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지지 않았던 수술실, 살려달라는 기도
오월 현장, 광주기독병원
80년 5월21일 그날 하루 126명 입원.
그날 총상 환자 23명 수술.
의료진은 한순간도 메스를 놓을 수 없었다.
수술 환자 전원을 살려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병원장이었던 고 허진득 원장의 역할이 컸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허 원장은 그날 아침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긴급진료반을 편성했다.
전시의료체제'로 운영하는 대책을 세웠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한 것은 5월21일 오후 1시,
계엄군이 금남로 건물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한 것은 오후 3시48분.
그날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종합병원을 비롯해 대다수 병원이 휴진이었다.
정상근무가 이뤄졌던 광주기독교병원으로 총상환자들이 몰렸다.
응급환자들로 병원은 아수라장이었지만 조직된 의료팀'은 빠르게 대처했다.
전 직원 비상소집, 상황실 운영, 전 의료진 응급실 배치, 중장기전 대비, 혈액은행 운영,
병원 설립정신을 살린 무료치료 결정.
광주기독병원 의료진은 광주민중항쟁 열흘 동안
149명의 부상자를 치료하고 81명의 총상환자를 수술했다.
긴급 전시의료체제' 운영, 81명 총상환자 수술
의사 조상기(2020년 정년퇴임)씨는 5월18일(혹은 19일) 5·18관련 첫 환자를 대면했다.
만 1년도 안된 내과 레지던트였던 그는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쳐서 다쳤다”는 말을 헛소리'로 판단했다.
동기들 사이에서 나온 “술 취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두들겨 패고 있다”는 이야기도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개머리판, 곤봉에 맞아 피범벅이 된시민들이 끊임없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5월21일,
“붉은 피가 새하얀 병원 바닥을 뒤덮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는 병원을 울렸다.
흘러나온 피 때문에 사람들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셀 수 없는 총상환자 중에서도 복부관통상 환자들이 우선적으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의식이 있는 환자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빨리 치료해주라'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병원은 응급환자로 가득 찼다.
복도, 대합실, 휴게실, 분만실까지 매트리스를 깔고 환자를 수용했다.
의료팀은 수술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개 수술실은 3일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잠을 자지 못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피로가 밀려왔지만 수술과 치료를 중단할 수 없었다.
광주기독병원 직원들은 집에 갈 수 없었다.
간호사들은 4인1조 3교대였으나 모두 쉬지 않고 1주일 동안계속 근무를 했다.
수술과 관련 없는 내과·치과 등 의사들도, 관리직원들도
환자를 옮기고 약품을 나르는등 쉬지 않고 일을 도왔다.
기독병원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직원들도 찾아와
각 분야에 배속돼 구호활동을벌였다.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련하다 군에 갔던 임선준씨도
휴가를 나왔다가 달려와 수술팀에 합류해 도왔다.
의료진을 크게 당황시킨 것은
환자 몸에 박힌 M16 총탄이었다.
당시 병원 외과과장이었던 김성봉(현 김성봉외과의원장)씨는
광주광역시의사회가 펴낸 〈5·18 의료활동> 자료에서 한 총상환자에 대해 “
좌측 쇄골 직상부에 조그만 총상 입구가 있었으며
엑스선 촬영결과 윗가슴 뒤편에 산탄 총알 같은 것들이 퍼져서 박혀 있었다”며
“이렇게 넓은 부분을 닥치는 대로 휘젓고, 찢고, 자른 후
박힌 이 총알 파편들은 척추나 기타 주요 신경이 있는 부위를
수술로도 회복시킬 수 없는 손상을 줘서 목숨을 건지더라도
불구의 몸을 만들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그는 병원에 실려 온 총상환자들의 상태를 시간대별로 살피면
계엄군의 발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추론할 수 있었다 한다.
“처음 도착한 환자들은 총상이 허벅지 아래 하체부분이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로 올라와복부와 흉부 등 상체에 총상을 입었다.
이것은 군인들이 정조준해서 사격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체를 겨냥하여짐승 사냥하듯이 마구 쏘아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환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혈액이 문제였다.
병원에는 400여 명 정도를 치료할 수 있는 혈액이 보관돼 있었는데
대부분 총상환자들이라 혈액이 바닥났다.
병원 간부회의에서 결정한 것처럼 직원들이 헌혈에 나섰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시민군들이 헌혈운동을 벌이며 가두방송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헌혈을 하려는 시민들이 병원 정문 길거리까지 늘어섰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를 했던 한 간호사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많았어요.
그리고 황금동 콜박스에서 일하던 술집 아가씨들까지
전부 몰려와서 헌혈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당시 간호감독이었던 안성례씨에 따르면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는 헌혈 대상이 안 되자
'내 몸이 늙었지 피가 늙었냐며 통사정을 했다 한다.
저녁시간이 되자 병원 보관 용량을 초과,
시민들에게 귀가를 종용했지만 행렬은 줄어들지 않았다.
병원 중앙공급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박춘희씨는 당시의 의료품과 식품 상황을 설명한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쳐났다.
“병원에서 요청하지도 않았고, 요청할 시간도 없었는데
제약회사, 개인의료상사에서항생제 진통제 지혈제 링거 등 의약품을 병원으로 들고 찾아왔다.
음식은 로비에 쌓일 정도였다.
