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신부,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쳐,
살레시오회 이태석 요한 신부님
의사, 이태석 신부
수단에서 신부 겸 의사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는 2년 마다 한 번씩 휴가차 한국을 찾는데, 이번에는 대한의사협회의 초청으로 대한의사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인 ‘해외활동 의사 초청 심포지엄’에 참가하고자 고국을 방문했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 공부를 하고 군의관을 마친 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 신자로 원래 꿈이 ‘의사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진학 중이던 1999년, 이태석 신부는 여름 방학 기간에 아프리카를 가게 되었는데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그 곳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2001년 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곳이 수단이란 생각에 수단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수단
이태석 신부가 의료봉사활동 중인 수단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 수단은 내전과 기아가 얼룩진 곳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이 살고 있는 남수단과 아랍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수단으로 나뉜다. 두 곳은 인종과 종교 등 상황이 달라 거의 두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 중 이태석 신부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남수단으로 가난은 물론 전기나 전화, 수도 등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고 1년 내내 50도를 넘나드는 혹서의 땅이다.
봉사활동
- 의료봉사
처음에 이태석 신부가 수단에 왔을 때 반경 100km 이내에 병원은 물론 환자를 보는 의사들이 없었다. 병원의 필요성을 느낀 이태석 신부는 2000km 떨어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트럭으로 2~3개월에 걸쳐 필요한 자재들을 공수해 2004년에 병원을 건축했다. 이태석 신부는 하루에 150~200명 정도의 환자를 보는데,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이질 등 감염성 질환자들이 많다. 복부, 임파선 등 각종 결핵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는 물론 아프리카 오지라서 뱀이나 악어에 물려서 오는 환자도 가끔 있다. 또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부족 간의 전쟁으로 창에 찔리거나 총에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환자도 심심찮게 있다.
- 교육활동
이태석 신부는 의료봉사활동은 물론 교육활동도 하고 있다. 이태석 교사가 머무는 지역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 학교가 전혀 없어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에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약 40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학교 규모가 점점 커져서 18개의 교실에서 14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성장했다.
이태석 신부는 교육 외에도 음악도 가르치고 있다. 수단은 오랜 내전을 겪은 나라로 그로 인해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 상처를 음악으로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리부터 시작해 기타, 오르간을 가르치다 4년 전에 10개의 악기와 35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밴드를 결성했다.
문둥병으로 발가락의 형태도 찾아 보기 어려운 수단 어린이들을 위해
신부님께서 직접 폐 타이어를 이용해 신발을 만들어 주셨다는 군요....
문둥병으로 육신이 오그라 들어도 아이들은 천사같은 미소를 늘 띄고 있다고 합니다.
온전한 신체를 갖고도 늘 부족함으로 행복을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한장의 사진입니다.
수단 어린이들의 슈바이쳐이신 이 태석 신부님.
수단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봉헌하기로 하셨다는 이요한 신부님과 수단 어린이와 학생들
기브 미 어 펜(Give me a Pen!!)
8년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열흘간 여기 수단에 온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이었다.
먹질 못해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들, 손가락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른채
너무 쉽게만 살아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발가락 없이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나환자들, 삐쩍 마른 엄마 젖을 빨다 결국 지쳐 울어대는 아기들.. 이러한 현실이 무엇보다도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다닐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나무밑에 앉아 그냥 시간을 때우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우리 어려운 시절 가난했지만 젊은이들의 미래가 있었기에 희망을 잃지 않았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모습에선 전혀 미래나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의 모습은 무서움마저 들게했다.
