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 친구, 세 남자
“난 찬성.”
“한진웅, 니가 뭔데 찬성이야. 내 인생이고, 내 결혼인데.”
“나도 찬성.”
“김서윤, 너는 또 뭐야?”
“그럼 3명 중에 2명이 찬성이니까. 황기백의 결혼은 어머님의 뜻대로 진행하는 걸로. 이제 됐지? 밥 먹으러 가자, 서윤아. 기백이 어머님이 보내주신 음식이 진수성찬이더라.”
“이것들이 진짜!”
진웅과 서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기백의 방에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황기백은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스물아홉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혈압이 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것들은 친구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또라이 같은 놈들. 내 결혼을 왜 다수결로 정해? 어? 그리고 왜 다 찬성인거야, 왜! 왜! 엄마 좀 말려 달라고 불렀더니, 이것들이 먹을 것에 정신이 팔려서 나를 배신해!”
기백은 침대에 누운 채로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난 반대야! 난 반대라고!! 전 세계 내 팬들도 다 반대야! 반대가 훨씬 많아! 이 결혼 반댈세!”
하지만 아무리 기백이 소리쳐봤자 친구 두 놈은 먹는데 정신이 팔렸고 멀리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들릴 리가 없었다. 기백은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형, 나야. 우리 스케줄 중에 해외에 오래 있으면서 촬영해야 하는 거 없어? 있어? 얼마나? 3일? 그게 오래냐? 그래, 이참에 헐리우드 진출은 어때? 부르는 데가 없으면 어때? 요즘 누가 앉아서 찾아와주길 기다리고 있어. 신인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지. 어때? 형! 형! 끊지 마, 형! 형!”
이럴 수는 없었다. 기백은 다시 무너지듯 침대로 쓰러졌다. 뼈대 있는 황씨 집안의 종가집 종손인 기백이었지만 한 번도 그에게 뭘 해라, 뭘 하지 말아라 잔소리 해 본 적이 없는 부모님이었다.
갑자기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직도 한복에 갓 쓴 문중 어른들이 가문의 수치라며 반반한 얼굴 믿고 헛꿈 꾸냐고 난리가 났을 때조차 기백을 응원해주시던 분들이었다.
“갑자기 왜! 왜 그러는 거야......”
배우로 데뷔하고 4년. 사람들은 다 잘생긴 외모 덕에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하지만 기백에게 4년 동안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신의 외모와 사투를 벌여온 시간이었다.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그리고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냐고! 사진은커녕 이름도 모르고! 딸랑 전화번호만!!!! 이게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야, 그만 소리 지르고 밥이나 먹어.”
진웅이 세상 근심 없는 햄스터처럼 양 볼 가득 음식을 씹으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라면 이런 진웅의 모습마저도 귀엽다 했을 기백이었다. 스무 살, 같은 과 동기로 만난 세 사람은 서로를 친구보다 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기백에게 진웅과 서윤은 극악무도한 악의 축과 바를 바 없었다.
“그래...니들일 아니라 이거지. 한진웅,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너, 니 이번 영화 시나리오 보고 나 좀 하자, 하게 해주라, 귀에 딱지가 앉게 말했는데. 결혼? 결혼을 하라고?”
기백은 침대에 축 늘어진 채로 방문 앞에 서 있는 진웅을 쏘아보며 말했다.
“얘기가 왜 또 그쪽으로 튀냐.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너 좀 오버야. 어머니가 당장 결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참한 아가씨가 있으니 한 번 만나봐라, 이거 아냐. 너 왜 세상 끝난 것처럼 구는데?”
진웅은 기백이 누운 침대 옆에 걸터앉아서 기백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금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어머니 마음 백 번 이해해. 아무리 뜬소문이 8할 이라는 연예계라지만 아들이 분기별로 스캔들을 일으켜대는데. 더구나 이렇게 잘생기고, 이렇게 멋있고, 이렇게 나쁜 남자고.”
“나도 궁금하다, 나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이랑 왜 그렇게 스캔들이 나는지! 내가 뭐, 동네 북이냐! 만인의 연인이야!”
“에이. 또 흥분한다. 나는 알지. 너무 너무 잘 알지. 우리 기백이가 일 밖에 모르는 거.”
진웅이 작정하고 달래주니 기백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니까.....그러니까 너네가 도와줘야지......”
“너 그거 모르지? 어머니랑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나랑 서윤이한테 전화 하시는 거.”
“....왜?”
“너 만나는 여자 없냐고. 내 생각에는 이게 단순히 너희 부모님의 생각만은 아닌 것 같아. 그 갓 쓰고 꼬장꼬장한 문중 어르신들이 너무 눈에 불을 켜고 너를 보고 있으니까. 부모님은 너를 보호해주고 싶은 거야. 그 노인네들한테 흠 잡히지 않게. 그래야 당신들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게 지지해 줄 수 있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딸랑 전화번호만......아.......”
“이제 그만. 그만 찡찡거리고 밥이나 먹어. 서윤이가 다 먹겠다.”
진웅은 기백의 엉덩이를 팡팡 때리고는 일어섰다.
“한진웅.”
진웅을 부르는 기백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투덜거림과는 달리 진지했다. 진웅이 돌아보니 누워있던 기백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나 진짜 이번에 니 영화 하고 싶어. 진심이야. 십 년 지기 친구 말고. 배우 황기백으로 평가해줘.”
“응. 그럴게.”
진웅이 진심으로 대답하고 활짝 웃자 그제서야 기백의 표정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야! 작작들 좀 하고 내려 와라. 갈비찜 다시 데우면 짜다고! 황기백! 한진웅!!!”
아래층에서 서윤의 분노의 외침이 들리자 진웅과 기백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다. 세상의 온갖 다정함과 젠틀함, 상냥함을 모두 쏟아 부어 만든 것 같은 배우 김서윤의 본모습이 저런 먹깨비라는 것을. 쯧쯧.”
황기백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젓자 진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야, 세상 상남자에 냉미남 미를 뿜고 다니는 니가 이런 찡찡이 개초딩인 거는 어떻고? 어휴. 한심한 것들.”
“뭐? 개초딩? 초딩은 너지. 쪼그만 게 형한테 까부네.”
금방까지도 진웅에게 우쭈쭈를 당한 것은 기억에서 순식간에 삭제라도 된 듯 형님 타령을 하는 기백이 한심했지만 그게 또 기백의 매력이기도 했다. 부릴 수 있는 만큼 허세를 부리는 것이 밉지 않은 기백.
“맞선녀한테 전화나 해라, 이 초딩아. 이거, 초딩이 장난 전화 한 줄 알면 큰일인데.”
진웅은 기백에게 회심의 일격을 내리 꽂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야!!!!!”
기백의 분노의 외침에 진웅과 서윤의 박장대소가 답장처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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