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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지명(先見之明)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라는 뜻으로, 장래를 미리 예측하는 날카로운 견식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先 : 먼저 선(儿/4)
見 : 볼 견(見/0)
之 : 갈 지(丿/3)
明 : 밝을 명(日/4)
(유의어)
독견지명(獨見之明)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면 행복할까. 모두들 그에 대비하느라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기 쉬워 큰 복은 아닐 듯싶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버리면 항상 끝없는 기쁨과 공포가 뒤섞여 한 순간도 평화스러울 때가 없어진다는 서양 격언이 있다. 그래서 지혜가 깊은 전지전능한 신도 미래의 일을 모르도록 캄캄한 밤으로 덮었다고 했다.
앞날을 알지 못하므로 설사 오늘 모든 것을 잃더라도 아직 미래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역시 모르는 것이 낫겠다.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물이 앞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알 수 있다면 일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내다보고(先見) 그에 대한 지혜(之明)를 발휘하는 것은 큰 능력이다.
이 성어는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조조(曹操)의 휘하 모사로 유명한 양수(楊修)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양수는 폭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독서로 항상 조조의 의중을 읽어내는 데에 탁월했다.
그에 관한 성어로 닭의 갈비라는 뜻의 계륵(鷄肋)이 유명한데 그다지 큰 소용은 없으나 버리기에는 아까운 점령지의 철수란 조조의 뜻을 알아챘다. 이런 양수의 재기(才氣)에 조조는 크게 평가하면서도 깊은 신임은 주지 않았다.
양수가 원래 관도(官渡) 전투에서 조조에 패한 원소(袁紹)의 생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여러 번 의중을 미리 알아챈 양수를 조조는 후환이 두려워 죽여 버렸다.
양수의 부친 양표(楊彪)는 아들을 잃고 비통해하다 조조가 야윈 이유를 묻자 대답했다. ‘저는 부끄럽게도 김일제와 같이 앞을 내다보지 못해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뿐입니다.’
愧無日磾先見之明 猶懷老牛舐犢之愛.
괴무일제선견지명 유회로우지독지애.
김일제(金日磾)는 무제(武帝)때 흉노(匈奴)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무례하다며 죽였다. 그와 같이 못해 아들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 범엽(范曄)이 쓴 후한서(後漢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미래의 일을 지각할 수 있는 예지력은 큰 능력이다. 보통 삶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너무 앞서 나간 능력은 질시와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양수의 앞을 내다본 재주도 결국 화를 입었다. 그 능력을 조화롭게 펼칠 수 있도록 주위를 설득하는 것도 큰 재주이다. 독불장군은 없는 법이다.
선견지명(先見之明)
이 성어는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조조(曹操)의 모사 양수(楊修)의 아버지가 아들을 잃고 나서 조조에게 한 말에서 유래한다. 위(魏)나라의 조조(曹操)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낸 양수(楊修)는 재능이 뛰어나고 지혜로웠다.
脩字德祖, 好學, 有俊才, 爲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수자덕조, 호학, 유준재, 위승상조조주부, 용사조씨
양수는 자가 조덕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나 승상 조조의 주부가 되어 조조의 일을 처리하였다.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而不得進, 欲守之又難爲功, 護軍不知進止何依.
급조자평한중, 욕인토유비이부득진, 욕수지우난위공, 호군부지진지하의.
조조가 친히 한중을 평정함에 이르러, 유비를 토벌하고자 하나 나아가지 못하고, 지키고자 해도 또한 성공이 어렵게 되자, 호군이 진군할지 멈출지를 알지 못하여 어찌해야 하느냐 명령을 구하였다.
操於是出敎, 唯曰 鷄肋而已.
조어시출교, 유왈 계륵이이.
조조가 이에 나와 교시하기를 단지 계륵(鷄肋)이라고만 하였다.
外曹莫能曉, 脩獨曰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弃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
외조막능효, 수독왈 부계륵, 식지즉무소득, 기지즉여가석, 공귀계결의.
조조 외에 누구도 이해하지를 못했는데, 양수가 홀로 말하기를, “무릇 닭의 갈비(계륵)란 것이 먹으려면 얻을 것이 없고 버리려면 아까운 것이니, 공께서는 귀환하기로 꾀하여 결정하신 것이다.”
乃令外白稍嚴, 操於此迴師.
내령외백초엄, 조어차회사.
이리하여 조조는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외곽을 지키는 소대(小隊)부터 차츰차츰 철수할 차비를 명하였고, 조조는 이에 군사를 돌렸다.
修之幾決,多有此類.
수지기결,다유차류.
修又嘗出行,籌操有問外事,乃逆為荅記,
수우상출행,주조유문외사,내역위답기,
勅守舍兒:若有令出,依次通之. 既而果然.
칙수사아:약유령출,의차통지. 기이과연.
如是者三,操怪其速,使廉之,知狀,於此忌修.
여시자삼,조괴기속,사염지,지장,어차기수.
且以袁術之甥,慮為後患,遂因事殺之.
차이원술지생,려위후환,수인사살지.
조조는, 양수의 재능이 뛰어난데다가 원술(袁術)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에, 후환이 두려워 그를 죽여 버렸다.
後子修為曹操所殺,操見彪問曰:公何瘦之甚?
후자수위조조소살,조견표문왈:공하수지심?