그때 막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했던 제임스 신부님도 ‘교육은 이곳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며 급한대로 7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나무 그늘 밑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최고 학년이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의 평균나이는 열여덟 살 정도였다. 일 년 뒤엔 대나무와 흙으로 작은 움막들을 만들어 교실로 쓰기 시작했는데 책상은 없었지만 Y자 형태의 두 개의 나무 사이에 얹힌 긴 통나무 의자가 제법 교실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처음으로 수업이라는 것을 받아보는 아이들의 눈은 설렘과 호기심에 너무나도 반짝거렸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공책이 부족해 흙바닥에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영어 단어를 써가고 수학 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보며 다 쓰지도 않은 멀쩡한 문구류들을 마구 버리는 우리의 지나친 소비 문화가 분명히 ‘죄’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전 보름달이 너무나 아름다워 마을로 산책을 나간 적이 잇었다.
집밖에 나와있던 많은 아이들이 인사를 해왓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책이나 책을 무릎에 펴 놓고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전기가 없던 집 안에선 공부를 하지 못하고 달빛을 이용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빛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형설지공’이란 말을 방불케 하는 학구열이 대단한 아이들, 배도 고프지만 그보다도 공부를 더 고파하는 정말 기특한 아이들을 보며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공부만큼은 최선을 다해 여건을 마련해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 후로는 전등이 세 개가 달려있는 간이 성당을 밤에 자습실로 쓰도록 했고 병원의 환자대기실에도 전등을 달아 야간 학습실로 쓰기 시작햇는데 매일 밤 많은 아이들이 공부할 것을 들고 찾아왔다.
야간 자습을 무었보다도 싫어하는 한국의 아이들이 정상인지 공부할 시간을 늘려달라고 졸라대는 이곳 아이들이 정상인지 햇갈릴 때가 있다. 처음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라 용량이 부족해 밤 9시까지만 공부를 하게했는데 30분만 더 늘려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전동기를 돌려가며 9시 반까지 공부시간을 늘렸다. 몇 달이 지나자
그것도 부족해 ‘30분만 더’하며 졸라대는 아이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부하라고 애원을 해도 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래! 하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한번 해봐라!’는 심정으로 결국은 밤 11시까지 공부 시간을 늘려놓았다.
자습을 시작할 때 다같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끝날 때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일어나 성모송으로 마무리하는 이곳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기특하고 예쁜지 모른다.
올해 겨우 고등학교를 시작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가 없어 많은 아이들이 불편을 겪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게속하고 싶은 아이들은 근처에 고등학교가 없어 12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로 유학을 가야했다.
없는 살림에 새로운 곳에서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를 마치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공부를 할 수 없이 포기를 해야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형편이 그래도 조금 괜찮아 유학을 갔던 아이들도 학교의 낮은 질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많이 되돌아왔다. 선생님도 충분치 않고 작은 월급대문에 선생님들이 학교에 제대로 나오질 않아 정해진 시간표도 없고 학생들은 교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교사가 오면 하루 한두 시간의 수업을 하고 그나마 선생님이 오지 않는 날엔 하루 종일 한 시간의 수업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꼭 필요한 것인 줄은 알면서도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더 더욱 아팠다.
기도는 들어줄때까지 끈질기게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이들은
‘제발 고등학교를 열어달라’고 끈질기게 수년간을 졸라댔다. 고등학교를 시작해보려했지만 고등학교를 나무밑에서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부지걱정, 건물걱정, 돈 걱정, 선생님 섭외 걱정 등 걸리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기에 선뜻 시작할 수가 없었다.
몇해를 미루고 미루다 ‘에라 모르겠다’벌려놓고 보자! 어떻게 되겠지! 라는 똥배짱으로 -아니 섭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고등학교를 시작해버렸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 고등학교의 재고품을 교복으로 하고 케냐에서 교과서를 사서 나이로비에서 급히 교사 세 명을 구해 데리고 들어와 시작을 했다. 시작을 하고보니 처음엔 보이지도 않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윤곽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잇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이 없어 초등학교 건물 창고를 교실로 꾸며 고등학교를 시작하던 날, 모르는 사람들에겐 아프리카의 조그만 마을의 작은 고등학교의 초라한 개교식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리 선교사들과 이곳 아이들에겐 수년간 함께 꾸어왓던 소중한 꿈을 이룬 감격스러운 날이었고 마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벅찬 날이었다.
