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플라워 킬링 문>이 원작으로 하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소설 <플라워 문>은 (현재는 FBI라 불리는) 수사국 요원 톰 화이트(제시 플레먼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마틴 스코세이지는 그 중심을 어니스트 버크하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턴), 그리고 어니스트의 삼촌인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로 옮겨놓는다. 만약 <플라워 킬링 문>이 원작처럼 톰 화이트 중심이었다면, 이 작품은 백인의 탐욕에 희생양이 된 오세이지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구원자-백인’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실제로 원작 소설의 부제는 ‘오세이지족의 살인과 FBI의 탄생’이다). 스코세이지는 동일한 사건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 결과,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구원자 백인이 아니라, 오세이지족을 죽여 그들의 부를 가로채려는 킹 헤일과 어니스트의 추악한 탐욕과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코세이지가 1920년대 서부의 땅에서 발견한 미국의 역사다. 스코세이지가 이제야 첫 웨스턴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이 사뭇 놀랍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지금까지 스코세이지가 보여준 영화적 세계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세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웨스턴과 스코세이지, 그 늦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플라워 킬링 문>은 가장 스코세이지다운 것이 가장 수정주의 웨스턴다운 것임을 증명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플라워 킬링 문>은 웨스턴의 아이콘인 기차의 도착과 함께 본격적인 서사를 시작한다. 서부에 발을 내딛는 어니스트는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문구와 마주한다. 서부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코세이지는 주인공이 ‘갇힌(또는 갇힐) 세계’, 또는 그 세계가 인물에게 각인되는 순간을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하곤 했다(흔히 눈의 빅 클로즈업으로 표현된다). <택시 드라이버>(1976)에서 혼란스러운 뉴욕의 밤거리를 바라보는 트래비스의 시선, <에비에이터>(2005)에서 어린 시절의 하워드 휴스의 뇌리에 박히는 ‘검역’이라는 단어, <좋은 친구들>(1990)과 <디파티드>(2006) 등에서 거리의 갱스터에게 빠진 소년의 눈, 그리고 <분노의 주먹>(1980)에서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게 주먹을 날리는 제이크 라모타의 모습까지, 스코세이지의 인물들은 그렇게 마주한 세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삼촌 킹 헤일은 어니스트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오세이지족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 그것이 가난한 백인이 부유해질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합법적인’ 방법이다.
한발 더 나아가 킹 헤일은 몰리 가족의 재산을 빼앗을 큰 그림을 그린 뒤, 어니스트라는 늑대 한 마리를 그 속에 던져넣는다. 어니스트는 킹 헤일의 조력자가 되어 몰리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에 앞장선다. 심지어 마지막 생존자인 아내 몰리를 죽이는 일도 거부하지 않는다. 어니스트는 전형적인 스코세이지의 인물이면서도 어리석기로만 따진다면 최고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비열한 거리>(1974)의 자니, <좋은 친구들>의 헨리 힐, <카지노>(1996)의 니키, 그리고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의 조던 벨포트 등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는 상관없이 무모하리만큼 가속을 높이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오직 현재의 시간만 있다는 듯이 브레이크 없이 그 세계를 질주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다. 감방에 갇혀 “난 짐승이 아니야. 나도 인간이야”라고 외치며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고(“왜! 왜! 왜!”), 엔딩 무렵의 스탠딩 코미디 극장에서 “나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한의 고백을 하지만, 그가 자신이 더 내려갈 바닥이 없을 만큼 추락해야 했던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내부로부터 파열하는 삶
스코세이지의 인물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자신의 속도를 좀처럼 줄이지 못한다. 어니스트가 당뇨에 걸린 아내에게 투약하는 인슐린에 ‘어떤 약’을 함께 넣을 때, 그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짓’을 한다. 그는 자신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전형적인 스코세이지의 인물이다.
킹 헤일과 어니스트에 제동을 거는 것은 ‘자각’이 아니라 ‘자멸’이고, 이는 외부의 어떤 힘이 개입한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내부에 뿌려진 ‘자멸의 씨앗’이 자라난 결과다. 스코세이지는 유전을 소재로 탐욕의 역사를 써내려간 또 다른 작품인 <데어 윌 비 블러드>(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2008)의 엔딩 장면, 그러니까 대저택의 볼링장이 붉은 피로 물드는 그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점은, 바깥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부로 파열한다는 겁니다”라고. 그러고 보면 스코세이지의 인물들이 구축한 세계 역시 언제나 그 안에 “자멸의 씨앗”을 품고 있곤 했다. 그것이 폭력에 기반해 건설된 왕국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리 톰슨의 동명 작품을 리메이크한 <케이프 피어>(1992)는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이지만, 그 속에는 스코세이지의 비전으로 가득하다. 스코세이지는 원작과 달리 파국에 봉착한 미국의 가정이라는 화두를 삽입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노래하던 화목한 가정은 바람 피우기에 바쁜 남편과 그런 남편 덕분에 마음의 문을 닫은 아내와 비뚤어진 딸로 뒤바뀐다. 스코세이지의 <케이프 피어>의 가족은 단순히 외부에서 침입한 미치광이 살인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속이 썩어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었다. <에비에이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미국의 꿈을 표상하는 인물이자 세상의 변화를 이끌 만큼의 힘을 가졌던 하워드 휴스가 스스로의 강박에 종속된 채 그 내부에서 파열되는 이야기다. 