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언젠가 오래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 고도(古都)를 다녀왔습니다.
당대 왕들이며 귀족들이 얼마나 공을 들였으면 수 천 년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찬란한 유적들이 잘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제 눈길을 확 끈 것은 엄청난 규모의 봉분들입니다.
어떤 왕들은 살아생전 자신의 무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신하나 종들 가운데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무덤에 함께 묻힐 사람들의 명단,
이른바 ‘순장조’(殉葬組) 명단까지 미리 확보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은 신하나 종들 가운데 수명이 다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함께 묻혔다는 것입니다.
당대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왕이며 황제들 역시 죽음 앞에 한 인간이었습니다.
홀로 떠나기가 너무나 두려워 애꿎은 살아있는 신하들이나 종들과 함께 그 길을 갔습니다.
죽음이 두렵긴 두려웠나 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그간 쌓아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절대 아닙니다.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 순간도 아닙니다.
기를 쓰고 도망갈 대상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만에 찾아온 절친한 친구 같은 대상입니다.
그 친구가 다가올 때 조금은 아쉽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여기보다 더 아름다운 희망과 영생의 땅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대성통곡을 터트리며 억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오래 기다렸던 수학여행 떠나듯이 그렇게 홀가분히 떠날 일입니다.
말은 그럴싸한데 사실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평소에 떠나는 연습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상 안에서 내려놓은 작업을 자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살아생전 매일 매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릴 곳을 다 달린 사람들은
더 이상 지상에 아쉬움이 없습니다.
여기(地上) 있으나 거기(天上) 있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말씀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진정으로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부터라도 이 아래가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해야겠습니다.
보다 자주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끊어나가야겠습니다.
지상에서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지만 그런 노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헤아려봐야겠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외치는 욥의 음성처럼
무로 돌아갈 것들을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근심의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죽기 살기로 모아들이는데 혈안이 되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들 다 놓쳐버리기 마련입니다.
‘영혼이나 신앙, 사랑이나 우정이 밥 먹여 주냐?’며 정신없이 허상만을 쫓아다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청천벽력 같은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복음 12장 20절)
시편작가의 강조처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그저 육(肉)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릴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