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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기업가정신 선구자 | |||||
01 |
김준성 |
이수그룹 전 명예회장 |
06 |
정세영 |
현대산업개발 전 명예회장 |
02 |
서성환 |
아모레퍼시픽 창업회장 |
07 |
정인영 |
한라그룹 창업회장 |
03 |
유일한 |
유한양행 창업회장 |
08 |
정인욱 |
강원산업 창업회장 |
04 |
이동찬 |
코오롱그룹 전 명예회장 |
09 |
정주영 |
현대그룹 창업회장 |
05 |
이병철 |
삼성그룹 선대회장 |
10 |
조홍제 |
효성그룹 창업회장 |
제2부 기업가정신 혁신가 | |||||
11 |
강덕영 |
한국유나이티드제약 회장 |
29 |
윤종용 |
삼성전자 전 부회장 |
12 |
강호찬 |
넥센타이어 사장 |
30 |
윤홍근 |
제너시스BBQ 회장 |
13 |
구자관 |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
31 |
이금기 |
일동후디스 회장 |
14 |
권영세 |
안동시장 |
32 |
이윤재 |
피죤 회장 |
15 |
권오현 |
삼성전자ㆍ삼성종합기술원 회장 |
33 |
이종호 |
JW그룹 명예회장 |
16 |
김광석 |
참존화장품 회장 |
34 |
장순흥 |
한동대학교 총장 |
17 |
김승호 |
보령제약그룹 회장 |
35 |
전순표 |
세스코 회장 |
18 |
정경선 |
루트임팩트 CIO |
36 |
정경선 |
루트임팩트 CIO |
19 |
김 윤 |
삼양그룹 회장 |
37 |
정석현 |
수산중공업 회장 |
20 |
김재철 |
동원그룹 회장 |
38 |
정휘동 |
청호나이스 회장 |
21 |
김진성 |
고려사이버대학교 총장 |
39 |
조규일 |
진주시장 |
22 |
김희용 |
동양물산기업 회장 |
40 |
진영환 |
삼익THK 회장 |
23 |
문용식 |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 |
41 |
최규성 |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
24 |
박영주 |
이건산업 회장 |
42 |
한성숙 |
네이버 사장 |
25 |
윤동한 |
한국콜마 회장 |
43 |
허광수 |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
26 |
윤석금 |
웅진그룹 회장 |
44 |
허명회 |
KD운송그룹 회장 |
27 |
윤영달 |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
45 |
허승호 |
대원강업 부회장 |
28 |
윤은기 |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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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명 가나다순
김준성 이수그룹 전 명예회장
한국은행 총재, 은행연합회 회장, 삼성전자 회장, 대우 회장, 이수화학 회장 등을 지낸 김준성 이수그룹 전 명예회장은 부총리, 은행장, 기업인 등으로 신망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는 빼어난 문장력과 구성력에 홀딱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천재적(?)인 소설가다. 1955년 ‘현대문학’에 ‘인간 상실’을 발표, 공식 문단에 데뷔한 김회장은 왕성하게 경제계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1997년에는 계간 ‘21세기문학’을 창간, 한국문단 다양성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공(功)을 남겼다.
정호웅 문학평론가(홍대 교수)는 ‘김준성 소설 선집’에 부치는 글에서, 김준성 소설가를 ‘후문학파’라고 펑했다. 선인생 후문학파(先人生 後文學派)의 준말이라고 한다. 금융, 정부, 경제, 기업체 등 다른 영역에서 활약하다가 나이 들어 문학에 뛰어든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를 처음 쓴 사람은 강희근 시인이라고 한다.
김준성은 ‘나이 들어(?)’ 후문학파에 기웃거린 것이 아니라, 직업적인 ‘전문학파’의 소설보다도 더 빼어난 작품을 속속 발표, 후문학파의 대가(大家)라는 평을 받았다. 소설에는 ‘금융과 경제와 기업계’의 최고위직에 몸담았던 경력을 무기로 스토리 구성이나 전개에서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경제’ 전문성을 갖고 있다.
김준성의 중편소설 ‘흐르는 돈’의 마지막 장면을 독자들과 함께 잠시 읽어보아도 그 빼어난 문장력과 구성은 역시 ‘압권(壓卷)’.
김준성 중편소설 ‘흐르는 돈’의 주인공
박성도 회장의 돈과 재단 이야기
#1 자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결한 물이나 공기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생활에 유용한 물과 공기도 넘친다든지 오염이 됐을 때는 인간에게 지대한 재해를 가져온다. 자본도 마찬가지다. 자본은 인간의 욕심처럼 한도 끝도 없다. 장미꽃의 가시가 사람을 해칠 수 있듯이 자본도 독소를 지니고 있다. 재단 설립에 관한 서류 준비는 고문 변호사와 회계사에 의해 이미 갖추어진 상태였다….
미국에 있는 큰아들 박교수에게는 미국 현지법인의 주식을 증여했고, 둘째아들인 박사장 몫으로는 지금 회사 주식의 상당량을, 셋째아들인 기획실장에게는 다른 한 개 회사의 주식을 양여해 놓았다. 그런데도 신문과 잡지의 가십 란 공세는 여전했다.
#2 그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산마루에 올라가 돈을 산 아래로 흘려보내는 꿈이었다. 더러운 물을 산 위에서 흘려보내면 흘러가는 동안 자정(自淨)되어 산 아래에서 깨끗한 물이 되듯이, 더러운 돈도 깨끗해진다는 암시 같았다. 이 세상 모든 비리를 재벌 탓으로 돌리던 정치도, 언론도, 심지어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박성도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이 재벌 중심의 체제에 기식해왔던 현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탓이 아닐까? 이제 박성도에게는 꿈에서조차 돈을 정화시키기 위해 혼자서라도 재단 설립의 계획을 추진하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흐르는 돈’의 스토리를 간추려보면, 주인공인 박성도 회장은 경영권의 가족세습을 타파코자 전문경영인에게 회사경영권을 맡기고, 자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설립,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구도. ‘흐르는 돈’으로 ‘돈의 정화’를 실현코자 하는 박성도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바로 한국 경제계의 ‘큰 어른’으로서 김준성 회장이 생전에 남기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김회장은 말한다. “나로 하여금 문학을 하게 한 것은 세상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잠재된 예술의 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원고지에 매달려 있을 때 가장 큰 행복과 환희를 느낀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서성환 아모레퍼시픽(태평양) 창업회장
“정말 쓰던 화장품을 바꿔주는 게 맞나요?”
“몇 번 발랐는데도 교환이 된다고요?”
수화기를 내려놓을 새 없이 폭주하는 전화를 받느라 아모레퍼시픽(태평양)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1993년 48주년 창립기념일에 서성환 회장은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태평양 모든 임직원이 한없는 책임을 진다는 ‘무한책임주의’를 대내외에 선포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로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창업회장 ‘장원(粧源) 서성환 회장’의 기업가정신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오늘날 70년 전통을 이어 아름다움과 건강을 모토로 세계적인 뷰티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선대회장 서성환 회장에서 서경배 회장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아모레퍼시픽의 기업가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장원 서성환 회장에게는 어머니 윤독정 씨의 가르침이 있었다. 개성의 작은 상점, 커다란 가마솥 앞에서 암갈색의 열매 껍질을 벗겨 곱게 빻은 다음 그 가루를 기름틀에 넣고 동백기름을 짜냈다.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윤여사의 동백기름은 품질이 좋았다.
이때 개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서성환 회장은 본격적으로 가업에 매달렸다. 그의 임무는 좋은 원료를 구해오는 것. 이른 새벽녘, 해가 뜨기도 전에 서성환 회장은 길을 나섰다.
서울까지 160리 넘는 길, 낡은 자전거에 실린 보따리 속에는 도시락 세 개가 전부였다. 인삼 향이 묻어나는 개성시내를 가로질러 도회지의 흙먼지를 온통 뒤집어쓰면 서울에 도착했다. 남대문시장까지 내달려 좋은 원료를 찾느라 이곳저곳을 헤매다보면 어느새 원료 한 짐이 자전거에 실렸다.
“급하다고 실을 바늘 허리에 매어 쓰지는 못한다.” “기술은 훔쳐도 자세는 훔칠 수 없다.”
서성환 회장이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이다. 이 교훈은 서성환 회장에 이어 서경배 회장까지 현재의 아모레퍼시픽이 있게 한 정신이다.
“현재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비자들의 신뢰와 좋은 평가이며 그 첫걸음이 바로 품질이다.”
광복 후 가짜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서성환 회장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좋은 제품을 향한 고집을 이어갔고 그 결과, 첫 브랜드 ‘메로디크림’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국내최초 화장품연구실을 설립(1954년)하고 세계최초 한방화장품 출시(1966년)는 아모레퍼시픽의 품질제일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소비자가 살아야 기업도 산다”는 정신으로 6.25한국전쟁 후 수십만으로 불어난 여성가장을 화장품 판매원으로 고용하는 ‘방문판매’는 여성 일자리 창출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초록색 제복의 방문판매원을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오직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자 오랜 시간 품질개발에 전념한 서성환 회장. 그가 남긴 한마디가 내 마음을 울린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글_ 채영희 기자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회장
유한양행 창업자로서 민족기업을 올곧고 꿋꿋하게 육성하고, 이 땅을 하직하고 승천하면서도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빛을 환하게 밝혀준 유일한 박사. 언론에 비친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가 세상을 떠난(1971년 3월 11일) 후, 그를 측근에서 모셨던 유한양행 임직원들이 추모하며 올린 시(獻詩)를 보자.
햇빛보다 밝은 빛
– 고 유일한 회장님 영전에
압제받던 민족에게 용기를
질병속의 백성에게 생명의 약을
봉사에 타는 피와
희생에 타는 정신
그렇게 타던 횃불이 꺼지다니
그 불빛아래 이 땅의 의약이 싹텄고
그 불빛아래 새로운 인재가 자라니
하늘의 소명이 앞서 지치더니
오!, 고인이여 유박사님이시여
이제 뒤에 남아 기도하오니
높게 쌓인 사랑의 탑아래 기도하노니
기도하는 마음마다 피가 통하여
마련하신 터전 위에
그 불빛 영원토록 빛나리
햇빛보다 밝은 빛으로
– ‘유경(柳鏡)’ 1971. 3월호
작자가 누구인지 명기되지 않은 이 조시(弔詩)에서, 유일한 박사를 ‘햇빛보다 밝은 빛’으로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유일한’이라는 자서전에 의하면 “유일한 박사가 유한양행을 창업한 이후 45년간을 오너와 동시에 최고경영자로 재임하는 동안 유한에 몸을 담은 임원은 모두 40명이었다”며 “유한의 역사가 창업기, 성장기, 시련기, 재흥기, 약진기 등 45년이라는 기복 많은 긴 세월에 비추어볼 때 임원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45명이었다는 것은 임원진 변천이 별로 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유일한 박사의 용인술(用人術)이 사람을 신뢰하고 동지적 결의로서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주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유한에 몸을 담은 임원들은 오너이면서 최고경영자인 유일한의 기업경영과 용인술에 깊이 매료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리라!
“오늘은 무슨 벼락이 떨어질 것인가?”하고 전전긍긍하면서도 “회장실 문을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방금 얻어맞은 기합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면서도 “유한에 몸을 돌리기는커녕 애사심과 존경심을 굳게 할 수 있었던 자력(磁力)은 바로 유일한의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경영능력에 비롯된 것이었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을 키우는 것은, 같은 배를 탄 인간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유한양행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종업원이라고 생각했다.
인류의 성자(聖者)인 슈바이처 박사는 “나는 생명에 봉사함으로써 세계에 대하여 뜻있고 목적이 있는 삶을 다하겠다”고 말했는데, 유일한 박사는 1971년 3월 11일 영면하면서 유언장에 이런 단호한 글을 남겼다.
“나의 전 재산 학교 재단에, 아들엔 한푼 없이 ‘자립하라’, 손녀=현금 1만 달러, 딸=묘지 주변 땅 5천평….”
유일한 박사도 슈바이처처럼 이 땅의 진정한 성자(聖者)가 아닐까.
글_ 박동순 편집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전 명예회장
고 이동찬 코오롱그룹 전 명예회장은 선친인 고 이원만 창업회장과 함께 한국의 섬유산업을 개척해온 ‘선구적 경영자’다.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인 중에서 ‘정직한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마도 우리나라 대기업 경영자 중에서 ‘정직한 경영인’이라는 평을 받은 인물은 그가 최초일 것이다. 코오롱그룹 안에서는 물론, 코오롱그룹 밖에서도 그는 대한농구협회 회장, 경총 회장, 섬유산업연합회 회장, 골프협회 회장, 한일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 등을 맡으며 우리 사회 곳곳을 밝게 하는 ‘빛’과도 같은 역할을 조용히 수행해왔다.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을 14년 동안 이끌어오면서, 자신의 성격처럼 조용하고도 편안한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정부를 향해선 따끔한 직언도 서슴지 않은 경제원로로 기억되고 있다.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선친에 이어 1957년 코오롱을 설립하고, 1996년 아들 이웅열 코오롱그룹 당시 부회장에게 회사경영을 넘기며 은퇴하기까지 37년간 코오롱그룹을 ‘지속가능성장’ 기업으로 발전시켜왔다. 은퇴 당시 그는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만들어 입힌 것, 경총 회장으로 노사화합에 기여한 것,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코오롱 소속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일 등등이 가장 보람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복(福)있는 경영자다. 기업(企業)에서도 성공했고 화업(畵業)에서도 아마추어를 넘는 프로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1992년 고희전(古稀展), 2001년 팔순전(八旬展), 2009년 미수전(米壽展) 등을 열며 화단(畵壇)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1년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자신의 호(우정:牛汀)에서 따온 ‘우정 선행상’을 만들었다.
“선행은 모래에 쓰고 악행은 바위에 새겨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행은 그만큼 쉽게 잊힌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의 선행을 모래가 아닌 바위에 새기고 싶습니다.”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또한 한국골프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내셔널타이틀인 ‘코오롱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2003년 이후 ‘우정힐스’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토너먼트코스로 꼽히는 ‘우정힐스’는 그 이름에 고 이동찬 명예회장의 아호인 ‘우정(牛汀)’을 모시고 있다. ‘우정’은 ‘물가의 소(牛汀)’라는 뜻이다.
이웅열 회장은 2018년 ‘코오롱글로벌’ 61주년을 맞아 ‘과천시대’에 이어 ‘마곡시대’를 열었다. 1997년 과천에 둥지를 튼 지 21년 만에 헤드쿼터를 마곡지구로 옮겨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할 체제를 갖춘 것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 코오롱생명과학, 코오롱글로텍 등 3사의 본사 및 연구개발 인력 약 1천500명이 입주한 마곡 신사옥의 ‘원앤온리타워’ 명칭은 이회장이 지난 1996년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내놓은 취임 일성이기도 하다.
이회장은 무한경쟁 시대에 생존하려면 한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 한다는 ‘원앤온리’를 그룹경영의 비전으로 강조해왔다. 평소 ‘소통(疏通)은 심통(心通)’이라는 이웅열 회장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통경영이 코오롱그룹의 21세기를 활짝 열어나가기를 바란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기업은 영원한가? 호암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이에 대한 답은 “노(No)”라고 단언하고 있다.
영원은커녕 짧으면 10년, 20년, 길어서 40, 50년의 사이클로 소장(消長)하고 있다.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는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애 중에서 기업경영에 바칠 수 있는 경영수명도 30~40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산업계의 실정을 돌이켜보면 경제ㆍ산업개발이 본격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개별적인 기업의 부침(浮沈)은 물론 기업그룹의 소장(消長)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심했다.
번영을 구가하던 기업그룹이 어느 사이엔가 쇠퇴하는가 하면 소멸의 길을 걷곤 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기업그룹이 탄생하고 그리고 그것은 얼마 안 가 내리막길을 걷기도 했다.
