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많은 신발이 있어도, 또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발에 꼭 맞는 자기 신발을 잘도 찾아 신는다.
신발은 손으로, 육안으로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육안은 발과 신이 만났을 때의 그 딱맞는 느낌까지 줄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할 때 모든 일에 필요한 손이지만
구두나 운동화 등 자기 신발을 찾을 때는 그리 큰 소용이 없다.
그저 신발장에 있는 신발을 옮기는 단순한 움직임 정도?
그저 자기 신발을 찾는데는 발이 최고다.
여러 켤레의 구두 중에 발이 편하고 마음에 들어 자주 신고 다니는
신발은 한두켤레 정도다.
어떤 의상에도 무난하게 맞출 수 있고,
또 오래 신고 다녀도 발에 무리를 주지 않는
그 구두를 나는 오래 신고 다녔다,
한 5-6년 됐을까, 우연히 들른 백화점 세일 매장에서 사들고 들어온
그 구두는 지금처럼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신발장에서 꺼내져 나를 움직이는 싱싱한 원동력이 돼준다,
그것은 나를 어디든 데려다 주었고,
별난 주인의 쉬임없는 나들이에도 묵묵히 제 임무를 수행해 주었다.
때로는 아스팔트를, 때로는 보도블럭을 또 때로는 오솔길을,
때로는 해변을, 때로는 진흙길을 , 더러는 산길까지
내가 가는 길을 마다않고 따라다녔고,
유난히 비오는 날 나들이를 즐기는 내 바이오리듬에 따라
빗길의 차갑고 텀텀한 느낌마저도 나와 함께 즐길 줄 알았다.
기실 나는 그 구두를 처음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두를 신기 시작하면서
내 구두의 뒷굽은 늘 평균 7센티미터 정도였다.
구두를 고르는 첫째 조건이 뒷굽 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낮은 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내 다리도 이미 6-7센티미터 높이의 구두 위에서 단련이 되어
낮은 구두를 신으면 몸이 뒤로 젖혀지는 듯했고 불편했다.
그리고 운동화나 단화를 신고 신나게 다닌 날은
어김없이 다음날 종아리에 알이 배겨 고생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들이 하나 둘, 뒷굽 높은 구두 선호도에서
점차 낮은 굽, 또는 단화, 심지어는 효도 신발까지 취향을
바꿔갈 때도 나는 여전히 뒷굽 높이를 7센티미터 정도 고수했고,
모임 때 가끔 아직도 그런 높은 굽을 신느냐는 비난 아닌 비난이 일면
내 바지 길이가 다 그렇게 맞춰져 있어 나는 구두 굽 높이를
바꿀 수 없다는 기막힌(?) 논리를 펼치곤 했다.
못말리는 내 높은굽의 구두 취향에 어느 순간 문제가 끼어들었을 때,
느꼈던 나의 서글픔을 굳이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그래서 마련한 구두가 뒷굽이 4-5센티미터 정도 되는 구두였고,
활동량이 많은 날은 그런 구두를 굳이 선택을 해서 나가곤 했다.
그런 구두 중 하나가 지금 내가 말하는 발에 꼭맞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이겨냈던, 아니 나를 지탱해 준 그 구두였다.
처음 살 땐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던 그 구두는 가격 대비
모양과 질에서 우수한 듯 보였고, 그 모양이나 색상이 정장이나
캐주얼 모두에 잘 어울릴 듯하여 장만한 것이다.
구두를 샀던 해는 별로 신지 않았고,
그 이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 삼년 묵힌 구두가 내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갑자기 늘어난 체중으로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하던 어느 해 가을부터였다.
외출을 할 땐 별 망설임없이 그 구두를 선택했고,
덩달아 구두는 조금씩 낡아가기 시작했다.
구두의 앞모양이 조금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구두 앞 부분의 가죽도
조금씩 벗겨져 빛도 바랬다.
뒷축이야 얼마나 갈았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한번씩 구두를 닦아 주었는데,
구두약을 한껏 먹은 구두는 반짝반짝 빛을 내었지만
그 몸엔 이미 내 발의 모양이 강하게 반추되어 있었다.
