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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묵상글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 창조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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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10 04:11
- 창조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지난 몇 주 그러니까 연중 1주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내내 들었고,
오늘부터 또 몇 주 그러니까 연중 7주까지 우리는 창세기를 듣는데
오늘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얘기를 우주의 기원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형제들을 창조하신 얘기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나의 창조와 시작 얘기로만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구원도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창조 얘기가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서 별로 성의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무 쉽게 무성의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무 쉽게 그러니까 생기라 하면 바로 생기는
그런 구조로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2장처럼 손도 안 쓰고, 머리도 안 쓰고,
애도 안 쓰고 그저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이나 약하게 태어난 분들은
사랑도 없이 애쓰지도 않고 불량품으로 나를 만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그러셨을 리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지르신 분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의 표현은 사랑이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음을 얘기하려고 함이고,
앞에서 인용한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라고 얘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이들은 치유만 청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구원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연중 감사송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사랑 없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창조만 하고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자로이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들처럼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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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첫째 딸을 얻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나 딸 자랑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냐면서 웃으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정말, 딸 바보다.”
30년이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30년에 우리에게 보여줬던 딸 바보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그 예쁘고, 똘망똘망한 따님은 잘 계신가?”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웬수 때문에 내가 환장하겠다.”
관점이 바뀌면 인간을 보는 눈도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다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투고 나면 어떨까요? 그렇게 아름답지도 또 멋지지도 않습니다. 나의 원수로만 보입니다.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로 사랑이라는 감각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왔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옷자락 술은 예부터 유다인들이 몸에 착용한 ‘성구갑’과 건물 문설주에 붙이는 ‘메주자’와 더불어 일상에 녹아 있는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이제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자~ 이제 내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려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낮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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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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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독서>는 태초의 ‘창조’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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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께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 과거에 묶여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너도나도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동네는 셈이 빠른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고,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하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아진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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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은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 오면 풍요롭고,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한과 북한은 3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모든 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런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연탄가스, 만원 버스, 암표 장사, 승차 거부, 재래식 화장실, 달동네’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합니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은 경제, 문화, 의료,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하면서 저도 ‘상전벽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이니 25년 전입니다. 본당에 주일학교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5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가정 방문하면서 태권도 사범 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자는 제안을 했고, 자매님은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권도는 본당 사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임진강에 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세례받았고, 부모님도 세례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국기원에 가서 승단 시험도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도 보여주었습니다. 10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제가 떠날 무렵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2010년이니 15년 전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지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도 곤파스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당에 있던 야산의 흙이 흘러 근처 아파트의 축대 벽이 무너졌습니다. 뉴스에도 나왔고, 서울시장도 다녀갔습니다. 저는 시장님에게 야산을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태풍이 불어도 안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시장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야산을 낮추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구청장님도 기꺼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옮겼습니다. 흙은 주민들의 텃밭을 가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산은 10미터 정도 낮아졌고, 성당에는 1,000평이 넘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철쭉도 사고, 벚나무도 사고, 장미도 샀습니다. 아카시아와 잡목으로 지저분했던 야산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윷놀이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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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티가 납니다. 정성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정성이 느껴집니다. 노력이 닿아있는 곳은 그 노력을 볼 수 있고, 사랑이 닿아있는 곳에는 그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구슬땀을 흘린 곳에는 그 땀의 결실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단순한 청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걸레가 닿았던 곳은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는 천지가 시작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대로 되었다고 성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그분의 뜻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분의 숨결과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치유가 일어나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구원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어둠과 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오늘 창세기와 같이 묵상한다면 우리 구원은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에게 닿을 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걸맞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손길을 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통해서 전해지기도 하고 기도 안에서 전해지기도 하고 사제들을 통해서 전해지기도 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입천장이 까지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성격이 급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입천장이 까졌습니다.
훌훌 벗겨지는 천장에 혀를 대며….
얼마간 또 아프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이렇게 다짐하지만….
언젠가는 또 까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알면서도 까지는….
쓰라림의 연속임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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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경청의 환대
“경청이 우선이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베네딕도와 그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 스티카와의 유명한 전설적 일화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제33장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일화라 간략히 그 내용을 나눕니다.