심지어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는 인물의 붕괴된 내면으로 우리를 초대하기까지 한다. 중요한 것은 ‘자멸의 씨앗’이 자라 ‘내부에서 파열되는 세계’야말로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스코세이지의 비전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스코세이지가 <에비에이터>를 두고 “오직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또는 “미국적 대서사시”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과잉된 세계는 그 안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플라워 킬링 문> 역시 마찬가지다. 킹 헤일의 왕국이 무너진 것은 과잉된 탐욕을 자양분으로 자멸의 씨앗이 자라난 결과다. <좋은 친구들><카지노>에서 범죄로 세운 왕국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주가 조작범 조던 벨포트를 가능하게 한 미국식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고, 또한 이들 세계는 <플라워 킬링 문>의 1920년대 서부와 구별되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탐욕 앞에 무릎을 꿇은 인간 군상과 그렇기에 내부로부터 파멸할 운명의 삶. 원작처럼 톰 화이트 중심의 서사였다면, 이러한 세계의 묘사는 한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스코세이지는 어리석은 자신의 인물에 대해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가 대표적인 사례일 테지만, <플라워 킬링 문>의 어니스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코세이지는 어니스트의 어리석은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줄 뿐, 그에 대해 구구절절 해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빈틈이야말로 스코세이지가 생각하는 관객의 자리고, 관객의 세계와 영화의 접점으로서 (롤러코스터가 아닌) 시네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친구의 얼굴을 한 폭력
스코세이지가 묘사하는 폭력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좋은 친구들>의 한 장면일 것이다. 한참 웃고 떠들던 토미가 갑자기 얼굴을 바꿔 “내가 우습냐?”라며 헨리 힐을 쏘아붙이는 그 장면 말이다. 그렇게 스코세이지 영화의 폭력성은 ‘불쑥’ 튀어나온다. 그래서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긴장감이 스코세이지가 그려내는 폭력의 특징이다. 이는 마치 연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를 담은 듯한 연출을 통해 폭력의 잔혹성을 배가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스코세이지는 폭력 장면의 양식화된 연출을 기피하는 감독이다. 즉 배우들이 멋들어지게 합을 맞추거나 스타일리시한 방식으로 폭력 장면을 연출하기보다는 뉴스에서나 만날 것 같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구도 속에 ‘안무 없는 폭력’이 불쑥 펼쳐지는 것이 스코세이지 영화의 특징이다(<카지노>에서 리키의 최후를 보여주던 옥수수밭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의 오세이지족에게 행사되는 폭력 장면 역시 이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이 등장하지만 그 어떤 죽음도 합당한 이유를 갖지 못한다. 스코세이지는 마치 웃고 떠들다 “내가 우습냐?”라며 돌변하던 토미의 얼굴처럼 느닷없이 분출하는 그 폭력의 순간을 관객의 시야에 불쑥 들이민다. 그것이야말로 오세이지족이 느꼈던 공포의 실체였을 것이다. 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단순히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가족이나 친구,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스코세이지에게 폭력의 세계는 평범한 삶과 나란히 놓여 있곤 했다. 스코세이지가 갱스터를 경유해 그린 폭력의 세계는 <대부> 시리즈의 상류층 갱스터의 비장함처럼 우리의 평범한 삶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었다. 스코세이지가 성장하며 실제로 경험한 갱스터(또는 범죄자)는 그저 “매일의 일상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하게 회사에 출근하는 누군가의 삶처럼, 스코세이지의 갱스터들은 폭력과 범죄를 생존의 한 방식이자 평범한 삶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대부>가 그린 갱스터의 세계가 성화에 가깝다면 스코세이지가 그린 갱스터의 세계는 풍속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유일하게 성화에 가까운 인물은 몰리다. 어니스트가 <좋은 친구들>의 헨리 힐을 닮았다면, 몰리는 <비열한 거리>의 찰리를 닮았다. 찰리가 거칠고 폭력적인 거리의 삶과 영혼을 구원하는 삶 사이에서 방황했던 것처럼, 몰리 역시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듯) 백인의 달콤한 삶에 매혹되어 있으면서도 오세이지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양립 불가능한 바람 속에 힘겨워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땅에서 솟구친 검은 물기둥에 몸을 검게 물들이며 추던 춤과 영화 엔딩에서 마치 희생된 자들을 위한 위령제처럼 재연된 오세이지족의 전통적 군무가 공존하는 세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몰리 역시 <비열한 거리>의 찰리처럼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세이지족은 ‘친구의 얼굴을 한 폭력’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다. 아니, 돈이라는 절대적 이유 앞에 죽어야 했다. 킹 헤일은 현자의 얼굴로 자신의 탐욕과 폭력을 감춘 위선자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탐욕을 한없이 투명하게 추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아무 죄의식이 없다. 킹 헤일이 아무 거리낌 없이 오세이지족을 죽일 수 있었던 까닭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로 그들을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세이지족의 부를 빼앗는 일이 자신이 배푼 시혜에 대한 당연한 대가이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것을 ‘되찾는 일’(“네 집의 주도권을 되찾으란 말이야”)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땅은 애초에 누구의 것이었을까? 왜 킹 헤일은 애초에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 속에 마틴 스코세이지가 서부를 통해 보여주려 한 ‘미국의 맨얼굴’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부의 땅에서 자행된 폭력을 정당화해온 논리가 바로 이 (위선적) 오인 속에 존재하니 말이다. 글 안시환(영화평론가) 2023-10-26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