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거절할 것인가, 헌신할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지만 책임도 따라와
사람들은 생각한 것 마음대로 표현 못할 때 힘들어 해… 말의 자유 방해 받으면 공동체 위기 빠져
페르시아의 대왕이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에 사신을 보내 굴복의 징표로 땅과 물을 요구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사신을 우물 속에 밀어 넣고 거기서 땅과 물을 찾아 대왕에게 가져가라고 말했다. 이 장면은 영화 ‘300’의 초두에 “디스 이즈 스파르타”라는 대사(영화사에서 이제 ‘아임 유어 파더’만큼 유명해진)와 함께 극적으로 연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선 이 장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물에서 죽은 사신의 목숨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 위해 두 스파르타인이 자진해서 페르시아의 대왕을 찾아간다. 대왕의 신하는 연회를 베풀고 그들을 회유한다. 두 스파르타인의 대답을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각하, 저희에 대한 각하의 충고는 사태를 충분히 알지 못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한쪽 면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다른 한쪽 면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즉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계시지만,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한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아니면 쓴지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도 일단 자유의 맛을 알게 되신다면, 자유를 위해서는 창뿐만 아니라 손도끼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하게 되실 것입니다.”(박광순 역)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페르시아전쟁이었고, 그리스는 이 전쟁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의 진정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스라는 정체성을 얻게 됐다는 뜻은 바로 자유에 대한 체험을 근본에 간직한 서구 문명의 원천이 됐다는 뜻이다.
그리스 이래의 저 자유에 대한 체험은 늘 공동체가 좇는 제일가는 가치가 됐다. 암스테르담 시청 근처의 강변에는 그 도시가 낳은 철학자 스피노자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밑에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20장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Het doel van de staat is de vrijheid).” 사람들이 못 참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의 자유가 방해받을 때 생기는 것은 분노, 아첨과 불신이며 이런 것들이야말로 공동체를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국가는 자신의 안위 자체를 위해, 사람들이 이성과 그 표현인 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자유야말로 사람들이 늘 염원하는 바인데, 그 흔적들을 우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 두드러졌던 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발견한다. 4·19 정신을 대표하는 김수영은 쓰고 있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푸른 하늘을’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 아래 있던 프랑스의 시인 엘뤼아르의 ‘자유’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몇 행만 읽어 보자.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오생근 역) 시인들은 자연을 노래하듯 자유를 노래해 왔다. 자연만큼이나 자유도 애초에 인간의 근본에 놓여 있었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에 대해선 그것의 ‘탄생’을 물을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자유야말로 우리를 근원에서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 근원성을 하이데거는 이런 말로 표현했다. “진리의 본질은 자유이다.” 자유에 따라서 있는 존재자가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이고 참됨, 곧 ‘진리’의 본질은 자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 이외에 나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일까? 사르트르는 이러한 물음을 진지하게 숙고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소설 ‘구토’에서 우리는 자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이 자유는 왠지 죽음과 약간 흡사하다.”(김희영 역) 자유가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 있다면, 자유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다.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 같은 것도 자유는 어디서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소설의 저 구절처럼, 자유 안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는 그야말로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죽음을 선택해도 뭐라 할 수 없는 완벽한 ‘임의성’ 외에 뭐란 말인가? 자유는 자신을 통해 삶으로 가는 자도 반기고, 죽음으로 가는 자도 반기는, 그야말로 무심한 신(神)과도 같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이런 자유인가?
이렇게 임의성과 자유를 혼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불안이라는 정서 속에서 비로소 자유가 제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의 관점에서 아담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신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금지의 법을 내린다. 아담은 이 금지 앞에서 불안에 빠지는데, 바로 금지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곧 그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의 자유가 없었다면 금지의 명령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자유가 있다면 명령도 어길 수 있으리라. 신의 명령을 받았지만, 그 명령을 따를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달렸다는 사실 앞에서 아담은 불안해진 것이다. 선생님의 권유로 시험 준비를 위해 공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법처럼 따르기로 한 학생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곧 불안에 빠지는데 그 계획을 지키지 않을 자유를 자신이 행사할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주는 바는 우리는 명령 앞에서 비로소 ‘명령을 어길 자유’를 가진 자로서 탄생한다는 점이다. 명령과의 마주침 이전엔 자유란 한낱 이래도 저래도 좋은 임의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누가 우리에게 명령하고 호소하는가? 물론 우리가 살아나가는 나날의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신이 명령하기보다는 타자(他者)가, 이웃이 내게 호소한다. 그 호소는 신의 명령처럼 무거운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서사시에서 유대인의 경전에 이르기까지 신은 이웃의 모습으로 줄곧 나타나지 않았던가? 신이 여전히 명령한다면, 그 명령은 이웃의 호소 속에서 들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해 레비나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맞아들이는 것은 나의 자유를 문제시하는 것이다”(‘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는 나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자로서 출현한다. 이 호소가 나의 자유를 탄생하게 하는데, 바로 ‘의문에 부쳐진 자유’로서 탄생하게 한다. 도대체 나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나에게 자유가 있다면 나는 타자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 속에서 자유는 자신을 타자에게 ‘죄지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발견한다.
이 문제에 대해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몇 구절을 보자.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에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타자 앞에서 우리의 자유는 죄짓기도 전에 기소(起訴)된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작품도 없으리라. 자유는 어디 있는가? 바로 자유는 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줄 수도 있고 내주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으로 있다. 그 이전엔 자유가 아니라 임의성만이 있었다. 타자의 등장과 더불어 비로소 죄지을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된 ‘복종’의 참뜻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자유와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복종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다. 진정한 자유는 타자의 호소에 대한 귀 기울임, 즉 호소에 대한 복종에서부터 생각될 수 있다. 자유는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면 숲속에 숨겨진 보물처럼 영원히 깨어날 줄을 모른다. 타자와의 만남만이 비로소 자유가 정체성을 갖게 해주는데 그 정체성이란 바로 ‘심판받는 자유’이다. 타자의 호소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헌신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또는 모른 척할 것인가? 이런 질문의 가능성이 바로 자유 자체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곧 ‘나는 타자에게 연루됐다는 것’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타자의 호소는 나에게 대답을 선택할 자유를 탄생시키지만, 어떤 대답을 선택하건 그 선택은 대답에 대한 책임을 필연적으로 만들어낸다. 자유 속에서 대답을 선택했다는 것은 나는 그 대답의 책임자가 됐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유는 ‘무거운 자유’이다. 그래도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가 자유를 원치 않더라도 타자의 말 걸어옴이 우리에게 대답하거나 대답하지 않거나 하는 자유를 선사한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철학에서의 ‘자유’ :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상과 문학이 직간접적으로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제국으로의 편입을 거부하고 자유를 지키려는 과정(이 과정이 바로 페르시아전쟁이다)에서 정체성을 얻게 된 서구 문명의 원천, 그리스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철학은 자유에 관한 수많은 문제에 몰두해 왔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모든 것은 결정돼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우리는 자연에서 나온 자신의 본성에 순응할 때 가장 자유로운데, 그러면 자유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자유는 자연과 다른 것인가?
첫댓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유명한 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