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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DMZ 평화의길 5코스(고양종합운동장-성동사거리)
여행일 : ‘25. 2. 1(토)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일산서구) 대화동·가좌동 및 파주시 동패동·송촌동·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고양종합운동장→가좌근린공원→동패지하차도→심학산둘레길→파주출판단지→공릉천→살래길→통일동산→성동사거리(거리/시간 : 21km, 실제는 ‘동패지하차도’에서 출발 16.7km를 5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년 9월,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트레킹 들머리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자유로(국도 77호선) 이산포 JC에서 고양대로로 바꿔 타고 3km쯤 들어오면 ‘고양종합운동장’이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보조경기장 뒤쪽에 위치한 ‘휴게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 고양종합운동장(휴게공원)을 출발 ‘자유로’ 언저리를 따라 파주 통일동산까지 북진하는 21km의 여정이다. 도심에서 출발해 숲길과 시골길, 공원 등 다양한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심학산, 출판단지, 통일동산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는 없다. 하지만 짬을 조금만 내면 종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통일의 의지들 되새겨 볼 수 있다.
▼ 08 : 20. 실제 출발지인 동패지하차도(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아니 이름(DMZ 평화의길)에 어울리지 않는 시내구간을 줄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 08 : 23. 동패지하차도 상단(이정표 : 성동사거리 15.8km).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인데, 평화누리길(6코스) 및 경기둘레길(5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의길(5코스)’도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점인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6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제공한 앱에는 ‘4.95km’로 뜬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안내도는 평화누리길(6코스)과 경기둘레길(5코스)만 표기하고 있었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평화의길’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 08 : 27. ‘산남로’를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란다.
▼ 08 : 29. 동서대로(358번 지방도) 하부 굴다리. 평화누리길은 6코스의 시점을 이곳으로 삼는 듯 눈에 익은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다. 다음 화장실은 출판도시를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꼭 들렀다 가도록 하자.
▼ 길은 ‘심학산’의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겁을 준다고나 할까?
▼ 08 : 33.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심학산 둘레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 평화누리길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출판도시길 순환코스)’의 남쪽 코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안내판은 북쪽 코스도 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면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북한의 송악산까지 코앞으로 다가온단다.
▼ 심학산은 한강을 향해 솟아오른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곳곳에 바위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경사까지 급해 산을 오르려면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탐방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 08 : 48.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탐방객들을 위한 쉼터도 여럿 만들어놓았다. 하긴 ‘심학산 둘레길 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10월26일에 열렸다나?
▼ 08 : 55. 산머루가든 갈림길(이정표 : 낙조전망대↑ 1,699m/ 산머루가든→ 660m/ 배수지↓ 1,387m). 심심찮게 길이 나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 09 : 08. 약천사 갈림길(이정표 : 배밭정자↑ 1,592m/ 약천사→ 260m/ 전원마을↓ 516m)도 그중 하나다. ‘약천사(藥泉寺)’는 1932년 (고려시대의 절터에) 법성사로 중창되어 1995년 약천사로 개명한 앳된 사찰이지만 13m 크기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세를 탔다. JTBC 주말드라마 ‘나의해방일지’의 촬영지이자, 인기배우였던 고 박용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진다. 산책하기 딱 좋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배낭도 없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데크 계단이나 밧줄 난간을 설치해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 09 : 24. 낙조전망대.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의 끝, 서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곳에 세워놓은 전망대이다.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낙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 난간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중히 흐르는 한강 너머, 김포 한강신도시를 시작으로 하성면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중심에 봉성산과 전류리포구가 있다. 3코스와 4코스를 답사하면서 눈만 들면 ‘심학산’이 차올랐었는데, 이번 5코스는 반대로 김포의 드넓은 들녘과 전류리포구를 눈에 담으며 가는 모양새이다.
▼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밀물일 땐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기도 한단다. 봉성산, 태산, 문수산 등 앙증맞은 멧부리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비틀면 저 멀리 북녘에 황해도 개풍군 관산반도가 희끄무레하다.
▼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리듬감을 더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거기다 널따란 바위들이 등산로 곁에 군데군데 놓여 있어 좋은 쉼터가 된다. 이 구간에서는 ‘추락위험’ 경고판까지 만날 수 있었다.