베네딕도 수도규칙 맨 처음에 나오는 “들어라, 오 아들아(Obsculta,o fili)”라는 말마디가 참 인상적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라는 말마디도,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 오늘 기념하는 스콜라스티카의 경우에 적절합니다.
규칙서에서 들음의 경청은 수도승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로 부각됩니다. 두분의 전설적 만남의 일화를 통해서 확인되는 사실은 두분 다 경청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남매는 매년 한차례 만나 영적담화를 나누었고 <베네딕도 전기> 33장은 성녀가 세상을 떠나던 543년 마지막 만남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녀의 누이인 스콜라스티카는 방문하는 날, 하느님의 사람인 베네딕도는 수도원 대문 밖에서 내려와 멀지 않은 곳에서 누이를 기다리다 만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온종일 성스런 대화를 나눕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두분에게서 ‘경청의 환대’를 배웁니다. 하루는 금방 지나고 아쉬움에 스콜라스티카는 간청합니다.
“오빠께 부탁드립니다. 이 밤에 저에게서 떠나지 마시고 아침까지 천상 삶의 기쁨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눕시다.”
이로부터 3일후 세상을 떠났으니 죽음을 예견한 마지막 만남이라 각별한 청이었던 듯 싶습니다.
“누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나는 수도원 밖에서 밤을 지새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빠의 단호한 거절에 누이 스콜라스티카 수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은채 눈물을 강물처럼 책상 위에 흘리며 기도했고, 눈물의 기도는 청명한 하늘에서 비를 끌어들였고, 이어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같이 퍼붓는 비 때문에 오빠는 수도원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영적생활에 대한 성스러운 대화를 마음껏 나누면서 온밤을 지새웠습니다. 새삼 하느님 또한 우리의 기도를 잘 들으시는 경청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 그레고리오 교황의 해명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감동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경우에 오빠를 더 오래 보고 싶어한 여인의 사랑이 그분보다 더 강했다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한 스콜라스티카가 더 능력이 있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의 공통적 특징도 사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경청, 사랑의 환대, 사랑의 기도, 사랑의 기적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일화라 축일 때 마다 펼쳐보는 베네딕도 전기 33장입니다. 복음에 앞서 오늘날은 생략하지만 <부속가>의 내용도 참 아름다워 끝부분만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신부여, 면류관을 받으라.
백합중에서 살며 가득히 찬 행복 속 맘껏 취하리.
강가에서 나아와 천당 궁궐로 가는 동녀중의 비둘기.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인도하여서 영생 얻게 하소서.”
그러니 두 남매의 마지막 만남은 ‘하느님의 각별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근거한 참 아름다운 영성체후 기도문 후반부입니다.
“성녀가 기도한대로 하늘에서 비를 내리신 주님께서 또한 성녀의 전달에 의지하여 저희의 메마른 마음을 천상 성총의 이슬로 적셔주소서.”
바로 두 남매 성인들처럼 경청의 환대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를 관상과 활동의 관계로 설명도 하지만 이보다는 ‘경청의 환대’로 봄이 적절합니다. 관상의 우월성보다는 경청이 우선함을 강조합니다. 관상과 활동, 모두 사랑의 환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기식대로 음식 장만으로 주님께 환대의 사랑을 표현한 반면, 마리아는 주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 말씀의 경청을 통해 환대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관상과 활동의 관계는 우열이 아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이어 주님은 마리아의 환대가 옳았음을 인정하며 마르타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있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경청의 환대를, 활동에 앞서 관상을 선택할 것을 강조합니다. 경청의 환대를 선택하여 훈련을 통한 습관화도 관상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 말씀도 그대로 경청과 환대의 성녀인 마리아와 스콜라스티카는 물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리라.”