양수가 죽자, 그의 부친 양표는 몹시 비통해하였다. 어느 날, 조조가 양표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렇게 야위셨소?”
對曰:愧無日磾先見之明,猶懷老牛舐犢之愛.
대왈:괴무일제선견지명,유회노우지독지애.
양표가 대답하였다. “저는 한 무제의 신하였던 김일제 같은 선견지명(先見之明)도 없이,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사랑만 품고 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操為之改容.
조위지개용.
양표의 말에 조조의 안색이 바뀌었다.
***
金日磾子二人,武帝所愛,以為弄兒.
김일제자이인,무제소애,이위농아.
김일제(金日磾)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한무제(漢武帝)가 사랑하여 무제의 농아(弄兒; 데리고 노는 아이)로 삼았다.
其後弄兒壯大,不謹.
기후농아장대,불근.
(그런데 농아가 황제에게 버릇없이 행동하는 때가 많았다.) 농아가 장성했는데도 삼가 하지 않았다.
自殿下與宮人戲,日磾適見之,惡其淫亂,遂殺弄兒.
자전하여궁인희,일제적견지,악기음란,수살농아.
궁인과 어울려 희롱하는 것을 김일제가 보고, 그의 음란함을 싫어하여 농아를 죽였다. (일제는 앞날을 걱정하여 그를 죽인 것이다. 그는 일제의 장자였다.)
後漢書卷五十四 楊震列傳 第四十四
후한서권오십사 양진열전 제사십사
선견지명(先見之明)
요즘에 하루를 보내기는 힘든데 일주일은 금방 다가오고, 한 달 또한 후다닥 지나가는 듯 여겨진다. 누군가 세월의 속도는 자기의 나이에 비례해서 더 바삐 흘러간다고 말한 말이 실감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 남으려면 남보다 앞서 봐야 하고, 앞서 생각을 해야 하며, 또 남보다 앞서 행동을 해야만 당당히 살아남을 거라는 강박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럴 때마다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묘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오래전 부터 알고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알아차리는 밝은 지혜라는 뜻이다.
약 3000여 년 전 중국에서 쓰였던 갑골문자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풀이해 보면, 선(先)자의 윗부분은 발의 모양이고, 아래 부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다’란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견(見)자는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 부분에 눈의 모양만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보다’라는 동작을 강조한 것이다. 지(之)자의 밑에 있는 가로선은 출발선을 나타내고 위에 있는 것은 발의 모양으로 전체 모양은 ‘가다’의 의미였으나, 후에는 주로 ‘~의’등의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명(明)자의 왼쪽에 있는 것은 해의 모양, 오른쪽에 있는 것은 달의 모양이다. 해와 달의 모양을 결합하여 ‘밝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제갈량(諸葛亮)이 3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한 겨울에 남동풍을 불게 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가 일찍부터 별과 달의 위치 등을 따져 3일 후에 남동풍이 불어올 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즉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고로, 선견지명이라 하면 흔히 하늘의 뜻을 읽었다거나 남다른 혜안(慧眼)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남보다 많은 자료에 근거하여 추론(推論)하여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추세를 내다볼 때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과 과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선견지명을 발휘한다면 살아가는 동안 남들보다 앞서가는 삶을 살 것이다.
선덕여왕의 선견지명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따님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분이 바로 신라 최초의 여자 임금인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다. 처음엔 신하들이나 백성들도 여자라 하여 미심쩍어 했지만 곧 여왕의 지혜와 혜안에 탄복하여 마음으로 따르게 되었다. 선덕여왕의 선견지명이 어느 정도인가는 다음 세 가지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
한번은 당나라 태종의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석 되를 신라에 보내왔다. 찬찬히 그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난 여왕은,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단정하듯 말하였다. 옆에 있던 신하들은 왕이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의심하며 수근거렸다. 선덕여왕은 그 낌새를 알고도 아무 말 없이 꽃씨를 궁궐 뜰에 심으라고만 하였다.
마침내 꽃이 피었다. 그러나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질 때까지도 과연 향기라고는 없었다. 신하들이 여왕의 선견지명에 놀라 물었다. “어떻게 향기가 없을 줄 아셨습니까?” 여왕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향기있는 꽃에는 나비가 모이는 법, 헌데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는 꽃에 향기가 없음을 말함이 아니겠느냐. 당나라 임금은 이것을 보내 내가 여자로서 짝없이 혼자 지낸다고 업신여긴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추운 겨울날 영묘사라는 절 마당의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난데없이 개구리 떼가 몰려와 3~4일을 계속해서 울어댔다. 여왕은 즉시 신하들에게 군사 2천을 뽑아 서쪽 교외의 여근곡을 찾아가 적병을 죽이라고 했다. 신하들은 왕명을 받고서 긴가민가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 근교로 향했다.
가서 물으니 과연 부산아래에 그 모양이 여성의 생식기를 닮은 여근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골짜기에는 여왕의 말대로 백제 군사 5백명의 숨어 있었다. 신라 군사들은 좌우에서 기습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여왕의 혜안으로 위기를 모면한 뒤 신하들은 모두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이렇게 설명했다. “개구리가 성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곧 군사를 상징함이요, 옥문지의 옥문이란 여근을 말한다. 여자는 음양으로 따지면 음에 속하며 그 빛은 희니, 흰 빛깔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의 군사가 서쪽에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 이래서 적병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 말을 들은 신하들은 비길 수 없는 왕의 지혜에 오직 탄복할 뿐이었다.
