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자로가 말하기를, “환공(桓公)이 공자규(公子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그를 위해 따라 죽었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인(仁)하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按春秋傳 齊襄公無道 鮑叔牙奉公子小白奔莒 及無知弑襄公 管夷吾召忽奉公子糾奔魯 魯人納之 未克 而小白入 是爲桓公 使魯殺子糾而請管召 召忽死之 管仲請囚 鮑叔牙言於桓公以爲相 춘추전에 따르면, 제양공이 무도하여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받들고 거나라로 달아났다. 공손무지가 양공을 시해함에 이르자, 관이오, 소홀이 공자 규를 받들고 노나라로 달아났다.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제나라로 들여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소백이 들어가니 이 사람이 바로 제환공이 되었다. 노나라로 하여금 공자 규를 죽이도록 하고, 관중과 소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소홀은 그를 위해 죽었고, 관중은 죄인이 되기를 청하였는데, 포숙아가 제환공에게 말하여 재상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左傳莊公八年 齊侯使連稱管至父戌葵丘(二人 齊大夫 戌 守也) 瓜時而往 及瓜而代 期戌 公問不至(問 命也) 請代弗許 故謀作亂 僖公之母弟曰夷仲年 生公孫無知 有寵於僖公 衣服禮秩如適(適 太子) 襄公絀之 二人因之以作亂 遂殺襄公而立無知 初襄公立 無常(政令不常) 鮑叔牙曰 君使民慢 亂將作矣 奉公子小白(襄公無子)出奔莒 亂作管夷吾召忽 奉公子糾(小白庶弟)來奔 九年春 雍廩(齊大夫)殺無知 夏公伐齊納子糾 桓公自莒先入 秋師及齊師戰于乾時 我師敗績 鮑叔帥師來言曰 子糾親也 請君討之 管召仇也 請受而甘心焉(甘心言 欲快意戮殺之) 乃殺子糾于生竇(魯地) 召忽死之 管仲請囚 鮑叔受之 及當阜(齊地)而稅之 歸而以告曰 管夷吾治於高徯(音奚 齊卿高敬仲也 言管仲治理政事之才多於敬仲) 使相可也 公從之 좌전 장공 팔년에 따르면, 제나라 제후가 연칭과 관지보로 하여금 규구에서 지키도록 하였다(두 사람은 제나라 대부이고, 戌은 지킨다는 것이다). 오이 나는 철에 가서, 다시 오이 나는 철이 되어 교대해야 해서 1년 동안 지켰지만, 公問(임금의 명령, 問은 명령이다)이 오지 않아서, 교대를 요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희공의 어머니의 남동생이 이중년이라 불렸는데, 공손무지를 낳았고, 희공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 의복과 예절과 차례는 적자(適은 태자다)처럼 하였다. 양공이 이들을 밀쳐내자, 두 사람은 이로 인해 난을 일으키고, 마침내 양공을 죽이고서 공손무지를 임금으로 세웠다. 처음 양공이 즉위했을 적에, 일정함이 없었다(정령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포숙아가 말하길, “임금께서 백성을 부림에 있어 오만하면, 난리가 장차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공자 소백(양공은 자식이 없었다)을 모시고 도망쳐 나와서 莒나라로 갔다. 난리가 나자 관이오와 소홀은 공자 규(소백의 庶弟다)를 모시고 노나라로 도망쳐 들어왔다. 장공 9년 봄에 옹름(제나라 대부)이 공손무지를 죽였다. 여름에 장공은 제나라를 정벌하고 공자 규를 제나라에 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환공이 거나라로부터 먼저 들어와 있었다. 가을에 우리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에 미쳐서 건시에서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대패하였다. 포숙아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하는 말이, “공자 규는 친척이니 청컨대 노나라 임금께서 토벌하여 주시고, 관중과 소홀은 원수이니, 청컨대 받아서 마음을 달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甘心이란 통쾌하게 죽여 없애고자 함을 말한다). 마침내 공자 규를 생두(노나라 땅이다)에서 죽였고, 소홀은 그를 위해 따라 죽었으며, 관중은 죄수가 되기를 청하였다. 포숙아는 관중을 받아서, 當阜(제나라 땅이다)에 이르자 그를 풀어주었다. 돌아와서 환공에게 고하여 말하길, “관이오는 고혜(제나라 卿 고경중인데, 관중이 정사를 다스리는 재주가 고경중보다 많다고 말한 것이다)보다 더 잘 다스리니, 재상을 시켜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제환공은 이를 따랐다.
