게 이 하나됨의 영, 신적 통일성을 삶 속에서 구체화하며 살 수 있다고 보았는가. 루미는 우주적 인간은 삶의 매 순간 ‘신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피들은 이를 '디크르(dhikr),'라고 부른다. 루미가 강조하는 디크르는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영혼의 작용으로 우주적 리듬을 타고 호흡과 명상을 통해 우주의 통일적 생명력과 교감하는 예식이다. 우주적 리듬이란 신성언어인 샤하다의 고백을 주문처럼 암송하며 응집과 취산의 원리로 호흡을 조절하여 대우주과 소우주의 조화와 함께 발생 하는 합일적 율동을 뜻한다. 수피 사상가 알 가잘리(al-Ghazzali)는 이 율동의 자연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창조되면서부터 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죽음에 이를 때 인간은 신을 향한 마음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초월하게 된다. 남은 것은 오직 신을 향한 탄원뿐이다. 그 탄원은 오직 그대가 홀로 있어 내면적 비움을 통해 신의 이름을 진실로 부를 때 찾아드는 리듬이다. 그 우주적 율동으로 신은 그대의 몸을 통해 현현한다. 자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리듬을 통해 그대는 신과 하나가 된다. 그 황홀한 순간, 바로 성육신의 순간이다.”
수피들은 이 율동을 신과 함께 추는 ‘신춤’으로 이해한다. 수피즘에서의 신춤은 일반무용가나 예술인들이 추는 춤과 엄격하게 구별된다. 아랍어로 '라크스(raqs)'는 일반적으로 춤을 뜻하는 용어이지만 수피들은 결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수피들은 라크스 대신 '세마(sama)'라고 한다. 이는 수피들의 신춤이 예술적 차원을 넘어선 ‘신이 되는(becoming divine)' 엑스타시의 순간으로 ‘영적인 콘서트(spiritual concert)’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디크르의 첫 번째 책임이 영적 체험을 통하여 ‘영적 연인’이 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책임은 디크르의 삶을 실천하는 차원에 있다. 디크르의 역동성은 원운동적 성격을 지니는데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인간으로부터 신에게’ 이르는 쌍방향의 ‘기억’이고 ‘추억’인 것이다. 디크르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이고, 특정행위에 제한되지 않는 신의 사랑에 관한 직관적 인식, 자발적 기억, 윤리적 행위인 것이다. 신을 향한 명상적 마음에서 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 행실, 생각에서 신의 사랑이 기억되지 않는다면 그는 신을 충분히 기억하고 있지 못함이다. 즉, 디크르는 기도뿐 아니라 삶의 책임, 사회적 책임, 우주적 책임을 모두 포함한 지속적이며 총체적인 방법으로 신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피들은 이것이 진정으로 신의 하나됨인 ‘타우히드(tawh?d)’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의 하나됨은 명상적이고 내면적 세계만을 통해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 외연적 삶의 차원에서도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크르의 실천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수피들은 '이바다 (ibada)'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예배, 제례, 봉사가 포함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요소 들이다. 꾸란의 메시지(51:56)와 같이 예배와 봉사는 동질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디크르는 명상적 수행만을 강조하는 수피의 길이 아니라 삶의 윤리적 영역에서까지도 신을 기억하는 ‘신과의 일치’ ‘하나됨’의 고백이다. 이는 디크르의 행위예술과 같이 삶 속에서 행위로, 실천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총체적인 영적 콘서트이다. 루미의 우주적 인간은 디크르의 행위예술을 완성해 나가는 ‘신이 되어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5.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신비주의 신학: ‘神과의 영원한 연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모두 당대 저명한 신학자이면서 신비주의자였다. 둘 다 엘리트 신학자의 길을 걸어 이른 나이에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었다.