여기서 아내가 상징하는 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런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경청과 환대,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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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
살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올곧은 믿음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풋풋한 희망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따뜻한 사랑 지닌
사람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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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약함이 아니라 강함 때문에 겪으시는 고통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굽은 이를 펴 주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시고(마태 11,5 참조), 우리의 바람에 맞갖은 약을 주시고, 간청하는 이를 옷자락의 술로 고쳐 주시고(마르 6,56 참조), 손을 댄 이를 낫게 해 주신 권능의 주님께서 나약했다는 말입니까? 불경한 그대들은 그분의 상처를 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약함이라 여기는 것입니까? 그 육신의 상처는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이의 생명이신 그분의 상처에서 모든 이에게 생명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버림의 목적은 사물을 악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사물을 잊는 것도 아니다. 버림의 목적이 사물을 포기하거나 잊는데 있었다면. 하느님을 버리라고 하는 엑카르트의 가르침은 하느님을 억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부정의 길의 목적, 부정신학의 하느님을 경험하거나 무의 하느님을 경험하는 목적은 창조의 하느님을 억누르거나 잊는 데 있지 않다. 엑카르트의 여정에서, 둘째 오솔길만으로는 부족하다. 둘째 오솔길이 첫째 오솔길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버림의 목적은 만물 속에 있는 신성을 더 깊이 경험하는 데 있다.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소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신적인 방법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은 그러한 사람을 위해 만물 속에서 빛을 발한다. 만물은 그러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하느님은 만물 속에서 그러한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사실상, 버림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의 신성 배후에 있는 신성을 보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크게 칭찬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을 신적인 방법으로 지각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좋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4,1-11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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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구원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이 얻어지는 게 아닐 것입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210. 02:18 ㅣNo.179947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시사해 주는지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병든 사람들이고 또 그들은 자신의 병이 낫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처럼 병원이라든지 의료와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정이고 또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시대적인 배경입니다.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는 재력이 있지 않는 이상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꿈과도 같은 현실이고 그렇게 치료를 하지 못하다 보면 원래 처음에는 사소한 병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병을 키워 큰 고질병 같은 병으로 중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병이 되면 아마 병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그 병이 어떻게 되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경험이 있고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게 되면 판단을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점차 사라지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런 처지에 몰리게 된 사람이라면 어떤 심정일까요? 절박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사정인데 마침 들리는 소문이 있어서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그간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치유해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실제 그게 사실이라는 게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면 그때 그 사람들에게는 그건 절망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실낱 같은 희망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 보면 일단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물어 물어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주십사 하고 간절한 간청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여차여차해서 예수님을 뵐 수 있는 지근거리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을 때 그때 그 사람들이 그들 마음속에 품었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오늘 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청한 것은 병을 고쳐주십사 하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는 병을 고쳐주십사 하는 그런 말을 먼저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조금은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은 실제 일어났던 풍문의 기적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 같은 소문 외에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엄청 많았을 거라고 추측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 기적의 손길이 자신에게 올 수 없다는 불길한 생각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저 치유 기적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들 마음엔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이라도 만질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애절함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만 해도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다는 희망에 찬 확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그런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여기서 결론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하는 결론은 언급이 되지 않고 다만 복음사가의 시선으로 그렇게 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됐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금 표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이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전체 이 상황과 결부시켜 그게 왜 그런가를 묵상하며 마무리지으려고 합니다. 단순히 오늘 복음의 내용만 놓고 봤을 때 구원의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색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죽음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걸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기 위한 일반적인 조건 같은 게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와 같은 것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결과는 무상의 은혜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그렇다고 가치 없이 무조건 백지수표를 남발하듯이 마구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갈구하고 간절히 원하려고 하는 간절함과 애절함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총이 무상의 은혜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는 우리의 공로도 수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건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다고 표현한다고 하면 하느님의 구원은 별가치 없는 그런 가치로 격하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로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이런 게 없다면 그저 구원이라는 게 감나무 아래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얻으려고 하는 형국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이 공로는 사실 구원을 받을 만한 합당한 기준에는 충족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또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보면 아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그게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과 비교를 하면 공로라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공로이기 때문에 감히 공로라고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묵상해봐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장난 같지만 그 말 속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을 거라고 저는 묵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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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오직 복음 묵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10. 19:32 ㅣNo.179940
서방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토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480년경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왔으나 아마도 부모와 함께 기거한 것 같다. 그 후 그녀는 오빠 베네딕토가 동굴에서 은수자로 생활할 때 오빠처럼 살 결심을 하고 여러 귀족 청년의 청혼도 모두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몫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혼자 생활했는지 아니면 공동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오빠인 성 베네딕토를 만나 기도 생활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성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 인근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에게 맡겼다. 그래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로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전승으로 전해진다. 성녀가 마지막으로 오빠의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성녀는 들어갈 수 없었기에, 오빠가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평소대로 기도와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 날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오빠는 수도회 규칙에 따라 거절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오빠와 그 일행은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그곳에 머물게 된 오빠는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 고 물었고, 성녀는 “오빠는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생활의 기쁨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죽음에 관한 전승이다. 오빠와의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동생은 선종하였다. 이날 오빠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창밖으로 동생이 있는 수녀원에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동생이 하느님께로 돌아갔음을 알게 되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마련해둔 무덤에 안장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 주보성녀로 공경 받고, 비둘기는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로 가셨다. 언니 마르타는 일행 시중 일로 분주했고,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치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보고 저를 도우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일렀다. 그분께서 이르셨다. “마르타야, 참 많은 일로 걱정하는구나. 필요한 건 단 한 가지다. 동생은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지 마라.”
