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실대던 햇살이 불현듯 비를 몰아오던 12월이었다. 집 없는 한 사람이 이웃이 된 지 한 주일이 가까웠다. 검은색 상하 차림에 마흔쯤 된, 날렵하고 큰 키의 그가 하필이면 대문 앞에 천막을 치자 나는 덜커덩 빗장 부터 걸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비닐 휘장만 들락이는 모습이 못마땅했을 뿐 아니라, 햇살이 들춰낸 검붉은 얼굴과 날선 눈매가 꺼림칙했다. 예전엔 길가에 허물어지듯 웅크린 이들의 눈빛이 한없이 연약해 보였는데, 팬데믹 이후는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주요 도시에 아시아계 사람을 폭행 하는 노숙자가 늘어났다. 문을 열고 나서기도 섬뜩해 틈만 나면 창문 새로 동태를 살피며 한시바삐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처럼 안락한 보금자리를 누리고 싶은 소망에는 다를바 없었을까. 그 사람은 천연덕스럽게도 노숙을 이어갔다.
마닐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미국 대학으로 진학했고, 남편의 은퇴와 함께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시부모님의 마지막 생을 지켜 드린 후에 그들과 합류한다는 것이 타계한 후에도 10년이 넘게 머물렀다. 우리 둘은 아직도 마지막 쉼터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국 사는 아이들 곁을 마치도 두 번째 개척지인 양 맴돌았다. 이번엔 드디어 정착하려 마음먹었을까. 아들네가 사는 이곳 샌프란시스코에 작은 집 하나를 물색했다. 남향으로 트인 거실 창은 보도에서 반 평쯤 들어 틀을 잡았고 앞으로는 매그놀리아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웠다. 주택이 몰려있는 곳에선 약간 벗어났지만, 운전하지 않고도 상가 길로 접어들 수 있어 편리하기 그만이었다. 사흘이 멀다고 몰려오는 손녀들을 맞을 수 있게 아들네에서 10분 안쪽에 자리한 것도 커다란 복이었다. 그런 여기에 고 만고만한 이웃이라든지 새 주택이라도 들어서면 금상첨화였겠건만. 전혀 다른 처지의 한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으니, 여간 우울하고 찜찜한 게 아니었다. 껄끄러운 눈초리에도 마음껏 세간을 펼친 그를 마땅찮게 여긴 건 집 없는 사람을 혐오해서가 아니었다. 길가에 주차된 차량을 쇠파이프로 내리 치는 등, 도착한 날부터 내보인 광폭한 모습과 늦은 밤 난데없이 내지른 고성이 모처럼 누리려던 노후의 평안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제비를 뽑듯 마주하게 된 그 사람의 참담한 정황이 다시 한번 인간 세상의 불평등을 부각해 주어 몹시도 불편했다. 어른은 물론 할머니로까지 승격 했음에도 여유롭긴 고사하고 움츠려만 들던 내 모습도 마뜩잖았다.
그 시절 우리 또래가 늘 그러했듯 초등학교 때의 나 또한 연민을 자주 느끼던 아이였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엔 굴뚝 연기가 시커멓게 피어오르고 버터 냄새가 코를 찌르는 빵 굽는 집이 있었는데, 그 단칸 살림방엔 식구들이 넘쳐났다. 가끔 머리에 희뿌연 밀가루를 덮어쓴 엄마를 데리고 한 아이가 걸어 나왔는데, 열악하고 좁은 데서 형제들과 엉키느라 공기조차 비껴갔는지 가무잡잡한 얼굴엔 하얀 버짐이 피어 있었다. 나중에 그 아이를 반에서 만났을 때 나는 차마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바로 앞 우리 집만 넓은 방을 누린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