세 번째 이야기.
선덕여왕의 예견력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정도였다. 왕이 아무 병도 없이 건강할 때였다. 하루는 신하들을 앞에 놓고 말했다.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그때는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시오.”
신하들은 건강한 왕이 죽는다는 얘기를 하는 데다, 도리천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옥황상제가 있는 하늘이라 그런 곳이 어딘가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러나 왕은, ‘도리천이란, 낭산의 남쪽 비탈이니라’하고 일러주었다.
왕이 예언한 그날이 오자 과연 왕이 죽고 말았다. 신하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신하들은 왕이 일러준 대로 낭산 남쪽 비탈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문무왕이 즉위하여 낭산 남쪽 선덕여왕의 능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 하늘 아래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선덕여왕이 예언한 대로였다.
미래 지향적 사고(先見之明)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때 ~했더라면, 그때 ~했어야 했어’하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당시에는 미래지향적 사고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때를 놓친 후에야 후회하게 되는 것이 그런 경우들 일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다시 미래지향적 사고가 필요할 때가 찾아 왔을때 안타깝게도 또다시 그 중요성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인생에서 흔히 3번의 기회가 찾아 온다고들 한다. 이 말에는 옛 성현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싶다. 미래지향적 사고의 중요성을 망각한 체 인생에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언제나 미래 지향적인 사고로 대비하여 그 기회를 잡아라는 뜻이 담겨 있음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짧은 견해이다.
이러한 점을 유념해 어리석은 행동의 우둔함을 깨닳고 곧 미래지향적 사고의 중요성을 알아차려 미리 준비하는 사람은 분명 성공할 수 있는 소지가 많지만 미래지향적 사고의 중요성을 깨닳지 못하고 우둔한 행동만하고 후회만 하는 이는 성공할 여지가 없다.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일의 결과에 후회를 줄일 수 있지만 미래 지향적 사고(선견지명)가 미비 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던 간에 후회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맞게 대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옛 성현들의 놀라운 선경지명에 관한 이야기나 미래 성장가능성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여 성공한 기업가들의 사례를 접했을 때 단지 운으로 아님 신내림을 받았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당장 우리 스스로 그러한 노력과 능력을 배양하여 미래의 승리자가 되는 건 어떠한가?
우리 주변이나 옛 사람들의 이야기들 중에서도 미래 지향적 사고(선견지명)로 인해 울고 웃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다. 이러한 이야기를 거울삼아 미래의 승리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의 선견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500년 앞을 내다본 정도전(鄭道傳)
조선왕조 건국의 개국 공신 중의 제 일등 공신으로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정도전이 그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정도전 조선을 개국하는데 가장 공이 큰 정도전은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은 뒤 그의 업적도 잊혀진 것이다.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6)에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정도전은 대학자 이생 밑에서 정몽주(鄭夢周), 이존오(李存吾) 등과 함께 공부했다. 고려 말에 유학을 공부하고 조정에 들어간 신흥 사대부들과 달리 정도전은 출신 배경이 나빠 늘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정도전은 1375년(고려 우왕 1)에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명나라를 멀리하자는 당시의 정책에 맞서다가 전라도로 귀양갔다. 그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383년(고려 우왕 9)에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어 조선 개국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실 조선을 세운 건 이성계지만 조선이 나라로서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정도전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불씨잡변(佛氏雜辨)과 같은 책을 써 불교를 억압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당시 궁권과 종묘의 위치를 정하고, 이름을 지었다. 또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책을 써 나라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제정했다.
정도전은 특히 문장에 뛰어난 재략가로 숭례문, 경복궁 등 모든 궁궐의 이름을 짓고 썼으며 한양에 도읍지를 옮기기 위하여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서 조선왕조의 영원을 기리는 풍수지리를 보았다. 예로부터의 명당으로는 좌청룡 우백호가 그 으뜸으로서 정말 경복궁은 명당중의 명당으로 대도읍지로 천년을 가도 아깝지 않은 자리였다.
그런데 흠이 한 가지 있었다. 왼쪽의 인왕산은 우뚝 선 그 모습이 수려하여 나무랄 때가 없는 산이었으나 오른쪽의 산(지금의 창신동)은 우백호는 우백호이나 무언가 모르게 빈상을 타고 남으며 특히 꼬리 부분이 병약해 보였다. 이는 조선왕조가 향후 장자(長子)가 번성하지 못하고 차남(次男)이후가 득세 할 운세였다.
그러나 천운인 것을 정도전은 앞쪽 남산 쪽을 바라보았다. 장차 이곳에는 약 500년 후면 한양 인구가 3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가 들어서리라고 예측하였다. 지금의 30만은 아무것도 아니나 당시의 30만은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자기 운세가 제명을 다하기가 어려운 난세를 타고 났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 운명이 다하기 전에 자손이 번창 할 명당자리를 찾았다. 그 명당이 지금의 한국일보 옆 수송초등학교 자리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자기의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역시 정도전의 말대로 조선왕조 멸망의 1910년 한일합방 당시 향양(서울)의 인구는 30만이었다 한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또, 조선왕조는 장손(長孫)이 성한 예가 드물었다. 태조(太祖) 역시 제명까지 임금의 자리에 있지 못했고 장남 정종(定宗)도 불과 몇 년 만에 동생 방원(芳遠)에게 양위를 했으며 그의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도 셋째 세종(世宗)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했다. 장자로 이어진 문종(文宗)도 단명, 장손 단종(端宗)은 삼촌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하는 등...
