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일본도 진실에 근거하지 않은 운동에 속아 온 ―― 한국의 역사학자가 실증 연구에서 밝힌 위안부 문제의 진실 / 6/19(수) / 분슌 온라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오랜 세월 한일 간에 큰 문제로 꼽혀 왔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종종 격렬한 반일운동이 벌어졌던 것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하고, 그때까지의 반일적인 역사관은 실수였음을 논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것이 한 권으로 정리된 것이 이영훈 편 반일 종족주의이다. 그 멤버 중 한 명인 저자 주익종 씨는 반일운동의 핵 중 하나였던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위안부 문제 사실을 밝혔다. 그 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반일 종족주의 '위안부 문제' 최종 결론』(문예춘추)에서 프롤로그를 일부 발췌하여 소개한다. (총 2회 1차/2차에 이어)
◇ 반일집회 참가자 급감
2019년 광복절 [편집부주 : 8월 15일. 1945년 그 날,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공휴일로 정해져 있다] 전날인 8월 14일 수요일, 서울시 온도계는 섭씨 35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날 정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00회 수요집회[편집부 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및 금전적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열리고 있는 집회.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현장은 더웠다.
2만 명이 넘는 참가자들(집회 주최 측 추산)이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가 국가 정책으로 자행된 전쟁범죄임을 인정하라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열렬히 구호를 외쳤다. 그 한 달여 전부터 이른바 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한일 간 충돌이 있었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직에서 막 물러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일본에 맞서 죽창을 들라고 선동했고, 안 갑니다, 안 사요라는 일본 여행 기피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상점 선반에서 일본 맥주가 사라지는 등 그야말로 반일 폭풍이 한국을 휩쓸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7개월이 지난 2023년 3월 15일 수요집회에는 20여 명의 참가자가 원래 집회장소에서 떨어진 곳에 모였다. 한편 이들을 비판하는 반일동상 철폐 및 위안부법 폐지를 목표로 하는 운동가들의 집회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90여 명이 모였다. 반수요 집회가 수요 집회를 압도한 것이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실증연구가 베스트셀러에
2019년 여름, 한국의 몇몇 지식인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내고 반일의 폭풍에 맞섰다. 편저자인 이영훈 교수는 평생 경제사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일제 수탈론 등 한국사학계의 허구 역사인식을 무너뜨렸다. 나아가 조선왕조가 왜 쇠망했는지, 식민지화와 함께 어떻게 근대문명이 도입되었는지, 독립 후 대한민국의 놀라운 발전이 왜 이루어졌는지 등을 철저히 사실에 입각하여 규명하였다. 그는 뒤따르는 학자들과 함께 당대 한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반일 종족주의를 타파하려 했다.
필자도 집필에 참여한 그 책은 한국인이 식민지 시대에 대해 갖고 있는 역사인식이라는 것은 만들어낸 이야기, 즉 허구임을 통렬한 필치로 폭로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하에 있던 일본이 구한말 [편집부주: 대한제국 말기] 혼란기에 조선의 영토였던 다케시마(한국명은 독도)을 빼앗고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조선인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고, 쌀을 수탈하고, 조선인 수백만 명을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하고, 과거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노예사냥을 하면서 조선의 소녀들을 총검으로 위협해 연행해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이 책은 이 같은 한국인의 근현대사 인식은 근거 없는 꾸며 낸 것이며, 이 거짓말을 그대로 간직한 한국인들이 한일관계, 나아가 한미관계를 파탄내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고 갈파했다.
이 책에 대해 반일 종족주의로 얼룩진 학계와 언론계 종사자들이 악의에 찬 가시 돋친 비난을 쏟아냈지만 한편으로 책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책은 학술교양서로는 이례적으로 11만부 이상의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 위안부 운동 내부에서 잇따라 부정 발각
2020년 5월에는 위안부 운동을 좌지우지해 온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전 이사장 윤미향의 후원금 횡령 의혹이 폭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폭로한 사람은 윤미향과 손잡고 위안부 운동의 얼굴이 된 전 위안부 이용수였다. 그는 윤미향이 전 위안부들을 이용해 모은 국민 성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심지어 사욕에 빠져 국회의원까지 됐다고 비판했다. 이는 곧 서울시와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있는 위안부 운동조직 정의연과 그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회계부정 및 기부금 횡령 의혹으로 번졌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던 6월, 이 횡령 의혹의 내막을 알게 된 마포구 위안부센터 평화의 우리 집 관리소장이 의문의 자살을 했다. 문재인 정부 검찰은 그해 9월 윤미향을 업무상 횡령,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문재인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편집부주: 일본으로 치면 대법원장]의 밑에 있는 지방법원은 2년 반에 걸친 모타모타 재판 끝에 2023년 2월 1700만원의 횡령만을 사실로 인정해 1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윤미향은 이 판결로 면죄부를 받은 듯 의기양양했지만, 9월 2심 판결에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줄임)
위안부 운동가들이 주장하고 그동안 대다수 한국인이 믿어온 위안부의 이야기가 과연 진짜인가 하는 회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인 소녀는 정말 일본 관헌에 강제 연행되었는가, 그녀들은 정말 위안소에서 보수도 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집단 강간당하고, 일본 군인과 업자에게 폭행 고문을 당했는가, 그리고 정말로 마침내는 일본군이 패주하는 전쟁터에 버려져 학살당했는가, 라고.