子路疑管仲忘君事讐 忍心害理 不得爲仁也 자로는 관중이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겨 잔인한 마음이 이치를 해쳤으므로 관중은 어진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問集註謂忍心害理不得爲仁 忍心之忍是殘忍之忍否 朱子曰 傷其惻隱之心 便是忍心 如所謂無求生以害仁 害仁便是忍心也 누군가 묻기를, “집주에서 잔인한 마음으로 이치를 해쳐서 仁이 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忍心의 忍이 바로 殘忍하다는 것의 忍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그 측은지심을 손상시키는 것이 바로 忍心이니, 예컨대 이른바 삶을 구함으로써 仁을 해침이 없다는 것에서 仁을 해친다는 것이 바로 忍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忘君謂不顧糾死 事仇謂相桓 忍心謂心所當爲而忍之使不爲 害理謂理所當然而咈之使不然 忘君事仇 卽忍心害理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임금을 잊었다는 것은 공자 규가 죽은 것을 돌아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원수를 섬겼다는 것은 제환공을 재상으로서 보좌한 것을 말한 것이다. 차마 하는 마음이란 마음으로 당연히 해야 할 바를 참아내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치를 해쳤다는 것은 이치상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바를 거슬러서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임금을 잊고 원소를 섬기는 것이 곧 차마 하는 마음과 이치를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桓公兄而子糾弟 襄公死則桓公當立 此以春秋知之 春秋書桓公 則曰齊小白 言當有齊國也 於子糾 則止曰糾 不言齊 以不當有齊也 不言子 非君之嗣子也 公穀幷註 四家皆書納糾 左傳獨言子糾 誤也 然書齊人取子糾殺之者 齊大夫商與魯盟于蔇 旣納糾以爲君 又殺之 故書子是罪魯也 정자가 말하길, “제환공은 형이고 공자 규는 동생이니, 양공이 죽었다면 제환공이 마땅히 즉위해야 한다. 이것은 춘추로써 알 수 있는데, 춘추는 제환공을 쓰면서 제나라 소백이라고 말하였으니, 마땅히 제나라를 소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공자 규에 대해서는 그저 糾라고 말한 것에 그치고 제나라를 말하지 않았으니, 제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부당한 것임을 말한 것이고, 子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임금의 후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양전과 곡량전의 병주와 네 명의 대가들 모두 규를 제나라에 들여보냈다라고 썼지만, 좌전만 유독 ‘子糾’라고 말했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 사람들이 子糾를 취하여 죽였다라고 쓴 것은 제나라 대부 常이 노나라와 蔇 땅에서 회맹을 하고서 이미 糾를 받아들여 임금으로 삼고서 다시 그를 죽였기 때문에, 子라고 쓴 것은 노나라의 죄를 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春秋於糾上一無子字 一有子字 何也 雙峯饒氏曰 始以納之爲非 故去子以明其不當納 終以殺之爲非 故又稱子以明其不當殺 누군가 묻기를, “춘추에서 糾 위에 하나는 子자가 없고, 하나는 子자가 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쌍봉요씨가 말하길, “처음에 들여보낸 것이 잘못이기 때문에, 子자를 제거함으로써 들여보낸 것이 부당함을 밝힌 것이고, 마지막에 그를 죽인 것이 잘못이기 때문에 다시 子를 호칭함으로써 그를 죽인 것이 부당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들을 규합하되 무력(武力)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九 春秋傳作糾 督也 古字通用 不以兵車 言不假威力也 如其仁 言誰如其仁者 又再言以深許之 蓋管仲雖未得爲仁人 而其利澤及人 則有仁之功矣 구는 춘추전에 糾자로 기재되어 있다. 독려한다는 말인데, 옛 글자는 서로 통용되었다. 兵車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력을 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如其仁’이란 ‘누가 그 어진 것과 같이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인데, 다시 재차 말함으로써 그것을 깊이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대체로 관중이 비록 어진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이로움과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기 때문에, 仁의 공이 있다는 말이다.