이후 쭉 장손의 경우 사화나 외척의 전횡 특히, 자손의 빈곤으로 마지막 멸망까지도 장손은 그 운세가 정도전의 말대로 순탄치 못했다.
그리고 정도전이 거처한 집터(현재 수송초교) 자리는 정도전이 방석(芳碩) 옹위의 역모에 연루되어 그를 죽인 후 화가 난 태종(太宗; 이방원)이 정도전의 집터가 자손번창 할 명당이란 말을 주위로부터 듣고 집을 헐어 버린 후 나라에서 관장하는 마숙을 만들어 말 사육장이 되었고 이는 조선조 말까지 이어졌다. 말이란 스테미너와 그 세력이 강하고 정력이 좋아 종자의 번식이 강한 것이고 그터 역시 종자번식의 대명사이니 그의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장남이 득하지 못함을 알고 또한 태종과 친하면서도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방석옹위를 모색하고 역적으로 몰린 점은 태조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200년 앞을 내다본 어사 박문수(朴文秀)
조선시대의 문신. 호는 기은.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7년에 사서로 다시 등용되었고, 영남 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 등이 있다.
그는 이조역사에 가장 유명한 문과 무를 겸비한 어사또로 유명하며 그의 일화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어사칙명을 받고 임지로 갈 때는 간신들의 사전음모 및 음해로 죽을고비도 수차 넘긴 명 어사였다.
박문수는 젊어서 어명을 받들고 전국을 방방곡곡 섭렵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과 풍광이 좋은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흑성산(현재 독립기념관 자리)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손들에게 이 자리를 집안에 묘 자리를 쓰면 자자손손 정승․판서 등 높은 벼슬자리를 누릴 자손들이 즐비할 자리라고 알리며 이 자리를 자신의 묘 자리로 써 줄 것을 당부했다.
그 후 그가 나이를 들어 죽어갈 무렵 그는 한층 높은 경륜으로 더 높은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문중과 직계 자식들을 불러 놓고 유언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묘 자리를 그 자리(흑성산)가 아닌 이웃 마을에다 옮길 것을 지시했다. 명당자리를 알고 있는 문중의 반대가 굉장했다.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대소가 문중 모두를 설득했다. “물론 좋은 자리다. 그러나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좋은 자리는 많은 사람의 시기의 대상도 되고 자연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보다도 지금부터 200년 후 나의 묘 자리로 인하여 부끄러워 질 일이 벌어질 것으로 두 번 죽는 일이 생길지니 나의 말을 따르라”고 간곡하면서도 엄중히 지시했다.
과연 그로부터 200년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 그 자리가 명당자리임을 입증시켰고 특히, 박문수가 지명한 그 묘 자리(흑성산)가 독립기념관 본관이 들어섰다 하니 과연 그의 안목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뒤늦게 묘 자리 이전으로 인한 수고로운 일(문중의 이전 반대문제, 이전 보상문제 등)들이 많아 졌을 것이며, 이장으로 두 번 죽는 일(비극)이 뒤 따랐을 것이다.
100년 앞을 내다 본 에디슨
미국의 발명가인 에디슨은 평생 미국에서 살면서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천 93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습니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하여 동물의 기름이나 가스등으로 밤을 밝힌 인류에게 빛을 가져다 주는 기적 중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에디슨의 발명으로 전기가 급속히 보급됨에 따라 전기시설 설비를 둘러싸고 미국의회에 논란이 제기 되었다. 이유인즉, 시공시 전기선 처리를 놓고 지하로 묻어야 될지 아님 지상에 설치해야 될지 결정의 문제가 국회(미 상하원의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논란 격론 끝에 전기를 만든 에디슨에게 그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에디슨은 의회의 이러한 질문을 받고 많은 생각 끝에 지하(땅밑에) 묻는 걸로 결론을 통보했다. 예산(재정)상의 문제와 시간상의 문제 등 어렵고 많은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국의 전선줄을 지하에 묻게 되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지금, 만약 그 때 전선줄을 지하에 묻지 않고 지상에 설치했다면 아마 생활의 상당 부분을 전기에 의존하는 미국은 거미줄 밑에 사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도시설계는 모든 전선이 지하로 설치 되어있는 관계로 미관상 산뜻한 도시가 될 수 있었으며 전기로 인한 감전, 누전 등의 위험도 많이 감소 될 수 있었다. 이렇게 100년 앞을 내다 본 미국의 도시설계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계획과는 많은 대조를 보이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50년 앞을 내다본 R.H. 고다드 박사
지구상에서 달에 가보고 싶은 욕망은 기원전부터 내려 온 인류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이러한 꿈의 시발로 고다드 박사는 미국에서 로켓의 아버지라 일켤어진다. 고다드 박사는 1920년부터 액체 추진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다드 박사에게 로켓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생긴 것은 그가 액체 추진제 로켓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또 그의 연구가 미국의 우주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사는 1926년 3월 16일 사상 처음으로 로켓트를 발사하게 되었다. 사실상 최초의 로켓은 12세기경 중국의 불꽃형 로켓이었다. 그가 발사한 로케트는 56m밖에 못올라 가고 떨어졌지만 미국의 신문은 특종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이날 R․H 고다드 박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비록 지금은 56m밖에는 로켓트를 못쏘아 올렸지만 지금부터 약 4~50년 후에는 저 달에 반드시 우리 지구인들이 도착하게 될 것이오”라고 예언하였다.