교사를 구하기가 힘들어 나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가르치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과 순수한 아이들의 질문 때문에도 더 그렇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삶에 특별한 맛을 내게하는 교실에서 만들어지는 나와 아이들간의 특별한 형태의 끈끈한 우정 때문에도 더 그렇다.
가전제품’, ‘할부구입’, ‘복리이자 ’, ‘소시지’, ‘세금 ’등이 무엇인지를 묻는 때묻지 않은 이곳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덕에 가끔씩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와 있는 착각을 하곤 한다. 야간에 진료실에 앉아 가끔식 오는 응급환자를 치료하거나 수학문제를 들고 들어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소박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요즈음은 연합고사를 준비하고 있는 중학교 졸업반 아이들의 부탁으로 매일 밤 환자대기실의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수학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
케냐나 탄자니아를 가면 길거리에서 ‘기브 미 비스켓’ 또는 ‘기브 미 머니’라고 외치며 먹을 것이나 돈을 구걸하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이들과는 달리 이곳 수단에선 ‘기브 미어 펜’하며 연필이나 볼펜을 구걸하는 특이한 아이들을 많이볼 수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기특한 아이들이다.
이들이 구걸하고 잇는 것은 단순하게 볼펜을 사기위한 돈 ‘백원’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들의 작은 외침은 배움의 권리에 대한 정당한 요구요 ,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이유이건 교육의 충분한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어른들의 명백한 직무유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은 외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즈음은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
- 수단 이태석 신부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간 한국인 의사 이태석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2001년. 촉망받는 전문의 과정을 눈앞에 두고 아프리카 수단으로 간
이태석 신부 (당시39세).
그는 사제서품을 받은 뒤 아프리카 각지를 순례하다가 내전과 질병,
기아로 시들어가는 수단의 비극을 목격하고는 ‘가장 가난한 곳에서
뜻있는 삶을 살리라’는 결심으로 수단에 정착했다.
현재 이 신부가 살고 있는 톤즈는 1만년 이상 소를 치며 살아온 유목민
딩카족의 마을. 그는 이곳의 전통 방식대로 진흙과 나무를 엮어 만든
진료소에서 나병, 말라리아, 결핵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진료소에 올
수도 없을 만큼 중증이거나 더욱 깊은 숲 속에 사는 환자들은
이동진료로 돌본다.
또한, 이 신부는 올 초부터 이웃한 학교의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해 지금은 드럼, 키보드, 기타 등을 갖춘 그룹 사운드를 만들 정도.
살아오면서 늘 삶보다는 죽음이 가까웠고 때문에 웃음조차 잊어버렸던
아이들이, 이제는 음악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해맑게 웃는다.
■ 딩카족에게 배우는 참된 풍요와 평화
지금도 병을 낫게 한다며 굿을 할 만큼 원시부족의 문화와 풍습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딩카족. 이 신부는 그들의 문화가 낯설었지만
그들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자신이 적응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 딩카족은
섣불리 남에게 기대기보다는 나병으로 문드러진 손발로 밭을 일구고,
벌거벗다시피 살아가면서도 이웃과 콩 한쪽을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이 신부는 말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딩카족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그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가난한 몸에 배인
여유와 평화다.
■ 수단은 어떤 나라인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나라(한반도의 11배), 나일강이
흐르는 비옥한 곡창지대 수단. 그러나 수단 남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되었다. 인구 80% 이상을 차지하는 북부의 아랍계와 남부
원주민간의 내전이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의 수단
정부는 남북간의 모든 경제교류를 차단시켜 남부 고사작전에 들어갔고
국제사회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남부 원주민들은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다.
<의사 神父가 아프리카에 만든 `기적'>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수상자 이태석 신부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수상 소감이요? 에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요..."
