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건국-1,시오니즘을 처음 주창한 테오도르 헤르츨]
이스라엘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은 것이 ‘시오니즘 Zionism’이다.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에서 말하는 ‘시온’은 현재 예루살렘 시구시가지 남서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을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시온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16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 만들어진 구시가지 성벽 남서쪽 모퉁이 부분에 붙어 있는 구역을 시온산이라고 일컫는다.
시온산은 세계를 유랑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순히 다윗왕의 성채가 있었던 작은 언덕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시대 유대민족의 영광이 서린 곳이다.
이곳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유랑의 세월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일죵의 본향, ‘에레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곳이고 예루살렘 그 자체로 여겨졌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침내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을 실현할 시오니즘 운동이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el)에 의해 시작되었다.
헝가리 태생 오스트리아 언론인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프랑스의 육군장교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간첩죄를 뒤집어쓰게 되면서 촉발된 국가적 논란인 ‘드레퓌스 사건(1894년)’을 경험한 2년 뒤인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헤르츨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유대인 개인이 아닌 유대민족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국가가 없어서 차별과 박해를 받는 것이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대민족에 의한 유대 국가의 건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그즈음, 동유럽의 反유대주의 확산과 더불어 ‘Pogrom’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학살사태를 지켜보면서 헤르츨은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을 조속히 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영국이 유대 국가 건설 후보지로 제시한 동부 아프리카의 영국령 우간다지역(오늘날의 케냐)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
우간다 이외에도 건국의 후보지로 남미 지역의 아르헨티나가 한때 거론되기도 했다.
건국의 땅을 어디로 결정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의 논쟁이 벌어졌다.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론에는 공감하지만, 유대민족의 안전한 도피처 확보가 급선무라는 현실적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시오니스트 총회는 이 모든 대안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임을 확인하였다. 시오니즘이 확산되면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박해를 피하려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9년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의 수는 대략 45만 명에 달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의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더욱 가속화된 시오니즘 정치운동은 전쟁이 끝나고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군이 모두 철수하면서 마침내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시오니즘을 주창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스라엘의 건국 훨씬 이전인 1904년에 4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나라의 선지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스라엘 의회 의사당 내 정면 벽에은 이스라엘의 국장인 ‘Menorah(7개 갈래의 촛대)’와 함께 테오도르 헤르츨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의회 의장의 사무실에도 그의 사진이 걸려 있고, 이스라엘 국립묘지는 그의 이름을 딴 山인 헤르츨 산에 위치해 있다.
텔아비브와 북쪽으로 인접한 스타트업 중심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Herzliya’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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