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봄비
- 강 문 석 -
버스는 연거푸 에스자로 커브를 틀면서 가풀막진 언덕길을 기어올랐다. 여행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인데 오전 11시가 채 안되어 대마도 관광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말았다. 예약한 식당의 점심시간까지 시간을 채우기 위해 가이드는 이즈하라 시내에 붙은 전망대를 오른다고 했다. 차창에 부딪치는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고도를 높일수록 나뭇가지들이 더 요동치는 것으로 보아 바람도 점점 거세지는 듯 했다. 차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멀미기운도 고개를 들곤 했다. 전망대는 자욱한 안개 때문에 해발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버스가 멈추자 가이드는 우리에게 전망대 산책을 권했다. 하지만 화장실 용무가 바쁜 몇을 빼곤 꼼짝을 하지 않았다.
비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비옷에다 우산까지 받쳐 들었지만 언덕배기를 흔드는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카메라는 빗물에 파인더까지 뿌옇게 되어 스마트폰에다 전망대 풍광을 담기 시작했다. 한창 신록으로 물드는 숲이 안개에 휩싸여 신비롭고도 몽환적인 분위길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언덕을 출발할 때 "전망 없는 전망대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고 뼈있는 농을 건넸더니 가이드는 발끈하는 반응을 보였다. “산책 안하셨나 봐요? 다들 다녀오셨는데…” 여행 첫날인 어제 오후, 느닷없이 가이드는 기상악화로 인해 남은 여행의 일부가 축소된다는 말을 꺼냈다.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우절에나 하는 거짓말처럼 들려서 반신반의했다가 한참 뒤에야 심각한 상황이란 걸 알았다. 바다에 배가 뜨지 못할 정도로 강풍이 분다는 것. 그렇더라도 선박의 몸체가 바다 위를 붕 떠서 달리는 ‘코비’만 타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코비는 30대밖에 없고 우리 팀은 미리 서둘러서 그 배를 잡았다고 했다. 배를 놓친 팀들은 지금 난리가 나서 초상집 분위기라는 말까지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충격인데 가이드는 이러한 상황을 자주 맞닥뜨려 그런지 전혀 심각한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비는 무슨 놈의 비?’하며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후속조치가 바로 뒤따랐다. 1인당 추가비용을 더 거둘 거라며 생략되는 여행코스까지 낱낱이 읊어댔다. 일행은 다른 여행팀이 확보하지 못한 승선권을 우리 팀이 구했다는 말에 환호하면서 박수까지 쳐댔다. 그땐 버스가 만제키바시萬關橋에 막 도착할 무렵이었다. 다리 앞에서 가이드는 차를 세우더니 다리는 걸어서 건너야한다며 전원을 내리게 했다. 다리를 들어서자 강풍이 몸을 날려버릴 듯 달려들었다. 다리 밑 바다는 까마득했고 조류도 소용돌이가 심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면서 하얀 모터보트가 힘겹게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상대마와 하대마를 잇는 만제키바시는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인공해협을 만들면서 놓은 다리다. 처음 건설한 길이는 100미터였으나 20년 전 세 번째 공사로 현재의 210미터 길이가 되었다고 한다. 숙소에서 가까운 도심 한복판의 대형 식품매장을 들렀다. 아이쇼핑이 목적이었는데 매장엔 상품광고를 현수막이 아닌 코믹한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인형들은 기상천외한 발상을 동원하여 맞닥뜨린 사람의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게 했다. 돼지도 하나 있었지만 대부분 서양인들 얼굴이었다. 발가벗고 앉아 술병과 술잔을 받쳐 든 주당으로부터 노랑과 초록색 파프리카를 쟁반에 담아든 대머리도 보였다.
네모난 판때기에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란 한일 두 나라 인사말을 넣어 막대기에 매달아 들고 선 요리사 복장의 사내까지 20여 점이나 되었다. 일본인 특유의 재치 있는 상술이 돋보였다. 이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우리 한국인들만 일본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지금도 끊이지 않는 독도분쟁 탓이겠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일행 중엔 심하게 낡은 숙소인데다 두발건조기까지 없는 객실을 불평하는 여인도 있었다. 그러한 불편을 느꼈다면 거꾸로 그녀는 평소 그만큼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일본인들은 그러한 설비를 갖추는 것조차 낭비로 보는 데야 어쩔 것인가.
일본보다 훨씬 늦게 주택에 전기 공급을 마친 우리나라가 이미 20여 년 전 220볼트로의 승압을 마쳤지만 일본의 전력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카메라의 배터리를 충전하자면 110볼트 콘센트는 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식으로 어뎁터adapter를 준비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니 미리 예보한 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의 낭만을 노래할 때 등장하는 봄비 정도가 아니라 여름철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쏟아졌다. 이즈하라 시내를 도보로 둘러보는 투어엔 비 때문에 33명 중 11명만 나서서 퍽 단출했다. 숙소를 나서자 바로 앞 대로변에 어제 가이드가 소개했던 ‘18은행’이 나타났다.