이탈리아 출생 수도회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오빠가 세운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평생을 봉직했다.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호 성녀인 그녀는 오로지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는 초막 하나에 은수 생활을 했다. 성녀는 오빠와의 영적 담화와 기도로 하느님 말씀 묵상을 택하면서 저마다 진 제 십자가를 지고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께서도 이 남매에게 천상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내리셨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선교 사명을 지닌 우리도, 비둘기마냥 순결한 성녀의 삶을 본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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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만을 기린다면 /
박윤식 [big-llight] 250209. 19:31 ㅣNo.179939
/ 연중 제5주간 월요일(마르 6,53-56)
예수님과 일행은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이곳은 카파르나움 남서쪽에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다. 그들이 내리자 사람들은 곧 알아보고,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을 곳곳 장터에다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거기에 손을 댄 이마다,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동네방네 소문을 낸다. 어떤 병도 고쳐 주시는 ‘그분’께서 오셨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병든 이를 들것에 눕혀 데려온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온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렇듯 예수님과의 만남은 치유를 통한 접촉이었다. 기적의 힘은 분명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그분을 뵙고 싶은 그 갈망, 그 모든 것을 맡기려는 단 하나 오직 믿음, 이렇게 함께 하려는 이 믿음이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게다.
사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지만, 우리 스스로가 간절함과 무덤덤함,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 열매를 맺을 수도, 아니면 달리 맺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정녕 예수님을 잘 알고 있을까? 예수님께 무엇을 얻고자 여기저기 분주히 나다닐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 그들을 예수님께 정성스레 데려가기나 할까? 아니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기는 할까? 이런 일 가운데 과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하고 있을까?
그래도 예수님 시대의 병고에 시달리는 겐네사렛에 사는 사람들은, 자비의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 간청했단다. 그중에는 멀리서 소리치는 이, 몰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이, 가까운 이들을 동원해 부탁하는 이, 그 방법은 각자 사뭇 달랐다. 그러기에 그들은 저마다 다 구원받았다. 치유는 자신이 병자임을 아는 게 먼저요, 어떤 방법으로도 예수님을 만나는 게 다음이며, 마지막은 보이고 자비를 청하는 거다. 가끔 우리는 각자가 병든 것조차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고 치유 받으려 그분께 달려간 이들은, 그분 말씀에서 그분 치유를 받아들일 믿음이 있는 이들일 게다. 자신이 병든 자임을 깨닫는 이만이, 치유를 간청하기에. 혹시 내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분열시키며, 때로는 혼란을 가져준다면, 나는 치유를 청할 줄도 모르는 영혼이 병든 이가 아닌지를 이참에 꼭 되돌아볼 때이리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은 무한하며, 가끔 성체 조배를 통해 아픔을 말씀드리면 위로를 받는단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분 힘을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며 어마어마한 것으로만 여기기에, 깊게 못 느낄 뿐일 게다. 기적은 따뜻함이고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훈훈함이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선뜻 낫게 하신 게 아니다. 먼저 마음을 열게 하신다. 다음에 당신의 능력을 주신다. 마음을 열었기에 우리는 뜨거움을 느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사 중 영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예수님 모심을 깊이 체험해야 할 게다. 그때마다 기적의 그분을 만나는 두려움이 앞서야 한다. 그러기에 습관적인 영성체가 아닌지 스스로 새겨보자. 애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신다면 영의 힘이 생기로 다가오리라. 지금 이 순간도 애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린다면, 그분의 그 따뜻한 기적은 언제든 체험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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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말하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생태 위기에 놓인 시대에 읽는 창조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읽는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제계 전승의 특징대로 하느님의 창조 활동 전반부가 규칙적인 반복에 따라 질서 있는 작업으로 드러납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혼란(카오스)을 질서(코스모스)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 돌보십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또한 섭리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을 잘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돌봄의 임무를 위임받은 인류는 그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1,11) 조화롭게 땅에 돋게 하신 “푸른 싹”(1,12)을 뒤섞어 유전자 변형이나 종자 조작 등으로 창조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고,
기후 위기는 종자 위기로, 식량 위기로, 인류 생존의 위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충실한 청지기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의 보편 성사로 교회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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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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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마치 예수님을 기다린 것처럼 보이며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미리 알고
맞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제자들의 모습과 다르게 묘사됩니다.
앞부분에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
더욱이 시간이 밤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그랬다고 해석합니다.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에 이어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각자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의 마음은 굳어져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아니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모습이 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어느 모습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나의 모습을 잘잘못의 관점에서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완고한 마음의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굳어진 나의 마음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생각하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반복되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다면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굳은 믿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판단하기보다