올해도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예의 그 구두를 꺼내 신었다.
봄을 보내면서 손질하지 않고 신발장에 넣어두었던
그 구두의 외양은 사실 볼품이 없었다.
대충 구두솔로 닦아내고 발에 꿰어 보았더니, 웬걸 그 편안한 느낌은
바로 내 발바닥을 통해 온몸을 전해졌다.
오랜만에 나를 만난 구두는 제 온몸으로 익숙한 반가움을 나에게 전한 것이다.
아직 구두 뒷축은 갈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한달 넘게 그 구두를 신고 나는 이 땅 위에 또 내 삶의 일기를
쓰고 다녔다.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모질게, 또 더러는 심심하게
나는 구두를 대했다.
바닥에 닿는 느낌이 해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있었지만
그게 별반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 와중에 때로는 굽높은 구두도 신었고, 단화도 더러는 신었지만
거의 매일 나의 외출에 군말없이 동행해 준 것은 내 낡은 검은색 구두였다.
며칠 전, 또하나 일을 정리하면서
후배를 만나 얘기를 나눈 날이었다.
가을밤 찹찹한 바람이 살갗을 간지럽히고,
나와 그녀는 커피를 사들고 야외 공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가위가 지난 보름달은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고,
그 달빛은 바람에 실려 조금 답답하던 내 가슴까지 시원하게 열어주는 듯 했다.
얘기의 주제는 참 다양해졌다, 한창 왕성하게 일하는 후배가
일에 치여 죽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나이 시절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또 부러운 마음을 솔직히 내비치기도 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녀를 만나러 밤중에 쫓아나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벤치가 조금 불편했던지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어야 했고,
꼬고 있던 오른 다리를 풀어 내려 방향을 틀어 왼 쪽 다리를 오른 쪽 다리 위에
올렸을 때 내 시선을 잡은 것은 나의 낡은 구두였다,
구두 안쪽, 엄지발가락 아랫부분, 그러니까 구두 앞 쪽의 뽀족한 부분이
완만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그 부분이 유난히 더 불거져 나온 듯 했다.
나는 발을 조금 더 치켜 올리고, 고개를 조금 더 숙여 그 부분을
자세히 보았다.
불빛은 밝지 않았고, 지는 달의 희미한 빛만이 구두를 비춰주고 있었다.
구두 옆이 터져나와 있었다.
가슴에 찬바람이 싸악 지나갔다.
언제부터 이 모습이었을까?
분명 어제, 오늘일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일주일, 열흘전인지도 모르겠다.
그 지경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나를 따라 다녔단 말인가.
그래도 나는 구두를 벗어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오래도록.....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더 깊이 숙여 구두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 곁에서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일에 대한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 말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오래오래 그렇게 구두를 보고 또 보았다.
옆이 터진 구두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오래된 가죽의 촉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발냄새가 뒤섞인 구두 냄새가 손끝을 타고 찌르르 몰려든다.
가만히, 다시 구두를 신은 발에서 손을 뗀다.
이미 구두는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말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기료장수 한테 가서 터진 구두 옆을 꿰매서
신을까, 아니면 이대로 버려야 하나,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구두를 벗어 입구에 가지런히 놓았다, 정성껏.
그리고 나는 내 구두의 모습을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다.
신발장엔 일년에 한두번 밖에 신지 않는 구두도 있고,
아예 신지 않아 신발로서의 기능을 상실 한 것도 있다,
아직 한번도, 구두 때문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낡은 구두, 옆구리가 터진 구두, 나의 구두,
그 낡은 구두는 그날 밤 아프게 홀로 잠이 들었다.
나도 잠이 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줄기 빛처럼 내 머리를 스치지나는
생각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 낡은 구두는 이제 벗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벗는거야.
그때까지 내 고민은 구두를 버릴 건가 말 건가였는데,
그건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낡은 구두는 벗는거야.