신비주의자로 분류됨에도 이들의 신학은 신과 소통하는 ‘인간’에게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둘 다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신의 현현을 체험한 부류로 이들의 신비주의는 인간의 삶을 떠난 종교적 황홀주의나 무아경의 세계를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며 실천적인 신비주의 색채가 강하다. 에크하르트의 경우는 실제로 신비체험의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라인강 지역의 수녀들과 신비체험에 관한 영적 담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유사한 경험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비주의 체험에 관해서 루미의 경험은 에크하르트의 경우보다 더욱 직접적이며 문서상으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루미의 경우는 인간을 통한 신의 체험이 가능함을 앞서 강조했다. 루미는 신비가 샴스와의 만남을 통해 신이 인간을 통해 현현함을 고백했다. 그는 영적연인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 곧 신성이라고 이해했으며 인간과의 사랑을 통해 신인합일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인간의 고통과 진실한 사랑에 예민했고 인간 삶의 신비적 단면들을 지성적 해석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지성적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이들은 신비적인 내세의 이상으로 현실을 대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의 자아를 비우고 변혁시킴으로서 신의 사랑과 자비를 ‘지금 이곳에서’ 극대화하고자 했던 ‘인본주의적 신비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핵심적 신학주제인 신 이해에 있어서도 이 두 신학자는 매우 유사한 신관 해석을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신의 ‘하나됨’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의 하나됨을 묘사하기 위해 신성, 단일성, 통일성, 초월성과 같은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사상에는 신의 하나됨을 해석하는 접근방식도 유사하다.
두 사상가는 모두 신플라톤 철학의 일자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 중세시기에 나타나는 신비주의 사상에는 신플라톤 철학과 이와 결부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요소들이 기본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루미보다 에크하르트의 신학에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에크하르트가 구분하는 신성의 개념은 바로 신은 단적으로 유일하며 완전한 피안에 존재하기에 어떠한 묘사도 초월한다는 신플라톤주의 신의 단일성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플라톤 철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플로티노스(Plotinos) 의 질문은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성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영혼으로 하여금 아버지인 신을 잊게 한 것은 무엇이었나?’ 플로티노스는 신을 ‘넘쳐흐르고 그 흘러넘침으로 모든 것을 창조한 지고한 신비’라고 표현한다. 이는 에크하르트가 신의 본성을 물의 유동적인 메타포를 사용해 묘사한 ‘흘러넘침,’ ‘솟구침,’ ‘녹아나옴’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신의 하나됨을 ‘유출과 환원’의 역동적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데 이 또한 플로티노스의 ‘유출 이론(emanation)'에서 파생한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신에서 유출된 최초의 것은 정신-영적세계-물질세계의 단계적 유출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신적 존재의 단계적 유출이고 인간 영혼 또한 신적인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개별적 영혼에는 이미 전체적인 세계정신의 질서가 있으며 각각의 영혼은 전체 우주를 정신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 영혼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시작은 ‘분열’과 ‘에고’라는 것이다. 분열과 집착의 유혹을 받는 자아는 그 에고의 허상으로부터 떠나 온전한 자아소멸을 통한 신과의 하나됨을 신적 단일성의 상태로 파악한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그 자유로움을 인해 신을 향한 집착까지도 無化시킬 수 있는 비움, 그 맑고 투명하게 비어있는 공명의 상태를 신성의 피안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비움의 상태에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할 수 없기에 차별과 비차별을 초월하는 ‘초차별성’이며, 자아와 타자를 구분할 수 없는 투명함이기에 ‘통일성’이며, 나와 너의 존재론적 차이를 넘어 새로운 초월적 탄생을 희구하기에 평등하고 투명한 의미의 하나를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크하르트의 하나개념은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하나이며 생명을 넘어선 생명, 빛을 넘어선 빛, 텅빈 사막, 어두운 빛의 하나로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은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했던 부정신학의 하나 개념과도 유사하다. 디오니시우스의 하나 개념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신비의 흑암’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신성이란 모든 차원의 인간 이해와 앎을 초월하여 만질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존재를 뛰어넘어 버린 존재로서의 '초본질적 지성(superessential Intellect)'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하나됨이란 흑암, 사막과 같은 상징으로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에크하르트는 디오니시우스의 부정 신학적 경향성을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부정의 부정을 통한 ‘초연’ 혹은 ‘초탈’을 강조함으로서 無의 심연을 강조하는 신성 중심의 신비주의 맥락을 지키고 있다. 신성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에크하르트가 인용한 플라톤의 순수한 이데아는 세상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 영원, 내면과 외면을 온전히 초월하는 신비한 일치로서의 하나임을 말한다. 에크하르트 사상에 중요한 영향력을 주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명제 ‘하나님은 존재이다’의 의미를 에크하르트는 ‘존재는 하나님이다’라고 재정립함으로서 부정의 부정, 초월의 초월을 통한 초연(超然)의 하나를 의미했다. 이러한 측면은 에크하르트가 헬레니즘의 영향과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종교적 신비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직접적 신성 참여와 지성을 통한 신성의 연합을 강조했던 그의 의도를 엿볼 수있다.