이말을 들은 기자들은 고다드 박사를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4~50년 후 인류가 달에? 어림없는 미치광이 과학자다, 겨우 56m 쏘아놓고 망상에 빠진 과학자, 이런 과학자가 미국인이라는데에 우리 모든 국민은 수치감을 느끼며 그를 혐오한다, 사과하라 무슨 망상인가’ 등등 기자들은 맹렬히 고다드 박사를 비난하였고 미국의 국민들과 언론매체들은 일제히 하나가 되어 고다드 박사를 완전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44년 3개월, 약 45년 후인 1969년 6월 인류는 대망의 아폴로 13호가 로켓 새턴 5호를 장착하여 인간을 싣고 달에 착륙하게 되었다. 실로 달아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에서 닐 암스트롱이 거닐던 달로 꿈이 현실로 이뤄진 순간이었다. 세계인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사람들은 과거 로켓트의 역사를 더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다드 박사의 기사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45년 전 신문을 펼치던 기자들과 편집인들은 깜작 놀랐다. 그 당시의 기록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TV와 라디오 등 방송언론 매체와 신문사들은 다시 이렇게 기사를 바꾸어 그의 예지력을 호평하였다. “우리는 고다드 박사가 미국인이라는 점에 자랑과 자부심, 한없는 존경과 긍지를 느낍니다.”
그리고 전 신문 등 언론매체들은 고다드 박사에게 그 당시의 일들을 정중히 사과하는 내용을 연일 기재하였다. 그 콧대 높은 언론인들이....
10년 앞을 내다 본 율곡 이이 선생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다. 스스로 자주적인 학풍을 실천하여 독자적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내놓았다. 이황(李滉)을 대표로 하는 주리파가 ‘사단(四端)은 리(理)가 발한 것이요,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고 한데 대하여 이이(李珥)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한가지이고 따라서 사단(四端) 역시 기(氣)가 발한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리(理)란 형체도 행위도 없다. 오직 기(氣)만이 형체와 행위가 있다. 그러므로 무릇 발하게 하는 것은 리(理)이지만 실제로 발하는 것은 기(氣)이다. 사단 역시 기가 발하여 리(理)가 그것을 탄 것에 불과하다."
이황의 주리론이 일종의 관념론이라면 이이의 주기론은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그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서로 대립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이황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해야 한다’고 하여 금욕주의를 부르짖은데 대하여 그는 ‘먹어야 할 때 먹고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성인이라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여 최소한의 물질적 욕구를 인정하였다.
현실사회에 대한 그의 여러 가지 처방은 후에 실학(實學)의 모태가 되었다. 선생은 왜병의 조선침략을 예고하고 10만 양병책을 선조(先祖)에게 간곡히 진언했다. 그 일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어 일본 실정을 살펴보기로 하였는데 당시 어리석은 당파간의 당쟁(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인해 국가의 앞날보다 당장의 당리당략을 주장해 결국은 조선 침공설은 기우(杞憂)라는 통신사 김성일(金誠一) 부사(동인)의 주장으로 매듭을 짖게 되었다.
1592년 봄 김성일 부사의 예견과는 반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고니시 유끼나가(소서 행장)가 이끄는 왜병은 한양을 점령하고 그 선발대가 선조일행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한양을 뒤로하고 임진강에 다다른 선조일행은 앞을 가릴 수 없는 폭우속에 그것도 한밤중에 앞뒤가 막힌 진퇴양란에 빠진 격이 되었다. 뒤에는 왜병이 쫓아오고 앞은 칠흑같은 임진강...
이때 그 곳의 한 농부가 이미 고인이 된 율곡 이이 선생의 편지 1통을 선조에게 바쳤다. 내용인즉, “임진강변에 송진나무(솔기)로 지은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니, 이 정자에 불을 붙여 뱃길을 밝히오소서” 그리고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배를 타고 선조임금과 그 일행은 이 불빛으로 무사히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
이 어찌 앞을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니었겠는가. 왜적의 침공사실, 10만 양병설, 화석정을 이용해 나라를 구한 점, 만약 그 때 조선왕실이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 것인가?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율곡 이이 선생의 고향 경기도 파주군 율곡리(탄생지는 외가인 강릉임) 앞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고 그 곳에는 풍광이 뛰어난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 정자가 바로 화석정이다. 율곡선생이 8세 때 이곳 화석정 정자에서 화석정이라는 시를 지었다.