▼ 09 : 34. ‘배밭 정자’란다. 요 아래 있는 ‘배 과수원’에서 이름을 얻어온 모양인데, 사통팔달로 길이 나뉘는 지점답게 정자 말고도 이정표와 벤치, 운동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배밭입구(510m)’ 방향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을 5분쯤 내려가자 한껏 덩치를 부풀린 한강이 얼굴을 드러낸다. 오두산 아래서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 09 : 43. 심학산등산로 입구. 4개의 등산길과 둘레길 코스를 그려 넣은 ‘심학산 종합안내판’과 이정표,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 심학산의 원래 이름은 ‘수막산(水幕山)’이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에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란 뜻이란다. 홍수 때 산이 깊이 잠겼다거나 바위가 깊숙이 포진해 있다며 ‘심악산(深嶽山)’과 ‘심악산(深岳山)’, 지세가 거북의 등딱지를 닮았다며 ‘구봉산(龜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이름인 ‘심학산(尋鶴山)’은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鶴) 두 마리 도망갔다가 이곳에서 잡혔다는데서 유래됐단다. 하지만 이는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곡해(曲解) 또는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는 이유다. 고로 대동여지도 등 일제 이전의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09 : 46.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는 두어 개의 카페가 들어있었다. 참고로 이곳 ‘책마을’에는 ‘인포떼끄’, ‘보물섬’, ‘헤세’ 같은 입소문을 탄 카페가 여럿 있다. 하나 같이 책과 카페를 합쳐놓은 공간이다. 책을 꼭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 골라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읽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라도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누가 알겠는가.
▼ 09 : 52. 다리(이름표가 없는)를 건너 ‘출판단지’로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이자 1만여 명의 종사자들이 250여 개 출판관련업체에서 일하는 ‘책 마을’이다.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 과정이 '원스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도 빨라졌다. 덕분에 시내 곳곳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다.
▼ 다리는 ‘출판단지 유수지’를 가로지른다. 유수지(遊水池)란 가뭄이나 홍수 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한 천연 또는 인공의 저수지를 말한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하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인공의 저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09 : 54. 이채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문발로’를 따라간다. 파주출판도시가 품은 가장 큰 도로인 문발로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뻗은 길들을 따라 출판사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책방(완전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 판매한다), 그리고 북카페(역시 할인판매)와 아트샵, 박물관 등이 자리한다. 길가에 늘어선 건축물들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이게 곧 바른 책을 펴내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 도시 전체를 멋진 건축물들로 채웠다고 한다. 덕분에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나?
▼ 광화문의 교보문고 앞 빗돌에 새겨진 문구를 ‘책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전달된 책은 읽혀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책’인 것이다. 그래 이곳은 상상하고, 만들고, 공감하고, 나누는 책 마을이었다.
▼ 09 : 59. 심학교사거리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참! ‘책 마을’은 한적했다. ‘책’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인근에 있는 ‘(헤이리)예술인마을’이나 ‘영어마을’처럼 북적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단지를 통과하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10 : 04. ‘직지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판단지 근린공원’에 이른다.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으로, 너른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 등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언덕은 지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덕분에 눈썰매장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 유수지 쪽에는 ‘탐조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수지를 찾는 철새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2023년에 생태모니터링을 했는데 101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큰기러기·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수리부엉이·흰꼬리수리 같은 법정보호종도 포함되어 있단다.
▼ 계속해서 ‘직지길’을 따라간다. 아니 8차선의 ‘자유로’와 2차선의 ‘직지로’ 사이에 보행로까지 품은 자전거도로를 따로 내놓았다.
▼ 10 : 17. 유수지가 끝나는 곳에 ‘노주교 사거리’가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문발 IC’의 고가 진출입로가 얼키설키 지나간다.
▼ 10 : 19. 문발교사거리(이정표 : 성동사거리까지 8.3km). ‘운정신도시’ 중 최초로 조성된 ‘교하지구’로 연결된다는 표식일 것이다. 교하(交河)는 최창조라는 풍수가가 ‘통일 한국의 수도’로 추천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년(광해군 4년)에는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계속해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유로’와 ‘재두루미길(활자마을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의 사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허락되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 10 : 37. ‘재두루미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로 보아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 탐방로는 이제 ‘재두루미길’을 따라간다. 1차선의 차도를 중심에 두고 양옆에 점선으로 자전거길을 나누어 놓았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 10 : 46. 슬슬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마을(송촌동)로 들어간다. 이정표(성동사거리 7.9km/ 동패지하차도 7.9km)가 정확히 절반을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강변을 따르던 길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고 보면 되겠다.
▼ 길은 두어 곳에서 나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전방에 두고도 들녘으로 에돌아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방향을 지시해준다.
▼ 10 : 58. 그렇게 도착한 ‘송촌동’. ‘동곡심방(銅谷心房)’이라는 편액을 건 3층 건물이 반긴다. 마당에는 거대한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아 운주사(雲住寺)의 ‘와불(臥佛)’을 모티브로 삼았지 않나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운주사는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이 근저에 깔려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며 선복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 안내판은 화순(전라남도)의 운주사에 있는 ‘와불(臥佛)’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었다. 운주사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은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기도 하다.
