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와 여행의 추억
김형화
“사태가 좀 진정되면 만납시다.”
“그동안 건강 잘 지키시고요.”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길어지며 지인과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을 때 이런 인사말을 버릇처럼 달게 되었다.
의정부에 사는 ㅇ사장과도 이런 문자를 나누고 연락을 안 한 지 한 해가 다 되어간다.
2018년 11월 하순에 베네룩스 3국을 관광차 다녀왔다.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으로, 전혀 모르는 스물 남짓 되는 일행과 함께했는데 여기서 ㅇ사장 부부를 처음 만났다.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2시간동안 비행기를 탔고 그곳에서 다시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첫 목적지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였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이었지만 쿠텐베르크 동상이 서 있는 시청 광장과 노트르담 성당 주변의 아름다운 거리 풍경을 잠시 둘러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이드가 메뉴까지 미리 예약 해 두었기에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식사가 나왔다. 그때 ㅇ사장 부부는 우리 부부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았는데 첫 만남이어서 가볍게 인사만 나누었다.
나는 해외관광을 할 때 대부분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한다. 모든 일정을 전문 여행사가 짠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안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단독여행에 비해 비용도 적게 드는 것도 큰 장점이다. 물론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지켜야 할 일도 있고 개인적인 욕구를 접어야하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때 여행기간은 일주일이었는데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 독일의 일부 도시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동거리가 멀어 버스를 오래 타야 했고 관광지에서도 바삐 움직여야 했다. 또한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강도 높은 일정이었다.
첫날, 알자스 지방의 중심도시인 스트라스부르와 콜마르를 관광하고 룩셈부르크에 저녁 늦게 도착하여 야간투어를 하였고, 이튿날도 룩셈부르크에서 독일 중서부에 있는 휴양도시 몬샤우 마을을 거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밤중에 도착하는 등 처음부터 가히 강행군이었다.
여행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기 때문에 웬만한 고생은 감수한다. 그러나 그 고생의 정도가 가슴 뛰는 강도보다 클 때는 고행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수행자라면 몰라도 보통사람으로서는 더구나 칠순을 넘긴 사람으로서는 사서 고생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해야지 다리 떨릴 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우리 부부는 웬만큼 힘든 일정도 견뎌낼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ㅇ사장 부부도 그렇게 보였다.
새로운 풍광을 감상하고 낯선 풍습과 문화를 알아가는 것 못지않게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여행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과 만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추억처럼 문득문득 생각난다.
북유럽 여행에서 만난 ㅎ씨는 산업은행 지점장으로 퇴직을 앞두고 부부가 함께 왔는데 여행 중에 우리 부부와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국 후에 ㅎ씨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쓴 기행문을 내게 보내왔다. 고쳐야 할 부분이나 덧붙일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행문은 여행의 감상과 함께 아들에게 대한 사랑과 삶의 교훈이 곳곳에 녹아있는 멋진 기행문이었다.
일행 중에 애연가가 있었는데 이분은 식사 때 마다 급히 식사를 끝내고 먼저 밖으로 나가 일행이 나올 때까지 담배를 피우곤 했다. 내가 우스개 삼아 “두 가지를 해결하려니 힘들지요”라고 말을 걸었고 그 후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나의 집안 형님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교수였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장 출신 ㄱ씨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산록에 자리 잡은 호텔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남십자성을 보러가자고 하여 호텔 불빛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가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한없이 더듬었다. 그는 신용카드 오류로 현금 인출이 안 되는 호주에서 우리 부부의 옵션관광 비용을 대납해 주기도 했었다.
터키에서 만난 ㅇ씨는 건설회사 임원으로 퇴직하고 남산에서 레지던스를 경영한다고 했는데 아이패드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가끔씩 업소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분은 술을 좋아해서 저녁 식사 후에 가끔 내 방으로 불러 현지 맥주와 한국 소주로 조제(?)한 쏘맥을 마시며 그날의 피로를 풀었다. 취기가 오르면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불렀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 올려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ㅇ사장과는 여행 중에 얘기도 잘 나누지 못했다. 식사 때 가끔 옆자리에 앉을 때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다보니 눈인사만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벨기에를 거쳐 파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드디어 귀국 비행기를 타는 날이 밝았다. 오전에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고 달팽이 요리가 나오는 식당으로 갔다. 이곳에서 ㅇ사장 내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식사를 마치면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 우아즈 마을에 들러 고흐의 무덤을 둘러보고 공항으로 갈 것이므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식사였다. 우리는 맥주로 건배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여행이 끝나가는 무렵이어서인지 화제가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살아가는 얘기가 나왔다.