여기에는 최고경영자의 자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평소 어떠한 사람이 사장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본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떠한 사람이 사장이 되어야 하느냐?
첫째,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하고
둘째, 탁월한 지도력을 구비하고
셋째, 신망을 받는 인물이어야 하며
넷째, 창조성이 풍부해야 하고
다섯째, 분명한 판단력을 갖추고
여섯째, 추진력이 있어야 하고
끝으로, 책임을 질 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이병철 지음 ‘호암자전’에서
세상엔 이런 조건을 모두 겸비한 인물이 드물다. 따라서 조직력으로 다양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조화되어 서로 보완적으로 협력하면 능히 그런 경영체(經營體)를 만들 수 있다. 이런 경영체제가 확립되면 사장 이하 전 임직원은 단단한 정신무장으로 회사를 이끌어갈 수 있다.
기업은 항상 새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의한 변신(變身)을 통해 부단히 성장ㆍ발전해야 한다. 기업의 인재들 또한 끊임없는 교육과 연수를 거쳐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왕성한 기업가정신과 기술개발이 없어서는 안된다. 시대를 앞지르는 정확한 통찰력과 왕성한 창조적 의욕을 꾸준히 갖고 있는 경영만이 기업을 성장ㆍ확대시키고 기업의 생명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삼성이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설탕ㆍ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에서 출발하여 전자ㆍ석유화학ㆍ조선ㆍ기계 등의 중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으로, 삼성은 그 업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면서 근년에는 반도체ㆍ컴퓨터ㆍ산업용 전자기기ㆍ유전자 공학 등 세계 최첨단의 산업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삼성이 걸어온 길은 그대로 한국산업사의 구조전환의 과정이었다. 창업자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거듭 강조하고 싶다. 기업은 결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변화에의 도전을 게을리 하면 기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쇠퇴하기 시작하면 재건하는 것은 지난(至難)하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HDC) 전 명예회장
1967년은 한국경제사에서 꼭 기록해둘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그해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자동차가 설립(1967년)되고 초대 CEO로 정세영 사장이 취임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현대 포니가 개발됐고, 1976년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세계 시장에 포니가 수출되면서 그에게는 애칭으로 ‘포니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 명예회장을 지낸 후, 1999년 자동차업계를 떠나 오늘의 HDC그룹인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활약했다. 다음 글은 현대자동차의 ‘계동 사옥을 떠나면서’ 정세영 명예회장이 남긴 글이다.
“지금까지 현대자동차를 이끌어오는 동안 내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회사가 시련에 처했을 때 애사심으로 최선을 다해준 중역들 그리고 묵묵히 땀흘려준 모든 직원과 근로자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특히 큰형님(정주영 현대 창업회장)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큰형님은 부모님 이상으로 사랑과 용기를 주셨으며,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었고, 자동차산업이라는 중차대한 사업을 맡겨 보람있는 생을 살도록 뒷받침해 주셨다….
자동차를 떠난 다음날(1999년 3월 6일), 나는 강남구 삼성동 현대산업개발(HDC로 부름) 15층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HDC는 주택부문이 전체 매출의 70% 가량 차지하고 있는 주택건설업체다.
나로서는 1957년 현대건설에 첫 입사한 이후 건설회사와는 40여년 만에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이다. 함께 현대자동차를 떠난 몽규(현 HDC 회장)가 회장으로 경영의 책임을 맡고, 나는 명예회장으로 2선에서 자문하는 일만 했다. 지난 32년 동안(1967년 현대자동차 사장 취임) 자동차 회사를 경영해오면서 나는 가급적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해왔으며, 공평하고 곧은 길을 지향하는 ‘정도경영(正道經營)’을 소신으로 삼아왔다. 원칙을 지키는 경영을 지향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 정세영 지음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에서
1999년 4월 28일, ‘에쿠스’ 신차발표회가 열린 날이었다. 정명예회장은 그 자리에 참석할지 말아야할지 난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그와 전 사원들이 정성을 기울여 만든 ‘현대’ 차였기에, 그의 마음은 이미 에쿠스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손은 시승차(試乘車)의 핸들을 잡고 있었다. 국내외에서 지금까지도 그를 ‘포니정(Pony Chung)’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 세월 현대자동차 포니로 대변되는 말(馬: pony)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의 자동차왕 ‘포니정’은 말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말에서 내렸다.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있으면 스스로의 오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말의 기사(騎士)가 바뀌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오류와 잘못을 고친다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리될 때 현대자동차는 더욱 훌륭한 준마(駿馬)로 커나갈 것이다. 허허벌판 울산 땅에 기둥을 세운 이후로 함께 땀과 눈물을 흘려준 모든 현대자동차 가족들, 자동차밖에 모르고 살아온 세월을 곁에서 꼬박 지켜준 아내, 국내외 출장 다니느라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하는 사이에도 건강하게 자라준 자녀들, 그들이 있기에 자동차 회사를 떠난 지금도 나의 ‘네 바퀴 인생’은 건재하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
한라그룹의 역사는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궤(軌)를 같이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의 출발과 똑같은 연도인 1962년, 운곡 정인영 회장에 의하여 ‘운명처럼’ 현대양행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공업그룹으로 탄생한 한라그룹은 오늘날 조선, 중공업, 자동차부품 및 건설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중공업그룹으로 발전했다.
운곡 정인영 회장은 원래 신문기자로부터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이른바 ‘해방전후사’의 혼란기에 인생의 진로를 고심하다가 ‘역사의 기록자’가 되기 위해 신문기자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의 명문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영어과를 수료하고 귀국한 열혈청년(熱血靑年) 운곡 회장은 1947년부터 동아일보 맹렬 기자로 뛰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된 긴박한 상황이었다. 정부 발표를 토대로 동아일보는 6월 26일 ‘괴뢰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정예 국군, 적을 요격 중’이란 제목의 호외를 뿌렸다.
그날 아침, 정인영 기자는 황급히 “외국기관들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편집국 기자들 사이에 “이제 취재는 불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왔고, 인쇄 문선공들도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인쇄는 나 스스로가 할 수 있다”며 정인영 기자가 나서서 동료들과 함께 윤전기를 돌려 6월 27일, ‘적(敵),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란 제목의 호외 300부를 찍고 지프차를 빌려 서울 시내 곳곳에 직접 배포했다. 이는 전쟁 발발 직후 서울의 전황을 알린 최후의 호외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생활은 1950년 6.25사변으로 3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당시 아오야마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던 정인영 기자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출입하며 ‘역사의 기록자’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1991년 3월 20일 ‘상공의 날’, 운곡 회장은 “한국의 중공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는 80년대 초 ‘중공업 입국(立國)’의 꿈을 안고 준공을 앞두고 있던 창원공장을 빼앗긴 지 10년 만에 다시 재계 30위권에 들어선 시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갖은 불명예를 깨끗이 씻어내고 기업인 최고의 ‘명예의 전당’인 금탑산업훈장을 가슴에 달았으니 이는 생애에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었으리라! 운곡 회장은 큰 체구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각, 사고방식, 행동, 사업구상만큼은 ‘중후장대(重厚長大)’ 형이었다. ‘중후장대’란 문자 그대로, 운곡 회장은 무겁고 두텁고 길고 큰 길을 걸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운곡 회장은 훗날 뇌졸중에 걸린 이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끊임없이 해외출장을 다녔다. “시련은 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부도옹 운곡 회장은 몇 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재기한 것이다.
최근에는 2세 경영자 정몽원 회장에 의하여 IMF 당시 외국계 자본에 매각했던 만도를 다시 인수, 옛날의 영광을 되찾았다.
오늘날 만도가 세계 50대 자동차부품 회사로 성장했으니 운곡 회장도 지하에서나마 기쁘게 생각하리라!
글_ 박동순 편집인
정인욱 강원산업 창업회장
여기에 ‘원리원칙’대로 살다 간 한 기업인을 소개코자 한다. 강원산업을 창업한 정인욱 회장 이야기다. 1912년 황해도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채광야금(採鑛冶金)을 전공한, 정통파 공학도 출신이다. 1945년 해방 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석탄과장으로 봉직했고, 훗날(1955년) 대한석탄공사 총재가 되었다.
‘이윤보다는 도리를, 기업보다는 나라를 앞세웠던 정인욱 회장’. 그의 부인은 평소 정회장을 가리켜 ‘완벽주의자’라고 했고, 따님들은 고생을 사서 하는 분, 즉 사전에도 없는 ‘고생주의자(苦生主義者)’라고 회상했다. 바른 길이 아니면 천만금이 생겨도 가지 않았다. ‘우리기술’, ‘우리자본’을 우직하게 고집했으니, 마지막 승자(勝者)로 남지는 못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정인욱전기편찬회(간사: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고문)가 발간한 ‘선각자 정인욱’이다.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 편찬회의 김입삼 상임고문이 따님들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신 말씀이 있으시면…?”
“아마 ‘너절한’이라는 말이었을 겁니다.” 한때 서울 장안을 온통 떠들썩하게 한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아파트 붐이 일어나기 10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이동욱 동아일보 이사는 정인욱 사장(당시)에게 압구정동 일대의 땅을 널찍이 확보할 것을 권유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이(李)이사! 나더러 그 ‘너절한’ 땅 장사를 하란 말이오?”
사실 그 무렵 강원산업은 ‘삼표연탄’ 호조로 100억원 이상 현금보유회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때 100억원 정도의 땅 구입으로, 후일 50조원 자금은 족히 마련할 수 있었다고 이동욱 씨는 훗날 아쉬워했다. “이윤이 난다면 지옥이라도 가는 것이 기업인이라는데?” 그래서 그는 ‘기업가’라기보다 ‘경세가’로 불러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우리 기술로 지하 수직갱(垂直坑: 광산이나 탄광에서, 수직으로 파 내려간 갱도)을 끝낼 무렵, 강원산업 탄광을 방문한 이병철 삼성 회장이 “정인욱 사장은 기업가가 아니라 기업수도사(企業修道士)”라고 평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정인욱 회장! 그가 미국이나 독일, 일본에서 태어났으면? 정회장의 기업관과 경영윤리관이 이 나라 정경풍토와는 너무나 괴리되었다. 그러나 그는 따뜻한 심정의 휴머니스트로 남았다. 정회장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의 마지막 구절이다.
“승자 뒤에는 패자가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기업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산업개발의 기술자요, 무명용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아(E.H. Carr)도 정인욱 회장과 똑같은 말을 했다.
“역사의 페이지에는 역사 스스로를 위해 영광스런 용사의 역할을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역할을 완수한 영웅들로 가득 차있다.”
정인욱 회장의 미완의 꿈은 오늘날 2세 경영자인 정도원 회장의 삼표그룹으로 지속가능성장의 혼(魂)을 이어가고 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기업가정신에 대해서는 TV 드라마에까지도 나올 만큼 너무나 유명하다. 우리나라 기업가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최고경영자’ 1위인 아산 회장의 ‘행복한 삶의 네 가지 조건’에서 그의 선구적인 기업가정신을 찾아보자.
“정회장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일이 많다. 사실 나도 운이 좋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반박할 기분이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운이라는 것이 특별히 나한테만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다 똑같이 평등하고 신은 인간에게 공평하다. 진 일, 마른 일, 좋은 일, 나쁜 일, 불운(不運), 호운(好運)이 누구에게나 다같이 공평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지 특별히 좋은 일만 돌아가게 선택받은 사람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운이란 ‘때’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좋은 ‘때’,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앉아 놀아도 마당으로 호박이 저 혼자 굴러들어와 주는 것은 아니며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신의 여건을 불행하게만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시련 속에서도 그것이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시련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잘 발전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좋고 나쁜 면이 항상 공존하고 있고 또 그것은 밤이 낮으로 바뀌고 낮이 밤으로 바뀌듯 항상 변환한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인간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가정신의 네 가지 조건
첫째, 건강은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좋은 운 속에서 크게 발전하고 나쁜 운도 탈 없이 견뎌 행복한 일생을 살려면 우선 건강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강도 있지만 노력이 없으면 부서지기 쉬운 것도 또한 건강이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항상 투명하고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권유를 하고 싶다. 마음이 지옥이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 사람은 내가 내 주변보다 더 낫게 발전할 수도 있고 뒤떨어질 수도 있다. 더 나을 수도,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질 못하고 항상 더 낫기만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항상 질투, 질시, 투기로 불행 속에 빠져 산다.
셋째, 보다 나은 삶, 보다 나은 인간, 보다 나은 직장인, 보다 나은 발전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겠다. 똑같이 열 시간 일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 중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의 성공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일찍 출근하는 것은 고맙지만 늦은 퇴근은 달갑지 않다… 나에게 머리 좋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려면 퇴근시간에 모두 퇴근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넷째,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는 말이 있다. “뜻이 강하고 굳으면 어떤 어려운 일에 봉착해도 결단코 자신이 마음먹었던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의미이다.
– 정주영 지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편안하고 쉽게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다. 비바람, 찬서리, 눈보라, 밤이슬을 맞아가면서도 결심과 각오를 거듭 새롭게 하면서 꾸준하게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다보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아산 회장의 가르침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
‘만우(晩禹: 늦을 만, 어리석을 우)’. ‘만우’는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회장이 직접 지은 자신의 호(號)다. 만우 회장은 스스로를 “늦되고 어리석다”고 자신을 낮추었다. 그는 정말로 늦은 것일까? 일제시대라는 어둠의 시대상황 속에서 그가 처음 신학문을 접한 것이 17세였고, 중앙고보(中央高普)에 들어간 것이 19세,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을 졸업한 것이 30세였다. 기업경영의 세계에는 40세가 넘어 입문했고, 독자적인 자기사업을 시작한 것은 56세 때였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56세에 깃발을 올린 사업이 ‘동방의 샛별(曉星)’이라는 효성그룹이다.
그의 손은 마이다스(Midas)의 손이었다. 호암 이병철 회장과 동업으로 삼성에 참여한 사업은 한국재계(財界) 1위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가 창업한 효성 또한 5대그룹, 10대그룹으로 발돋움했다. 한 생애에 한국에서 두 거대기업을 만들고, 두 기업을 미 ‘포천(Fortune) 500대기업’에 진입시켰다. 그렇다면 만우 회장은 ‘재빨리 영리하게’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보다 ‘늦게 어리석게’ 기업을 경영하면서 어떻게 대성(大成)할 수 있었을까. 만우 회장은 회고록에서 이같이 단언했다.
“기업인은 왜 기업을 하는가? 우선은 이윤추구라고 대답할 것이지만, 실은 기업을 통해서 성취와 희열을 얻기 위한 것이고, 이러한 성취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인격 완성을 도모코자 사업을 하는 것이다.” 만우는 1906년 5월 20일, 경남 함안(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부락 백이산 자락)의 유교적 가풍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진주와 함안 땅은, 이병철 삼성 회장, 구인회 LG 회장, 조홍제 효성 회장 등 현대경영사 전개의 세 거인(巨人)이 태어난 지역이라고 해서, 최근 한국경영학회와 진주시 주관으로 ‘기업가정신 도시’로 명명된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치하 중앙고보 학생으로 6.10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동경 유학시절 하숙방에서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동방의 샛별”이라는 자부심으로 동방명성(東方明星)을 꿈꾸고, 경남 군북지역 금융조합장으로서 ‘17만평 자작농 창설’을 솔선수범한 만우의 기업가정신은 모두 동방의 샛별국가에서 태어난 ‘조선인’의 은근과 끈기와 성실이라는 경영이념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었다. 만우 회장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삼성에 참여했다가 그 후 섬유, 타이어, 중공업 등 당대의 시대정신인 수입대체와 수출주도산업에 헌신함으로써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효성(曉星)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만들었다. “나는 개인의 영예를 위해서 한 사업도 아니오, 부를 위해서 한 것도 아니오.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코자 사업에 임한 것이오.”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 경영자’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업을 했다는 만우 회장의 말은 오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효성그룹이라는 ‘뿌리 깊은 나무’는 훗날 전경련 회장을 지낸 조석래 회장과 조현준 회장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는다”는 옛말은, 효성의 기업정신과 닮은 것으로 보인다.