▼ 11 : 00. 언덕으로 올라서자 2차선 도로인 ‘소라지로’가 반긴다. 탐방로는 ‘소라지로’를 따라 북진한다.
▼ 11 : 06.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한강이 자신도 보아달란다.
▼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조금 더 나가보자.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 길가에는 멋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설렘’이라는 디저트 감성 카페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멀리 보이는 한강 뷰와 통 유리창 밖의 초록뷰를 보며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데, 잠시 쉬다가자는 내 부탁을 들은 채도 않고 지나쳐버리는 걸 보면 집사람의 눈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 메뉴판도 예술로 변할 수 있는가 보다. 이곳만의 시그니처 크림커피와 디저트를 마시다보면 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맞은편에는 ‘Eastern ~ One’이라는 인테리어 소품 창고형 매장도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기세에 눌려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짬을 내 들러보신 이석암 작가님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고 귀띔해주신다.
▼ 11 : 10. ‘송촌동 종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소라지로327번길’이라는데 2차선이었던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졌다.
▼ 길이 좁아진 탓인지 도로라기보다는 임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서는 살림채(한옥펜션)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성동사거리 6.7km)을 만나기도 한다.
▼ 11 : 18. 고개를 넘으면 ‘재두루미길’과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 11 : 25. 탐방로는 마을(松村洞)을 관통한 다음, ‘재두루미길’로 다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책으로 둘러싸인 공릉천변을 따라 동진한다.
▼ 11 : 28. 공릉천에는 ‘송촌교’가 놓여있었다. 아래로 물만 지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다리다. 공릉천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를 막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침투한 적도 있었단다.
▼ 다리 난간은 윤형철조망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서만 있는 게 아닌가. 하류 쪽은 철책으로 꽉 막혀 있는데 반해, 상류 쪽은 아무 제한 없이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 자체가 민통선인 셈이다.
▼ 공릉천의 상류 쪽 풍경. 공릉천(恭陵川)은 양주 칠봉계곡에서 발원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길이 75km의 국가하천이다. 공릉천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진다. 송촌대교 일원과 하구에 습지가 발달된 탓에 저어새·흰꼬리수리·재두루미 등의 철새가 관찰되는데, 삵·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단다.
▼ 하류 쪽에는 ‘송촌대교’가 놓여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 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 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리 몇 마리가 전부였다.
▼ 11 : 33.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때 공공하수처리시설을 지나기도 한다. 시설의 담장을 끼고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비릿한 농업비료 같은 냄새를 스멀스멀 풍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리를 잡아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탄현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왼쪽에 탄현 시가지가 들어섰다. 시골의 소읍인줄로만 알았는데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 11 : 48. ‘소리지로’를 빠져나와 지하 차도로 들어간다. ‘자유로’에서 ‘필승로’로 빠져나가는 진출로 아래로 난 일종의 굴다리다.
▼ 굴다리는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품명은 '평화의 삼거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습지 지역의 특성을 그림으로 담았단다.
▼ 굴다리를 빠져나온 다음(이정표 : 성동사거리 2.2km), 이번에는 자전거 길과도 헤어진다. 이어서 통일동산관광특구 도로 표지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 11 : 51. 이후부터는 ‘필승로’를 따라간다. 50년 전, 육군 졸병이었던 시절 구호가 ‘필승’이었던 것 같은데.
▼ 이즈음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 11 : 58. 검단사 입구. 탐방로는 ‘검단사’ 쪽으로 올라간다. 검단사(黔丹寺)는 847년(신라 문성왕 9)에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으로 불리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됐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두루누비(DURUNUBI)에서 제공한 GPX 트랙이나 이정표 등 모든 지표는 검단사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통일공원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진행할 것을 권한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산길’을 걷느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서이다.
▼ 1975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 장준하 선생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러다 홍수로 묘가 파괴되면서 2012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단다. 공원에는 선생의 행적을 알리는 연혁이 적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뒤편 산길을 50m쯤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오는데, 그의 책 ‘돌베개’의 이름을 따 봉분을 돌베개로 만들었단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 11 : 59. 우리부부는 도로를 따라갈 경우 ‘통일동산’을 만날 수 없다는 선두대장의 엄포에 헷갈려 검단사 방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50m쯤 올라갔을까 이정표(성동사거리 3.5km)가 왼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이어서 초입의 침목계단을 오르자 ‘살래길’ 표지판이 길손을 반긴다. 파주 시민들이 건강 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많이 찾는 둘레길이다.
▼ ‘살래길’은 엉덩이(또는 몸을)를 살래살래 흔들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출발 검단사·유승앙브와즈아파트·전망대를 거쳐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이르는 4.2km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 검단산(黔丹山, 151.8m)의 허리쯤을 에돌아가는 둘레길은 곱디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 거의 없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았다.
▼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나 평상에서 쉬어가면 그만이다.