우리말 발음으론 다소 우습지만 ‘십팔’을 ‘넘버원’으로 풀이하면 더없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우체국 간판엔 한글까지 병기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를 알 수 있었다. 수선사修善寺에는 구한말의 대유학자이자 항일 운동가였던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순국비가 세워져 있어서 오늘 가장 먼저 찾는 것 같았다.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정토종계淨土宗系의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일본의 주택이나 사찰 대부분이 망자를 가까이 모셔놓고 있듯 수선사에도 유골을 모신 비석이 공동묘지처럼 빼곡했다. 비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투어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개 눈엔 뭣만 보인다고 주택가 골목길 외벽에 나붙은 전기계량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계기보관함을 행인들이 파손한 것은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높이 치솟은 전주에 붙은 배전선로와 변압기를 카메라에 담을 땐 빗물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마역사 민속자료관에는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를 지었다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화와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중인데도 이곳엔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문을 들어서기 전 왼편엔 1697년부터 일본을 방문해 문화를 전파한 조선통신사를 기리는 비가 서 있었다.
덕혜옹주 결혼기념 봉축비는 앞에 놓인 작은 조화화분이 말해주듯 경내 길옆에 쓸쓸히 비를 맞고 서있었다. 고종의 왕녀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하여 성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봉축비를 건립하였다. 부부는 애정이 깊었지만 한일양국 간엔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1955년 이혼한 옹주는 6년 후 귀국하여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고 한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 복원한 것이었다. 자료관 근무자는 안내지도를 자신이 앉은 좌석 안쪽에 쌓아놓고 있다가 달라고 요청을 하자 내주었다. 근검절약 정신이 배어 있어서 낭비를 막고자 그렇게 운영하고 있었다.
일행이 들렀던 면세점에 가까이 붙은 일본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행은 말은 않고 있었지만 대마도 여행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식당을 막 나서면서 가이드에게 출국장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차안에서 대마도의 역사에 관하여 좀 더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면서 이제 대마도가 나가사키로 현이 바뀐 만큼 나가사키에 관한 엔카演歌 한 곡을 들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마침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을 떠오르게 하는 나가사키 노래가 있어서였다. 바로 ‘나가사키와 교모 아메닷다長峙は今日も雨だった였다.
그러나 가이드는 제발 노래만은 좀 봐달라며 손바닥까지 비벼대는 시늉을 했다. 노래가 나온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 SWS외국어학원 강사는 육성으로 수강생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반백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은 것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데다 노랫말이 담고 있는 애절함이 그 어느 노래보다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은 교직을 은퇴한 분이었다. 아마도 당시 예순에 가까웠을 터이니 이미 오래 전 먼 세상으로 떠났을 것 같다. 인터넷세상으로 바뀌면서 엔카를 즐기는 카페가 늘어나자 이 노래도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경내 수목들은 싱그러움을 더했고 무리지어 만개한 철쭉은 빗물을 이기지 못해 약간 얼굴을 찡그린 모양새다. 대기시간이 길어져 곤욕을 치렀던 히타카츠항 입국장의 악몽이 살아나 출국장을 들어서면서 은근히 걱정을 했지만 그러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선박 한 대에 탈 인원만 도착한 때문에 그만큼 빠르게 출국수속이 끝나서 승선할 수 있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은 4월말 하오 2시 반, 항구는 적막이 깃들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하염없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이렇게 평온한 바다를 두고 기상악화라며 귀국시간을 3시간이나 앞당기면서 여행자들에게 겁을 잔뜩 주었더란 말인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을 때 코비는 정확하게 오후 3시에 출항을 했다. ‘집채만 한 파도’란 말은 신문방송에서나 듣던 말인데 우리가 탄 배는 그런 파도를 수도 없이 넘고 또 넘었다. 퍼붓는 빗줄기도 기세등등한 풍랑에 더해지고 있었다. 서너 명의 여승무원들은 배 멀미 토사물을 수습할 봉투를 한 아름씩 안고 나눠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승객들은 승객들대로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토하느라 사색이 되었다. 옆에 붙어 앉은 아내도 멀미가 심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애가 탔다.
평소 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그럴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노년에 접어들어 기초체력이 부실한 것일 수도 있겠다. 선내방송까지 몇 차례나 비상상태를 선포하듯 승객들의 이동을 금지시키자 갑자기 타이타닉 참사가 떠오르며 긴장하게 되었다. 49.5킬로미터를 1시간 10분 동안 파도와 싸우며 현해탄을 건넌 코비는 드디어 부산항대교 밑을 지났다. 언제 그러한 악전고투를 벌였나 싶을 정도로 여객선은 태연하게 승객들을 항구에다 풀어놓았다. 이번이 대마도 여행 세 번째였던 아내는 여전히 초주검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다시는 대마도를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내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