아프리카에서 8년 동안 봉사활동을 펼쳐 제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태석(47) 신부는 16일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10대 같은 말투와 눈빛으로 대답했다. 사제이면서 의사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01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던 남부 수단의 톤즈마을에서 교육과 의료봉사에 헌신했다.
"의사로 개업하는 대신 선교 사제가 된 동기를 많이들 물어보시지만 특별한 게 없어요. 어릴 때부터 사제로서 이웃을 섬기겠다고 생각했고, 의대에서 잠시 잊고 있었다가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다시 어릴 적 꿈으로 돌아간 거죠" 1999년 로마살레시오신학대학 재학 중에 아프리카 수단 남부를 찾은 이 신부는 말라리아에 감염되는 고생을 하고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2년후 자신과의 약속대로 톤즈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톤즈마을에서 '쫄리 파더'로 불렸다. 세례명이 요한이어서 영어로 '존 리(John Lee)' 신부인데 주민들이 빠르게 부르다 보니 '쫄리'가 됐다. 당시 수단은 남쪽과 북쪽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 전화나 TV는 물론 전기조차 없었고 상점도 없어 식량과 물자 모두 부족했다.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가 창궐했다.
오랜 내전 기간 소년병으로 전쟁을 겪은 수단의 아이들은 어른만큼 거칠고 사나웠다. 이 신부는 학교와 병원 일로 눈코 뜰 새 없는 가운데서도 10대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밴드가 만든 화음은 톤즈마을을 넘어 수단으로
퍼져갔고 사납기 그지없던 아이들의 눈빛은 점점 부드럽게 변해갔다.
"꾸아인이라는 소년이 처음 합주를 하고 나서 이렇게 썼어요. '총과 무기를 녹여
트럼펫과 클라리넷을 만들어 톤즈에서 수십년간 들리던 총소리 대신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요. 은혜고 기적이죠" 아프리카에 온몸을 던졌던
쫄리 신부는 지금 1년이 넘도록 톤즈마을의 브라스밴드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휴가로 귀국한 후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간으로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그동안 항암치료로 머리칼이 빠지고 안색도
나빠졌다. 인터뷰 내내 기운이 없는 듯 숨을 몰아쉬곤 했다. 언제 톤즈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영혼을 위해 8년을 온전히 바친 그는 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냥 담담했어요. 삶과 죽음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이런 병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 있겠죠. 그게 뭔지 계속 묻고 있어요"
이 신부가 쓴 톤즈마을의 얘기와 근황은 사단법인 수단장학회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WithLeeTaeSuk)와 그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
그려져 있었다. 사제인 동시에 의사인 그가 한국의 의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저는 환자가 오면 눈을 찬찬히 바라봅니다.
어디가 아픈지 금방 알 수 있고 고민도 알게 되지요. 요새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환자가 들어오면 모니터 먼저 보는 의사들이 더러 있어요. 진찰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 신부가 참석하는 제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시상식은 17일 JW메리어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리는 대한의사협회 송년의 밤 행사장에서 거행된다.
