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물 사전] 침대 ⓒ전지은 |
침대는 안락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안락으로 우리의 정신을 옮기는 네 다리의 상징물이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나누며, 어떤 사람은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그들 모두는 안락과 불안 사이를 오가는 이계(異界)의 짐승 등에 올라탄 듯한 멀미를 느낀다. 잠에서 깨어나 느끼는 취기가 일상의 것도, 환상의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역과 경계에 대한 침대의 초월 의지, 혹은 무화(無化) 의지 때문은 아닐까. 직사각형이라는 명확한 공간적 구분은 침대라는 상징적 의미를 만나 명확하지 않은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침대는 세밀화일 수 없는 그림이다. 한편에는 휴식이라는 이름의 안락이, 한편에는 악몽과 비일상이라는 불안이 혼재된 이계이다.
내게도 침대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닥에서 잠을 잔 지가 꽤 되었다. 빗자루도 있지만 청소는 늘 손바닥으로 한다. 세탁기도 있지만 가급적 손으로 빨기를 선호한다. 그런 내게 침대는 여간 불편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차라리 관상용, 혹은 평면적 전시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을 잘라 죽였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의 생각이 타인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것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도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신화이리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악행에 만족하는 악행자가 자신의 악행과 같은 방식으로 종말을 고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자신을 조율하는 주인의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이 근원적 불일치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침대를, 잠을, 꿈을,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이게 한다. 침대는 사람의 내면과 무의식을 끄집어내어 ‘침대’라는 상관물에 올려두는 것으로 세상 모두를 불가해하게 하는 흔적이라 느끼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나의 침대는 하나의 지극히 객관적인 곱자와도 같아, 사람이 가진 비극의 길이를 재는 용도 이외에 다른 기능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생각하는 내 꿈의 길이에 맞춰 자라난다. 아이는 덮개가 되고, 어른은 커다란 판자가 되고, 밖에 다른 색깔의 바람이 분다면 방엔 계절이 찾아온다는 그런 몽환의 대상으로만. 그러자 침대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것이 되었다. 그 단순성을 즐기기 위해 나는 침대 머리맡에 경허 우음 29수(鏡虛 偶吟 二九首) 전부를 자잘한 필획으로 적어놓고 더러 나에게 읽어준다. 낮잠에 대한 길고 훌륭한 그 시 중에서도 “서동이 와서 내게 알렸다, 밥때를 알리는 북이 이미 울렸다고(書童來我告 飯鼓已鳴云)”라는 구절은 더욱 나를 침대에 가둔다. 비록 그 위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 하더라도, 깨어 있는 상태로서의 잠과 같은 것으로 말이다.
몽환 쪽으로 더욱 깊이 끌려갈 때, 침대에서 잠들기 전의 나는 침대가 되기 전의 무엇이다. 침구(寢具)이며 짐승인 너는 지금 나의 가장 외로운 어딘가를 떠돈다. 함께 하는 것과 혼자 하는 것, 여러 사람이며 동시에 혼자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구분 사이를 떠돌며 너는 내게 비닐 주머니 안쪽과도 같은 꿈을 쥐여준다. 불가해한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해석해야만 하는 사람의 곤혹 속에, 나는 어떤 사람이 침대 위에 남겨놓은 문양이 없는 털 한 가닥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잘라 간 내 다리와 내가 잘라 온 그 사람의 다리가 서로 길이가 달라 서글펐던 날에, 침대가 된 나는 이번 생이 지나가는 곳 모두가 된다. 그러나 나의 잠이 침대 위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곳이 어디건 기꺼이 나는 몽환하며 잠들리라. 설사 그가 내게 가장 긴 악몽을 드리울지라도 나는 침대가 목줄을 쥐고 이끄는 차안과 피안의 짐승이 되어 잠들지 않는 세상의 모든 것과 맞서리라.
조연호(시인) |
조연호
1994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농경시》, 《천문》,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과 산문집《행복한 난청》등이 있다. 현대시작품상과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_한겨레 문학웹진 <한판> 2013.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