율곡 선생은 서울에서 벼슬 생활을 하다가 자주 내려와 이 곳 화석정에서 몸과 마음을 달래며 글을 쓰고 마음을 추스르며 공부를 하였다. 율곡 선생은 먼 훗날을 대비해 이 곳을 청소할 때 반드시 기름 걸레로 닦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5년 앞을 못 내다본 위인 김봉수
김봉수, 그는 점쟁이이자 관상학가(철학관 운영)로 그의 신통력이 소문에 소문을 이으면서 국내 유수 경제계 인사는 물론 정가의 인사들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유명한 운명철학가였다. 그는 점을 볼 때 특유의 반말과 거만한 태도로 상대를 가릴 것 없이 행동했고 몹시 방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는 철학가 앞에 고개를 굽신거렸으며 많은 돈(복채)을 그의 앞에 내 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고 그 덕에 지금의 청와대 옆 자하문을 넘어가는 언덕길에 5층짜리 현대식 빌딩을 세웠다. 운명 철학으로, 입술하나로 빌딩(그 당시 5층 건물은 고층 빌딩에 해당)을 세운 것을 미뤄 볼 때 그의 입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관 건물을 신축한지 만 5년 후 정부로부터 김봉수 철학관 빌딩의 철거명령이 나왔다. 이유인즉, 북한의 남파 공작원 김신조 일행의 청와대 피격 사건을 계기로 주변정리를 하기 위한 작업 중 청와대 옆길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도로공사에 김봉수 철학관 빌딩이 딱 길 한 복판에 걸리게 되어 철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못 헐겠다. 보상 싯가대로 해다오” 행정소송 운운하며 떠들어 댔겠지만 국가 정부공사로서 그 것도 청와대 옆길을 만드는 일, 그 누구가 겁도 없이 항변하랴? 그 당시는 개인보다는 국가가 우선시 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오년 앞을 내다보지 못한 운명철학가 김봉수! 누가 김봉수가 자신의 운명, 5년 앞을 못 내다 볼 것이라고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또한 김봉수 뿐 아니라 그를 믿고 운명 철학을 보러 온 정치 경제계 인사들 그리고 복 부인 아줌마, 출세지향적인 아저씨, 신데렐라 꿈에 빠져 있는 아가씨들... 미래지향적 사고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미신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과 투자임을 망각하고 있었던 이들의 결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다양한 예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미래지향적 사고(先見之明)란 결코 막연한 미래에 대한 허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계획 그리고 그 것을 위해 전력 투구하는 실상인 것이다. 율곡 이이나 에디슨, 어사 박문수와 같이 실상을 위해 미래에 투자하여 훗날의 귀감이 되는 반면, 김봉수와 그를 믿고 찾은 사람들은 허상을 쫓다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허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각자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미래에 대한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로 조직과 기관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미래 지향적 사고란 진보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의 영위로 귀결된다. 안주와 도태의 위험을 안고 가야 하는 삶을 지양하고 끊임없는 개척과 자체 정화를 통해 개인의 발전 뿐 아니라 사회,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길 바라며...
선견지명(先見之明)과 후견지명(後見之明)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다가올 일을 미리 짐작하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이에 반해 후견지명은 결과론적인 지식을 마치 그전에도 알았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결과를 놓고 얘기하는 것이라 같은 뜻 같지만 다르다. 선견지명은 결과가 나오기 이전에 짐작했던 결과이고 후견지명은 결과가 나온 후에 말을 하는 것이 큰 차이이다.
책 ‘프레임’에서 이런 심리현상을 사후 과잉 확신이라고 하며 선견지명에 빗대어 후견지명 효과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니엘 길버트가 쓴 책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에서는 현재의 프레임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것은 마치 1900년대 초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과 같다고 소개했다.
어떤 댄스스포츠 선수를 보고 나중에 대성할 것이라고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선견지명이다. 그러나 대성하고 나서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은 후견지명에 속한다.
처음에 파트너를 만났을 때 끝까지 좋은 관계로 갈 것 같다는 예감은 과연 그랬다면 선견지명에 속하고 파트너 관계가 깨졌을 때 ‘내 그럴 줄 알았어’하게 된다면 후견지명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사람일 거라며 가까이 하고 나쁜 사람이라면 미리 거리를 둔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일은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일은 회피하게 된다. 그동안의 경험이나 경륜으로 얻어진 선견지명이다.
한편의 영화나 책을 보기 전에 유익하거나 재미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선견지명을 발동한다. 자신 없으면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평해 놓은 것을 보고 판단을 내리면 된다. 후견지명을 미리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앞일을 잘 모른다. 심지어 점쟁이들도 과거는 잘 맞추는데 앞일은 맞추기 힘들다는 얘기가 있다. 그동안은 앞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면서 살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 온 셈이다.
부모가, 선생님이 열심히 공부하라니 공부했고,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라니 그렇게 했다. 선견지명을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달려 온 셈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건강이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수명은 길어졌으나 건강나이는 68세 정도밖에 안된단다. 선견지명이 있다면 건강은 건강할 때 잘 관리해야 한다. 막상 몸이 상하고 나서 후회하면서 ‘그럴 줄 알았지’라고 해 봐야 후견지명일 뿐이다.
의심이 많은 리더가 불행한 이유
재기(再起)라는 단어를 듣는 일이 드물어졌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한번 쓰러지면 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한 세상을 감당해야 하는 조직의 리더는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기해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지혜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즉 잘 나가는 리더가 되는 것보다 덜 위험해지는 리더가 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에 의심(疑心)을 갖는 것이다. 무턱대고 선택한 일과 사람 때문에 곤란을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의심을 가지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위험한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일과 사람에 대한 의심을 갖는 것이 리더에게 요구되는 능력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나치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사람에 대한 의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리더가 위기에 빠지기 쉽다. 리더의 신중하고 노련한 의심은 초년의 성공 밑천이 되지만 성급하고 미련한 의심으로 변질된다면 말년의 실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상황이 불리해지거나 리더 본인의 자신감이 떨어져 마음이 약해지면 의심은 습관이 된다.
