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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불트만의 생애와 사상
(RUDOLF K. BULTMANN, 1884-1976)
김희보, 서울장신대 교수
루돌프 불트만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도 원문으로 불과 50쪽 안팎인 ‘신약성서와 신화론’은 그야말로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속에서 주장된 ‘비신화화론’을 두고 신학자 G. 보른캄은 “프로테스탄트 신학계와 세계 교회에서 달리 찾아볼 수 없 는 격렬함으로 논란되고 있는 문제”라고 하였다.
불트만은 신약학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신학의 다 른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신약학자요 역사학자며 고대 문헌 학자인 동 시에 조직신학자요 실천신학자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를 가리켜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자라고 일컫고 있다.
(가) 불트만의 생애
불트만은 북부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튀빙겐, 베를린, 마르부르크 등 여러 대학 신학부에서 K.뮐러, H.궁켈, A.하르나크, W.헤르만, A.율리허, J바이스 등 저명한 교수에게 배웠고, 1910년에 논문 ‘바울의 설교문체 및 견유파와 스토아파의 디아트리 베’를 바이스 교수의 지도 아래 써서 학위를 받았고 1912년에는 율리허 교수의 지도 아래 교수 자격논문 ‘모프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석의’를 써서 신약 학자로 나섰다. 신약교수가 된 불트만은 마르부르크대학을 출발점으로 하여 브레슬라우, 기센을 거쳐 1921년 하이트뮐러의 후임으로 마르부르크에 돌아와 신약학 교수가 되어 51년에 은퇴 할 때 까지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1921년에 ‘공관복음서 전승사’를 저술하여 K.L.슈미트, M.디벨리우스 등과 함께 성서학의 양식사적 방법을 제창하였으며 1924년부터 변증법 신학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입장에서 1926년에 출판한 것이 ‘예수’이다. 그 무렵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철학자 M.하이데거와 친교를 가졌고 그의 실존 분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찌 정권에 대립한 고백교회에 소속하여 일하였고 1941년 ‘신약성서와 신화론’으로 비신화론을 제창하여 세계적인 파문을 불러 일으켰으며 같은 해에 ‘요한복음’, 1948-53에 ‘신약성서와 신학’등 수준 높은 학적 업적을 발표하여 세계 신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원시 기독교’(1949), ‘역사와 종말론’(1957), ‘그리스도와 신화’(1958), ‘신앙과 이해’ 전 3권(1933- 60) 등이 있다.
(나) 신학사상의 형성과 전개
마르부르크 대학의 신약 강사로 출발한 불트만은 엄밀하게 역사적 및 비평적 방법을 사용하는 학풍을 강의와 연구의 기초로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종교사학파의 흐름을 이어 신약성서를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여러 종교 등 주변 세계와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에 출판된 ‘공관복음서 전승사’에서 양식사 방법을 제창하여 신약학자로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로마서’(특히 1922년 간행된 제2판)를 빌미로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추진되어 온 변증법 신학운동에 논문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운동’(1924)으로써 그 운동에 참가할 뜻을 나타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히틀러에게 비위맞추는 독일기독교인에게 반대하여 고백교회에 가담하여 독일 교회 투쟁에 참가해서 바르트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불트만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바르트와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변증법 신학의 운동에 참가한 후에도 이미 연구의 기초로 삼은 역사적 및 비평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더욱 추진해 나아갔다. 그리고 둘째로 ‘존재와 시간’(1927)의 하이데거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불트만이 1941년에 ‘신약성서와 신화론’에서 제창한 신약성서 비신화론에서는 위에 말한 두 가지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신약학자로서 출발한 불트만이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신학자로 도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 한정 되었던 이를테면 지난날의 문서로서의 신약성서가 이 장소와 이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현대를 향한 메시지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려 하였다.
(다) 양식사 방법의 제창
신약학자로서의 불트만이 이름을 확고하게 한 것은 ‘공관복음서 전승사’에서 주장한 양식사적 방법의 제창이었다. 그것은 궁켈이 구약성서의 연구에 적용한 유형사적 연구를 신약성서 중 특히 공관복음에 적용한 것이었다. 그 방법은 이미 1919년에 슈미트와 디벨리우스 등에 의해 제창한 바 있으나 1921년에 출판된 불트만의 이 저서는 그것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불트만은 그것을 브레슬라우 시대에 정리된 것으로서 연역적이거나 구성적이기보다는 보다 분석적인 특색이 강하다.
