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규군 2만여 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거두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밤낮 구별 없이 6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치뤄졌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화룡현 이․삼도구 서북쪽과 어랑출의 심산 장곡지대에서 2만여 명의 병력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의 토벌군과 10여 회의 혈전을 결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때 안무의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어랑촌 전투와 완루구 전투, 고동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승첩을 거두면서 독립전쟁의 뜻 깊은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의 값진 승전은 독립군 지도부의 뛰어난 전술과 용병술, 독립군 병사의 임전무퇴 정신과 동포들의 충심 어린 식량지원 및 정보제공 등이 혼연일체 되어 이루어낸 것이었다.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명칭 아래 일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대병력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 출병의 적당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0월 초에 중국 마적(두목 장강호(長江好))을 매수하여 훈춘사변을 일으킨 후 제19연대는 무순(撫順), 흥경(興京), 통화, 환인, 관전 등지로, 제20연대는 공주령(公主嶺), 산원포(山源浦), 영액성(英額城), 개원(開原) 등지로 출병시켜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니 이것이 곧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경신참변 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자유시에 도착, 부대를 재편하다
청산리 대첩 후 독립군 부대들은 장기적인 항전의 기지를 찾아 밀산(密山)으로 향하였으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등 연합부대도 밀산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북정하여 독립군의 집결지가 된 밀산은 1910년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이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지만 많은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하기는 곤란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1910년 전후부터 국외항일기지로 터전을 닦아오고 20만명이 넘는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노령 연해주로 월경키로 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 하겠다고 크게 선전하던 때였다.
월경하기 전에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장기항전(抗戰)할 것을 다짐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김좌진․조성환․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환․조동식․윤경천․오광선 등을 선임하였다.
밀산에 집결하였던 지청천․최진동․홍범도․김규식 등과 함께 선생은 노령 이만을 거쳐 1921년 6월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독립군은 새로운 전술전략을 습득하였으며 당시 러시아 한인군 지휘관의 한 사람인 오하묵(吳夏黙)의 주선으로 그곳 치타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러시아 측의 독립군에 대한 원조는 순조로운 듯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군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백군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북경에서 일본 주중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 어업권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방택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고 항의하면서 그 해산을 요구하자 러시아에서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일본과 불화를 가져 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독립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러시아의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휘말려 수많은 독립군이 무참히 희생되다
더군다나 1921년 6월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아(일명 : 朴允文)의 사할린 의용대 간의 이념과 이해의 갈등이 발생하자 러시아 적군은 흑하변 스랍스크촌에 주둔하고 있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총격을 감행하여 왔다. 러시아 적군의 전면적인 공격 앞에서 수많은 한인 무장대원들은 무참히 희생 당하고 말았다.(자유시 참변)
이때의 피해상황에 대하여 간도지방 한국 독립단에서 발표된 <자유시 사변에 대한 성토문(聲討文)>에 의하면 기원(紀元) 4254년 6월 28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 의용군이 노군(露軍)과 싸운 결과 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대참변을 당하게 됐다. 대한의용군에 참가한 단체는 사할린 군대, 청룡(靑龍)군대, 이만군대,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단 등으로서 자유시 참변에서의 한인무장대의 희생은 실로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선생의 군대는 제야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상해파)와 자유대대(이르쿠츠크파)간의 알력이 심화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국민회군은 양파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북간도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