글_ 박동순 편집인
강덕영 한국유나이티드제약 회장
포천(Fortune)지가 선정한 아시아 200대 유망기업. 1987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200여종의 의약품을 제조하여 세계 4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한국인이 주인인 다국적 제약기업, 바로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이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을 설립한 강덕영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라는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전에는 포기란 없다.
“50~60대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1970년대에도 참으로 암담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실업자가 거리에 넘쳤다. 1971년 당시, 나는 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는데, 그때도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성적증명서를 20통이나 준비해 취직시험이 있다는 곳에는 무조건 지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입사한 곳이 스위스 산도스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 그 당시 나의 월급은 10만원이었다. 그때 은행에 취직한 친구들이 5만원을 받았으니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많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를 펴지 못했다. 당시 분위기가 사무직만 최고 직업으로 여겼고, 영업사원은 ‘판매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개인의원에 다니며 의약품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늘 뛰어다니며 영업을 한 탓에 구두 뒷굽을 한 달에 한 번씩 갈 정도였다.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보통 거래처를 뚫기 위해 적어도 10번 이상 병원을 방문했다. 또 찾아가고 또 방문하여 끈질기게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찌나 끈질기게 다녔는지 그 열성에 질려 거래를 터준 병원이 많았다. 한번 고객이 되면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백전불굴의 정신’이다. 이는 우리 회사의 경영이념의 기초가 되었다.”
성경 말씀에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다.
그 역시도 간절히 구하고 원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큰 것으로 열어 주셨다. 젊은 시절 큰 꿈을 가지고 많은 것을 주님께 구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두 주셨다고 한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세계 40여개국에 수출하고 매출도 1,900억원이 넘게 된 것은 모두 주님께서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강덕영 회장은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ompliance Program)을 신설하여 사내 윤리의식을 고취하고 공정경쟁을 준수하여 국가경제에 공헌할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건강에도 매진하고 있다. 강회장은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하는 기업일 때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지키신다고 믿는다. 오늘 강회장의 기도제목이다.
“주님, 나의 생각을 지켜 주시고,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글_ 채영희 기자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
범지구적 사랑을 받고 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독일VLN 24 HOURS, 미국 포뮬러 드리프드,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체코 아이스하키, 터키 농구 등의 공통점은 모두 넥센타이어가 파트너십을 맺고 후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호시절이 찾아온다”는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의 경영철학은 국내 야구팀 넥센히어로즈의 성장과 맞닿아 있고, 넥센히어로즈의 선수들이 성장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면 넥센타이어의 글로벌화를 보는 것만 같다. 넥센타이어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프로야구 마케팅 전략으로 브랜드 이미지와 함께 매출신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초기 구단운영의 재정, 성적 등 우려의 시각도 있었지만 글로벌 타이어업계 후발주자로서 감수해야 할 리스크라고 판단,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진짜 히어로(Heroes)를 만들고 있다. 이런 강호찬 사장의 인내와 미래를 보는 안목은 부친인 강병중 회장의 경영철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1960~1970년대 부산 경제의 주축이던 합판, 고무 등 전통 산업이 위기를 겪으며 새로운 성장동력 마련이 절실했다. 자동차와 금융 산업을 유치하면서 부산의 산업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꿨듯이 이제 새로운 성장 산업을 준비할 때다”
“제가 골프를 시작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초보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골프를 하면서 ‘천, 고, 마, 비’라는 개념을 일상생활, 인생에도 적용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즉, 천천히, 고개 들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골프를 치면 잘 맞더군요. 생을 살면서도 너무 서두르지 않고, 조금 잘 나간다고 으스대지 말고 항상 낮은 자세로 묵묵히 나아가는 겁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 발 후퇴했다가 두 발 전진하는 겁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보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기업도 잘 되더군요.” – 강병중 회장
2015년부터 후원하고 있는 영국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시티는 유럽에서의 넥센타이어 인지도 상승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구단주와의 인연으로 UAE 국부펀드인 ‘무바달라’로부터 투자유치까지 받아 글로벌 TOP 10 타이어 회사로 성장한다는 목표달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넥센타이어의 유럽 공장이 지난 9월부터 시험 가동을 시작했다. 체코에 위치한 유럽 공장이 본격 가동을 시작하게 되면 유럽 내 넥센타이어의 사업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라 기대된다. 넥센타이어는 지난 9월 유럽 R&D 센터와 독일 소재 영업/마케팅 부문을 신축 건물로 통합 이전했다. 올해 말 미국연구소도 신축 건물이 완공될 예정이며, 내년 상반기에는 마곡 중앙연구소의 준공도 앞두고 있다. 넥센타이어는 생산, 연구, 관리 등 전 부문에 대한 투자와 조직 강화를 통해 제 2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넥센타이어 하면 스포츠마케팅 이외에도 제조업계 제일의 협력적 노사관계가 떠오른다. 장장 27년 연속 무분규를 실천하고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강사장은 “노사가 서로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면 신뢰가 쌓인다”고 당연한 듯 강조한다. “노사관계에서 상호신뢰가 우선이며 어떠한 현안도 노조와 먼저 상의한다”는 강병중 회장의 상생의 정신이 회사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약속장소, 회식장소, 쇼핑장소를 정할 때 음식이나 제품의 퀄리티(Quality) 만큼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화장실 문화’다.
“하루만 건물 화장실 청소를 아무도 안 해보세요. 화장실 갈 거 같아요? 아무도 안 가요.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세요? 우리가 말하는 ‘아줌마’인데 그분들이 없다면 우리 삼구아이앤씨도 없습니다. 청소하는 아줌마, 아저씨도 ‘여사님’, ‘선생님’으로 깍듯이 부릅니다. 모든 사람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직원들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고, 하는 일에 관계없이 모든 직업은 중요하다고 믿는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의 말이다. 1968년 창립하여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삼구아이앤씨는 아웃소싱전문기업으로 PM컨설팅(임대차 및 투자관리), FM컨설팅(미화, 시설관리, 조경), 보안컨설팅, CL컨설팅(공급망 및 창고관리) 및 실버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업계 ‘초일류’회사다.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와 감동을 선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2만5천여명의 전직원을 ‘정규직’으로 품고 있다.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책가방 대신 구두통과 아이스크림통을 매고 다니며 스스로 학비를 벌었고, 야간고등학교를 나와서 취직을 포기하고 자본금이 필요 없는 청소대행업을 시작한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은 반세기 경영 동안 다음과 같은 ‘인격존중’의 기업가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기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업이 바로 사람인 셈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기업문화의 기본적 바탕은 바로 인격존중에 있습니다. 사장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남의 의자에 않지 않지요. 이러한 원칙은 현장이나 본사직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또한 현장직원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 회사 원칙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머리에서 향기가 난다’는 얘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는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머리에서 나는 향기로 전해질 수 있다는 거죠. 이처럼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임직원 모두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극복하고 회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구아이앤씨의 특징은 사업 출발부터 전 직원을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하는 정규직화한 것이다. 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운영하면 퇴직금과 보험료 등 20%의 지출을 줄일 수 있지만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은 정규직을 고집했다. 청소와 경비 등 삼구아이앤씨의 주력 사업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 아니어서 비정규직 사원으로 운영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화장실을 청소하고 밤새 경비 서는 일처럼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직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정규직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
사람의 가치와 일의 자리를 소중히 생각하는 정신으로, 지금은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의 기업가정신이 산업계의 표본으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
글_ 이희규 기자
권영세 안동시장
1조원 안동시. 2017년 안동시는 1회 추경을 통해 안동시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살림살이 1조원 시대를 열었고, 올해는 본예산 1조원 시대를 열었다. 10% 초반의 재정자립도에도 불구하고 기획재정부 등 중앙부처와 경상북도를 동분서주 발로 뛰며 사업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한 권영세 시장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권시장은 “정부시책에 부응하는 다양한 아이템을 발굴하고 정치권과도 유기적으로 협조해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고 ‘2년 연속 보통교부세 전국 최다’를 확보한 것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며 “안동시민, 국민 여러분과 함께 자축하고 싶다”고 겸손하게 대답한다.
또한 “경상경비 절감과 함께 불요불급한 사업, 성과가 부진한 사업은 과감히 축소하거나 폐지해 여기서 발생한 잉여금으로 지방채 등을 조기 상환하면서 ‘채무제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는 권시장을 보면, 법학과 행정학을 공부한 그에게서 ‘선택과 집중’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정신문화의 고향인 안동시는 옛것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인 산업·지역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경북도청이전 2단계 사업과 ‘원도심·신도시’ 상생발전은 범국민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경북도청 신도시는 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 일원 10.96㎢에 걸쳐 2027년까지 3단계로 나누어 추진되고 있다. 특히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2단계는 주거와 상업업무시설, 테마파크, 의료시설, 복합물류센터 등 도시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으며 3단계는 2027년까지 대학, 레저, 산업단지를 조성해 인구 10만명의 신도시로 조성하겠다는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 원도심과 신도시는 상호 보완적인 역할분담을 통해 상생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핵심목표로 하며 신도시는 경상북도 균형성장을 견인하는 신성장거점으로 조성하고, 원도심 활성화를 담당할 행정조직을 꾸려 공동화에 대응하고 있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서는 도시재생사업과 안동역 이전에 따른 폐역사 부지활용, 낙동강 시민공원 명품화 등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원도심과 신도시 상생발전의 열쇠가 될 직행로 건설도 서두르고 있다.
“저의 생애의 화두는 마부정제(馬不停蹄)입니다.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겠다는 것이죠. 도청 이전이 저절로 안동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만큼 올해는 지난 성과를 바탕으로 ‘경북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세우면서 ‘안동가치 확산’에 매진코자 합니다. 신도시와 원도심 상생발전, 중앙선복선전철 개통에 대비한 서울-안동간 78분 시대 준비, 3대 문화권 사업, 안동문화 세계화, 바이오산업단지 확장과 백신 클러스터 조성, 한의신약 거점단지 조성, 농업경쟁력 확보 등 더 크고 먼 미래를 보며 안동시정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 권영세 시장 2018년 현대경영 인터뷰
안동은 이미 세계유산 하회마을과 기록유산 유교책판을 보유하고 있어 인류무형유산만 등재되면 세 가지 카테고리를 완벽하게 보유한 최초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안동시가 주도해 설립한 세계탈문화예술연맹을 통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국내 12개 탈춤과 묶어 ‘한국의 탈춤’으로 2019년 1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계획도 있다. 곧 울려 퍼질 안동시의 팡파르(fanfare)를 범국민적으로 기대해 보자.
글_ 이희규 기자
권오현 삼성전자·삼성종합기술원 회장
삼성전자의 경영구루(guru)요, 기술구루(guru)인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이 오묘한(?) 책을 펴냈다.
책의 제목부터가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格)’이라는 부제를 부친 ‘초격차(超格差)’다. 초격차(超格差)이지 초격차(超隔差)가 아니다.
권회장은 본래 ‘초격차’란 단어에서 ‘격(隔)’은 ‘사이가 벌어지다’, ‘멀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 책에선 ‘자격이나 지위 등이 서로 다른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격차(格差)란 단어의 격(格)에 더 집중하여 집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면서 경험한 교훈, 그리고 초격차를 향해 시도해봤던 경험 등을 정리해 공유하는 것이 삼성의 ‘후배 경영자’에 대한 도리라고 판단, 이 오묘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권회장은 이 책을 쓸 때 “삼성 반도체를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려놓는 과정에서 추진했던 전략과 전술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싶었지만,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사업의 성격이나 기술적인 설명을 자세히 해드릴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권회장의 기업가정신과 삼성의 기업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살아있는 노하우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1983년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삼성이 반도체사업에 진출한다는 선언이었다. 다수의 국내외 정책기관들은 이 결정에 모두들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연구인력도 없고 생산경험도 없으며 연구개발을 위한 인프라도 부족해서 반도체라는 첨단기술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스탠포드에서 공학을 전공한 저조차도 삼성이 메모리를 개발하겠다는 발표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으니까요. 바로 그때가 1985년, 제가 삼성 반도체에 입사한 해였다. 당시 한국 내에는 반도체를 연구한 사람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리콘밸리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인력들을 현장에서 채용하여 메모리 반도체 개발을 시켰다. 저도 그렇게 입사했다.
당시 세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일본이 주도하고 있었다. 삼성은 개발과 생산, 시장점유율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의 경쟁사보다 수년이나 뒤처져 있던 후발주자였다. 그래서 최고경영자와 연구원 모두 회사 존립의 위기감을 갖고 일해야만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건희 회장의 뚝심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한국 반도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투자를 결행했던 그의 ‘기업가정신’이 현재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저를 포함한 모든 삼성 반도체의 임직원들은 아침마다 ‘반도체인의 신조 10개 항목’을 외치고 일을 시작했다. 세계 반도체시장의 일원으로 살아남겠다는 저희의 간절한 바람이자 다짐이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중 두 가지 구호는 지금도 제 삶의 신조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 권오현, ‘초격차’에서
•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Never give up!
• 큰 목표를 가져라!
Aim high!
역시 단순함에 힘이 있다. 정말로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큰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그 꿈이 현실이 된다.
글_ 박동순 편집인
김광석 참존화장품 회장
“남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그것을 오직 내가 찾아내자.”
김광석 참존화장품 회장이 오래 전 연구노트에 쓴 글귀다. 뭔가 한가지만큼은 남들이 따라 오지 못할 정도의 전문성을 갖추자는 것, 그것이 오직 한길!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온 참존의 탄생 스토리다. 1984년 기초화장품의 연구개발을 시작한 이래, 기초화장품 품질개발에 지속적인 개발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도, 30여년간 기초화장품 전문기업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저력도, 모두 다 여기서 출발한다.
김회장이 국내최초로 개발한 ‘클린싱 워터’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사람들은 “물이 무슨 화장품이냐. 물은 물일 뿐이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식 발상이다. 팔릴 제품을 만들어야지 연구비만 날리게 생겼군. 큰 화장품 회사들이 만들어 성공한 유사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도 없고 시장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회사에서 이런 무모한 신상품을 만들다니… 이건 돈키호테적인 발상이다”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김회장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승부처다. 대형회사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분야를 우리가 개척하려는 것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항상 2등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김회장은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확신과 믿음(하나님께서 주신)으로 30만개의 샘플을 만들어 대리점에 돌렸다.
“백문불여일실험(百聞不如一實驗)” – 즉 백번 들어도 한번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샘플(sample)만 써 봐도 알아요”
참존은 막대한 광고비를 쓰는 대신 공장견학을 온 방문자들에게 샘플을 나누어 주어 잠재적 고객들이 직접 샘플을 써보고 난 다음 화장품을 선택할 수 있는 마케팅전략을 채택했다. 품질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각종 매체를 통한 광고전략보다 샘플전략이 훨씬 더 많은 고객을 창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이 샘플전략이야말로 오늘의 참존을 만든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김광석 회장은 기초화장품의 연구개발(R&D)에 핵심역량을 집중하여 ‘기초화장품만은 참존이 최고’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참존은 ‘고객은 왕’이기보다는 ‘고객은 신(神)’이라는 서비스 신념으로 고객만족, 고객감동에서 나아가 고객성공과 고객행복을 창조하는 서비스를 실천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회장은 어려운 고비가 올 때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때론 선택의 방향을 묻기도 한다. 그의 ‘기업가 정신’의 주인은 하나님으로 매사에 감사하며 청지기정신으로 겸손하다. 그의 감사기도는 새로운 성공을 만드는 동력이 되고 있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기업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제게 넘치옵니다. 새벽기도는 인생의 금광임을 고백합니다.”…
글_ 채영희 기자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처음’은 있다. 자기 자식의 첫 걸음마를 보는 부모의 마음, 첫사랑에 빠지고 첫 입맞춤을 나누는 청춘남녀의 마음, 첫 출근과 첫 월급날의 마음……. 어쩌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바로 그 소중한 ‘처음’들이 아닐까. 나에게도 그 소중한 첫 순간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가장이 되고 하는 개인적인 날들이야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고 남다를 것도 없다. 다만 경영반세기 동안 약품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 분야에서 겪은 일들이 특별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선 고향에서 형이 약방을 열었을 때 처음으로 여러 가지 약들을 만난 그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약들이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는데, 돌이켜 보면 내 평생의 직업이 된 제약사업과의 인연의 끝은 이미 그때 그 순간과 닿아있었다.