나를 돌아보면서
그 믿음을 조금씩 키워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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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사람의 출발지는
분명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웃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람은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픈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사람들의
도움이
우리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서로를
치유하길
바라십니다.
치유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아픔을 모르는
치유가 없고
고통을 모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에는
인격의 여정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아픔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하느님께
진실로
맡기는 것입니다.
전부를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사람의
오늘이란
하느님께
내맡기는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내맡김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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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투자와 시간을 할애하신 부분은 아무래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일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여기저기 몸이 아프면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집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다 보니 만사 귀찮아집니다.
육체가 시들시들해지다 보니,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병들어갑니다.
점점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점점 소멸되어가니, 그것을 견디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분의 하루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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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는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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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처럼 희망하라 - gratia
어렸을 때 들었던 뉴스인데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버스 추락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남편이 며칠 뒤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여인이 없으면 못 살겠다는 순정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잃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과 욕망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병이 치유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하지 않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포기가 빠릅니다. 아이가 엄마 옷자락을 잡고 이것저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것은 사 주고 저것은 사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금방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희망하는 대상이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못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희망은 바라기도 잘하지만,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곧 포기하고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그렇게 큰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영조와 신하들의 등쌀 밑에서 자랐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놀리기까지 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정조의 숙원사업인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이 짓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조의 노력을 싫어했던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력을 몰아낼까 궁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것이 천주교입니다. 정조가 키운 남인과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엮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배교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정조는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절망할 수도 있는 정약용은 계속 살길을 모색하지만, 이번엔 더 큰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작 그는 배교했음에도 그의 가문은 벼슬길이 막히는 폐족이 되고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좌절했을까요? 그는 18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는 엄청난 책들을 씁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이룬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무려 500여 권에 달합니다. 약 2주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입니다.
그가 온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썼기에 복숭아뼈가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앉아서는 책을 쓸 수 없어서 일어서서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문에 폐족이 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희망하며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늦게나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항복하겠다고 고려의 세자가 황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40년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황제에게 노쇠한 임금의 아들이 대신 간 것입니다. 이때 몽골의 황제는 죽고 두 인물이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세자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앞으로 황제가 될 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황제가 되는 중요한 입지를 주는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도 이것을 이용해 고려는 원나라의 변발과 같은 것을 따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항복하는 중에도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희망해야 할 것은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희망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갖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줄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제로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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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웃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은?> - 黃Dami 매일묵상
화가 이중섭이 하루는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의 문병을 갔습니다.
친구가 아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문병이었기에 그는 늦게 찾아온 것을 미안해하며 친구에게 작은 도화지를 건넸습니다.