불트만은 문화의 양식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아포르테그마(=짧은 이야기의 틀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으로서 논쟁적 대화, 교육적 대화, 전기적 아포프테그마로 나누었다), 독립된 전승으로 되어 있는 주의 말씀(=지혜의 격언, 예언적 및 묵시적 말씀, 율법의 말씀과 교회 규칙, ‘나’의 말씀, 비유 및 그와 비슷한 표현), 이야기(기적이야기; 치유 기적과 자연기적, 역사이야기와 성자의 전기)등으로 분류하여 공관복음을 고찰하여 각 양식을 형성한 배후에 원시 기독교단의 삶의 자리를 밝히려 하고 있다.
종교사학파의 흐름을 이은 불트만은 팔레스틴에서 성립된 원시 교단과 헬레니즘 세계에서 성립된 원시 교단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그에 즈음하여 원시 교단의 창조적인 영향력이 예수에 관한 전승의 형성 및 확장에 큰 역할을 수행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특히 마가복음에 의해 창조된 ‘복음서’라는 문화 양식이 헬레니즘 세계에 성립된 원시 교단의 선교와 예배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불트만의 이와 같은 주장은 공관복음을 소재로 하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 단순하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19세기 예수의 전기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동시에 각종 문학적인 양식을 낳게 된 원시 교단의 생활을 탐색하여 복음서가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 원시 교단의 신앙의 증언 내지 선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케리그마 신학의 막이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라) 신약성서 비신화론
양식사 방법이라고 하는 불트만의 신약학자로서의 독특한 주장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형성된 것과 같이 비신화론이라고 하는 그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적인 주장이 발표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변증법 신학 운동에의 참가와 또한 하이데거와의 친교 등에 의하여 이미 좁은 뜻의 신약 학자의 틀 안에서 벗어난 불트만의 보다 포괄적인 신학 주장은 1933년 이래로 논문집 ‘신앙과 이해’(제1권은 하이데거에게 헌정되었다. 전4권)로서 출판되어 왔었으나 그것이 가장 단적으로 제시된 것은 그의 ‘신약성서와 신화론’의 출판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원래 1941년 여름에 남부 독일 알피스바하에서 열린 잡지 ‘복음주의 신학’의 세미나에서 그가 행한 강연이었다. 그것이 이윽고 ‘복음주의 신학 논총’ 제7권에 불트만의 다른 논문들과 같이 출판되자 전쟁 중인데도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신화론’에 관해서는 이미 본지 ‘성서학 방법론’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다시 정리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불트만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세계상은 하늘 세계와 땅위세계 및 땅밑세계등 3계층 편성으로 된 신화적인 것으로서 케리그마의 내용을 이루는 구원 사건은 이 신화적인 세계상에 대응하여 언급되어 있다. 즉 하늘 세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어 땅위 세계에 오셨고 하나님과 사탄의 여러 힘이 활동하는 지상에서 활약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의 죽으심을 당하고 땅 밑 세계에 내려가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것은 죽음과 여러 힘이 그 힘을 잃는 우주적 파국의 시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세계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그곳에서 땅위세계에서 성령을 부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을 인도하시며 이윽고 하늘 세계에서 다시금 땅위 세계로 내려오사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고 구원의 사건은 완결된다는 것이 바로 3단계 편성의 신화적인 내용이다. 이와 같이 유대교적인 묵시문학과 그노시스적인 구원자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세계상을 현대인에게 승인하게 하는 일은 그와 같은 3계층 편성과는 전혀 다른 과학적 세계상 가운데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신약 성서가 본래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다.
따라서 비신화화의 과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까지의 비신화화가 한결같이 신화를 비판적으로 삭제한데 대하여 불트만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이와같이 비신화화는 해석학적인 과제이며 우주론적인 신화론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인간학적인 과제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점에 불트만의 독자적인 공헌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합리화가 아니다. 케리그마는 이 장소와 이 때에 있어서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트만의 논문집 ‘신앙과 이해’가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지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해 없는 신앙이 아니라 이해를 수반하는 신앙이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바울과 루터적인 칭의론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의 철저함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불트만이 신약학자로서 쌓아올린 업적은 하나의 시기를 금긋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널리 사상계 전체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은 깊이 역사와 인간 문제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는 성서를 진정한 현대인의 책으로 생각하였고 그 실존론적 해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건이 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으면서 거기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과 죽음의 문제와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해방된 새롭고 자유로운 삶의 문제를 다루었다.