보령약국을 개업하고 처음 간판을 걸었을 때 그 가슴 두근거리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 듯하다. 첫 손님을 받아 약국 영업을 시작한 후 수많은 고객들이 보령약국을 찾아주었고 나는 그 고객들의 성원을 바탕으로 꿈에도 그리던 제약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동영제약을 인수하여 제약업을 시작하였고 우리 집 마당에다 공장을 마련하여 제품생산을 시작했다. 약국에서 제약으로의 변신이었고 내 인생 가장 소중한 도전이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던 그 순간만큼 잊을 수 없는 ‘처음’도 없을 것이다. 제약업의 꿈을 이루며 처음 약품을 생산했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처음’이었다. 1963년 11월에 동영제약을 인수하여 서울 종로구 연지동 공장에서 처음 제품을 생산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64년 2월이었다. ‘오렌지 아스피린’이 바로 첫 생산품이었다. 그 제품의 탄생은 곧 내가 제약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엄숙해야만 될 것 같았다.
제조업이 되었건 서비스업이 되었건 기업을 경영하는 모든 분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름아닌 의약품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의약품은 곧 사람의 소중한 건강과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제품이었다. 따라서 나는, 제약인은, 그 어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보령약국을 운영하며 제약업의 꿈을 키우던 매순간마다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나는 첫 제품이 생산되었을 때 내 마음 속으로 거듭 다짐을 했다.
사업이 어려워서 그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결코 장삿속으로 약을 만들지 않겠다고!
사업이 성공을 하건 못하건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생각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오렌지 아스피린은 500mg짜리 100개씩으로 포장되어 출고되었다. 나는 평생 처음 만든 그 제품을 포장하며 박스 안에 내 결심까지 함께 담았다. “내가 제약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겠노라….!”
글_ 박동순 편집인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세나인(mecenat人)인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이 드디어 한국메세나협회 회장에 취임했다(2018년 2월 8일). 김회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술, 음악, 조각, 건축, 연극에서 와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방위적인 문화예술 애호가로, 재계에서도 그의 메세나협회 회장 취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원래 일신방직은 김영호 회장의 선친인 김형남 박사가 설립했는데, 김박사는 경제계와 학계 및 기독교계의 원로로서, 일신방직 회장과 숭실대 총장, 이사장을 지낸 우리 사회의 지도자이시다. 평양 숭실대에서 수학한 김형남 박사는 일제시대인 192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켄터키주 웨스레안대학 화학과에서 공부했고, 다시 공예화학의 명문인 미 프랫대(Pratt Institute) 공대 4학년에 들어가서 페인트, 피혁, 도금 등을 배웠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박사는 외지인 미국생활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 저를 당신의 품꾼으로 써주소서(행 22:7-10)”라는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란 역시 기적을 창출하는가? 김형남 박사가 프랫대에서 공부할 때 예상치 않게 단조학(鍛造學)을 배우게 되었다. 김박사는 담당교수를 찾아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 저에겐 단조학이 필요 없다”며 과목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담당교수는 “대학이란 쓸모없는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니 배워두라”고 권했는데, 단조학 공부는 훗날 그가 방직회사를 경영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됐다. 프랫대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대학의 교훈(校訓)을 자신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게 된 것이다.
“Be true to your work and your work be true to you.”
“그대가 하는 일에 충실하면 일도 그대에게 충실할지니.”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섬김을 다하라! 선친 김형남 박사의 좌우명은, 훗날 선친의 권유로 역시 프랫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귀국 후 일신방직 최고경영자에 오른 김영호 회장의 좌우명으로 계승되었다. 일신방직에는 이런 미담이 전해진다. 1945년 해방 후 기독교계 지도자로서, 김형남 박사가 전남 광주의 방직공장 책임자로 일할 때다. 하루는 총무부장이 결재서류를 올렸는데 한 여자종업원을 해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종업원이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 김박사가 총무부장을 불러 물었다. “그녀가 공장에서 나간다면 어디로 간다고 하오?”
“경상남도에 사는 오라버니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녀가 우리 공장에 들어온 지는 몇 년이 되었소?”
“왜정(일제시대) 말부터 근무했으니 3년경 됐지요.”
김형남 박사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폐결핵으로 우리 공장을 떠나면, 오라버니는 받아주겠지만 올케가 받아줄까?
“내가 6개월 요양원 비용을 주겠으니 치료케 하고 병이 나으면 공장에서 일하게 하시오!”
부전자전(父傳子傳)! 김형남 박사의 인본주의 경영과 김영호 회장의 문화예술경영은 오늘날 ‘정직하고 근면한 일신피플(People) 문화’로 정착, 우량기업의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김 윤 삼양그룹 회장
100년을 바라보는 장수기업(長壽企業) 삼양그룹을 가리켜 ‘안정적’ 또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삼양그룹은 1924년 설립 이래 약 100년의 기간 동안 한 번도 진화를 멈춘 적이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 단지 세월의 두께가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변화의 폭이 작아보였을 뿐이다. 삼양그룹 발전의 키워드는 따라서 거시경제학에서 말하는 ‘안정성장(stable growth)’ 전략이 아닐까.
삼양의 기업문화는 창업자 수당 김연수(秀堂 金䄵洙) 선생의 ‘수당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이란 모름지기 이익을 위한 집단에 그쳐서는 안되며, 국가와 사회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고 부국(富國)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수당정신의 키워드! 삼양은 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양심적이고 착실한 기업경영, 양보다는 질적발전을 추구하는 이른바 중용(中庸)의 정신으로 기업을 발전시켜 왔다.
김윤 삼양그룹 회장은 이같은 오랜 ‘삼양정신’을 이어받는 한편, 21세기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조건에 부합되는 전향적인 변신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삼양그룹은 그룹의 핵심역량을 ‘식품, 화학, 패키징, 의약바이오’ 등 4대 사업부문에 집중, ‘글로벌화, 스페셜티(specialty)화, 신사업화’를 추구, 다가오는 2020년까지 매출 5조5천억원을 달성하겠다는 그랜드비전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삼양그룹 성장전략의 핵심은 대내외 간 협업으로 경영 전반을 혁신하는 소위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다. 김윤 회장은 내부소통을 활성화하고 국내외 각종 연구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당부하며 변화와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 경기도 판교에 삼양디스커버리센터를 개설하고, 김회장이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혁신의 헤드쿼터(headquarter) 역할을 하고 있다.
김윤 회장은 디스커버리센터 준공식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커다란 패러다임 전환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칸막이식 사업구조로는 도약할 수 없다”며 “개방형 혁신으로 100년 기업의 초석을 다져나가자”고 당부했다.
삼양그룹은 1천500억원을 들여 센터를 지하 6층~지상 9층 규모의 연구·사무시설 ‘메카’로 조성했다. 이에 따라 서울, 인천, 대전 등에 흩어졌던 삼양그룹의 식품, 의약바이오 부문 연구개발(R&D)과 마케팅 인력 400여명이 한자리에서 일하게 됐다. 삼양디스커버리센터는 바로 삼양을 100년 기업으로 도약시키겠다는 김회장의 ‘열정’을 상징하는 연구개발센터다.
김회장은 올해로 창립 94주년을 맞이한 삼양그룹 3대 최고경영자로서 1985년 삼양사에 입사, 안정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으로 이른바 ‘오래된 미래’의 훌륭한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6년 후(2024년)가 되면 삼양그룹은 세계적인 ‘100년 장수기업’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김회장은 100년 기업의 비전과 관련, “자기 자신을 잘 알고, 감당하기 힘든 것을 넘겠다는 과욕을 부려서는 안된다”며 “분수를 지키는 경영”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한국현대경제사를 이끌었던 사업가 중 1.5세대-2세대에 속하지만, 가장 1세대적인 특징을 지닌 분이다. 1세대 사업가의 특징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이다. 그를 평가하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는데 그는 시작단계부터 세계적(global) 사업을 시작한 예외적인 기업인이다”
– 언론인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김재철 동원그룹과 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가다. ‘기업가정신과 경쟁’ 전문가로 유명한 미 뉴욕대의 이스라엘 커즈너(Israel Kirzner) 교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회를 기민하게 인지하고, 포착하는 능력”을 기업가정신이라고 정의했는데, 김회장은 일본에 이어 한국도 ‘원양어업 강대국(强大國)’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민하게 인지하고 도전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기업가정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보는 이유다. 김회장은 일본의 원양산업이 당장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과 국민들의 의식변화로 곧 사양길에 접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또한 고도성장으로 인하여 일본의 참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았다.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절묘한 ‘신사업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최근 경영학계와 벤처기업계를 중심으로, 김재철 회장을 ‘한국벤처기업가 1세대’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벤처기업이란, 첨단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업가가 높은 기대수익을 확신하고 (또한 높은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새로운 사업을 위해 설립하는 기업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 전야(前夜)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또한 위험이 컸던 원양어업은 바로 그 시대의 벤처기업이었다. 1960년대 당시의 우리나라 연근해어업은 원시산업이었고, 원양어업은 첨단산업이었다. 한국의 어업은 1960년대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 노후선박을 빌려서 제주도를 넘어 오대양으로 진출하는 기개와 전략과 열정을 가졌던 김재철 회장이야말로 한국 벤처기업의 원조기업가로 불려야 할 것이다.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 실현
1969년 김재철 회장이 제정한 동원산업의 사시(社是)다. 종업원이라야 불과 수삼명의 ‘구멍가게’형 회사가 내걸었던 당찬 기업이념이다. 동원산업의 경영이념은 출발부터가 ‘글로벌 시장’이었고,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성실한 기업활동과 사회정의를 모토로 하는 김회장과 동원산업은 납세에서도 선구자였다. 1990년 11월, 62억3천800만원이라는 거액의 증여세를 납부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증여세 관련 단일 신고세액으로는 사상 최고액이었다.
그의 증여세 기사는 해가 바뀐 1991년 3월 8일, 국민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한 기업인이 결코 적지 않은 돈을 기꺼이 법에 따라 납세했다”는 기사를 내보내며 알려지게 되었다. 김회장 측은 언론에 알려지기를 거부했으나, 국세청이 나서서 알렸다고 한다.
대양에서 생사를 넘나든 바닷사람은 “쩨쩨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는 김회장의 기질을 잘 말해주는 사례다. 그는 경제계의 대인(大人)이다.
글_ 박동순 편집인
김진성 고려사이버대학교 총장
김진성 박사(현 고려사이버대학교 총장)에게는 항상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혁신과 도약의 기틀을 세운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과거 하나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주변에선 의아한 시선도 많았지만 김진성 총장은 기존의 행정교장이 아닌 교육교장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시도한 하나고의 교육방침은 입시에 몰두한 교육을 하기 보다는 모든 학생들이 각기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첫 졸업생들이 입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하나고가 ‘공교육의 신(新) 모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주장만을 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김총장은 힘주어 회고한다. 고려대 농업경제학사, 캔자스대 경제학박사인 김총장은 모교인 고려대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거치면서 대외협력처장, 총무처장을 지낸 행정통(行政通)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그의 핵심역량이 높이 평가돼 2017년 초 고려사이버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김총장은 취임식에서 “83%의 기쁨과, 17%의 슬픔을 간직한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고려사이버대 교직원들은 내 것을 채우는 83%의 행복만큼 다른 사람과 학생들을 위해 17%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온화한 교육철학을 간직하고 있는 김진성 총장은 고려사이버대뿐만 아니라 국내 고등교육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이 시대 몇 없는 진짜 스승일 것이다. 한편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는 고려사이버대도 인문·사회분야에 추가하여 ‘공학’ 쪽에도 눈을 돌려 온·오프라인 최초로 ‘가상 실험실’이라고 불리는 ‘버추얼 랩(Virtual Lab)’을 성공적으로 구축, 운영해오고 있다. 또한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공학과 인문사회분야’를 융합한 학제적인 교육과정을 추진, 국내외 다양한 교육기관과 함께 새로운 교육과정 개발을 연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온라인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이버대의 입지가 확고해질 것이라는 예상도 많지만 김총장은 고등교육에 대해 더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이버대학들도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사이버대 총장으로서 저 개인적인 염원을 말씀드리면, 사이버대학의 ‘교육의 질’을 한단계 더 높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온라인 교육이 대명사인 사이버대학이 유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유수한 오프라인 대학들이 재정, 시설, 교수진 등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온라인 대학들은 다른 방향에서의 강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온·오프라인 대학 간의 경쟁이 아니라 그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고 상호 협력해야 하는 단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미래 사이버대학 경쟁력의 핵심으로 외형적인 콘텐츠보다, ‘어떤 것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더욱 중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는 사이버대학의 입장에서는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진성 총장 현대경영 인터뷰
고려대학교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려사이버대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수로서, 세계적 온라인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해 오늘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동양물산기업(TYM)의 김희용 회장은, 한국경영사 발전에 있어 ‘제1세대 최고경영자’로 유명했던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의 2남으로, 선친 김인득 회장처럼 그 역시 ‘산업보국(産業報國)’의 신봉자다. 선친 김인득 회장과 똑같이 김희용 회장도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현대경영 커버스토리 인터뷰 기사에서 김희용 회장이 밝힌 산업보국 정신과 기업가정신을 소개한다.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을 항상 가슴 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나를 알고 남을 알아야 강해지지 않겠는가? 나를 낳아주신 부모를 알고, 형제를 알고, 그럼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나라와 민족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국가이든, 가장 세계적인 것은 그 나라와 민족의 고유한 문화라고 할 것이다. 저는 바로 이 한가지 생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삶은 영위해왔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능력,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습득된 지식과 능력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여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다면 이를 위한 고된 노력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 안의 세계를 밖으로 뿜어낸다는 것, 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의 고유한 문화라는 바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결국 자신의 ‘근본’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적인 모습을 이끌어내야 한다. 나라의 큰 자산이 국민인 것처럼, 기업의 큰 보물은 직원들이다. 회사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하든 모두가 보배다.
동양물산기업은 창의와 도전정신으로 미래를 함께 개척하는 사람을 21세기 인재상으로 삼고 있다. 새로운 사고와 창의력으로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 끊임없이 학습하는 사람, 개인보다는 팀을, 팀보다는 회사를, 또한 고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리고 국제적 소양을 갖추고 글로벌 경영에 앞장서는 사람, 무엇보다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종업원에게는 최고의 일터를, 고객에게는 최고의 제품을, 투자자에게는 최상의 이익을 보상한다는 경영방침을 실현하고 있다.”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3년 김희용 회장을 인터뷰한 글이다. (현대경영 2003년 11월호)
2018년 동양물산기업은 창립 67주년을 맞이하였다. IMF 시절의 위기 등 수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전 임직원이 합심하여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지난 2016년 국제종합기계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지분을 인수하여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였고, 이제는 제품만 수출하던 기업의 수준을 벗어나 동양물산기업만의 첨단 기술력을 수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2020년에는 매출 1조원 달성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기업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창의와 도전정신으로 단련된 인재 육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처럼 15년 전의 그의 산업보국의 정신과 ‘근본’ 중심의 기업가정신이 오늘의 환경에도 그대로 통하는 것을 보면, ‘애국적인’ 기업가로서 그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문용식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
2018년 4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포인트를 가장 잘 아는 분이 4차 산업혁명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나우콤을 창립하여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는 등 IT 벤처기업에서 20년간 근무한 경력을 지닌 문용식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정보화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1987년에 설립된 기관으로 31년 동안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ICT 신기술 도입과 확산, 건전정보문화 조성 등을 통해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화를 이룩하는데 선두에서 견인차 역할을 한 기관이다.