“자네 주려고 가지고 왔네. 이걸 가지고 오느라 늦었네. 자네가 좋아하는 복숭아라네.”
그는 친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다 줄 돈이 없어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선물을 줍니다.
선물로 내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줍니다.
그 선물이 받아들여지면 그 선물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일반대학교 다닐 때 어떤 자매가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음’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여자가 마음을 준다는 것은 다 준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찾을 것이고 그것을 선물하려 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귀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서 성탄 선물로 과자와 커다란 사과 하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사과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먹기가 아까웠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당과 사는 집의 거리는 아이 발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성탄 선물 꾸러미를 한 시간 넘게 집으로 가져오면서 추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그 큰 사과를 보고 좋아하시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착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왜 먹지 않고 가져왔느냐?”고 하셨지만, 내심 감동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먹을 것을 부모님께 드린 이유는 어떤 중요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소속되고 싶은 욕구’입니다.
부모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과자와 사과를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속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합니다.
사람에게 먹는 욕구가 매우 중요한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만날 때 내가 선물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과 잘 지내며 그런 소속감을 통해 오는 행복을 느끼도록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도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두 농부는 무 농사를 졌고 모두 좋은 무를 생산했습니다.
한 농부는 이 모든 것이 원님 덕분이라며 가장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농부는 그 무가 원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며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큰 무를 선물로 받은 원님은 감동하여 그 농부에게만 답례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찾으려하지 않을 뿐입니다.
신앙인으로서는 내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돈이나 주면 좋아하지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무 취급하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귀하다 여기면 선물하고 보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았던 사람들은 빨리 그분에게 병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 분을 쫓아서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걸어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또 어디로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뛰어다닌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을 여유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을 발견했는데, 어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뛰어다니며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이 이웃에게 전해줄 가장 귀한 선물이 안 될 때 나도 예수님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농사를 잘 짓고도 바치지 않은 무로 만들어선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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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도 고치실 수 없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은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일이 아니라, 즉 복음 선포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사람들은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그 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병의 치유로만 만족하고서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많았고......
2) 질병의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지만,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특별히 더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그냥 고치면 되는데,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당신의 말씀만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는 “열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열이 떠나갔다.”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이 한 말인데, 그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지만, 예수님도 고치시지 못하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치료받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병을 고쳐 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은 고쳐 주시지 못합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는 사람들도 고쳐 주실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원하지도 않고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4) 자신의 병을 고통스러워하고,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또 치유를 위해서 노력하긴 하는데,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8-9).
그런데 그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문제로 시비가 붙자,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요한 5,15).
그것은 명백하게 ‘배은망덕’이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버린 일입니다.
몸의 병은 고쳤지만, 영혼의 병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탓입니다.
5)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또 몸의 건강을 되찾고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병든 상태라면,
그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몸’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나쁜 일’은 ‘구원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고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더 나쁜 일’은 그가 예수님을 신고할 때 이미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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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53-56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겐네사렛’이라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진 평야가 넓게 펼쳐진 곳으로 작물을 심으면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 풍족함 덕분일까요? 그 지역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줍니다. 본인 혹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치유해주시기를 바랐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자기들 고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 지방 곳곳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예수님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치유의 은총을 받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그들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도 큰 감동을 받으셨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는 그들의 소중한 마음과 정성이 헛되지 않도록 당신 앞에 나온 병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치유해주셨을 겁니다.