그렇다면 의심 많은 리더의 특징은 무엇이고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의심 많은 리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사람을 오래 쓰지 않는다.
의심이 많은 리더는 당연히 사람을 쉽게 의심한다. 특히 인간적인 배신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리더라면 좀처럼 사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싫증도 잘 낸다. 리더의 의심하는 습관은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오염시킨다. 처음에는 리더의 의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리더로서 가질 수 있는 책임감의 다른 표현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리더의 의심이 반복되면 오히려 리더를 의심하게 된다. 리더가 부하를 의심하고 있다면 부하는 이미 리더를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심많은 리더를 그냥 지나치는 바보 같은 부하는 없다. 의심많은 리더의 의심을 해소하기보다는 의심받을 그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기 위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게 된다. 결국 리더의 의심은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키우고 그 의심은 리더에 대한 회피 동기를 자극하게 된다.
무슨 일을 해도 의심을 받는다면 무슨 일인들 하고 싶겠는가? 의심 많은 리더는 공공의 적이 되고, 나아가 모두가 침묵하는 조직을 만들기 십상이다. 그러한 주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지켜보면서 리더는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고 착각하면서 기꺼이 사람을 버린다. 의심 많은 리더는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의심 받은 부하는 리더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둘째, 용서가 없다.
의심 많은 리더는 자신이 의심하는 사람을 실제보다 더욱 가혹하게 판단한다. 작은 실수에도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속단을 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후견지명(後見之明)이라고 한다. 즉 선견지명(先見之明)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결과가 도출된 후에 뒤늦게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판단해버리는 지각적 오류를 말한다.
이러한 후견지명의 후폭풍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나치게 부풀려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 많은 리더에게 한번 찍히면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수를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 실수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혹하면 누구나 분노하기 마련이다. 분노한 부하직원이 작은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리더에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부하도 리더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리더가 실수하기 만을 고대하거나 심지어 리더가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가해자나 방관자가 될 수 있다. 결국 리더의 가혹한 의심은 거칠게 표현하면 리더에 대한 부하들의 가혹한 복수를 초래할 수 있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의심 많은 리더는 반성에 앞서 자신의 의심 많은 습관 덕분에 이 정도의 피해만을 보았다고 판단하기 쉽다. 그리하여 의심은 점점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고 결국 리더 본인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의심할 만한 나쁜 존재라고 인식되게 되어 리더 스스로 더욱 고립된다.
셋째, 본인도 괴롭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의심하는 사람만큼 힘들다. 늘 의심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데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심한 경우에는 의심을 하지 않으면 자신까지 의심하기도 한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작아지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이 커지면 내부 직원들의 말은 일방적으로 믿지 않거나 회피하면서 남들의 말은 잘 듣는다. 의심이 많으면 본래 귀도 얇아진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은 멀리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은 곁에 두는 아이러니를 거리낌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은 리더는 참 어리석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의심하고 멀리하면서 일시적이고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에 의지하려는 리더는 그 누구보다 약한 존재이다. 겉은 의심으로 강한 듯 포장하지만 속은 남과 공유할 수 없는 고독으로 괴롭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은데 절친(切親)이 없다. 의심 많은 사람에게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기 때문이다.
넷째, 남 탓만 한다.
의심은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다. 어떤 일이 잘 안되면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특히 누군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과거에 성공 경험이 많은 리더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확신 때문에 일이 잘못된 원인을 더더욱 외부에서 찾게 된다.
바로 성공의 저주 때문이다. 과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변한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을 먼저 한다. 그럴수록 의심의 강도는 강해지고 의심을 표현하는 방식도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자신의 의심에 찬성하는 사람만 믿게 되고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돌린다. 결국 의심 많은 리더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만 남아 과분한 권력을 사유화하게 되고, 진실을 말했던 사람들은 억울한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조직을 떠난다.
의심 많은 리더는 외형상으로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누리겠지만 조직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진정으로 조직에 필요한 사람은 사라지고 리더의 의심을 추종하고 숭배하는 사람만 남기 때문이다. 사태가 그렇게 된 후에도 의심 많은 리더는 진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에 대한 분노만 내뱉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십상이다.
이상과 같이 의심 많은 리더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요즘처럼 리더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상황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클 수밖에 없다. 리더의 두려움과 염려는 의심을 키우는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의심을 줄이면서 좋은 사람을 잃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히 있다. 올바른 리더십은 바로 신뢰(信賴)라는 원천에서 출발한다. 의심은 신뢰 결핍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조직에 늘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더가 아무리 잘해도 배신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고 처음과 달리 변질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명의 나쁜 직원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로 편견 섞인 의심을 갖게 되면 리더 본인만 골탕 먹는다. 우선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들에게 리더와 조직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불필요한 의심으로 인한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좋은 조직에는 좋은 문화가 있고, 좋은 문화는 신뢰로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그 가운데 리더가 있어야 한다. 리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신뢰 사이에 있어야 본인을 가장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다. 만약 리더가 의심으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 있다면 해줄 것 다 해주고도 욕만 먹는 불행을 겪게 된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사람이 중요하다. 리더의 에너지를 의심이 아닌 신뢰에 집중할 수 있어야 리더십이 살아날 수 있다.
