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드라이버>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가 나왔을 때, 나는 이 걸출한 ‘운전기사 영화’의 연출자에게 정작 운전면허가 없더라는 이야기에 꽂혔다. 감독이 이후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이사하면서 끝내 면허를 취득했는지, 혹은 처음부터 낭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영화사 사람들을 만나면 내게 “한국판 <드라이브>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설을 풀었다. 대대장 레토나를 몰다 갓 전역한 운전병 출신의 20대 남자가 밤마다 대리기사를 해서 먹고살던 중, 신출귀몰한 운전 솜씨가 알려져 어느 조직보스의 운전기사가 된다. 어느 날 보스는 그에게 한 여자의 출퇴근 에스코트를 맡기는데, 그녀는 허언증이 매우 심하니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믿지 말라는 경고를 기사에게 남긴다…. 이렇게 스토리를 읊다보면, ‘드라이브’에서 초롱초롱했던 사람들의 표정은 서서히 ‘한국판’과 ‘비슷한’에서 실망한 낯빛으로 옮겨가곤 했다. 게다가 레픈 감독과 나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우린 둘 다 운전면허가 없다는 것뿐이다. 게임 <니드 포 스피드>와 <포르자 호라이즌>을 즐겨 플레이하니까 카체이스의 감각은 충분히 터득했노라고 말하기에 이르면, 지금 쓰는 거나 잘 쓰라는 말을 당연히 듣는다.
<드라이브>는 외면은 근사하지만 내부는 공허한 영화다. 왜 이름 없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는 옆집 여자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그녀의 아이와 형무소에서 갓 출소한 골칫덩어리 남편을 위해 이상한 역할극을 자처하는가?(그의 본업은 스턴트 대역이다) 잠시 연인이자 아빠 대행이었던 그는 여자의 남편이 나타나자 기꺼이 동료가 되어 범죄를 돕는다. 일이 어긋나자 그는 상황에 대한 이상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나는 그 이유가 두렵게도, 아이린을 향한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극중 자신만 이름이 없는 이 기사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숭고함에 빠진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겐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모든 일을 원점으로 돌려놓으려는 행동은 결국 텅 빈 자신을 마주하는 진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이상하게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면은, 카티나 라니에리가 부르는 <Oh My Love>가 흐르는 동안 드라이버가 스턴트용 가면을 꺼내 쓰고 악당 ‘니노’(론 펄먼)를 찾아가는 부분이다. 드라이버는 주변인들의 대역에서 이제 자신의 대역까지 하는 괴물이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노래가 <몬도가네> 시리즈 중 한편인, 노예제도를 인종차별적으로 다룬 악명 높은 영화 <굿바이 엉클 톰>(1971)의 주제가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이탈리아영화는 종종 사운드트랙이 영화를 초월한다), 과도한 해석을 해보고 싶어진다. 프로페셔널리즘, ‘전문가주의’란 작업의 숭고함을 위해 주체인 내가 기꺼이 노예가 되는 일이다. 행위 자체가 이유와 목적을 초월한다. 나의 존재는 그 순간 이 숭고한 행위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운전기사 영화의 원형은 역시 월터 힐의 <드라이버>(1978)일 것이다. 월터 힐은 헤밍웨이가 만약 현대 하이스트(Heist) 무비의 시나리오를 쓴다면 딱 이렇게 할 것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주차장에 ‘드라이버’(라이언 오닐)가 나타나 자기만의 도구로 자동차를 훔친다. 남자는 카지노를 막 털고 나오는 무장한 복면강도 두명을 차에 태우고, 굉장한 운전솜씨로 경찰들을 보기 좋게 따돌려 도주에 성공한다. 이 익명의 드라이버, “카우보이 데스페라도”를 너무나 잡고 싶은 ‘형사’ (브루스 던)는 법 집행의 영역을 초월한 덫을 놓는다. 그는 자신과 범인, 두 전문가끼리 검거와 도주의 게임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들 사이, 카지노에서 드라이버의 얼굴을 목격한 유일한 여인 ‘플레이어’(이자벨 아자니)가 있다.