아줌마들이 주먹밥을 해왔고 노지딸기가 나올 때라 그런 것도 쌓였다.”
한 쌀 판매상은 쌀을 보내줄 테니 차를 보내달라고 병원에 요청했다.
시민군이 차량으로 쌀을 싣고 왔다.
병원 앞 한 빵가게는 가게의 빵을 다 내어줬다.
관리과 직원이었던 안철봉씨는 병원에 산소가 부족하자,
계엄군의 사격이 한창일 때 월산동 산소공장까지 차를 몰고 가 산소통을 가져왔다고 한다.
또 다른 직원은 “식량확보를 위해 도매집에서 라면을 무더기로 사왔고
병원 직원들은 쌀을 비축해 두기위해 그 라면을 먹었다”고 기억한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쌀을 사러) 양림동 쌀집에 갔었는데
주인이 쌀 한 가마니를 사려는 손님한테 호통을 치며
모든 사람들에게 딱 한 말씩만 판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안성례씨는 “죽은 아들을 붙들고 주사 한 대만 놔줘,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살아난다니까 절규하는 할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며
“의료진은 7일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환자 진료에 나섰다.
잠시 동안의 휴식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총상을 당해 광주기독병원에 입원했었던 노득기씨는
“치료비에 대한 공식 얘기가 없을 때 자신들의 봉급을 털어 치료비를 대주기로 결정했다.
그런가 하면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나와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자.
우리는 환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며 버티는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광주오월민중항쟁자료전집)0 중)라고 회고한다.
시체 옆에 신발, 옷가지, 떨어져나간 이빨…
임경찬씨는 1979년에 병원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방사선과에서 근무한 그는 '전시의료체제에서 포타블이라는 휴대용 촬영기로
환자들 상태를 찍어 의료팀에 넘기는 일을 했다.
환자들 상태는 일분일초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병원 영안실에서 시체를 지키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병원에는 시체를 보관하는 냉동시설이 없었다.
부패가 심해 파리약을 분무기로 뿌리며 벌레라도 못 달라붙게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분들은죽어서도 편하게 있지 못한 거다.”
아들, 딸, 남편의 시체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병원에 몰렸다.
죽은 딸을 찾아 나선 한 아버지가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춘태여상 다니는 여학생이 죽었다.
병원에 피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헌혈을 하러 왔는데
그 여학생이 헌혈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공수부대한테 총을 맞고 시신으로 병원에 돌아왔다.
간호사들 이 그 학생을 기억하고 모두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는 주검이 된 여학생을 영안실로 옮겼다.
학생 아버지가 찾아온 것은 하루나 이틀 지나서였다.
“그 여학생 아버지는 바로 딸을 알아보고 쓰러져 버렸다.
한참 있다가 딸을 관에 넣는데 발도 붓고 온몸이 부어서 그 작은 몸이 관에 안 들어갔다.
아버지가 가거라, 가거라 울부짖으며 손으로 밀어 넣는데, 시신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되니까, 발로 죽은 딸을 누르면서 가거라, 가거라, 잘 가거라 하며 울더라.
그 처참한 광경이 어떻게 잊히겠는가.”
그 여학생은 17살 박금희.
광주기독병원에 자주 헌혈을 하러 왔기에 간호사 대부분이 그녀를 알았다 한다.
당시 적십자 대원으로 활동한 이광영씨 증언에 따르면
박금희 학생은 양림동에서 시민군 차량을 붙잡고 헌혈을 하려고 광주기독병원으로 왔다.
그리고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임경찬씨는 영안실에서 가족이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얼굴이 아니라 소지품인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총상으로 죽은 시체들은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
시체 옆에 신발, 옷가지, 떨어져나간 이빨, 차고 있던 시계 등을 놔뒀다.
한 꼬마의 시체 옆에는 구두 한짝만 두기도 했다. 놔둘게 없었다.”
희생자 관 위에 올린 장미꽃, 울며 부른 애국가
임경찬씨는 병원에 핀 장미꽃과 다함께 불렀던 애국가를 기억한다.
시민군들이 병원에 안치된 시신을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겼던 5월23일.
“병원 교회 뒤에 영안실이 있었다.
시민군들이 시신을 옮길 큰 트럭 세 대를 몰고 왔다.
시신에서 피가 흐르니까 관에 비닐을 깔고 시신을 넣고 관 뚜껑을 닫고 태극기로 덮더라.
그리고 병원 교회 울타리에 핀 장미꽃을 꺾어 관마다 꽃을 올렸다.
그리고 열을 맞춰 관을 하나씩 옮겼다.
관을 옮기며 시민군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교회를 돌아나가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일을 돕던 직원들이 애국가 부르면서 울고, 그냥 막울고….
건물 창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엉엉 울었다. 함께 울었다.”
광주기독병원 직원들은 기도반을 편성하고 매일 기도했다.
“다친 이들을 제발 살려 달라”는 생존의 기도였다.
“당장 시급한 게 저분들 좀 덜 아프게 해달라고.” (당시 간호사 박경희).
“하나님 저들을 회개하게해달라고, 어서 이 나라가 평안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당시 간호사 김복순)
-글을 쓴 김창헌님은
세상 사는 소란을 새살새살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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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5월호에서 옮겼습니다.
첫댓글 예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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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었는데
빅스비 활용방법을 최근에 알게되어
다소 수월하게 옮겼습니다.
오탈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