▶ 先(먼저 선)은 회의문자로 之(지; 가다)와 어진사람인발(儿; 사람의 다리 모양)部의 합자(合字)이다. 어진사람인발(儿)部는 본디 人(인)과 같은 글자이지만 이 모양이 아래에 붙는 글자는 그 위에 쓰는 자형(字形)이 나타내는 말의 기능을 강조하여,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한다. 그래서 先(선)은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앞선 먼저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돌아 간의 뜻을 나타내는 말 (3)바닥이나 장기, 고누, 윷놀이 따위에서 맨 처음에 상대편보다 먼저 두는 일, 또는 그 사람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먼저, 미리 ②옛날, 이전 ③앞, 처음, 첫째 ④돌아가신 이, 죽은 아버지 ⑤선구(先驅), 앞선 사람 ⑥조상(祖上) ⑦형수(兄嫂) ⑧앞서다, 뛰어넘다, 이끌다 ⑨나아가다, 앞으로 가다 ⑩높이다, 중(重)히 여기다, 뛰어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앞 전(前)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뒤 후(後)이다. 용례로는 남보다 앞서서 먼저 차지함을 선점(先占), 맨 먼저 주창함을 선창(先唱), 남보다 먼저 가짐을 선취(先取), 다른 문제보다 먼저 해결함을 선결(先決), 사보다 공을 앞세움이라는 선공후사(先公後私), 다른 사람의 일보다 자기의 일에 우선 성실해야 한다는 선기후인(先己後人), 남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선대부인(先大夫人), 남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선대인(先大人), 처음에는 잘 살던 살림이 나중에 가난하여짐을 선부후빈(先富後貧),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누를 수 있다는 선즉제인(先則制人), 먼저 예의를 배우고 나중에 학문을 배우라는 선례후학(先禮後學), 선병자의먼저 앓아 본 사람이 의원이라는 선병자의(先病者醫),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선우후락(先憂後樂), 먼저 의를 따르고 후에 이익을 생각한다는 선의후리(先義後利), 선화후과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열매를 맺는다는 선화후과(先花後果),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라는 선견지명(先見之明) 등에 쓰인다.
▶ 見(볼 견, 뵈올 현)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明(밝을 명)은 회의문자로 날 일(日; 해)部와 月(월; 달)의 합해져서 밝다는 뜻이 되었다. 그래서 明(명)은 (1)번뇌(煩惱)의 어둠을 없앤다는 뜻에서 지혜 (2)진언(眞言)의 딴 이름 (3)사물의 이치를 판별하는 지력(智力)으로 이치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 (4)성(姓)의 하나 (5)중국 원(元)나라에 뒤이어 세워진 왕조(王朝)로 태조(太祖)는 주원장(朱元璋) 등의 뜻으로 ①밝다②밝히다 ③날새다 ④나타나다, 명료하게 드러나다 ⑤똑똑하다 ⑥깨끗하다, 결백하다 ⑦희다, 하얗다 ⑧질서가 서다 ⑨갖추어지다 ⑩높이다, 숭상하다, 존중하다 ⑪맹세하다 ⑫밝게, 환하게, 확실하게 ⑬이승, 현세(現世) ⑭나라의 이름 ⑮왕조(王朝)의 이름 ⑯낮, 주간(晝間) ⑰빛, 광채(光彩) ⑱밝은 곳, 양지(陽地) ⑲밝고 환한 모양 ⑳성(盛)한 모양 ㉑밝음 ㉒새벽 ㉓해, 달, 별 ㉔신령(神靈) ㉕시력(視力) ㉖밖, 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금(昑), 밝을 돈(旽), 밝을 방(昉), 밝을 오(旿), 밝을 소(昭), 밝을 앙(昻), 밝을 성(晟), 밝을 준(晙), 밝을 호(晧), 밝을 석(晳), 밝을 탁(晫), 밝을 장(暲), 밝을 료(瞭), 밝힐 천(闡),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꺼질 멸(滅), 어두울 혼(昏), 어두울 암(暗)이다. 용례로는 명백하고 확실함을 명확(明確), 밝고 맑고 낙천적인 성미 또는 모습을 명랑(明朗), 분명히 드러내 보이거나 가리킴을 명시(明示), 분명하고 자세한 내용을 명세(明細), 밝고 말끔함을 명쾌(明快),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명백하게 되어 있는 문구 또는 조문을 명문(明文), 밝은 달을 명월(明月), 분명하고 똑똑함을 명석(明晳), 세태나 사리에 밝음을 명철(明哲), 똑똑히 밝히어 적음을 명기(明記), 일정한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풀어 밝힘 또는 그 말을 설명(說明), 자세히 캐고 따져 사실을 밝힘을 규명(糾明), 사실이나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밝힘을 천명(闡明), 날씨가 맑고 밝음을 청명(淸明), 흐리지 않고 속까지 환히 트여 밝음을 투명(透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떤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그 까닭을 밝힘을 변명(辨明), 의심나는 곳을 잘 설명하여 분명히 함을 해명(解明), 의심할 것 없이 아주 뚜렷하고 환함을 명백(明白),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서 취하는 입장과 태도 등을 여러 사람에게 밝혀서 말함을 성명(聲明),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명약관화(明若觀火),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명주탄작(明珠彈雀), 아주 명백함이나 아주 똑똑하게 나타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명명백백(明明白白),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명모호치(明眸皓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