<베이비 드라이버>
월터 힐은 영화에 드라마를 넣지 않았다. 오로지 영화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카체이스 신을 배당하기 위한 게임만이 있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성적인 긴장은 관객의 마음속에나 존재할 뿐 연애 감정이나 육욕 따위는 끼어들지 않는다. 여자가 드라이버를 목격하고도 용의자로 선 그를 지목하지 않은 이유는, 마침 월세를 낼 돈이 부족했기에 거래를 트기 위해서다. 형사가 꾸민 함정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드라이버가 다음 일을 맡는 이유는 역시 전문가로서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문제는 두 남자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들만 명예와 돈과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둘이 한심한 게임을 벌이는 동안 거액의 돈을 가로챈 최종 승자는 ‘플레이어’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남자는 “우리 둘 다 졌군”, “요즘엔 사기꾼들투성이라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캐스트 명단을 보면 월터 힐의 전략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은 캐릭터가 단 한명도 없다. The Driver, The Detective, The Player…. 직업이 바로 그 캐릭터이며, 행위가 곧 자신이다. 쿨함을 넘어 냉혹할 지경인 이 원전(classic)의 모던함이, <드라이브>의 기이한 포스트모던 변형(neo-classic)으로 이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영화 역사의 흐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래의 영화 작가는 어떻게 하면 될까? 이미 존재하는 원전과 근사한 변형을 또 표절하고 복제하고 변주하고 재변형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오리지널을 어떻게 획득해야 할까?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 미래의 작가는 이제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면 될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하여 엄선한 영화의 목록과 그들 작품에서 이미 제시한 원형과 클리셰와 특정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한 새로운 대답을 개인적인 테마라는 기준에 따라 재구성 혹은 재배열하여 관객에게 내놓으면 충분하다. 여기서 테마란, 이들 영화를 한데 묶어 선정한 작가 본인의 내밀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영화도 어느 사려 깊은 DJ의 선곡표나 믹스 테이프가 될 수 있다는 가정. 에드거 라이트의 <베이비 드라이버>가 바로 이렇게 한 것 아닐까?
전문가주의에 빠진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상은 당연히 아마추어, ‘풋내기’다. 그들의 삶에 이따위 것들과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런데 더 싫어하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천재’다. 전문가는 남의 재능을 혐오하는 법이다. 뛰어날수록 더 싫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에드거 라이트는 전문가들로 가득한 은행 강도의 세계에 천재 소년 한명을 데려다놓는다. 여자들은 그를 사랑하거나 내버려두는 반면, 전문가다움을 뽐내지 못해 안달하는 사내들은 이 ‘베이비’(앤설 엘고트)를 가만히 둘 수 없다. 그는 일종의 ‘뉴 타입’이다. 건담 대신 차를 운전하는 아무로 레이 같은 녀석이다.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입 꾹 다물고 대답도 재깍 안 하는 샌님 같은 녀석이 아무리 운전을 귀신처럼 잘한다고 해도 인정하기 싫다. 무엇보다 싫은 것은 녀석도 분명 강도단의 일원이고 같은 범죄자이면서도 ‘나는 운전만 한다’는 식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츠(제이미 폭스)가 베이비를 괴롭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월터 힐의 <드라이버>에서 ‘드라이버’는 마지막 체이스에서 어느 풋내기 드라이버가 모는 차를 뒤쫓는다. 운전은 꽤 하는 녀석이지만 결국 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돈을 가져간 악당을 쏴죽이고 총구를 겨누자 풋내기는 이렇게 말한다. “전 운전밖에 안 했어요, 다른 건 안 했다고요!” 그러자 드라이버는 말한다. “집에 가.” 어린애는 집에 가면 그만이지만, 에드거 라이트는 지금 시대의 다른 대답이 하고 싶다. 여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원한 테마,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전문가들의 공허한 내면 대신 천재 운전기사의 영혼으로 엄마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려주고 싶다. 좋아, 다 섞어. 내 인생의 라이브러리에서 추출한 끝내주는 믹스를 공유해줄게. <베이비 드라이버>의 가장 새롭고 흥미로운 점은 운전기사 영화의 영원한 클리셰, ‘도주’를 결말에서 관둔다는 것이다. 드라이버는 운전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지상 위에 발을 붙이고 선다.
생각해보니, 30대가 된 이후 내 인생의 드라이버들은 모두 지난 여자친구였다. 그들은 각자 분야의 오랜 전문가들이었고 베테랑 드라이버였으므로, 조수석에 조신하게 앉아서 여자친구의 명품백이 다치지 않도록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자기야, 달려!”라고 말하는 건 나의 임무였다. 이 사실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내 남성성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앞에서 내가 만들고 싶었던, <기사도>라 제목을 붙이고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 Part.II>를 스코어로 깔려던 <드라이브> 비슷한 한국영화는 이런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봐야 할지 모르겠다. 글 박수민(영화감독) 2017-10-04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