◇ 사실과 어긋나는 증언
사실 위안부운동과 관련된 한일 위안부문제 연구자들이 해온 연구 자체가 그 운동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 정대협 결성, 1991년 8월 전 위안부 김학순의 첫 증언, 1992년 1월 수요집회 시작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위안부 관련 자료가 많이 발굴되고 이를 분석한 연구가 다수 나왔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결론적으로 한결같이 위안부는 강제 연행된 성노예였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들이 자료 분석을 통해 실제로 보여준 사실은 그 주장과 달랐다.
강제연행, 강제동원의 객관적 증거는 없었다. 일본 군인이나 관헌에 강제 연행된 사실이 객관적 자료에 의해 밝혀진 위안부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성노예였음은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고, "우리가 왜 성노예냐"며 반발하는 전직 위안부도 있었다. 위안부 운동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가 설마 거짓말을 할 리 있겠느냐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라며 전직 위안부들의 증언을 편드는 것뿐이다.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 학대, 폭행을 말한 전 위안부의 증언.그러나, 그 증언들을 재차 검증하자면--? 뒤를 잇다
주익종/논픽션출판
https://news.yahoo.co.jp/articles/1c11a5e649d2a2ddecd4e6f346a2c108be2ddeea?page=1
韓国も日本も真実に基づかない運動に騙されてきた――韓国の歴史学者が実証研究で明らかにした「慰安婦問題」の真実
6/19(水) 6:12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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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春オンライ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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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慰安婦問題」は、長年、日韓の間で大きな問題とされてきた。この問題をめぐって、しばしば激しい反日運動が起きたことも記憶に新しい。しかし、韓国の歴史学者、知識人の間で、植民地時代の朝鮮について、実証的な研究を行い、それまでの反日的な歴史観は間違いだったことを論証する人々が現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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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が一冊にまとまったのが李栄薫編『反日種族主義』である。そのメンバーの一人である著者の朱益鍾氏は、反日運動の核のひとつであった慰安婦問題を取り上げ、膨大な資料に基づき、「慰安婦問題」の事実を明らかにした。その最終結論ともいえる『 反日種族主義「慰安婦問題」最終結論 』(文藝春秋)より、プロローグを一部抜粋して紹介する。(全2回の1回目/ 2回目 に続く)
「反日集会」の参加者が激減
二〇一九年の光復節【編集部注:8月15日。1945年のその日、日本の統治から脱した、として韓国では祝日に定められている】前日である八月一四日水曜日、ソウル市の温度計は摂氏三五度まで上がっていた。その日の正午、ソウル市鍾路(チョンノ)区にある日本大使館の前で開かれた第一四〇〇回水曜集会【編集部注:慰安婦問題に対する日本政府の公式謝罪及び金銭的・法的賠償を要求して開かれている集会。1992年1月8日から毎週水曜、日本大使館前で行われている】の現場はさらに暑かった。
二万人を超える参加者たち(集会主催側の推計)が四車線の道路を埋め尽くし、「日本政府は、日本軍慰安婦が国家の政策として行われた戦争犯罪であることを認めろ」「日本政府は被害者たちに謝罪しろ」と熱っぽくスローガンを叫んだ。その一カ月余り前から、いわゆる徴用賠償判決をめぐる日韓の衝突が起きていた。大統領民情首席秘書官職から退いたばかりの曺国(チョグク)法務部長官候補は、日本に対抗し竹槍を持てと煽動し、「行きません、買いません」という日本への旅行の忌避や日本商品の不買運動が広がり、商店の棚から日本のビールが姿を消すなどの、まさに反日の暴風が韓国中に吹き荒れていた。