에크하르트와 유사하게 루미 또한 신의 하나됨을 뜻하는 ‘타우히드’를 강조하는데그 하나됨의 시작을 자아소멸의 파나로 규정하고 있다. 루미의 수피즘도 종교철학적 배경을 살펴보면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피즘이 형성되던 7세기 페르시아 문화권은 아라비아 종족들의 토착문화를 비롯하여 동방정교회, 영지주의, 시리아 기독교, 불교철학, 신플라톤 철학 등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었다. 루미도 에크하르트와 같이 신플라톤 철학의 일자개념과 신인합일의 철학을 자연스러운 시대적 조류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특징적인 면은 에크하르트와는 달리 루미의 경우는 신의 하나됨을 일자로부터의 유출과 환원 즉, 단일성의 다수화와 다수성의 일자화의 無化적 귀환 형식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미는 신인합일의 관계에서 파나의 관점을 강조하지만 에크하르트가 사용한 비움의 無化와는 구별되어 보인다. 루미는 먼저 신의 파나를 통한 사랑의 창조성은 인간 영혼의 파나를 통하여 신안에서 소멸함으로서 ‘새로운 신’을 창조하 는데 더 관심을 보인다. 태초에 신은 ‘사랑을 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축소시킬 수 있었던 ‘자아부정’ 혹은 ‘자아 비움’의 모습을 인간에게 선보인 것이다. 신은 최초로 파나를 수행했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됨과 파나의 신적 사랑을 통하여 세계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신의 사랑은 실재로 영원하고 무한하나 신적 사랑의 형태는 피조물의 형태로 변화하여 신적 사랑의 씨앗은 모든 피조계의 질서와 함께 내재되어 있다. 아랍어의 ‘신’은 어원적으로 ‘상호성’에 기초하고 있다. 사랑은 신을 신이게 하는 정신이며 상호적 관계를 형성하여 피조세계를 신의 동반자로 삼게 한 것이다. 사랑의 정신은 본래부터 상호적인 본성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이러한 루미의 관점은 신플라톤 철학을 수피의 관점에서 응용한 것으로 ‘일자’로의 귀환이 無化로 전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자’를 새롭게 구성하는 소멸을 통한 재창조를 신의 하나됨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관점은 루미의 신의 하나됨 개념의 ‘타우히드’를 한층 더 승화시켜 신과 하나됨의 ‘이티하드(ittihad)’로 전형시킨다. 이때 신의 세계는 새로운 창조의 탄생이 된다. 따라서 루미의 신적 하나됨은 無化의 개념보다는 ‘운화(運化)’와 ‘추측(推測)’으로 표현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여기서 운화란 목적을 가진 듯한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스스로의 변화이다. 추측은 인간 영혼의 특수한 작용이다. 추측은 인간영혼을 운화하면서 동시에 운화를 성취하려는 목적성까지도 지닌다. 따라서 신의 파나와 인간의 파나는 스스로의 변화에 의거하지만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며 항상 새로운 재창조의 운동을 하게 된다. 루미에게 있어서 신의 하나됨의 타우히드와 신과의 합일을 통한 이티하드의 상태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성의 無의 심연이 아니라 파나를 통한 영원의 상태인 바까(baqa)의 영존(永存)을 뜻하는데 차이가 있다.