▼ 검단산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 완만하기까지 해서 누구나 산책하듯 가볍게 나서기 좋은 산이다. 거기에 ‘살래길’까지 조성되면서 길은 더욱 고와졌다. 주어진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모든 코스를 다 누빈다고 해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단다.
▼ 12 : 15. 길고 긴 계단 위에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편 듯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왕과 충신들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내다보일 것도 같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옛 영화를 회상하는 모양새이다.
▼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미공개 시설’이라고 하나, 건설업체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쪼록 잘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귀한 구경거리로 탄생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다.
▼ 12 : 22. 조금 더 걸어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 나무 계단을 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허리를 ‘자유로’가 지나간다. 길을 뚫기 위해 오두산 줄기를 뭉텅 잘라냈다.
▼ 2021년에 개장했다는 ‘장단콩 웰빙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 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다.
▼ 12 : 25. ‘호텔지구’에 가로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 산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고 있었다. 검단산 산책로는 크게 살래길과 능선길로 나누어진다. ‘평화의길’은 이중 살래길만 오롯이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탐방로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 참호나 교통호 같은 옛 군사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시설보수를 해온 듯 옛 모습 그대로이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12 : 48. ‘이제 그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유아숲체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마별 숲속 놀이시설인데, 유아숲지도사가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 12 : 57. 골프하우스인 ‘Bunker Hill’을 지나자 이번에는 ‘통일동산’이 맞는다. ‘통일동산(統一東山)은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시된 ’평화시 건설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안보·관광단지이다. 그 규모가 168만여 평이나 된다니 성동리 일대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일동산‘으로 적은 Kakao map의 표기는 잘못되었지 않나 싶다.
▼ 13 : 14. 공원을 빠져나온 다음, ’평화로‘를 따라 200m쯤 더 진행하면 ’성동사거리‘가 나오면서 트래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글자조형물(통일동산관광특구)이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다.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 입구다. 참고로 ‘통일동산 관광특구’는 탄현면의 성동리·법흥리 일원에 조성된 접경지역 최초의 관광특구이다. 평화와 역사, 생태와 예술문화 그리고 쇼핑까지 파주의 멋과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에 띄는가 하면, 이를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 오늘은 16.70km를 5시간에 걸었다. ‘평화의길’이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4.5km정도의 시내 구간을 생략했지만 시간은 코스 전체를 다 걷는 것만큼 소요됐다. 산길이 6km도 넘은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속도를 뚝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트래킹을 마치고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평화의길’에 근접해 있는 북한 땅 조망을 위한 전망대는 빠짐없이 안내해주겠다는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전망대는 1992년 9월8일 문을 열었다. 북한 인권을 포함한 북한실상 알리기 차원의 많은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으며, 북한 관산반도와 북한 주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나 김포에서 들렀던 전망대들과는 달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 흔히 통일전망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전망대'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정말 잘 꾸며진 박물관이자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어린이 체험관’, 1층과 2층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그리고 3-4층은 전망대로 꾸몄다. 4층에 있는 전망라운지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 1-2층의 전시실. 국립통일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답게 통일교육과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탈북민들이 직접 증언한 ‘북한 경제, 사회실태 인식보고서’ 및 ‘북한인권보고서’ 내용 등 다양하고 알찬 통일교육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3층의 ‘실내 전망대’. 원형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 오두산 인근을 축소시킨 미니어처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리창에는 그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의 지명을 적어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들어선 선전마을에는 인민문화회관과 소학교, 김일성별장, 북한군 초소 등이 있으며 주민은 4,000여 명이 산단다.
▼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야외전망대로 나가볼 일이다. 북한의 ‘관산반도’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시간 XR확장현실 망원경’을 통해서인데, 망원경으로 담은 장면을 QR코드로 스캔해 저장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디지털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 난간에 서면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리는 임진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나가 된 물줄기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파주의 옛 이름인 교하(交河)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 지난 달 ‘신형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북한 땅이 더 스산하게 보인다. 그 기분에 떠밀려 개풍군(황해북도)을 망원경으로 당겨보기로 했다. ‘쌀로써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등의 선전구호가 다르게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구호는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고 이동하고 있는 북한 농민들만 눈에 들어왔다.
▼ 밖으로 나오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883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동포를 버리고 자신만 월남할 수 없다며 북한 땅에 남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련 군정 및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 실향민을 위한 공간인 ‘망배단(望拜壇)’도 만들어져 있었다. 명절 때면 실향민과 실향민 후손, 탈북민 등이 차례상을 차려놓고 북녘을 향해 절을 올린단다.
▼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은 해발 118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곳이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던 오두산성(鰲頭山城,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의 성터도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 작가님 것을 빌려왔다. KBS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보면서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관미성(關彌城)’을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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