それから三年七カ月経った二〇二三年三月一五日の水曜集会には、二〇人余りの参加者が本来の集会場所から離れた所に集まった。一方、彼らを批判する反日銅像撤廃及び慰安婦法廃止を目指す運動家たちの集会には、それより遥かに多い九〇人余りが集まった。反水曜集会が水曜集会を圧倒したのである。その間、いったい何が起きていたのか。
実証研究がベストセラーに
二〇一九年夏、韓国の幾人かの知識人たちが『反日種族主義』という本を出し反日の暴風に立ち向かった。編著者の李栄薫(イヨンフン)教授は生涯をかけた経済史研究を通し、朝鮮後期の資本主義萌芽論や日本による植民地収奪論などの韓国史学界の虚構の歴史認識を打ち壊した。さらに朝鮮王朝がなぜ衰亡したのか、植民地化とともにどのように近代文明が導入されたのか、独立後の大韓民国の驚くべき発展がなぜ成し遂げられたのか等を徹底して事実に基づき究明した。彼は後に続く学者たちとともに、当代の韓国人たちの間に広がっていた反日種族主義を打破しようとした。
筆者も執筆に加わったその本は、韓国人が植民地時代に対して持っている歴史認識というものは作り出された話、すなわち虚構(フィクション)であることを痛烈な筆致で暴露した。今日多くの韓国人たちは、帝国主義下にあった日本が、旧韓末【編集部注:大韓帝国末期】の混乱期に朝鮮の領土だった竹島(韓国名は独島(トクト))を奪い取り、土地調査事業の過程で朝鮮人を虐殺し、土地を奪い、米を収奪し、朝鮮人数百万人を労働力として強制動員し、かつてアフリカで行われた奴隷狩りさながらに朝鮮の少女たちを銃剣で脅して連行し、日本軍の性奴隷にしたと信じている。この本は、このような韓国人の近現代史認識は根拠のない作り話であり、この嘘の話を鵜呑みにしている韓国人たちが日韓関係、更には米韓関係を破綻させているのが現在の大韓民国の危機の根源であると喝破した。
この本に対し、反日種族主義に染まった学界と言論界に従事する者たちが悪意に満ちたとげとげしい非難を浴びせかけてきたが、一方で本に共感する人々も多かった。この本は学術教養書としては異例の一一万部以上の超ベストセラーとなった。
慰安婦運動内部で次々不正が発覚
二〇二〇年五月には、慰安婦運動を牛耳(ぎゅうじ)ってきた正義記憶連帯(以下「正義連」とする)の前理事長・尹美香(ユンミヒャン)による後援金横領疑惑が暴露された。驚くべきことに暴露したのは、尹美香と手を結び慰安婦運動の顔ともなっていた元慰安婦の李容洙(イヨンス)だった。彼女は、尹美香が元慰安婦たちを利用して集めた国民からの寄付金を私的に流用し、更には私欲にかられて国会議員にまでなったと批判した。このことはすぐにソウル市と政府から支援金を貰っている慰安婦運動組織・正義連と、その前身である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以下「挺対協」とする)の会計不正及び寄付金橫領疑惑へと広がった。
警察による捜査が進んでいた六月、この横領疑惑の内幕を知る麻浦(マポ)区にある慰安婦センター「平和のわが家」の管理所長が謎の自殺を遂げた。文在寅(ムンジェイン)政府の検察はその年の九月、尹美香を業務上横領、詐欺などの疑いで起訴した。しかし、文在寅が任命した金命洙(キムミョンス)大法院長【編集部注:日本でいえば最高裁判所長官】のもとにある地裁は二年半にもわたるモタモタ裁判の末、二〇二三年二月、一七〇〇万ウォンの横領のみを事実として認め、一五〇〇万ウォンの罰金刑を宣告した。尹美香はこの判決で免罪符を得たかのように意気揚々としていたが、九月の二審判決では懲役一年六カ月、執行猶予三年を言い渡された。(略)
慰安婦運動家らが主張し、その間、大多数の韓国人が信じてきた慰安婦の物語は、果たして本当なのかという懐疑が広がり始めた。朝鮮人少女は本当に日本の官憲に強制連行されたのか、彼女たちは本当に慰安所で報酬も貰えず日本軍に集団強姦され、日本の軍人と業者に暴行拷問されたのか、そして本当についには日本軍が敗走する戦場に捨てられ虐殺されたのか、と。
事実と食い違う証言
実のところ、慰安婦運動に関わる韓日の慰安婦問題研究者たちの行ってきた研究自体が、その運動の真実性に疑問を抱かせるものだったのである。一九九〇年一一月の挺対協の結成、一九九一年八月の元慰安婦・金学順(キムハクスン)の最初の証言、一九九二年一月の水曜集会の開始から今に至る三〇年余りの間、慰安婦関係の資料が数多く発掘され、それらを分析した研究が多数出された。そして、その大多数の研究者は、結論として一様に「慰安婦は強制連行された性奴隷だった」と主張してきたが、彼らが資料の分析を通して実際に示した事実はその主張とは食い違っていた。
強制連行、強制動員の客観的証拠はなかった。日本の軍人や官憲に強制連行されたことが客観的資料により明らかにされた慰安婦は一人もいなかった。性奴隷であったことは事実として立証されておらず、「私たちがなぜ性奴隷なのか」と反発する元慰安婦もいた。慰安婦運動家たちができるのは、「被害者がまさか噓をつくわけがない」「被害者の涙が証拠だ」と元慰安婦たちの証言の肩をもつことだけなのである。
日本軍による強制連行、虐待、暴行を語った元慰安婦の証言。しかし、それらの証言をあらためて検証すると――? へ続く
朱 益鍾/ノンフィクション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