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백일기도로 왕이 된 조선 시대 인조의 흔적이 머문 경남 진주 성전암으로 가는 길에 '평촌리 은헌고택'을 지났다. 다음 기회에 하면서 미룬 게 여러 달이 가버렸다. 마치 빌려준 돈을 꼭 찾을 요량처럼 6월 23일은 점심을 먹기 부리나케 길을 나섰다.
진주에서 창원 마산으로 향하는 진마대로 이반성 교차로에서 빠져 이반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 소재지를 지나 좀 더 올라가면 옛 평촌역이 나오는 삼거리를 지나면 은헌고택이 있는 중도마을이 나온다. 개망초가 하얗게 무리 지어 핀 길을 지나자 고택으로 가지 않고 오른편으로 나도 모르게 마을을 그냥 가로질렀다. 보건지소를 지나자 회화나무가 나온다. 그 옆에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오토바이가 하나 서 있다. 1m 가량의 둥그런 시멘트 위에 돌이 올려져 있다. 돌에는 '貞烈處女淸州韓氏旌閣故墟(정렬 한씨 정각 고허)'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 있던 정각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근처 참나무 아래 정자로 갔다. 아흔이 넘었다는 할머니는 한자를 몰라서 뭔지 모른다면서도 낯선 이에게 길이 새로 나면서 중도마을 입구 쪽으로 옮긴 청주 한씨의 정려 내용을 들려주었다. 사예 한여철의 손녀이고, 수사 한응의 딸이었던 청주 한씨는 동북아국제전쟁 (임진왜란) 때인 1593년 6월 16일 왜적이 젖가슴을 만지자 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이에 영조가 정려를 내렸다.
마을 뒤쪽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산 밑으로 흐르는 내가 정(丁)자가 되고 마을 앞에는 숲이 우거져 정수(丁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이반성면이 아니라 옛날에는 정수개면(丁樹介面)이었다는 이야기가 바람에 돛단배처럼 시원하게 나온다.
지금 철길도 폐선되어 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 없는 오지라 이곳에 터를 잡은 시댁의 옛 선조 흉을 보면서도 저기 회화나무 근처 고택으로 구경하러 가보라고 권한다.
왔던 길을 돌아 중도마을 회관 쪽으로 향했다. 회관 앞에는 시원한 정자나무가 있는데 마을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몇 그루가 지난 세월의 흔적을 들려준다. 회관에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꽃이 창너머로 피어나고 화단에는 접시꽃이 환하게 피어 반긴다. 마을에는 드문드문 흙돌담이 보인다. 돌담 사이로 바람에 한들거리는 주황빛 석류꽃이 걸어가는 낯선 이를 구경한다. 500년가량의 회화나무가 담장에 의지해 돌담과 시멘트 담장 사이 골목길에서 내려다본다.
흙돌담과 함께 운치를 더하는 옆으로 가자 은헌(隱軒) 한사원(韓士源:1860~1908)이 지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이 된 은헌고택(隱軒古宅) 나왔다. 대문 없는 고택으로 들어서자 누렁이가 낯선 이를 경계하느라 짖는 소리 요란하다. 다행히 고택 안에서는 의례 구경 오는 낯선 사람이라는 듯 개에게 조용히 해라 이르자 소리가 멈추자 새소리만 들린다.
들어가는 입구 한편에는 고택에 관한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은헌고택은 청주 한씨 둔암공이 조선 연산군 무렵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한사원이 당대에 지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 후기 지주들의 거주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고택의 사랑채는 대청마루 외에도 또 하나의 툇마루를 독립되게 만들었고 안채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 은헌고택 사랑채 왼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에는 담쟁이가 마치 비밀의 문을 지키는 양 초록빛을 더해 신비감을 준다.
사랑채 동쪽의 행랑채는 화재로 소실되어 기단만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사랑채에 걸린 쾌종 시계 시침은 9와 10 사이에 있고 분침은 3과 4 사이에서 멈춰 있다. 사랑채 왼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에는 담쟁이가 마치 비밀의 문을 지키는 양 초록빛을 더해 신비감을 준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로 안채가 훤하게 드러난다. 안채에서 TV 소리가 들려 오는 중이라 함부로 들어가 구경하기 조심스럽다.
고택을 나와 마을 회관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마을 이름이 적힌 표지석 앞으로 갔다. 마을 표지석 뒤편으로 은행나무들이 빙 둘러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작은 공원 안에는 둔암선조(遯菴先祖) 조기(肇基) 500주년을 기념해 새긴 돌이 남쪽에 있고 뒤로 여러 걸음 물러나 팔각정에 안치한 '朝鮮處士遯菴韓公杖屨所碑(조선처사둔암한공장구소비)'를 비롯한 4기의 비석과 2기의 열녀비를 안치한 맞배지붕의 비각이 나온다. 이 비석군 앞에 서 있다.
중도마을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집성촌으로 처음 이곳으로 들어온 입향조(入鄕祖)는 둔암공(遯菴公) 한승리(韓承利,1477~1496)이다. 둔암공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 이름 중도(中島)는 옛 정수개면이 소재한 곳으로 마을 앞뒤로 내가 있어 중섬 또는 중도라 불린 곳이다.
마을 어르신에게 들은 한씨 열녀비는 비석군 맨 왼쪽 8개의 기둥으로 만든 비각 안에 있다. 비각 안 오른편에 있는 청주 한씨처럼 정려비가 인근 진성면 가진리에도 있다. 진주 강씨 정려비다. 첨사 김진의 처인 진주 강씨도 전쟁 때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남편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칼로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해 고종 5년(1868)에 건립했다고 한다. 청주 한씨 정려 옆에는 조선 시대 고종 7년(1870년) 한석건의 부인 칠원 윤씨의 열행을 기리는 열녀 칠원윤씨 정려비가 서 있다. 칠원 윤씨는 남편이 병으로 죽자 따라 자결했다고 한다.
▲ 청주 한씨는 동북아국제전쟁 (임진왜란) 때인 1593년 6월 16일 왜적이 젖가슴을 만지자 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이에 영조가 정려를 내렸다.
이들 여성에게 정려비를 내리며 장려한 속셈이 조선 시대 가부장적 가족 제도, 곧 남성 양반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었다. 임진년과 병자년에 일어난 국제전쟁 속에서 침략자들에게 납치, 강간당한 피해 여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국정의 책임을 반성하지 않고 회피한 셈이다. 바람이 한차례 지나간다. 마음속 답답한 마음은 이는 바람에 날아간다.
정려비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비석들은 공덕비다. 둔암공의 13세손 은헌 한사원이 현재의 집을 지었다. 은헌의 장손인 정우(正愚)는 일본제국 강제 점령기에 못을 파낼 때 부지 3000여 평을 무상으로 기증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학교를 세워 면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품은 마을에는 넉넉한 나무가 많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뜨거운 뙤약볕을 피했다. 물빛과 하늘빛이 가장 닮아가는 계절, 여름에서 잠시 노니는 바람을 만나고 스쳐 가는 세월을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