ㅇ사장은 모 방직회사 임원으로 다니다가 퇴직했는데 회사 다닐 때 회사 소재지인 의정부에 마련한 집에서 아직 살고 있고 서울 집은 전세 주고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등의 수입으로 사는 데는 지장이 없고 남는 돈으로 열심히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내가 국민연금만으로는 살기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월남전 참전 후유증으로 받는 명예수당도 꽤 된다고 한다. 나도 월남전에 참전했었기에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ㅇ사장은 퀴논에 주둔했던 맹호부대 참전용사였다. 나는 투이호아에 주둔했던 백마부대 28연대에 복무했었으니 ㅇ사장이 있던 곳과 가까운 거리였다. 더구나 ㅇ사장과 나는 나이도 동갑이었다. 이런 흔치않은 인연이 있냐며 의기투합한 우리는 귀국해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곧 해가 바뀌어 2019년을 맞이했고 1월 말에 ㅇ사장이 예약한 조용한 횟집에서 두 부부가 마주 앉았다. 방어회와 소주에 취해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이제까지 살아 온 얘기, 자식들 얘기를 흉허물 없이 털어놓다가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만나는 사이 또 해가 바뀌어 2020년이 되었다.
그 해 초 ‘중국 우한에서 지난 해 말 역병이 발생했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설날 다음 날에 그리스 여행길에 올라야 했기에 이 역병이 확산되지 않기를 조바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도 확진자가 나오고 말았다. 처음에는 우한에서 입국한 중국 여성, 며칠 후에는 역시 우한에서 입국한 한국 남성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로 판명되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었지만 정부에서는 여행 통제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나는 예정대로 설날 차례를 지내고 다음 날 그리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여행 도중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심지어 우리가 중국인으로 보였는지 피하려는 모습도 보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무섭게 퍼져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귀국해 보니 국내 사정도 심각했다.
ㅇ사장에게 방역 상황을 봐 가면서 괜찮을 때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곧바로 대구 신천지교회에서 집단 감염자가 나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난국으로 빠져 들어갔다. 전국 각지에서 의사, 간호사, 의료장비, 심지어 구급차까지 대구로 동원되었다. 방호복을 입고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을 방송을 통해 보면서 말 그대로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 후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코로나19 사태는 나아 질듯하다가 더욱 나빠지고 하기를 거듭했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대통령의 말도 식언이 되어버렸다. 방송에서는 연일 노란 옷을 입은 당국자들이 헤드라인 뉴스를 차지했다. 그들은 확진자 수만 달랐지 늘 똑같은 말, 국민 방역수칙만 강조하는 듯하였다. 그들이 사태가 호전될 것이라고 전망하면 곧바로 악화되는 상황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국민들의 불안감은 커져 갔다. 이해 할 수 없는 방역수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괴감도 들었다. 심지어 노란 유니폼에 대한 거부감마저 생겨났다.
‘코로나 블루’였다.
여의도에 사는 내 친구가 밤중에 가슴 통증을 느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증세에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는데 코로나 PCR검사를 받아야만 진료할 수 있다고 하여 그 급박한 시간을 집에서 코로나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다행히 음성으로 판정되어 진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심장으로 가는 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을 받고 퇴원했다. 만약 그 친구가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위중한 증세였다면 코로나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유명을 달리 하지 않았겠나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모골이 송연해 졌다.
감염률이 높은 각종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나 모임 금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네 사람까지만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고, 오후 6시 이후엔 두 명만 가능하다고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규제가 나왔다.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도 그렇단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어떻게 해서라도 따라가려는 민초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도 날로 깊어진다.
다시 예전의 익숙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때는 언제가 될까. 그동안 어떻게 처신하고 대비해야 하나.
ㅇ사장과의 약속은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꼭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