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에 눈까지 내리는 겨울 같은 봄인데도 꽃은 제철을 놓칠세라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내고 갔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칙칙하고 무거운 겨울옷을 걸치고 있다. 이런 겨울옷은 봄옷과 함께 옷장에도 서랍장에도 버티고 있다. 새봄이라지만 내 머릿속은 묵은 실타래가 들어 있는 듯 뒤숭숭하기만 하다.
4월이다. 눈발이 날린다 해도 봄이다. 겨울옷을 걸치고 있는 한 내게 봄은 오지 않을 터이다. 옷장과 서랍장에 있는 옷을 갈무리하려고 꺼내놓는다. 올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것들이 꽤 있다. 유행이 지나서 아니면 비슷한 옷이 있어도 또 아니면 몸이 불어 불편해서 입지 않은 것들이다. 이참에 봄옷 가운데에서도 이처럼 입지 않은 것을 버리기로 한다.
봄옷을 챙겨 옷장에도 걸고 서랍장에도 정리해 놓는다. 옷장 안에서 가볍고 화사한 옷이 솔솔바람을 일으킨다. 어디 옷장뿐이랴. 내게서도 무엇이 빠져나간 듯 발뒤꿈치가 저절로 들린다.
옷장 속이 훤하다. 서랍장 속도 공관이 넉넉해져 훗훗한 느낌마저 든다. 두어 개는 아예 빈 채로 남아있다. 빈틈을 찾고 그도 안 되면 억지로 만들어 옷들을 욱여넣던 불편한 심사에서 한결 편해진다. 박작거리던 머릿속도 수그러들면서 평온해진다.
창가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본다. 백수 노인을 닮은 구름 한 점이 느릿느릿 한가롭게 떠 있다. 내가 잠시 딴청을 피웠을까. 홀연히 사라진 구름, 하늘은 더없이 맑고 고요하다. 맥없이 조여오던 옷이 느슨해진다. 서랍 속 틈만큼 내게 생긴 틈, 이 틈으로 오늘 하늘을 본다. 아주 오랜만이다.
서랍을 열 때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옷들이 해일처럼 나를 덮친다. 그것은 곧 속박이고 짐이다. 버리면 될 것을 못 버리고 사는 것도 우습거니와 속없이 드러나는 소유욕 또한 어처구니없다. 버린다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참으로 힘든 것이다.
마음을 비우라고 하던가. 흔히 주고받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눈을 뜨고도 보이지 않아 헤매는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하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눈 뜬 장님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느라 눈을 부릅뜨다 깨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비울 것인가. 혹 서랍 비우듯 하면 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서랍장 하나 비우고 며칠씩 그 비움이 주는 낙樂을 만끽한다. 몸은 가뿐하고 마음은 자유롭다. 하니 마음을 온전히 비운다면 그것이 곧 천국에 사는 것일 게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은 제 몸으로 느낀 이 좋은 느낌을 어느 순간부터 쓰레기 버리듯 버리고 하는 것이다. 금방 잊고 사는 고약한 버릇과 어리석음 때문이란 것을 알지만 어리석게도 또 그렇게 산다.
그 좋은 느낌이 사라지고 있다. 저만치서 틈을 엿보던 약삭빠른 놈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빈 서랍을 그냥 두기엔 아까우니 채워야 한단다. 하긴 꼬드기지 않아도 나는 또 그동안 하던 대로 서랍을 채워갈 것이다. 그래 채우자, 채워야 또 비울 수 있지. 서랍이라도 비우다 보면 비움이 주는 즐거움에 중독되어 물욕이나마 덜어질지 모를 일 아닌가. 서랍을 여는데 먹물 그림 같은 장면 하나 떠오른다.
어느 산사 길목에서 지나가는 스님의 바랑을 보고 동행이 말한다. "저 바랑 좀 봐요. 홀가분해 보이지 않아요?"
바랑은 3부쯤만 채우면 족하고, 조금만 넘쳐도 욕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 정도면 수행승일 거라는 귀띔을 한다.
스님의 등에서 빛바랜 바랑이 흔드렁거린다. 서붓서붓 걷는 모습이 참으로 청정해 보인다. 일주문을 들어선 스님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때 흔드렁거리던 바랑이 내 안에서 움막을 짓고 있었을까. 빈 서랍 안에서 빛바랜 바랑이 나를 올려다본다.
(이경수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