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바라이죄(波羅夷罪, pārājika)는 승려(비구·비구니)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로, 이 죄를 범하면 승단(僧團)에서 영구히 추방되어 다시는 출가 수행자로서 살 수 없게 됩니다. 다음 법문은 대망어(大妄語)로 불교를 잘못 이해한 거짓말이다. .
“참으로 나(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영(昭昭英靈)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즉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다’라는 말이다."
운전수는 참나(진아)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부처님의 법(진리)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깨달음(득도)을 얻었다고 속이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는 매우 심각한 허물로 간주됩니다. 이는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진실함과 지혜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바라이죄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3만여 개의 부속이 설계도에 따라 조립되어 만들어집니다. 각 부속 하나하나가 따로 있을 때 움직임, 빛, 소리 같은 성질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립되면 전체로서 제3의 성질이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분해하면 그 어떤 부속에서도 움직임, 빛, 소리라는 특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라는 특성은 조립된 상태에서만 나타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동차가 움직이면 그 작용이 자동차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다양한 요소가 조립되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조립이 해체되면 그런 작동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분석해 보면 작동하는 특성은 개별 부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의 어딘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별개로 있다가 조립되면 결합하는 것도 아니고, 해체되면 어딘가에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조립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제3의 성질일 뿐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원리를 잘 몰라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만, 분석해 보면 사실 ‘나’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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