특히 한국정보화진흥원은 UN전자정부 평가 연속 3회 세계 1위, ITU(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발표 ICT발전지수 연속 3년 1위 달성 등의 성과를 창출한 ‘우리나라 정보화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기관의 수장으로 문원장이 취임한 것을 보면 그는 자타공인 국가정보화 최고경영자라 할 수 있다.
또한 문용식 원장이 취임 이후 발표한 ‘미션 선언문’을 보면 지능정보기술의 혁신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국가사회 전반의 혁신성장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담겨있다.
첫째, 사회 전 분야에 ICT의 적용을 시도하여 의료, 복지, 교통, 치안 등 다양한 사회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새롭게 마련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노력하고자 함을 목표로 한다.
둘째, 국가미래를 여는 것은 ICT가 단순히 효율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함이 아니라 국가의 지속가능 발전을 통해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최선의 방안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미션 달성을 위한 노력을 통해 국가정보화의 이른바 기간전략(基幹戰略)을 만드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은 ICT와 정보인프라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답을 드릴 것을 약속하며 미래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 지, 국가의 미래비전과 디지털 혁신 전략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시가총액 세계 5대기업 모두가 디지털 회사인 것을 감안하면 ‘디지털 혁신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국가의 새로운 가치 발휘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혁신의 관점에서 현재는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CT 경쟁력이 자꾸 뒤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비해, 심지어 중국에 비해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술 격차, 데이터 격차, 지식 격차, AI 격차가 자꾸만 커져갑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데이터 패권시대의 주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특히 디지털 혁신을 이끌기 위해서는 파괴적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의 반발을 뚫고 나갈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토대로 규제의 기득권을 혁파하고 상호 협력과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회사는 직원들의 열정과 능력을 믿고 맡겨야 하고 이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성원 스스로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도록 자율적인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도 제 나름의 경영 노하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정보화진흥원 CEO로 취임해서도 여전히 다짐하고 있는 사항이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저와 함께했던 모든 구성원들의 노력과 헌신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영철학은 ‘신뢰경영’, ‘자율경영’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문용식 원장 현대경영 인터뷰
글_ 이희규 기자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세계 최대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 세계 최고 직장 ‘구글’, 세계 일류 자동차사 도요타, 세계 최대 석유회사 BP(브리티시석유)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은 “이 모든 세계적 기업들은 인간존중 경영을 실현하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다”고 강조한다. 박영주 회장은 경제계에서 ‘메세나 킹(Mecenat King)’ 또는 ‘메세나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최고경영자다. 박회장은 메세나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90년대부터 ‘이건음악회’ 등을 통해 직접 메세나활동을 하거나 후원해왔다.
이러한 공로로 한국메세나협회 회장(2005~12년), 현대미술관회 회장, 예술의 전당 이사장 등을 지냈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몽블랑재단의 ‘몽블랑 후원자상’을 비롯,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2017년)’로 선정되었다.
이건산업은 1990년 체코 아카데미 목관 5중주단 초청 공연을 필두로, 지난 28년간 ‘이건음악회’를 열어왔으며 인천혜광학교 오케스트라 후원, 이건 가족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운영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박회장은 1989년 솔로몬군도에 이건재단을 설립하고, 무료 의료사업, 임업 기술전수사업 등 사회공헌활동을 적극 추진, 1998년, 2001년 각각 솔로몬군도 정부와 칠레 정부(Bernardo O’Higgins)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다.
1986년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은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남태평양에 있는 솔로몬 군도에 진출, 조림지에서 70년간 유칼립투스를 벌채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7년부터 6년간 솔로몬 내전이 발생하면서 목재사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외국자본도 투자를 포기했고, 솔로몬 군도에 들어와 있던 기업도 하나둘씩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건산업은 끝까지 솔로몬 군도에 남아서 사업을 지속했고, 반군이 사업을 방해해도 반군 사령관이 직접 사과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지역민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건산업이 지역민에게 공헌했던 다양한 사회활동 때문이었다.
박영주 회장은 벌채권을 얻은 이후 단지 벌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보호와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도 함께 펼쳤다.
1989년에는 현지법인을 세워서 지역민들을 고용하고 경제적인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다. 1991년에는 이건재단을 설립하고, 병원을 지어 현지주민들에게 무료로 의료지원을 했다.
현지인 중심의 전문가양성을 위한 장학사업, 농경기술을 전수하는 사업, 심지어 경찰서 설립 등 치안사업도 지원해왔다.
박회장이 솔로몬 군도에서 내걸고 있는 모토는 ‘Love People, Respect Nature, Pride in Job’이다. 사람을 사랑하자, 자연을 존중하자,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자는 경영철학은 솔로몬 현지인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다.
이런 세심한 공헌활동으로 박회장은 1998년, 2001년 각각 솔로몬 군도와 칠레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고, 솔로몬아일랜드 명예영사로 임명되었다.
박영주 회장의 메세나 경영과, 해외사업 경영은 결국 앞으로 우리나라 모든 기업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모델이 아닐까?
글_ 박동순 편집인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2018년 9월,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현대경영에 ‘기업가 문익점’이라는 신간 책자와 발간 인사장을 보내왔다. 인사장의 주요내용과 윤동한 회장의 ‘문익점 관(觀)’을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가로 ‘문익점’ 선생을 발굴한 윤동한 회장의 노고에 독자들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30년 기업 경영에 좋은 스승 중 하나는 역사책이었습니다. 저는 기업인으로서 가져야 할 정신과 경영의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순간도 역사 속 인물에서 답을 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 속의 기업가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문헌에도 기업가에 대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안성유기, 전주한지, 안동포 등 지역별로 유명한 산업은 있어도 그 산업을 이끈 기업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문익점이었습니다. 목화라는 상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 땅에 들여와 거대 산업으로 만든 그 안목과 실천정신이 바로 기업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18년 9월 윤동한
“필자(윤동한 회장)는 기업인이다. 기업인의 관점에서 보아서인지 문익점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가 뼛속까지 훌륭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임을 께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 한 것은 ‘목화’라는 상품을 알아보고 한반도에 들여와 거대 산업으로 만든 그 안목과 실천정신이다.
문익점의 아버지 문숙선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농사와 학문에 힘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은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을 것이고, 농민이 아니었지만 농작물 종류와 재배 등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을 것이다.
이러한 집안과 어릴 적 경험으로 그는 아버지와 아들들, 장인과 함께 목면 재배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가족의 사업으로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익점은 어떤 계획을 실행하는데 있어 인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반도에서 목면 재배에 홍원(弘願)이라는 인재를 활용했는데, 본격적인 재배 이전에 인간관계를 통해 목화 재배에 선진 기술을 갖춘 사람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승려 홍원을 알게 되었던 듯하다.
홍원을 영입하지 않았다면 목화씨를 산업 수준으로까지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진 문익점 선생의 기록일 것이다. 윤동한 회장의 ‘업적’은 문익점을 목화씨 도입자로 묻어두지 않고, ‘최초의 기업가’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점이다.
윤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어떻게 들여왔는지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롭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목화씨 종자를 개량하고 양산하여 10년도 안돼 전국으로 보급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의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종자 산업 분야에서의 획기적인 성공이었으며 나아가 문인이자 학자였던 그는 동시에 목면 산업을 개척하고 국내에 정착시킨 진정한 기업혼을 가진 창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익점 선생도 대단하지만, 문익점 선생을 한국 최초 기업가로 자리매김한 기업가 윤동한 회장도 대단하다고 축하의 인사말을 보내고 싶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충남 공주시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브리태니커 한국지사에 입사해 자신도 모르던 영업의 재능을 발견했다.
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해 전 세계 54개국 세일즈맨 중 최고 실력을 낸 사람에게 주는 벤튼상을 수상했다. 이후 영업 분야에서 승승장구하여 브리태니커 상무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윤회장은 미래가 보장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1980년 웅진씽크빅을 설립했다.
직원 7명의 작은 출판사로 시작하지만 히트 상품을 내놓으면서 창업 10년 만에 웅진씽크빅을 국내 최고의 교육문화기업으로 키워낸다. 이후 정수기, 식품, 화장품 사업을 확장시키며 웅진그룹을 재계 30위 수준의 그룹사로 발전시킨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우리나라 경제상황에서 이를 극복한 웅진의 발전사례는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윤회장은 40여년 동안 경영을 하면서 언제나 ‘사람의 힘’을 믿었으며, 직원들 스스로 신이 나서 일하게 만드는 신기(神氣)문화, 공정한 인사제도, 투명한 기업 경영 등을 웅진문화로 발전시켰다. 2012년 건설사업 실패로 기업회생을 신청했을 때도 ‘사람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이 “내 인생의 팔할은 바람이었다”고 하면 윤석금 회장의 인생은 “팔할이 사람의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시스템이 좋아도 기본적으로 회사를 구성하는 핵심은 사람이다. 인성 좋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포진한 회사가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다. 탁월한 기술도, 잘 구비된 시스템도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는 인재를 확보하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확보한 인재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의 성장을 조직의 성장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니 좋은 회사에 능력있는 인재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기업의 경쟁우위를 확보하는데 있어 훌륭한 인재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윤회장은 훌륭한 기업문화를 위해선 리더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기업문화는 리더의 노력에 달려있으며 리더의 올바른 가치관을 조직원들이 공감하여 실천하면서 기업문화로 완성된다고 한다. 웅진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위기를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윤회장이 제창하는 ‘또또사랑’의 기업문화 덕분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문화, 공정한 문화, 윤리적이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문화가 웅진의 저력이다. 좋은 기업문화는 어려움을 이기는 힘이 되기에 좋은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은 사업의 성과와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윤회장의 말처럼 회사를 성장시키고 싶은 경영자라면 제품을 개발하고 영업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기업문화를 만드는 데 신경 써야 한다.
기업의 뿌리인 기업문화와 그 문화의 주체인 사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웅진그룹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우리시대 ‘문화파수꾼’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이 펴낸 ‘AQ 예술지능’이라는 책의 추천사에 쓴 첫 문장이다.
(AQ: Artistic Quotient)
저자(윤영달 회장)에 따르면 인간에겐 생존 본능과 창조 본능이란 두 가지 본능이 있다…. 1960-90년대 ‘전사(戰士)의 시대’에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것을 회피하려 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20세기 말 한국경제는 IMF 사태를 맞았고, 이로 인해 창조 본능을 자극하는 경제전략으로 전환할 기회를 놓쳤다. 한국경제의 근본적 위기는 바로 인간의 창조 본능에 부응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머뭇거렸기 때문이다. 윤영달 회장의 ‘AQ 예술지능’은 지체되었던 전환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령 전 장관의 통찰력은 역시 ‘경제’ 쪽에서도 빛난다. 1997년 말 촉발된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때문에 “창조 본능을 자극하는 경제전략으로 전환할 기회를 놓쳤다”는 대목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다면 윤영달 회장이 ‘외롭게(?)’ 추구하는 ‘크라운해태의 문화예술운동’은 한 선구적 기업가의 머릿속에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생존 본능’에서 ‘창조 본능’으로 넘어가야 할 시대적 요청이 (IMF로 인하여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찬란하게 부활됐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윤영달 회장과 크라운해태제과의 문화예술운동은 이제 한국의 산업사회 전체로 뻗어나가야 할 ‘공적인 기억(public memory)’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그럼 윤영달 회장이 제창하는 AQ (artistic quotient)란 무엇인가. 윤회장은 “모든 경제는 예술가적 창조 본능, 즉 AQ가 주도하는 단계로 전환 또는 발전하게 된다”며 “이는 굶주림을 참다가 세끼 밥을 먹고, 그 후 세끼 밥에서 맛집을 찾게 되고, 요리평론을 하고 요리예술을 즐기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기업들은 이제부터 생존 본능 시대의 ‘전사(戰士)’에서 창조 본능 시대의 ‘예술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우리의 비즈니스 사회는 지금까지 군사전략(?)을 핵심개념으로 활용해 왔다. 비즈니스 조직문화는 세계 어디를 가도 군사문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기업이 싸우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의 구성원은 전사다. 싸우고 정복하며 지배하는 전사와, 창조하고 소통하는 예술가(예술가적 비즈니스맨)가 경쟁한다면 누가 승리할까? 윤영달 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경제는 이제 선진국을 추격하는 전략만으로는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첨단기술개발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Blockchain(블록체인) 등 기술개발의 방향성 역시 인간의 창조 본능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 빠르다, 더 가볍다, 더 얇다, 더 오래 간다, 더 싸다는 등의 신기술은 제가 강조하는 ‘유희, 초월, 미학, 몰입, 소통’이라는 다섯 가지 창조 본능을 통하여 혁신적인 상품개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애플, 구글, 레고, 할리데이비슨, 디즈니랜드, 3M 등 모든 창조적 기업들은 단순히 기술개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본능을 자극해서 고객을 만족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로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크라운해태제과의 신상품개발 전략도 이와 똑 같습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여기에 ‘천(千)의 얼굴’을 가진 분을 소개한다.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의 주요 경력과 주요 현직을 보자!
(전)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백강포럼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고문, 국가원로지도위원(국가발전지원단장),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 총리실 국가산업기술보호위원회 위원, 아시아올림픽 평의회의원, 대한체육회 홍보위원장, 국립극장 후원회장 등을 지냈다.
(현)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공동대표, 재단법인 천만장학회 이사장, UN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이사, 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 공동위원장, 사단법인 지구촌보건복지 이사장, 육군사관학교 정책자문위원, 공군정책발전자문위원장, 육군협회 부회장,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 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포럼 회장 등등…
일찍이 현대경영에 ‘시(時) 테크’ 칼럼을 연재하기도 한 윤회장은 우리 산업계에 대화, 소통, 상생, 융합, 협업(協業) 등에 이르기까지 집필과 강연 등을 통하여 ‘하드’한 산업사회를 ‘소프트’한 선진사회로 성숙시키는데 크게 공헌해, 세기의 경영구루(guru)인 드러커 박사에 빗대어 ‘한국의 드러커’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다.
윤은기 회장은 최근 The-K 한국교직원공제회 강연에서 앨빈 토플러, 클라우스 슈밥, 잭 웰치, 제프리 이멜트의 경영철학을 예로 들어 제4차 산업혁명이 그동안의 제1차, 제2차, 제3차 혁명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같이 말했다.
“제4차 산업혁명은 2016년 1월, 다보스 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 회장이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제기한 개념으로, 그 대표적인 디지털 기술이 IoT(사물인터넷), AI(인공지능), 블록체인 등입니다. 이런 기술은 학문간 경계가 사라지고 다양하게 연결되는 융복합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초연결성(Hyper-connected)과 초지능성(Hyper-intelligent)으로 그 영역이 무한대로 넓어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윤회장은 수닐 찬드라 구글 채용담당 부사장의 “개개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사람과 협업하지 못한다면 구글에서 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앞으로의 비즈니스 사회는 개인능력보다는 협업, 즉 연결하는 능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새로운 가치창조는 불가능하다고 역설. 윤회장은 또한 최근의 ‘협업’을 통한 대표적인 상생 비즈니스 사례로 기아자동차와 완구업체인 영실업을 소개했다. 어린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끈 변신자동차 장난감 ‘또봇’은 영실업과 기아자동차의 협업을 통해서 탄생한 제품이다. ‘또봇’이 기아자동차를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규모도, 사업 분야도 서로 다르지만, 두 업체는 협업을 통한 동반성장으로 ‘메가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런 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과 경청의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했다. 윤회장은 또 인간관계에서도 융복합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경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 의견을 내 생각과 연결시켜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것이 상생이오, 협업이라고 강조했다. 윤은기 회장은 한국의 산업계가 대화와 소통, 융복합과 협업을 이루는데 기여한 경영구루(guru)로 평가될 것이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윤종용 삼성전자 전 부회장
‘삼성의 디지털 경영을 선도한 ‘국보급(國寶級)’ 최고경영자’,
삼성전자의 윤종용 전 부회장을 가리키는 수식어다.