左傳僖公二十六年 齊孝公伐我北鄙 公使展喜犒師曰 昔周公太公股肱周室 夾輔成王 成王勞之而賜之盟曰 世世子孫無相害也 載(載書)在盟府 大師職之(職 主也 太公爲大師兼主司盟之官) 桓公是以糾合諸侯而謀其不恊 彌縫其闕 而匡救其災 昭舊職也 좌전 희공 26년에 따르면, 제나라 효공이 우리 북비 땅을 정벌하였다. 희공이 전희로 하여금 제나라 군대를 접대하여 위로하며 말하게 하길, “옛날에 주공과 태공이 주왕실의 팔다리가 되어 성왕을 보좌하였으니, 성왕께서 수고한다 하시고 맹약을 하사하시며 말씀하시길,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침이 없이 하고, 맹부에 써 놓고, 태사가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職은 주관한다는 말이다. 태공이 태사가 겸 맹약을 주관하는 관이 되었다). 환공께서는 이런 까닭으로 제후들을 규합하여, 화합하지 않는 제후들을 화합하도록 도모하고, 그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꿰매주며, 그 재난을 구해주는 등 옛날의 직무를 다시 밝혔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管仲不死 觀其九合諸侯 不以兵車 乃知其仁也 若無此 則貪生惜死 雖匹夫匹婦之諒 亦無也 정자가 말하길, “관중이 공자 규를 위해 죽지 않았지만, 그가 제후들을 규합함에 병거로 하지 않았던 것을 살펴보면, 마침내 그의 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삶을 탐하여 죽는 것을 아까워한 것이라 하여, 비록 匹夫匹婦의 신의조차 또한 없다고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九之爲糾 展喜之詞而糾合宗族之類 亦其證也 說者不考其然 乃直以爲九會諸侯 至數桓公之會不止於九 則又因不以兵車之文 而爲之說曰 衣裳之會九 餘則 兵車之會也 公穀以來 皆爲是說 可謂鑿矣 주자가 말하길, “九가 糾인 것은 전희의 말이나 종족을 규합한다는 부류가 역시 그 증거다. 예전에 말한 자들는 그것이 그러한 까닭을 상고하지 않고서 도리어 곧장 제후들을 아홉 번 회합하였다고 여겼는데, 환공의 회합을 세어보아서 9번에 그치지 않음에 이르자, 이제 다시 병거로 하지 않았다는 글을 빌미로 하여 그것에 대하여 의상을 입고 회합한 것이 9번이고, 그 나머지는 병거로 한 회합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공양전과 곡량전 이래로 모두 이렇게 말했으니, 이는 문구에 너무 穿鑿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召忽之失在輔子糾以爭國 而不在於死 管仲之得在九合之功 而不在於不死 仲之可以不死 正以小白兄而子糾弟耳 夫子特以忽之功無足稱 而其死不爲過 仲之不死亦未嘗害義而其功有足褒爾 固非予仲之生而貶忽之死也 소홀의 잘못은 子糾를 보좌하여 나라를 다투는 것에 있었지 따라 죽은 것에 있지 않았다. 관중이 잘한 것은 제후를 규합한 공에 있는 것이지 따라 죽지 않음에 있지 않았다. 관중이 따라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백이 형이고 자규가 동생이었기 때문일 뿐이다. 공자께서는 단지 소홀의 공이 족히 말할 것이 없지만 그가 따라 죽은 것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여겼고, 관중이 따라 죽지 않은 것도 역시 일찍이 의로움을 해친 적이 없고, 그 공로는 족히 호평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일 뿐이다. 이는 본래 관중이 살아남은 것을 인정해주고 소홀이 따라 죽은 것을 폄훼하신 것이 아니다.