고 이태석 신부 KBS스페셜로 만난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성경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다 지난 1월 14일 선종한 고 이태석 요한 신부의 불꽃같은 삶이 지난 10일 오후 8시 `KBS 스페셜-수단의 슈바이처 故이태석 신부-울지마, 톤즈`편을 통해 방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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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14일 선종한 고 이태석 신부. |
KBS 간판 다큐멘터리 'KBS스페셜'이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와 교육에 헌신하다 말기암 판정을 받고 지난 1월 14일 선종한 고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조명한다. KBS스페셜팀(연출 구수환 PD, 글·구성 윤정화 작가)은 직접 남부 수단 톤즈마을을 방문, 고 이태석 신부의 발자취와 고인이 7년 동안 이뤄놓은 기적같은 현지의 변화상을 담았다. 당초 4월 4일 부활절에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천안함 긴급 방송 편성으로 방영을 11일(일) 오후 8시(수단의 슈바이처 故이태석 신부-울지마, 톤즈)로 1주일 연기했다. 고 이태석 신부는 1987년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1990년 군 복무를 마친 후 광주 가톨릭대에 입학, 뒤늦게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20년 넘게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내전 중인 수단 남부지역의 톤즈마을에 정착, 의료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다. 이 신부는 질병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손수 벽돌을 찍어 병동과 진료소를 만들어 풍토병과 감염병에 신음하는
남부 수단의 병자들을 내 몸처럼 돌봤다. 남부 수단의 재건을 위해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다. 손수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교실을 지어 초중고 청소년 교육에
매달렸다. 절망의 땅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이 신부의 모습은 2003년 KBS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인터넷 Daum카페(수단이태석신부님)를 통해 후원자들이 모여들었다. 2000여명의 후원회원들은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아 전달하고 있다.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를 결성, 체계적인 후원활동이
이뤄지면서 돈보스코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개교하는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이 신부는 모처럼 휴가를 얻어 한국을 찾은 길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힘겨운 투병 과정에서도 톤즈에 돌아갈 날을 기대하던 이 신부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지난 1월 14일 하느님 품에 안겼다.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울지마, 톤즈
지난 2월의 마지막 날,
아프리카 한복판 수단의 남쪽 작은 마을.
남 수단에 하나밖에 없는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 선 흑인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영정 사진이라고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눈물로 그를 보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종족, 딩카족이다.
유목민인 그들은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아랫니 세 개를 뽑고 이마에는 칼로 브이(V)자 모양의
상처를 낸다.
북수단과 남수단의 오랜 내전은 분노와 증오만을 남겼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딩카족에게 가장 큰 수치다.
바로 그들이 운 것이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해온 이탈리아 사제도 처음 보는 모습이라며 놀라워했다.
검은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 톤즈로 가는 길, 그 위험한 여정 2박 3일
- 이태석 신부는 2008년 10월 휴가차 한국에 들렀다가 말기 대장암을 발견했다. 투병 끝에 결국 지난 1월 14일 선종했다. 투병 중에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제작진은 이태석 신부의 투병당시 화면과 사진을 들고 톤즈로 떠났다. 제작진이 톤즈로 향한 것은 지난 2월 22일. 그러나, 그날 새벽 아프리카 현지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톤즈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20여명이 죽었고, 길은 봉쇄됐었으며, UN에서 외국인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 1월 7일에도 부족 간의 전쟁으로 140명이 희생된 바 있다. 출발을 이틀 늦췄지만, 길은 뚫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돌아가는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남 수단 자치정부가 발행하는 별도의 통행증도 받았다. 비행기를 2번 갈아타고 흙길을 달려 드디어 톤즈에 입성했다. 서울을 떠난 지 2박 3일만이었다.
#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난 의사.
- 이태석 신부는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을 보장받는 의사를 버리고 사제가 됐다.
그는 10남매 중 아홉 번째였다. 노모와 형제들이 눈물로 잡았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곳이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였다. 아랍계가 지배하는 북수단과 원주민이 사는 남수단은 (83년)부터 내전을 벌여왔고,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한번에 3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최대의 비극 다르푸르 사태도 2003년 이 땅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와랍주 톤즈는 내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다. 긴급 구호 전문가인 한비야씨도 자신이 가본 곳 중 가장 최악이라고 했다. 이 신부는 2001년 톤즈에 정착했다.