마치 새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내일이나 모레, 기분이 동하면 낡은 구두를 들고
신기료 장수를 찾아가 터진 옆구리를 꿰매 놓자.
누가 알겠는가? 마치 상장처럼 남겨진 꿰맨 실자욱을
따라 내 삶의 이야기들이 소곤거리며 터져나올지.
첫댓글 새 구두 사다가 신발장에 보관해두고 낡은 구두 한켤레로 한 계절을 나는 모한 사람들의 취향, 옷이며 책ㅇ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에 정주는 생리를 안다면 억울할 것이다. 엑스트라들이 새얼굴로 들이밀고 있으면서 종종 틈새로 끼어들기는 하지만 자주 발에 안기고 사랑받는 것이 좋은 구두의 좋은 몫이지 결코 신발장에서 먼지 얹고 새것으로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바쁘다고 푸념할 때 인생의 윗 선배가 나에게 그랬다. "그래도 쓰일 때가 좋을 때야. 지금은 할 줄 안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 안된다는 일이 많아. 쓴다고 할 때 쓰여주어." 나는 그 말을 명심하는 편이다. 아마 글빛고을님의 검정구두는 행복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행복한만큼....약간 다른 측면에선 또한번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요.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이 주는 묘한 시각일지도 모르구요.하지만 마음 속에 또하나 깨달음을 갈무리할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함께님이 말하신 쓰임새에 관해서두요. 고맙습니다.
+, 이상하지요? 전 뭔가 하나 마음에 들면 그것이 한계절을 그리고 몇년을 닳아 못쓸때까지 입고 신는 습관이 있어요.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편한 것이 좋아서 늘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통굽구두지요...^^* 이것도 성격이 아닐까 싶어요 선택하기까지는 너무 시간이 많이들어 지치긴해도 선택하고 나면 끝까지 가는 ...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한데 아무래도 이 생 에서는 고쳐지지 않을듯 하네요...글빛고을님의 구두는 지나간 고을님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겠지요. 문득 상념이 많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올봄에 한 십여년 신던 반부츠를 두고 오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오늘 더욱 그 신발에 대한 아쉬움에 젖어드네요...
첫댓글 새 구두 사다가 신발장에 보관해두고 낡은 구두 한켤레로 한 계절을 나는 모한 사람들의 취향, 옷이며 책ㅇ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에 정주는 생리를 안다면 억울할 것이다. 엑스트라들이 새얼굴로 들이밀고 있으면서 종종 틈새로 끼어들기는 하지만 자주 발에 안기고 사랑받는 것이 좋은 구두의 좋은 몫이지 결코 신발장에서 먼지 얹고 새것으로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바쁘다고 푸념할 때 인생의 윗 선배가 나에게 그랬다. "그래도 쓰일 때가 좋을 때야. 지금은 할 줄 안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 안된다는 일이 많아. 쓴다고 할 때 쓰여주어." 나는 그 말을 명심하는 편이다. 아마 글빛고을님의 검정구두는 행복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행복한만큼....약간 다른 측면에선 또한번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요.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이 주는 묘한 시각일지도 모르구요.하지만 마음 속에 또하나 깨달음을 갈무리할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함께님이 말하신 쓰임새에 관해서두요. 고맙습니다.
구두도 인연이 있나봅니다. 구두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그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구나 싶습니다
+, 이상하지요? 전 뭔가 하나 마음에 들면 그것이 한계절을 그리고 몇년을 닳아 못쓸때까지 입고 신는 습관이 있어요.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편한 것이 좋아서 늘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통굽구두지요...^^* 이것도 성격이 아닐까 싶어요 선택하기까지는 너무 시간이 많이들어 지치긴해도 선택하고 나면 끝까지 가는 ...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한데 아무래도 이 생 에서는 고쳐지지 않을듯 하네요...글빛고을님의 구두는 지나간 고을님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겠지요. 문득 상념이 많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올봄에 한 십여년 신던 반부츠를 두고 오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오늘 더욱 그 신발에 대한 아쉬움에 젖어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