1998년 미국산업공학회(IIE) 선정 ‘최고경영자상’ 수상, 2005년 미 포천(Fortune)지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기업인’ 1위에 선정되기도 한 윤종용 삼성전자 전 부회장은 삼성의 세계화전략을 뒷받침한 일등공신이다.
삼성의 세계화전략을 이끈 윤 전 부회장의 좌우명은 저 유명한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란 무엇인가. 대전 시장을 지낸 염홍철 교수(배재대학교)의 ‘더듬기와 격물치지’란 글이 이해를 돕는다.
대부분 ‘혁신’에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고 실행방향이 탁 트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혁신과정을 논의하다보면 흔히 ‘더듬다’라는 단어가 연관어로 빈번히 나와 당황하게 된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문고리를 잡으려고 더듬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지만 혁신이란 문제와 결부시킬 때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들어 낸 아인슈타인 역시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더듬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더듬는다는 말을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확인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대학’에 나오는 말인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떠올리게 된다.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는 뜻으로, 이병철 삼성 전 회장을 비롯한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삼성가문과 삼성에서 오래 근무한 윤종용 부회장의 좌우명이기도 해서 그분들의 사무실에는 ‘격물치지’를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았다고 알려져 있다.”
윤부회장은 자신의 좌우명인 ‘격물치지’에 대해서 “대학(大學)에 나오는 표현으로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치지)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좀 더 설명하면 “만물에는 이치가 있고 그 이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보면 일정한 논리적 흐름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라고 풀이한다.
대학 8조목
①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깊이 파고들어 모든 것에 이르게 한다
② 치지(致知) 격물한 다음에야 모든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
③ 성의(誠意) 선을 따르는 각 개인의 마음과 뜻을 성실히 한다
④ 정심(正心) 마음을 올바르게 닦아 정한 위치에 둔다
⑤ 수신(修身) 몸을 올바르게 닦는 일로 인격의 수양을 말한다
⑥ 제가(齊家)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
⑦ 치국(治國)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는 것
⑧ 평천하(平天下) 위와 같이 수행하다 보면 나라 전체가 평안해진다
즉,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궁리하여 꿰뚫어보게(격물)’ 되면, ‘지혜의 단계에 이르게(치지)’ 되고, 여기에 ‘역사 인식’을 더해서 선견력, 통찰력을 얻어 이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윤종용 전 부회장의 지론이다. 그래서 삼성 시절 윤부회장은 전 임직원들에게 ‘격물치지 합시다’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한국의 대표기업이오, 세계 디지털시장을 호령하는 삼성의 세계화전략에 ‘격물치지’론을 벤치마킹한 것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심층분석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글_ 박동순 편집인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은 ‘공격적 경영의 귀재’이다. 1995년 창업 이후 2002년 그룹 회장을 지내면서 ‘위기는 기회다’라는 경영 마인드로, 창업 2년 만인 1997년 외환위기 때에도 다른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감축하는 시기에 그는 오히려 광고비를 집행하면서 공격적인 경영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공격적인 경영을 하는 CEO라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 임상혁 단국대 교수, ‘윤홍근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경영전략에 관한 연구’
최선의 노력이 최고의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윤홍근 회장은 제너시스BBQ그룹을 세계시장에 내놓기 위해 외식산업, 산업디자인, 바이오, 지배구조개선에서 음식평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부를 해왔다.
“단순히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실적을 올린다면 경영학만 공부하면 되지만, 급변하는 환경변화 속에서 시장을 개척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당 산업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CEO가 알아야 한다….”
윤홍근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Best of the Best Quality.’ BBQ 치킨을 먹어 본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이라고. 그 맛을 내기 위한 ‘Best of the Best Quality’는 BBQ의 이름이자 지난 창립 이래 BBQ가 지켜온 원칙이오 또한 BBQ를 국내 최대, 최고의 프랜차이즈 그룹으로 성장시킨 윤홍근 회장의 경영각서(經營覺書)이기도 하다. 윤회장은 “가맹점이 살아야 본사가 산다.”, “고객이 원하면 무조건 하겠다”, “회사의 성장에 따른 보람과 대우를 직원들과 함께 공유하겠다”고 늘 강조해왔다.
기업가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기업을 지배, 운영하는 경영자로 정의된다.
즉, 기업에 대하여 스스로 출자하고 경영을 담당하는 자를 의미하며, 출자자인 동시에 경영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은 영리경제의 단위이고 개별자본이므로 그 주체인 기업가는 영리활동의 주체이고, 또한 자본의 소유자인 자본가로도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기업가는 본질적 목표 즉,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새롭고 이질적인 것 또는 변혁을 일으키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영을 해야 한다. 기업을 경영하는데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 그리고 국내외적 경제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적 요소를 창조해내어 기업의 이익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기업가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등장하곤 한다. 기업가가 본질적으론 기업의 이익을 위해 달려가는 것처럼, 기업가정신 또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프랑스의 경영학자 앙리 훼이욜(H. Fayol)은, 모든 관리계층의 기업가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 다음 7가지 자질을 제시했다.
① 건강과 신체적 적합성
② 지력과 정신적 활력
③ 도덕적 소양
④ 일반교양과 풍부한 상식
⑤ 관리능력
⑥ 다른 기능에 대한 지식
⑦ 자신의 기업에 특유한 능력 등등.
갖은 난관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산업의 신화가 된 윤홍근 회장은 훼이욜이 제시한 7가지 자질을 모두 갖춘 전인적인 CEO가 아닐까?
글_ 박동순 편집인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
이금기 회장은 ‘소유경영자냐, 전문경영자’냐 하는 쓸데없는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 최고경영자다. 제약업계와 유아식업계의 전설적인 CEO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일동제약 평사원으로 입사했다가 입사 34년만에 회장직까지 올랐다.
일동제약이 국내 TOP 제약사로 발전하는 동안 이회장의 리더십과 함께 동반성장한 것이다. 그 빛은 이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은 제2기 인생(일동후디스)에서 더욱 발휘된다. 남양산업을 인수하고 일동후디스로 사명을 바꾸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 이금기 회장은 트루맘, 산양분유 등 프리미엄 유아식 시장을 개척했고 일동후디스를 유아식 업계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제약하는 마음으로 유아식을 만든다’는 기본적인 철칙 하에 이회장의 합리적인 리더십과 인간존중 사상이 오늘날의 일동후디스를 일궈낸 것으로 보인다.
1998년 일동제약이 한때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 이회장은 다시 CEO로 소환되어(?) 3년 만에 경영 정상화를 성공시켰다. 정부당국의 자금지원이나 세금면제 등 외부의 지원없이 워크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결정된 사항은 합리적으로, 그러나 일사분란하게 추진해 나간다”는 원칙 덕분에 직원들로부터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회장의 인간존중과 인화중시의 경영철학은 이 시대 모든 제조업 종사자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의약품과 식품은 국민건강에 직결되는 제품이기에 불량제품이 절대로 생산되거나 판매되어서는 안된다는 인간생명존중의 철학을 확고히 지키고 있다. 이러한 이회장의 신념은 국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일동제약과 일동후디스를 업계 대표의 회사로 성장시킨 비결이라 할 수 있다. 현대경영 인터뷰에서 이금기 회장은 “경영철학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역시 ‘인간존중’을 강조했다.
“제약업계는 기업마다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거의 모두가 창업주의 집념으로 회사들이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우리회사는 경영에 있어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상호존중과 임직원의 조화를 통해 남다른 기업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흔한 부동산 투자 한번 하지 않고 오직 기업의 주력사업으로만 승부해 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투명경영과 정도경영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금기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위해 전문경영인 최초로 한국제약협회 회장직을 맡아 업계 발전을 위해 ‘공정경쟁규약’ 제정과 의약품의 유통거래질서 개선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전경련 기업윤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광고주협회 회장, 한·뉴질랜드 경제협의회 한국 측 위원장직 등을 맡아 경제계, 광고계, 민간외교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사회적 책임경영도 선구적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사원으로 출발해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직을 지낸 1세대 샐러리맨의 신화에 머무르지 않고 창업기업가로 변신하여 국민건강에 기여하는 종합식품회사를 지향하는 이금기 회장의 ‘인간존중’ 기업가정신과 ‘휴먼 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하며 더 건강한 100세 시대를 위해 이회장의 기업가정신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
글_ 이희규 기자
이윤재 피죤 회장
“평생 피죤을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창업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품질제일을 실천하는 국내 유일의 생활용품 토종기업으로서 피죤은 1978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완벽한 제품으로 고객의 사랑에 보답해왔고 이러한 포뮬레이션(Formulation)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습니다 ” – 이윤재 피죤 회장
이윤재 피죤 회장이 현대경영 인터뷰(2011년 10월호)에서 토로한 말이다. 이회장은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세계경제전쟁’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회장이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풀어내는 ‘글로벌 경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자는 막대한 자본과 시장을 거느린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국내 토종기업이 경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싸움이었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회장은 피죤을 매각하고 편하게 여생을 즐겨보라는 유혹(?)이 끊이지 않는 상황 하에서도 “피죤의 제품은 피죤 것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산이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피죤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이같은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피죤의 신제품, 신시장 개발의 역사는 지금도 지속된다. 국내 처음으로 가루세제에서 액체세제 ‘액츠(Act’z)’를 개발했고, 독일에 망명한 천재 과학자 궁리환 박사와의 공동연구로 ‘무균무때’를 탄생시켰고, 바디 클렌져 ‘마프러스’도 출시했다. 피죤의 전성시대요, 무적무패의 시대였다.
피죤의 ‘1세대’ 주역이 이윤재 회장이라면, ‘2세대’ CEO는 이주연 대표이사다. 지난 2011년부터 피죤의 경영자로 참여한 이 대표이사는 다국적기업들의 공격으로 잠시 주춤해진 실적을 리세팅하기 위하여 영업과 마케팅 조직에 일대 메스를 가했다. 특히 피죤의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인재발굴에 적극 나선 것이 실적향상으로 나타났다.
이주연 대표이사는 “누구라도 능력이 있다면 기회를 주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이오, 피죤의 기업문화”라면서 능력우선 인사주의를 강조한다. 나아가서 “평소 일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찾는 사람이 인재”라면서 “수월성이나 특출한 자질을 갖춘 천재형 사람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보통사람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 회사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고 있다”고 강조한다.
피죤은 1978년 창업되었으니 올해로 불혹(不惑)의 창립 40주년을 맞이했다. 이주연 대표이사는 창사 40주년을 기점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생활용품 전문기업에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신사업구상도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적인 럭셔리 향수의 조향사와 함께, 인체에 해가 없는 향수를 선보일 예정이고, 반려동물 시장에도 ‘보쥴’ 론칭을 통해 첫 제품으로 ‘보쥴 아로마 테라피 샴푸’와 ‘미스트’ 4종 출시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론칭되는 제품은 반려견 피부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정까지 도모하는 아로마 테라피 브랜드로, 라벤더 오일과 유칼립투스 오일 등 2가지 라인으로 출시될 예정이다.
피죤 창립 40주년을 현대경영 독자와 함께 축하드리며, 현대경영 편집인의 서울고등학교 대선배이신 ‘존경하는’ 이윤재 회장의 건승과 피죤의 무궁한 발전을 삼가 기원드린다.
글_ 박동순 편집인
이종호 JW그룹 명예회장
더 많은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더 많은 의무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나와야 한다.
자신의 위치와 그에 따르는 의무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의 모습에는 빛이 난다. 그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이종호 JW그룹 명예회장이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이종호 명예회장은 JW중외제약 창업자인 성천 이기석 선생의 “제약회사의 사명은 다른 사업분야와 달리 고귀한 생명의 구제에 있다”는 뜻을 기려 2012년 성천상을 제정하여 ‘생명존종’ 정신을 실천하는 참 의료인을 발굴하여, 시상하고 있다.
JW그룹 공익재단인 중외학술복지재단은 올해에도 지난 8월, 제6회 성천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이종호 명예회장은 요셉의원 신완식 의무원장에게 상금 1억원과 상패를 수여했다. 삼성도, 현대도 아닌 JW중외제약이 1억원을 낸 것이다. 중외학술복지재단은 “안정적인 교수직을 뒤로 한 채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조건 없는 인술을 베풀고 있는 신완식 의무원장의 신념이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과 부합한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고 신완식 의무원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눈 것뿐인데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또한 중외학술복지재단은 장애 예술인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JW아트어워드를 개최하고 문화소외 이웃을 초청하여 로비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메세나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관내 임대아파트 거주 독거·장애 어르신 후원, 환경개선 등 지역사회중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탈북청년 후원 및 독서모임, 통일캠프와 같은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한 통일인재육성사업도 함께 진행중이다.
이런 사업들은 모두 사람과 현장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활동이며 JW그룹의 생명존중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종호 명예회장의 자선 사업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웃고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모두 공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 ‘항상 우리가 속한 사회를 생각하며 더 많은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이명예회장이 재단을 만든 이유라 하니, 목적과 결과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 기업 사회에는 이종호 명예회장 같은 기업인이 너무 적다. 역시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과 유대감일 것이다. 나눔은 돈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이종호 명예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큰 교훈과 울림을 남기고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장순흥 한동대학교 총장
우리나라 핵공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최고 전문가 장순흥 박사는 2014년 한동대학교(Handong Global University)의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특히 취임 당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동대 10대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인성과 지성을 갖춘 융·복합적인 글로컬(Glocal)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동대학교 10대 프로젝트
하나, 지역발전 프로젝트: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
둘, 통일한국 프로젝트: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한국을 이끌 인재 양성
셋, 개발도상국·아프리카 프로젝트: 개도국의 지속적인 발전 역량 강화 등 지원
넷, 창업 활성화 프로젝트: 새로운 시대와 산업을 이끌 창업가 육성
다섯, 스마트 파이낸싱·핀테크 프로젝트: 금융 분야의 발전을 위한 역량 계발
여섯, 차세대 ICT·IoT·AI 프로젝트: 4차산업혁명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
일곱, 차세대 자동차·로봇 프로젝트: 스마트카·로봇 등의 연구 및 기술 개발
여덟, 지속가능한 에너지·환경 프로젝트: 미래 그린에너지 등 첨단과학기술 교육
아홉, 차세대 의식주 프로젝트: 의식주에 과학기술을 접목하는 등 혁신 지향
열, 건강·복지 프로젝트: 인류의 건강·복지 개선을 위한 각종 프로젝트 진행
장순흥 총장은 10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웃과 지역사회, 지구촌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한 일환으로, 일자리 창출과 산업의 다변화 등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이끌어갈 차세대 기업가를 육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글로벌기업가정신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을 시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한동대는 지난 2007년 유네스코 유니트윈(UNESCO UNITWIN: University and Networking) 선도대학으로 선정된 이후, 지금까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에게 기업가정신을 전파하고 교육함으로써 그 나라의 발전을 돕는 글로벌 기업가정신 훈련 프로그램(GET: Global Entrepreneurship Training)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GET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유지 및 활성화될 수 있도록 현지에 ‘한동 기업가정신 글로컬센터’를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는데, 케냐와 가나에 이어 올해 페루 아레키파의 산파블로 가톨릭대학에 세 번째 센터를 개소하였다. 이 자리에서 장순흥 총장은 “한동 기업가정신 글로컬센터를 통해 기업가정신을 배운 차세대 지도자들이 지역과 국가를 발전시키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개발도상국 국민 스스로 경제개발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우고 정직하고 투명한 가치관을 갖고 기업을 운영하도록 도와야 한다. 한동대의 교육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를 더욱 보완하고 발전시켜 국제개발 협력사업을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강조하는 장 총장은 기업가정신의 글로벌 산파(産婆)라고 할 수 있다. “늘 무엇을 만들 것인가(Know-what)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를 위한 실천에 주저 없이 뛰어들라고 강조한다. 이웃과 시대의 필요를 파악하고 이를 실천한 결과가 역사를 이끌고 세상을 바꿔왔으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이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장순흥 총장의 기업가정신이다.