한편,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입장이나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 원하는 걸 청하기 위해 그분을 밀쳐댔던 이전 고을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달라고 그분께 ‘먼저 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고 기대하는 건 그들의 자유입니다. 또한 그분의 앞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는 것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이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과 의지에 달린 일이라 생각했기에 먼저 그분께 허락을 구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라고 외쳤던 나병환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굳게 믿으며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려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겐네사렛 고을 사람들의 성숙한 믿음 덕분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잘해봐야’ 질병이 낫는 수준에 그쳤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철저한 순명과 전적인 의탁으로 드러냈기에,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겐네사렛 고을 사람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은 당장 몸의 아픈 부위가 낫는 육체적 치유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기도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야 하지요.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이자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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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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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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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생로병사>
알라반의 말씀사랑
우리 인간은 '생로병사' 하게 운명지워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 것까지는 다 받아들이고 수긍하겠는데, 왜 꼭 병이 들어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갈수록 의술이 좋아져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 병원마다 왠 환자들이 그리 많은지요. 뭐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생기고 부속을 새로 갈아끼워 넣어야 하듯이 오랜 세월 잘 사용했으니 고장날 만도 하지요. 이런 노화를 겪으면서 여기저기 고장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병원신세를 지는 아이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린 사람들, 우울증과 조현증, 치매와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삶이 파괴되고 있는 사람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나서 "보시니 좋더라"(창세 1, 10.12.18)고 하신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시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아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보다 "사람들"(마르 6,54)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부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눕혀", "데려다 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복음의 다른 치유 기적사화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좀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직접 팔을 뻗어 "옷자락 술"(마르 6,56)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독서는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의 창조 설화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세상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빛, 하늘, 땅과 바다와 푸른 싹, 빛물체들'이 나흘 동안 차례로 생겨나지요.
시편 저자는 세상 만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 모든 창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귀하십니까! ...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시편 2,4)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압니다. 이 '하느님의 손'이나 '손가락'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위엄과 권능의 업적임을 드러낼 때 성경 저자들이 즐겨 썼던 표현이지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손들이 등장합니다. 자기 일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챙겨 데리고 온 손들, 그리고 치유의 일념으로 가득 차 장터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향해 힘껏 내뻗은 병자들의 손들.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것은 아무 의미없이 그냥 해보는 행동이 아닐 겁니다. 의도와 방향성과 목표를 지닌 신념의 표출이지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첫번째 창조가 하느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자리에서는 병자들을 도와주는 이들의 손과, 믿음에 차 내뻗은 병자들 스스로의 손을 통해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잠언 8,22-31 참조) 새 창조의 현장에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저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을 통해 오늘도 세상의 혼돈과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 여러분은 병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까? 주위에 그런 분이 계시지요? 이 고통스런 병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사업에 기여하기 위한 봉헌이라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고통이겠지요.
오늘 생로병사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하는 병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 아파하시며 그 고통을 축복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시길 청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기적수로 원죄의 업보로 얻게 된 이 병까지도 깨끗하게 치유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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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는 삶
<2025.2.10>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57~80절)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는 삶❞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삶, 섬김의 삶을 통해 구원의 길을 알려야 합니다.
✔ 주님 앞에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주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57~66절).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수치를 당해야만 했던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많은 이웃들은 엘리사벳의 출산의 소식에 함께 기뻐합니다. 전통과 관습을 깨고, 가브리엘의 예고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게 되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66절).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는 인간의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한계는 내가 정해놓은 프레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둬 놓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야를 좀 더 넓게 열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참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의 순종은 우리에게도 유익이 되지만 무엇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능하신 손은 오늘도 아니 내일도 우리 자신을 강하게 붙잡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통해 당당하게 사역의 자리로 그리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7~75절).
사가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심과 속량하심을 찬송합니다(67~68절). 현재 사가랴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이는 모든 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선지자들로 하여금 선포된 약속의 성취임을 깨닫게 됩니다(69~70절).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일으키실 ‘구원의 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원수들로부터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고난 속에서 겪는 절망의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내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양토록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가랴는 말문이 열린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시야도 열렸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주의 구원하심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욱 힘든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막무가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며, 은혜를 누리며 살되 바르고, 정직하게 그리고 사랑과 화해의 메신저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의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한마디와 행동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잘못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의심과 두려움 마음에 사로잡혔던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와 행하신 일과 구원하심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의 약속하심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76~80절).
사가랴는 그의 아들 요한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주는...’(76~77절) 삶이 세례 요한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때가 이르기까지 ‘빈 들’(80절)에서 살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피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빈들은 광야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오직 위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훈련을 받은 요한은 주님의 오실 길을 잘 준비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서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지금 내 자신이 서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세상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훈련의 과정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 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종과 헌신을 결단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 약속을 잘 준비해가는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맛보는 복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불평과 불만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답게 사랑의 언어, 축복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57~8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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