그는 왜 이곳을 찾은 것일까? 제작진은 톤즈를 방문한 적이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동영상을 모았다. 화면 속의 그는 불빛도 없는 움막 진료실에서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초기 화면(2003년)과 2007년
화면을 비교해보면, 그가 이곳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
- 이태석 신부가 떠난 빈자리는 참으로 커 보였다. 환자로 북적이던 진료실은 텅 비어 있었고 수술실 침대는 어지럽게 널려 있다. 여기저기서 구해온 약들로 꽉 차있던 약 보관실은 빈자리가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지금도 빈 병원을 찾아와 이신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병원을 찾은 2명의 중년 여성은 신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통곡했다. 대부분의 톤즈 사람들은 신부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한센병(나병) 환자들이다. 이 신부는 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주고 아침저녁으로 들러 세심하게 살폈다. 제작진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신부의 사진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손가락이 없어진 뭉툭한 손으로 사진 속 이신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흙집 창가에 사진을 올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가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신들에게 해주었다고 했다.
#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이유 있는 눈물
- 이태석 신부는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가난해진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톤즈강의 모래를 퍼다 날라 학교를 지었다.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 기둥을 옮겨와 농구대도 만들었다. 내전에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2005년 놀라운 계획을 실행한다.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 트럼펫, 클라리넷등 악기를 구해오고, 반듯한 단복도 마련해 입혔다. 스스로 악기 연주법을 공부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브라스 밴드는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제작진이 만난 밴드 부원들은 신부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며 자기들끼리 밴드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신부의 마지막 투병 화면을 지켜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을 멈춘 아이들은 이 신부와의 아주 특별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 제작진의 한마디
故 이태석 신부,
그의 길지 않았던 삶의 행적을 따라가며
제작진은 국내외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태석 신부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부터 보였습니다.
의사 선배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며 목이 메었고,
올해 일흔의 이탈리아 사제는
자신을 데려가고 대신 할 일 많은
이 신부의 생명을 살려달라 기도했었다며 울먹였습니다.
톤즈에서 만난 13살 소년은
이태석 신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보라고 하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현지 통역도
아이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따라 울었습니다.
제작진도 눈물을 피할 길이 없어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눈물로 기억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날,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타인처럼
흩어지는 바람인줄 알았는데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대 향한 그리움-
그대의 그림자에 쌓여
이 한세월 그대와 함께 하나니
그대의 가슴에 나는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가 되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그는 모든 악기들을 독학으로 배운 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음악이 어린 시절부터 소년병 등으로 전쟁을 치러 황폐해진 학생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그는 평온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항암치료 중인 고 이태석 신부. 머리가 모두 빠졌다.
내전 상태로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태였지만 이곳의 군인들도
고 이태석 신부에게 치료를 받은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 이태석 신부를 추모하는 연주 행렬을 제지하지 않았다.
톤즈에서 이 신부는 쫄리 신부라 불렸다. 세례명 요한(John)에 성 이(Lee)씨를 합쳐 그들의 발음으로 부른 애칭이다. 폐허가 된 학교 건물을 다시 쌓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통해 전쟁과 가난으로 상처받은 어린이들을 치유해 나갔다. 4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원주민들은 잘 해야 하루에 수수 죽 1끼로 끼니를 때운다는 수단에서 사제의 역할보다는 의사로서 활동을 많이 했다. 내전으로 불안한 나날 가운데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날마다 방문하는 100여명의 환자들과 결핵, 나병 등 장기 입원환자를 돌보고,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과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8년 동안 했다. 그가 찾아가는 날은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신부님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신부님이 오시면 ‘쫄리, 쫄리’라고 연호하며 몰려들었다.
그랬던 그가 2008년, 2년 마다 갖는 휴가기간에 귀국하였다가 자신이 대장암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3년 정도의 투병기간을 거쳐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14일 선종하였다.
이태석 신부는 나환자를 돌보며 언제나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겸손한 삶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고 말했다.
“나환자 병동에 레지나라는 환자가 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말기환자입니다. 가진 거라곤 저주받은 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행복합니다.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항상 즐겁게 삽니다. 다른 환자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을 보살피려 합니다. 레지나에게서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그들이 내게 돌려주는 행복과 가르침이 더 큽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두운 영화관에서 눈물을 찔찔거리면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정호 프란치스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