글_ 채영희 기자
전순표 세스코 회장
1976년 12월 설립된 세계적 해충방제회사 세스코는 설립 당시부터 본사와 기술연구소를 신축하고 당시 전무한 획기적 전산시스템을 업무에 도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주요 경기시설에 방역 사업을 실시했고, 이후 과학기술처 기술개발 촉진법에 의해 기술 부설연구소를 인정받았다. 90년대 초 의약부외품 제조업 허가를 취득하고 1993년 대전 EXPO 주요 시설에 방제작업을 실시하면서 국내 방역업계를 선도해온 기술력과 인지도를 인정받았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위생 서비스로 국민의 재산과 건강을 지킨다는 사회공익적 철학을 꾸준히 지켜온 세스코는 현재 생활환경을 저해하고 각종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해충과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의 전염성 유해 세균에 대해 토탈위생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으며 첨단 R&D시스템과 업계 최대 고객인프라를 기반으로 고객맞춤형 솔루션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브랜드 인지도, 시장점유율 및 고객만족도에 있어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기업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2003년 설립된 중국법인을 시작으로 2014년 베트남 법인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1970년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의 방제 산업에 뿌리를 내리고 세계 최대의 방제기업으로 성장한 세스코의 성공 뒤엔 창업자 전순표 회장의 피나는 집념과 노력의 기업가정신이 있었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7평짜리 작은 사무실에 직원은 사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직원 한 명뿐. 회사의 시작은 이러했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수학하고 농림부에서 과장을 지낼만큼 촉망받던 공무원이 쥐잡는 회사를 차렸다. “쥐약을 사면 되는데 왜 돈 주고 쥐를 잡느냐”며 “미친 짓”이라는 말을 수천번 이상 들었던 사장은 밤낮으로 현장을 돌면서 수주를 얻고, 쥐잡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의 노력하는 모습은 고객들을 감동시켰고, 그 결과 그는 3천여명의 전문 컨설턴트를 통해 30만여개 고객사에 해충방제, 식품안전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굴지의 종합환경위생기업 회장이 되었다. 처음에 공무원으로 시작해 ‘쥐잡기의 날’ 등의 아이디어를 낼 정도로 유능했던 전회장은, 공직생활만으로 쥐 방제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보다 효과적인 쥐잡기에 나섰다. 전회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여겼기에 불평등 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그리고 1995년 ‘63빌딩 쥐소동’ 사건으로 세스코는 유명세를 타면서 터닝포인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제 5성급 이상 호텔과 식품공장, 백화점 등에서 8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세스코는 해충방제뿐 아니라 바이러스·박테리아 컨트롤, 식품안전관리서비스까지 종합적인 환경위생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 현대경영 전순표 회장 인터뷰
이제 전회장은 사회공헌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해충 퇴치에 힘을 쏟았던 인생을 앞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취지다. 특히 설봉장학회와 금강장학회를 통해 장학사업을 하고 동국대학교에 도서기금 후원 및 동우 장학회를 설립해 차세대를 위한 2세 교육에 헌신하고 있으며 세스코를 세계 굴지의 종합환경 위생기업으로 성장시키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성과를 인정받아 1993년 국민훈장 목련장, 2016년 금탑산업훈장(기획재정부), 2018년 자랑스런 한국인상(미주동포후원재단)을 수상하기도 했다. “누구나 기피하던 3D업종일수록 첨단화하면 그게 바로 첨단사업”이라는 말처럼 일의 본질에 파고드는 집념.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CEO의 진짜 덕목일 것이다.
글_ 이희규 기자
정경선 루트임팩트 CIO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가 최근 가장 핫(hot)한 경영자로 떠오르고 있다. 주인공은 사단법인 루트임팩트(ROOTIMPACT)와 에이치지이니셔티브(HGI)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정경선 CEO다.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의 외아들인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서울 성동구 소재 벤처창업 지원회사인 ‘헤이그라운드(HEYGROUND)’다. 지금 헤이그라운드가 오픈되자, 서울 성동구 일원은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벤처 천국’으로 변신 중이다. 정경선 대표이사의 말을 들어보자. “체인지 메이킹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든든한 대지(ground)가 되겠으니, 그라운드에 입주해서 함께 일하고, 만나면 가볍게 헤이(hey)라고 인사를 나누자는 뜻에서 헤이그라운드로 지었습니다.”
모든 기업의 주된 목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윤추구이고 돈이다. 그런데 아산 회장의 손자는 기업의 주된 목표를 회사의 이윤보다 사회적기업의 사회적가치에 두고 있다. 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HEYGROUND Overview
2017년 6월, 공식 오픈한 헤이그라운드는 지하 2층~8층, 약 6,000㎡의 건물로 500명의 체인지메이커들이 함께 일하는 업무 공간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헤이그라운드 멤버가 될 수 있으며, 현재 소셜벤처, 비영리 단체, NGO, 사회혁신 지원 조직 및 프로보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헤이그라운드는 국내 최초로 체인지메이커만을 위해 지어진 업무공간으로서, 체인지메이커들의 활동이 보다 지속가능해지고 더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도록 지원코자 설계되었다.
루트임팩트는 2015년부터 24개의 잠재적 헤이그라운드 입주사와 함께 ‘그라운드 빌딩 프로세스’ 작업을 통해 헤이그라운드만의 문화를 정의하고 그 안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단순히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멤버 모두가 ‘임팩트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원으로서 체인지메이커들만의 문화, 협력 방식, 커뮤니티를 함께 정의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그 결과 2017년 7월 현재, 43개사 550명이 헤이그라운드로 출근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정경선 대표이사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한스’에게 꽤나 감정이입을 했었다”며 이런 말을 둘려주고 있다. “저 역시 한스처럼 내성적인 아이였었죠. 그런데 제게 상상의 세계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책과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나아가서 RPG(Role Playing Game)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저만의 세상을 꿈꿨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보노보 혁명(제4섹터, 사회적 기업의 아름다운 반란)’이라는 책을 읽고 아쇼카 재단을 알게 된 후, 시민의식의 표상과 같은 사람들을 지원해서, 의미 있는 변화와 함께 의미 있는 운동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는 조직을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저만의 꿈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산 탄생(1915-2001) 100주년인 2015년 즈음에 설립된 헤이그라운드의 성공을 아산 회장도 지하에서나마 기뻐하시리라!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길을 찾을 수 없으면 만들라”는 자신의 말을 손자가 이루었기 때문에….
글_ 박동순 편집인
정석현 수산중공업·수산인더스트리 회장
“열한 살 때(1963년) 일입니다. 집에서 8Km 떨어진 오수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1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때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면 중학교 문턱을 못 넘어섰을 겁니다.” 너나할 것 없이 궁핍했던 시절, 정석현 수산중공업 회장의 이야기다. 정회장은 현대건설에 엔지니어로 입사 후, 이른바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한양대 기계과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곧 이어 작은 공구상점을 개업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그 작은 공구점은 플랜트 전문건설 부분 TOP 기업으로 성장한 오늘의 석원산업(수산인더스트리)으로 성장했다. 정회장의 도전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 후 브레이커, 유압드릴, 크레인 등을 생산, 전량 70% 이상을 수출하는 수산중공업을 인수 8년 만에 매출을 4배 이상 성장시켰다. 수산중공업은 이제 수산인더스트리, 플러스기술, 한국가스기기, 수산서비스, 포뉴텍 등을 거느린 세계적 강소(强小) 중공업그룹으로 성장했다. 정회장은 경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키워드로 기술개발과 노사관계를 꼽았다.
“수산중공업은 현재 전체 매출의 70%가 수출을 통해 발생하고 있으며, 이중 50%는 일본업체와의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의 엔저현상은 우리 수산중공업에는 넘어야 할 큰 산인 것이 분명합니다. 엔저현상은 비단 우리 수산중공업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 중 일본업체와 경쟁하는 많은 기업들이 함께 겪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저는 지금의 엔저현상이 “약 3년간은 지속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환율이라는 것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대외변수에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끊임 없는 기술개발과 원가절감을 통해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대외적인 환경이 어려울수록 우리 중소기업계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노사관계입니다. 노사가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함께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의지가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 수산중공업은 노사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회사의 성장을 위해 함께 뛰고 있어 앞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부합니다“
– 2016년 현대경영 인터뷰
정회장이 이끄는 수산중공업, 수산인더스트리 등의 기업들은 대부분 대기업에 납품을 통해 매출을 의존하는 기업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신제품을 생산하고 소비자들에게 직접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이다. 이같은 중소기업이 독일식의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의존에서 벗어나 대기업에 기여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고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정회장은 강조한다. 또 “원자력발전 정비시장은 과거 한전KPS가 국내 시장 100%를 점유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원자력 정비시장도 민간에게 오픈하게 될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기술자들을 모집하고 교육하는데 투자했다”고 한다. 결국 원자력 정비시장도 민간에게 일부 개방이 되었지만 그 시장을 준비한 기업은 수산인더스트리 밖에 없었다. 결국 준비하지 않은 기업에게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준비에도 원칙이 있다. “수산중공업 또는 수산인더스트리 등 R&D비용은 계량적으로 산정할 수는 있지만 한도는 없습니다. 이익이 나면 줄이고 R&D비용에 투입합니다. 그러나 빚을 내서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는 정회장의 원칙은 바로 강소기업 성장의 비밀이 아닐까?
글_ 이희규 기자
정휘동 청호나이스 회장
한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간디(Mahatma Gandhi)에게 찾아왔다. “선생님! 아들이 단 음식을 너무 좋아합니다. 먹지 말라고 해주세요.” 그러자 간디는 그 부인에게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2주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온 여인에게 간디는 조용히 아이에게 타일렀다.
“꼬마야! 단 음식은 몸에 해로우니 그만 먹으렴.”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선생님! 어째서 2주 전엔 아무 말씀도 해주시지 않으셨나요?”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인께서 처음 오신 날, 저 역시 단 음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부터가 단 음식을 즐기면서 어찌 남에게 끊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먼저 단 음식을 끊기로 작정했지요. 제가 단 것을 끊으려면 2주 정도가 필요했거든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간디는 현재까지도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도자다. 위의 이야기에서 간디는 자신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남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도 바뀌지 않는다.
늘 같은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손에 쥐어지는 게 없다며 남의 탓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화를 읽고, 닮고 싶은 사람들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내심 모종의 결심을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이다. 그들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결심한 것 중 몇 퍼센트나 실천하고 있는가?
정휘동 회장의 세 가지 제안
① 자신을 선두그룹의 위치에 올려놓으십시오. 운동선수의 경우, 올림픽을 위해 저마다 4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붓겠지만 원하는 메달을 차지하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성공의 열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땀 흘린 사람이 가져가는 법입니다.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제 위치가 선두그룹에 편성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두그룹은 ‘가진 자’들보다 ‘가지려는 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② ‘안되는 사람’에서 ‘되는 사람’으로 바꾸십시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상 시상식 후의 대규모 축제행사를 2년 연속 진행한 프로듀서는 20대의 한국 여성이었고, 또 미국 MIT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연소 대기업 임원이 된 SK 윤송이 상무이사(현 엔씨소프트 CEO)도 20대 여성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되는 사람’은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이야말로 성공의 열쇠이지요.
③ 습관과 마음가짐을 바꾸십시오. 남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더 부지런히 일하고, 더 바쁘게 생활하는 사람은 그만큼 대가를 반드시 보장받게 됩니다. 남들보다 아침을 먼저 열어가는 습관을 키우십시오. 내가 바로 ‘최우수 실적’의 주인공이라는 마음, 단기간 내에 목표를 이루겠다는 마음,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계획하는 마음을 아침 일찍부터 품으십시오.
– 정휘동 지음,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위로 달린다’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4년을 피땀 흘려 노력한 선수만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남들보다 갑절로 노력한 사람만이 사업에서도 빛을 보는 것이다. 결국 나를 바꾼 사람만이 세상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이 어린 여성분들까지도….
글_ 박동순 편집인
조규일 진주시장
2018년 7월 10일 한국경영학회는 기업인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미래 창업인과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글로벌 기업인을 배출한 진주지역을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한국경영학회는 선포문에서 진주가 LG/GS그룹의 구인회 회장, 구자경 회장, 허준구 회장, 허신구 회장, 허창수 회장, 허동수 회장,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효성그룹의 조홍제 회장, 넥센그룹의 강병중 회장, 대교그룹의 강영중 회장 등 300여명이 넘는 우리나라 굴지의 창업기업인을 배출한 창업과 기업가정신의 산실임을 밝히고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선도하고 미래 세대들의 창업정신을 촉진하고 훌륭한 기업가정신의 기업인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진주시는 한국경영학회의 기업가정신 수도 선포를 계기로 ‘기업가정신의 수도’로서 이미지를 고취시켜 유망기업의 투자를 촉진하고 미래 기업인을 양성하는 창업의 중심 메카로 발돋움한다는 계획 하에 단계적인 조치에 들어갔다.
진주시는 지난 8월 특허청에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수도 진주’를 상표 출원했다. 이는 진주시의 기업가정신 수도 지역브랜드를 구축하고 명칭 사용에 대한 독자적 배타적 권리를 확보할 뿐만 아니라 진주 출신 기업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지속적인 기업 투자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지난 9월 5일 ‘남명사상과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는 기업가의 정신적 사상의 근원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공통으로 남명 조식선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우리나라 기업가정신의 원류 중의 하나로 주목하고 있어 남명사상이 진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업가정신의 뿌리임을 밝히고 이를 통하여 진정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정신이 무엇이며, 이것의 뿌리를 밝혀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진주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 창업주들을 길러낸 교육의 전당인 지수초등학교를 기업인들의 성지로 조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기업가정신 콘텐츠 제작, 기업가 상징물 조성, 스토리텔링 등 관광상품 개발, 기업가역사관 건립 등 중장기적인 사업도 서두르고 있다.
올 7월 민선7기 진주시장으로 취임 후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시정의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업유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투자유치 전문가 영입, 투자 인센티브 확대, 공장설립 규제 완화 등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시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월 정례로 ‘시민과의 데이트’ 및 분야별 간담회, 읍면동 순방 등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낮은 자세에서 시민들과 기업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시장 취임 100일 동안 기업인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고 기업인의 기를 살려 유망기업을 유치하려는 노력과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이들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조 시장의 행보에 진주시민들 모두가 박수를 보내고 있다. 자신의 철학을 아래로 내리는 수직적인 문화를 지양하고 ‘경청과 공감’으로 소통을 강조하고 수평적 조직관계를 지향하는 조규일 시장에게서 이 시대가 원하고 존중받는 기업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진영환 삼익THK 회장
삼익THK는 1960년 설립한 삼익공업사가 모태로 58주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다. 삼익(三益)이라는 이름에는 ‘생산자, 소비자, 이해관계자’ 셋(三)을 이롭게(益)한다는 창업정신이 담겨 있다. 삼익THK의 역사에선 ‘삼익줄’과 ‘삼익쌀통’을 빼놓을 수 없다. 창업 5년 후 삼익공업사가 (주)삼익줄로 법인전환하고 모든 산업의 기초 수공구인 줄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제품의 우수성’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0년대 들어선 당시 주부들에게 최고의 인기상품이자 기존에 없었던 혁신제품인 ‘삼익쌀통’을 출시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1980년대에는 국내산업이 기술집약적으로 환경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고 업무 전산화와 연구개발 등 회사 발전을 주도해나갈 기술연구소도 설립했다. 또한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LM가이드(기계의 고속화, 고정도화에 필수요소인 직선운동시스템)의 성장가능성을 인식하고 일본THK와 LM가이드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해 국내 최초로 LM가이드를 자체생산하면서 해당 분야의 국내 1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삼익THK는 이제 ‘글로벌 산업자동화 솔루션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기술개발과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이같은 고속성장에는 진영환 회장의 3정(正·精·情)경영이 그 뿌리로 자리잡고 있다.