신의 파나와 같이 신적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고 신의 자아부정의 결과이기도 한 인간은 파나 체험과 영지를 통하여 태초의 사랑인 신의 원초적 사랑을 창조하여 그 안에 깊이 침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미는 이러한 신의 사랑을 ‘숨겨진 보물’이라고 보았으며 창조세계를 통하여 그 진면목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루미는 인간이 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인식의 단계를 물질세계의 인식, 심미적 세계의 인식, 영적 세계의 인식으로 구분하고 영적 세계의 인식 단계에 이르면 영지의 직관적 지식을 통해 신의 세계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루미는 이러한 인식 단계의 변화를 ‘창조의 재생’이라고 보는데 이는 인간 정신이 고양되는 순간마다 새로운 창조의 순간이 이어지는 ‘계속되는 창조’인 것이다. 하나였던 사랑이 다양한 형태로 움직이다 다시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되는 창조의 통일적 순간인 것이다. 루미는 따라서 생명의 매 순간과 찰나를 존재들의 죽음과 부활의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사상적 비교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에크하르트의 지성과 루미의 영지 이해이다. 에크하르트는 신과 신성을 구별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과 연결될 수 있는 ‘영혼의 불꽃’으로 인간의 지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성은 신의 내적 본성이며 생명이다. 반면에 루미는 신과 신성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만 신의 영원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샤하다의 이슬람 고전적 고백을 바탕으로 신외에 다른 신 없음의 신중심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루미는 ‘알라’의 이름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의 신성개념까지 포함시킨 루미의 신은 영원한 사랑으로 신적 사랑을 향한 인간의 직접적인 깨우침을 위해 영지의 빛을 필요로 한다. 루미 또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영지를 신적 불꽃이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루미는 사랑을 느끼는 것,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모두가 신적 사랑의 불꽃이 인간 영혼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신의 파나로 인한 첫 소멸의 결과라고 이해 한다. 이러한 신적인 불꽃을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인간 또한 파나를 통해 자아의 완전한 소멸을 이루어야 하며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영지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것이다.
지성과 영지의 신적 불꽃은 소우주인 인간이 대우주를 연결하는 창조성이기도 하다. 이 불꽃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공유하며 내세의 삶뿐만 아니라 이 땅의 삶에서도 신인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외된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며 인간이 자기 존재의 깊은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각자의 깨달음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지성과 영지에 관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에크하르트의 지성과 루미의 영지는 사유적,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모두 직관적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성과 영지는 모두 ‘직감적으로 아는 내적인 깨달음’이라는 차원에서 추론적 지성이거나 철학적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지성을 '알고 사랑하는 근본적인 기질,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의 영적인 흔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지성을 ‘존재’개념의 틀에서 해방시킨다. 그는 지성은 존재보다 상위개념이며 다른 질서에 속하는 순수 인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지성에 관해 다른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곧 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고귀한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어떠한 매개도 필요치 않은 지성의 자유적 본성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모두 지성과 영지의 ‘영혼의 불꽃’을 영원히 신에게 향하는 ‘신적 평등성의 빛’으로 이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루미의 영지개념에는 에크하르트의 지성개념과는 구별되는 특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크하르트의 지성이 신성과의 합일을 이루는 통일성의 연결로서의 지성이라면 루미의 영지는 '합일적(unitive)' 신비상태 뿐 아니라 ‘환상적(visionary)’ 신비상태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루미는 비현실적인 은둔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신비주의 또한 배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합일적 신비주의는 환상적 신비체험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기도 했다. 루미의 영지는 개념적 진공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엑스타시의 체험과 함께 신지적 철학은 그 빛을 더욱 찬란하게 발한다고 보았다. 루미에게 있어서 영적 엑스타시는 물론 인간과의 만남과 관계성 속에서도 파생될 수 있는 것이며 그에게 있어 샴스와의 만남은 신적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 환상적 신비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루미는 지속적인 영적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적 사랑의 황홀경을 추구했으며 그의 환상적 신비주의는 합일적 신비주의로, 인간의 삶 속에서 신의 사랑이 체현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신비주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 다. 이러한 측면에서 루미의 영지개념은 에크하르트의 지성개념 보다 더욱 종교적, 심미적 차원의 신비주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인간학 영역에 있어서도 유사성과 대비점이 교차한다. 이 주제는 '인간의 신화(divinization)' 개념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둘다 인간의 비움과 파나 체험을 통하여 지성과 영지의 깨달음을 얻고 신성과 신에 각각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크하르트의 인간이해는 신적 합일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 중심의 원인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비움과 떠남의 영적 행위를 통해 신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지성을 갖고 신성의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참다운 의인은 신을 ‘돌파’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신을 돌파한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팽창’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그는 진정한 의인은 인간의 참된 본성이 신의 참된 본성 즉 신성의 세계까지 팽창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비움과 떠남의 영적 행위는 그 영적 팽창 혹은 성장의 첫 출발점이 된다고 보았다. 에크하르트는 인간 영혼은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어 만물이 하나가 되는 신적 원형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팽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의 원형에 이르러서야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 ‘영혼’은 ‘영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크하르트는 인간 영혼의 진화적 신화를 강조하고 있다.