仁之一字 以德而言 則必心無私而事當理 乃能當之 若言其功 則推利澤及人 有恩有惠 便可稱之 初不計德之如何也 仁이라는 한 글자는 덕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고 일은 이치에 합당해야만 마침내 그것에 해당할 수 있다. 만약 그 공효를 말하자면, 이로움을 미루어 그 은택이 남에게 미치게 하여 은혜가 있다면 곧 그것에 걸맞을 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덕이 어떠한지 따지지는 않는다.
仲之仁是粗處 至精處則顔子三月之後或違之 관중의 仁은 거친 부분이니, 지극히 정밀한 부분이라면, 안자의 ‘삼개월 후에 간혹 그것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如漢高祖唐太宗未可謂之仁人 然戰國至暴秦 其禍極矣 高祖出而平定天下 隋末殘虐尤甚 太宗出而掃除以致貞觀之治 此二君 豈非仁者之功耶 仲之功亦猶是也 예컨대 한고조와 당태종은 아직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국시대에서 포악한 진나라에 이르자 그 화는 극에 달했다. 한고조가 나오자 천하가 평정되었고, 수나라 말기에 잔학함을 더욱 극심하였지만, 당태종이 나오자 이를 쓸어 없애고 정관의 치를 불러왔다. 이 두 임금의 경우에, 어찌 仁者의 공이 아니겠는가? 관중의 功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慶源輔氏曰 仁者安仁 蓋天理渾然 無一息之不存 無一物之不體 管仲之於德 其違闕者 多矣 顧何足以語此 然使桓公糾合諸侯攘夷狄存周室 不假威力 無所殺傷 則利澤及人 是亦仁者之功效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어진 사람(仁者)은 仁을 편안히 여기니, 대체로 天理가 혼연하여 한 순간도 보존되지 않음이 없고, 사물 하나라도 체득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관중은 덕에 있어서 어긋나고 모자라는 것이 많았으니, 다만(顧) 어찌 이것이라 말하기에 충분하겠는가? 그러나 제환공으로 하여금 제후들을 규합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주왕실을 보존함에 있어 위력을 빌리지 않고 살상하는 바가 없게 하였으니, 이로움과 은택이 사람들에게 미친 것이다. 이것 또한 仁者의 공효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蔡氏曰 子路擧忽之死仲之不死 是以忽爲殺身成仁 仲爲未仁 夫子答以仲有仁之功如此 忽豈能如仲之仁乎 是以忽仲比而言之 非泛許仲以仁也 下章匹夫婦之諒 亦指忽而言 채씨가 말하길, “자로는 소홀의 따라 죽음과 관중의 죽지 않음을 거론하였는데, 이는 소홀이 殺身成仁하였다고 여기고, 관중은 아직 어질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공자께서는 관중에게 ‘仁의 공효가 있음이 이와 같은데, 소홀이 어찌 능히 관중의 仁처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로써 답하신 것이다. 이는 소홀과 관중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지, 관중이 어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다. 아랫 장의 匹夫匹婦之諒도 역시 소홀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仁有以心術之精微言者 非大賢以上之安仁 不足以當之 有以事功之顯著言者 如管仲有仁者之功 亦足以爲仁矣 子路好勇 死非所難而處死爲難 故夫子不非仲無死節之義 反取仲有及人之仁 亦所以曉子路而箴之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仁에는 심술의 정미함으로써 말하는 것이 있으니, 大賢 이상으로서 仁을 편안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 해당하기에 충분하지가 않다. 일의 공효가 현저함으로써 말하는 것도 있으니, 예컨대 관중에게 仁者의 공효가 있는 것도 또한 충분히 仁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자로는 용맹을 좋아하였기에,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관중에게 죽는 절개의 의로움이 없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도리어 관중에게 남에게 미치는 仁이 있음을 취하셨으니, 이 역시 자로를 깨우쳐서 그것을 경계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