“삼익THK의 기업정신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익THK의 주력제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해왔는데, 이는 곧 우리나라 산업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줄의 경우 창업아이템으로 지금까지 생산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쌀통의 매출이 괜찮았다고 해서 그냥 ‘해피(happy)하다’며 만족하고 안주했으면 결코 지금 규모의 회사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변화하고 혁신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삼익THK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익THK의 기업정신, 기업문화에는 삼익만의 ‘3정의 문화’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① ‘바를 정(正)’으로 정도(正道)를 걷자는 의지
② ‘정밀할 정, 정성 정(精)’으로 최상의 품질과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
③ ‘인정 정(情)’으로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는 따뜻한 정(情)의 문화
이러한 3정의 문화를 ‘기본 경영방침’으로 삼아 ‘정도투명경영’, ‘고객만족경영’, ‘인간존중경영’의 3정(正·精·情)을 끊임없이 추구해왔기 때문에 고객들로부터 오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진영환 회장 현대경영 인터뷰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다.” 국내 정상급 뮤지컬인 ‘맨 오브 라만차’에서 주인공인 돈키호테가 하는 대사 중 일부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추구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삼익THK도 마찬가지였다. ‘삼익줄’이 국내 최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안주하지 않고 쌀통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지만 이것이 성공해서 회사에 큰 이익이 될지 아니면 손해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산업용 로봇 분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회장은 미래를 생각하며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고 결과는 늘 성공적이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경제상황에서 진회장이 던지는 ‘변화와 혁신’의 메시지는 모든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글_ 이희규 기자
최규성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정치인 출신 CEO(최고경영자)인 최규성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은 ‘경제정치’, 즉 경제를 생각하는 정치가 출신 CEO로 유명하다. 최사장이 생각하는 경제란 무엇보다 농어업인을 비롯한 국민 생활과 밀접한 경제를 말한다.
2018년 2월 한국농어촌공사 CEO에 취임한 최사장은 ‘경제정치인’ 출신답게 공사의 ‘사회적 가치’ 기능강화를 위한 조직개편에 핵심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선언, 다른 공기업 CEO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북 김제 출신인 최사장은 17대, 18대, 19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의정활동을 통해 농업인의 소득을 위한 쌀 목표가격제 개선, 쌀 소득보전 직불금 부당 수령 방지책, 동서화합과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새만금-포항 간 동서고속도로사업 확정 등 지역과 농어촌에 필요한 현실적 대안개발과 제도개선에 앞장서 왔다. 최사장의 취임 일성을 들어보자.
“우리 농어업과 농어촌 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져 기쁘게 생각하며, 막중한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공사는 대한민국 농어촌 발전의 주역으로서 주곡 자급 실현과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저 역시 국회에서 주로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과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농어촌의 산적한 현안에 대한 정책적 해법을 찾고자 노력해온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 공사 CEO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은 과거 의정활동 중 부족했던 부분을 다시 한번 채워달라는 시대적 소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할 방침입니다.”
공사의 미래비전과 관련, 최사장은 “농어촌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선도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공사로 변화해 나갈 것이고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 가치의 창출은 공기업의 선택이 아니라 존립의 필수조건으로 농정환경의 변화에 맞게 기존 주력사업의 기능을 재정립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기후변화에도 농업인이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도록 기존사업의 역할을 재정의하여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농어촌의 미래를 위한 신성장사업 육성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공사를 운영하겠다고 강조. 무엇보다 국민이 생활 속에서 체감할 수 있는 사업 성과를 내기 위하여, 조직과 인력을 효율과 성과중심으로 개편하는 등 선진 경영시스템으로 혁신해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의 국정과제로 선정된 ‘새만금개발’을 위해서는 농어촌공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해 2023년 새만금에서 열리는 ‘세계 잼버리 대회’의 성공을 위해 부지매립공사를 조기에 준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
또한 공공주도 매립의 가시적 성과를 올리기 위해 앞으로 잼버리 부지와 같은 방식의 매립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가겠다고 한다.
최사장은 “신뢰가 없이는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존립할 수 없다”는 논어의 무신불립(無信不立)의 뜻을 새겨 “공사 CEO로서 언제나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천금 같은 신조로 삼고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국민과 농업인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농어촌공사의 발전은 국가발전과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_ 박동순 편집인
한성숙 네이버 사장
투명경영과 신뢰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화학, 의약기업인 독일 머크사는 350년 동안 13대째 창업가문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 경쟁력은 바로 ‘기업가정신’과 과학적 호기심’의 결합이다.
350년 제조업 머크사와 창립 20년도 채 안 되는 IT기업 네이버와 단순비교가 가능할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투명경영’과 고객 ‘신뢰’다.
네이버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최고의 기업가정신으로 삼고 전면에 나선 CEO가 있다. 바로 한성숙 네이버 대표다.
한 사장은 “사용자들이 네이버 플랫폼을 더욱 신뢰하며 이용할 수 있도록 글로벌 수준 이상의 서비스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며 CEO에 오르자마자 네이버의 투명경영과 신뢰도 회복에 힘썼다.
첫 화면 뉴스 삭제, 실시간 검색어 삭제, 댓글 시스템 변경 등 뉴스 서비스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정책 변경안을 내놨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불거진 댓글 매크로(자동 프로그램) 사용과 관련해서는 24시간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 소셜 계정 댓글 제한, 동일 전화번호를 지닌 계정들의 댓글 제한, 반복성 댓글 제한 등도 실시했다.
한성숙 사장이 투명성과 신뢰회복을 위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 소상공인 지원방안도 강화했다. 서울, 부산, 광주에 ‘파트너스퀘어’를 열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에게 광고, 마케팅, 세무 등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판매제품까지 전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 사장은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민컴에서 잡지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직하면서 IT관련 기업에 첫발을 딛었다. 엠파스 창립 멤버로 합류해 검색사업본부장을 거쳐 네이버 전신 NHN으로 옮겨 검색품질센터장, 서비스본부장을 역임하면서 IT서비스 전반을 총괄했다.
IT 1세대다. 그는 여성으로서 이용자의 작은 목소리까지도 살피는 섬세함과 시장의 흐름을 서비스로 연결하는 실행력으로 네이버의 변화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IT업계에 몸담았다면 한 번 성공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네이버는 어느 때보다 빠른 변화 속에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다.”
“우리는 늘 매번,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쌓인 산을, 직접 길 만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이런 큰 노력과 수고가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저 또한 네이버의 대표이자 여러분의 동료로서 진심을 다하겠다.”
한성숙 사장은 말한다. “네이버에서 내가 여자라서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유를 갖기 시작하면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진다. 하고 싶은 일을 정한 다음에는 될 때까지 견뎌내야 한다. 정상에 오르려면 결국 견뎌야 하고, 내가 하는 것만 힘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객이란 민감한 사람이 아닐까? 고객들은 요새 이런 말을 한다. “네이버가 정직해지는 것 같다고.....”.
글_
채영희 기자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나의 기업가정신은 ‘고뇌’
캘러웨이골프를 창립한 일리 캘러웨이는 뒤늦게 골프에 빠져 회사를 설립한 CEO다. 대학 졸업 후 1970년대까지 방직회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64세에 골프를 접하고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은퇴 후 계획하던 와인 사업 대신 골프사업을 시작했다.
와인 생산을 위해 캘리포니아 지역에 포도밭을 사두었던 그는 우연히 인근 작은 클럽 공장에서 웨지와 퍼터를 접하게 되는데, 이것이 캘러웨이골프클럽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히코리스틱’ 클럽이다. 이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골프용품 사업을 시작한 일리 캘러웨이는 클럽의 전설적인 엔지니어 ‘리처드 햄스테더’를 영입해 ‘S2h1우드’, ‘ERC드라이버’ 등 명작을 탄생시킨다.
일리 캘러웨이의 40년이 넘는 노련한 경영 능력과 골프에 대한 열정, 과감한 행동력이 캘러웨이골프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스포츠는 기업경영에 좋은 경험과 철학을 안겨준다. 대한민국 스포츠경영의 국가대표는 당연히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이다. 대한골프협회장을 세 번이나 맡을 정도로 골프광인 허광수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이자 비즈니스맨이다.
허회장은 자신의 ‘인생의 스승이자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선친인 허정구 삼양통상 전 회장을 언급했는데 선친 또한 대한민국 골프계의 지도자이자 만능 스포츠맨이셨다.
부친의 공을 티에 놓아드리면서 골프에 친숙했던 허광수 회장은 아이스하키 선수 때의 부상을 계기로 제2의 스포츠인 골프에 인생을 걸었었다.
“네가 원한다면 프로골퍼로서의 길을 가도 좋다”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지만 당시 한국 프로골프는 크게 만족할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깊은 고민 끝에 프로골퍼의 길을 접었다고 한다.
삼양통상 LA지사장, 이사, 전무, 부사장, 사장을 거친 허광수 회장은 1997년 회사명이 변경된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에 취임했다. 성장의 기틀을 다진 후에도 에너지사업과 환경사업 등 변화와 도전을 통해 사업다각화를 하며 해외시장을 개척한 것이 오늘의 삼양인터내셔날을 만든 원동력이다.
세계 일류기업을 지향하는 삼양인터내셔날은 세 가지 기업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고객만족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둘째, 도전과 변화의 추구
셋째, 창조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허광수 회장은 “창조적인 기업이 미래를 주도하고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을 발견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이는 고스란히 고객의 행복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혁신과 책임경영을 통해 고객과 함께 ‘존경받는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가는 것이 삼양인터내셔날의 비전이며, 허회장은 기업을 스포츠처럼 경영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시킨 산 증인이기도 하다.
18홀 중에 공을 치는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선택과 고민의 시간이다.
허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어찌 보면 매순간의 ‘도전과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고뇌’가 아닐까.
글_ 이희규 기자
허명회 KD운송그룹 회장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논하기 위해서는 ‘기업가정신 대상(2010)’을 수상한 허명회 KD운송그룹 회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배병휴 ‘경제풍월’ 대표는 시상식에서 “허회장님은 공자의 치술(治術) 중 돌보아주는 것(養:양), 가르치는 것(敎:교), 솔선수범하는 것(先:선) 등 세 가지를 실천하신 분으로, 경영여건이 열악하고 부채에 눌려 도산이 잦은 운수업계에서 거의 신기(神技)의 억척 성격으로 단 하루도 결근 없는 ‘특근(特勤)’으로 부실회사를 인수하여 재생시킨 그의 운수대통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낸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고 칭송했다. 허회장과 KD운송그룹은 운수대통(運數大通)이요 또한 운수대통(運輸大通)이라는 겹경사를 맞은 것이다.
허명회 회장은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고 전역 후 경희대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경기여객 임시직 사원으로 입사해 주임, 과장, 상무 등을 거치고 대원여객을 창업, 10년 만에 소위 ‘흙수저’에서 ‘다이아몬드수저’가 된 전설적인 CEO다.
이후 경기여객과 남일여객 등을 인수하며 오늘날 국내 최대의 대중교통산업의 대표회사로 부상하면서 KD운송그룹은 업계 부동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은 회사를 국내 최대 네트워크를 구축한 초일류 운송그룹으로 만들 수 있었던 허회장의 기업가정신은 ① 검소 ② 직원사랑 ③ 경영전반 업무 섭렵 ④ 성실 ⑤ 현장경영으로 요약된다.
① 검소: 임시직으로 시작하여 10년간 모은 돈으로 30대의 버스를 산 후 대원여객을 창업했고 한국 최고, 최대의 버스회사로 성장했지만, 자가용을 한 번밖에 바꾸지 않는 등 허회장의 검소함은 가장 큰 내공(內功)의 비결이라 할 것이다.
② 직원사랑: 버스기사들의 유니폼을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하고 업무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김장철엔 김치까지 나누어주며 직원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정년 보장, 정규직 고용 등 노사신뢰의 관계유지에 특별히 힘쓰며 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허회장의 직원사랑도 회사성장의 비결로 꼽히고 있다.
③ 경영전반 업무 섭렵: 임시직 시절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며, 허드렛일부터 배차·발권 등의 업무까지 섭렵했던 이력을 보면 경영전반에 모두 능통한 ‘버스운송산업의 마에스트로(maestro)’로 불리고 있다.
④ 성실: 경영 반세기 동안 부모님 상(喪) 3일, 녹내장 수술 3일을 빼놓고는 모두 회사에 나가 업무를 수행한 허회장의 근면과 성실함이다.
⑤ 현장경영: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KD운송그룹의 네트워크는 수많은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회장은 모든 노선이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는지 전부 꿰고 있으며 배차시간이 적당한지, 고객이 불편한 점은 없는지 등을 항상 현장에 나가서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단기간의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객들에게 꼭 필요한 노선을 신설하고 지원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이런 허회장의 노력으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30대의 버스로 출범한 KD운송그룹이 고속버스, 시외버스, 공항버스, 광역버스, 시내버스 등 보유차량 5천240대로, 일본에 아시아 최대 여객철도 운송회사가 있다면, 한국에는 KD운송그룹이 아시아 최대 버스회사로 지속성장의 모델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무쪼록 한국 대표 버스회사에서, 아시아 대표, 세계 대표 버스회사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글_ 이희규 기자
허승호 대원강업 부회장
대원강업은 1946년 설립되어 70년이 넘게 ‘스프링·시트’ 제품 생산에만 전념해 온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이다. “우리가 맡은 것 하나라도 세계 최고가 되자”라는 일념 아래 ‘한 우물’을 판 대원강업은 국내 스프링시장의 약 80% 이상 점유하고 있으며 세계 TOP 5에 드는 종합 스프링·시트 제조사다.
창업자의 3세인 허승호 부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미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회사 내 주요 요직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고, 1999년 대표이사로 취임, IMF 위기를 탁월한 경영수완으로 안정화시켰다는 평가가 따랐다.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2006년에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취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업다각화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뚝심을 지켜온 기업가정신, 스프링과 시트만으로 지난 70년간 끊임없는 혁신과 성장을 기록해온 이면에는 허부회장만의 세 가지 대원칙이 있다. 이는 조부이자 창업자 고 목산 허주열 명예회장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첫째는 ‘인격도야(人格陶冶), 기업번영(企業繁榮), 국가초석(國家礎石)’의 사시(社是). 허승호 부회장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원강업의 사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먼저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를 기반으로 한다. 개인의 인간 됨됨이에서 시작해 내가 속한 회사, 나아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뜻이다. 개인이나 회사의 성장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가와 인류에 보탬이 되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에 전 임직원들도 사명감을 갖고 일에 임하게 된다.
둘째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 경쟁력’은 곧 기업의 존망을 가름한다는 ‘품질원칙’이다. 대원강업은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품질 제일주의와 신용 본위주의를 바탕으로 사세를 확장해온 기업이다.
“품질은 관심의 크기이며 관심에는 확인이 따라야 하며,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허부회장의 말은 평소 품질에 관해 얼마나 중요하고 꼼꼼하게 챙기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노력으로 대원강업은 기준이 까다롭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도 제품 수주에 성공했고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셋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의 원칙이다.
대원강업은 국가 기반 산업인 자동차 산업을 위해서 최고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적시에 공급하는 일을 사명감으로 여기고 있다.
허부회장은 대원강업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는 행동가로서 스프링만큼은 기업 본연의 사명인 이윤에 관계없이 그 어떤 제품도 수입을 불허하고 있으며 외국에 의존하던 부품들도 잇따라 국산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기업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산업, 나아가 국가에 기여한다는 사시(社是)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국가 미래를 향한 준비를 멈추지 않는 허승호 부회장의 ‘세 가지 대원칙’이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대원강업의 초석으로 자리잡고 있다.
글_ 이희규 기자
* 자세한 내용은 월간현대경영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Copyright ⓒ 월간현대경영 2018. 10월호
첫댓글 프로필 사진이 안 나오네요~
그리고 한성숙 네이버 사장 자료는 보완할 예정임.
방금 모두 보완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