루미의 우주적 인간에도 인간의 신화 관점은 발견된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팽창하여 신성의 합일을 이루는 형태가 아니라 신의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여 그 속에 ‘잠김’ 혹은 ‘취함’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취한다는 표현은 일반적 알코올을 이용한 연금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신의 술(wine of God)에 취한다는 상징적인 뜻이다. 루미는 파나의 체험을 통해 영지의 깨달음을 얻은 우주적 인간은 자기소멸의 상태 속에 들어가 새로운 신을 창조 하고 그 안에 머무는 소멸적 합일을 이룬 자로 이해한다. 그런 우주적 인간은 디크르로서 신의 하나됨을 표현하게 되는데 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 추는 신춤으로 다르위쉬의 춤이 등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신의 운화와 추측 속에서 루미는 ‘나는 신이다’이라고 고백한 것이며 이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실재가 하나의 차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신적 파나와 인간 파나의 신비적 합일을 계속 창조하는 것이다.
6. 나가며
이 논문은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자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즘의 시인이며 신학자인 루미의 사상적 만남을 통하여 신비주의 신학을 재조명한 것이다. 두 사상가는 시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답게 방대한 양의 저술과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제한된 본 논문에서 이들의 신학적 사상을 총망라하기 어려웠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신학자의 가장 궁극적인 주제인 신과 인간의 합일문제는 신비주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와 루미는 각자 속한 전통에서 비춰보면 매우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에크하르트의 경우는 정치적 동기가 강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단 논쟁에 연루되어 단죄받을 정도로 그의 신학은 당시 대단히 혁명적이고 역설적이었다. 루미 또한 그에게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스승이며 영적 연인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살해되기까지 인간을 향한 열정과 인간을 통한 신의 현현을 확신했던 인물이었다. 어쩌면 에크하르트나 루미는 모두 전통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면 소위 ‘올바른 신앙’과 ‘정통성’에 과감히 도전한 ‘사상적 이단아’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진정한 신비주의는 인간의 깨달음을 통한 신과의 직접적 만남이었고 그 만남은 바로 자아와 현상계의 모든 집착을 과감히 떨쳐 버린 고결한 비움과 소멸의 아름다움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하여 신을 만나기도 하고 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는 영혼중심의 신비적 합일을 강조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신을 ‘인식자체’ ‘순수지성’으로 파악하여 인간 내면세계의 정화와 비움을 통한 신성의 온전한 발현과 흘러넘침을 강조하는 ‘실천적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그는 종교적 관상과 묵상은 반드시 현실적 삶 속 적용되어 삶의 성화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의인학’을 설파한다. 그에게 있어 신비주의란 성전이나 골방에서 일어나는 순결한 영적체험만이 아니라 인간의 갈등과 문제로 가득한 뜨거운 삶의 현장 속에서도 신성이 파기되지 않고 발현되는 성속의 통합과 신인간의 하나됨이 빛나는 현실참여적인 신비주의인 것이다. 루미의 신비주의 또한 인간을 통한 신의 현현을 내세의 피안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과의 진실한 사랑 속에서 체험할 수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곧 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루미의 신학은 관념적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신적 사랑의 시작은 신의 파나와 인간의 파나를 통한 온전한 소멸로 영원히 창조되는 신과 인간의 추억, 그 매 순간의 ‘디크르’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신비주의는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불꽃’인 지성과 영지를 인간이 끊임없이 태우는 한 신과 인간이 영원히 연결된다고 보는 ‘영적 영원주의자(spiritual perennialist)’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비움과 소멸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심리적 자아 도취나 지적 진공상태에서 빠지는 무아경의 신비주의와는 달리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차별과 분열의 문화를 치유하는 영성을 제공한다. 오늘날과 같이 자아의 집착이 만들어 낸 사회의 불평등한 계급구조,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분열된 자아의식과 차별의식을 향해 비움과 소멸의 신비주의는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모든 인간과 우주만물이 신성과 신의 불꽃을 지닌 존재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는 과도한 소유가 낳은 병폐 속에 자기 비움과 소멸의 신적 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창조질서를 열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와 루미의 신비주의는 비우고 사라짐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신성의 순수성을 현실 속에 실천하여 ‘영원으로서의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추구하는 윤리적 신비주의이며 ‘죽기 전에 죽어 지금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미래 신학의 종착지를 신비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아마도 이는 극에 달한 물질문명과 분열된 자아의 고독 속에 비움과 소멸의 신비주의가 전해주는 신적 사랑의 현현이 인간을 더욱 거룩하게 신화(神化)시키는 영적 지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