2000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가 시대를 초월하여 나의 삶의 방법을 받쳐주고 있다고 하는 실존론적인 이해를 통하여 역사와의 대화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역사와의 대화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의 역사로서 담당하는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 점에 불트만 사상의 현대적인 의의가 있다.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소재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배려와 불안의 존재론적 카테고리이다. 때문에 성서의 신화론적 및 우주론적 표상과 언어는 배려와 불안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역사의 상세한 객관적 서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존재 가능성과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하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역사가 말하는바 주제적 내용에 대한 앞선 이해와 인간 존재의 존재 가능성 및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이 필수조건이다. 또한 그것이 역사와의 만남과 해석을 위한 문제 설정과 거점이다.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거점은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일관되어 있다.
“가장 주체적인 해석이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며 결국 실존의 물음에 의해 감동을 받은 사람만이 본문의 요구하는 바를 알아 들을 수 있다.”
불트만은 바르트와는 다르게 하나님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앙과 새로운 자기 이해를 창조함으로써 나의 자기 이해에 역사하시는 바 나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과의 만남으로 해서 발생하게 되는 신앙과 이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실존에 관한 물음에 의해서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실존과의 관련에서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한 가운데 자기가 돌아오게 되어야 한다. 이 불트만의 죄와 믿음에 의한 칭의(의인) 더 나아가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의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요
20세기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비신화화'는 신화적 용어들로 표현된 〈신약성서〉의 본질적 메시지를 실존철학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성서비평).
초기생애
불트만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할아버지는 선교사였다. 그는 언제나 학문적 신학의 길을 따르고자 했으며, 19세 때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다. 1912년 교수자격 취득논문을 쓴 다음, 마르부르크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고, 브레슬라우(1916)·기센(1920) 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21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신약학교수로 임명되어 1951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1921년 불트만은 〈공관복음서 전승사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를 발간했는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인 마태오(마태)·마르코(마가)·루가(누가)가 사용한 전승 자료를 분석하고 그들vftgg이 사용하기 이전에 형성된 이 자료들의 교회전승사를 추적하려는 시도였다. 이 책은 독창성이 풍부한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며, 학자로서 불트만의 명성을 확립했다. 이어서 그는 〈예수 Jesus〉(1926)·〈예수와 말씀 Jesus and the Word〉(1934) 등 예수에 관한 책을 써냈는데, 이 책들에는 그의 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1922~28년에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함께 일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을 발간한 하이데거는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전개된 인간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이 불트만 자신이 해석한 바울로 신학과 요한 신학의 인간 실존 이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신학
하이데거와 토론을 벌인 이 몇 년 동안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한 대신에 초월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의 케리그마(K?rygma:선포)에 대한 신앙이며, 예수는 케리그마 속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불트만의 부활 이해)고 전제한 불트만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견해가 최초로 표현된 것은 〈신약성서의 계시 개념 Der Begriff der Offenbarung im Neuen Testament〉(1929) 〈현존재의 역사성과 신앙 Die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und der Glaube〉(1930) 등에서이다. 불트만의 이런 입장은 그후 계속 유지되었으며, 1941년의 비신화화 제안을 포함한 그의 모든 저작들은 이를 일관성 있게 발전시켰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할 때 불트만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가르침을 수정해 나치 이데올로기에 맞추기를 거부했고, 나치의 교회 정책에 대항해 조직된 독일 프로테스탄트 운동인 고백교회를 지지했다(→ 국가사회주의). 그러나 자신의 말 그대로 그는 "결코 직접적으로, 적극적으로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나치 정권을 정면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대학교와 세계의 다른 대학교 사이에 교류가 재개되면서 불트만은 국제적인 학술분야의 주요인사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독일대학교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견해들은 전세계적으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신약학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어야 했고, 신학자들 가운데서 불트만의 입장은 독일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불트만은 1955년 영국에서 〈역사와 종말론 History and Eschatology:The Presence of Eternity〉을 강의했고, 1958년 미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Jesus Christ and Mythology〉를 강의했는데, 이 강의들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볼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케리그마와 신화 Kerygma und Mythos〉 시리즈의 주제가 되었다.
평가
불트만은 탁월한 스승이었으며, 제자들에게 정신의 독립성을 북돋웠다. 그결과 두 갈래의 '불트만 학파'가 나타났다. 1954년 E.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고, 많은 제자들은 스승과 무관한 입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E. 푹스와 G.에벨링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인간 실존의 언어적 양식을 강조하는 신약성서 해석방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새로운 해석학(new hermeneutic)이다. 불트만 자신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제자들과 함께 이 논의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마르부르크에서 조용히 살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