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님, 제 딸아이 좀 데려가 주세요"
"네? 어디로?"
"물 속으로요"
"네?"
느닷없는 그녀의 부탁에 난 아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정전으로 암흑 속에서 막 빠져나와 가게가 환해진 다음이었다.
필리핀은 전기가 모자라서 저녁이면 자주 정전이 되었다. 일반 가정 집은 더욱 심했고 가게는 그래도 좀 덜한 편이었다.
공항에서 같이 갈 사람들의 라이센스를 확인하다가,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딸은 스쿠바 라이센스가 없었던 것이다.
난 화가 나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라이센스도 없는 사람을 왜 보내?"
"형, 동네 아는 누나인데, 그냥 따라가고 싶데. 남편 없이 딸 하나 키우는 누나인데 착한 사람이야. 조용하게 따라갔다 올거야. 안심해 , 형"
남편 없이 딸아이와 스쿠바팀을 따라왔다니.
일반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고 왜? 이상한 기분은 내내 마찬가지였다.
마닐라 공항에서 두마게티로 가는 국내선에서나 리조트로 향하는 지프니에서나 그리고 리조트에서도 모녀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 시절에는 혼자 사는 여자가 드믈었고, 또 그런 여자들은 스스로 위축되고 창피해서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스쿠버 일행들과 같이라니!
욕심 많은 후배 강사가 해외 다이빙을 두 팀이나 받아서, 한 팀을 나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난 몹시 귀찮아서 거절했으나, 전부 중급이상의 다이버라서 별 문제 없을 거라 해서 마지못해 승락한 거였다.
후배는 멀리 태평양 섬으로 가기 때문에 가까운 필리핀 일행속에 그녀들을 덤으로 보낸거였다.
나 역시도 별로 손해 볼 일도 아니고 다이빙 팀도 아니기에 별 부담이 없었다.
첫째 날, 아포섬 다이빙을 마치고, 저녁에 지프니를 대절 해서 두마게티 시내로 술 마시러 나갔다.
두마게티는 인구 10여만명 조금 넘는 소도시인데, 필리핀에서 네 번째로 큰 네그로스 섬의 주도였다.
그런 소도시에 대학교가 10개가 넘었다. 인구의 4분의 1 이 학생이었다. 미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였다.
필리핀에서 알아주는 교육도시였다. 따라서 치안도 철저하고 외국 관광객도 별로 없어 물가도 싼 편이었다.
탄두와이(필리핀 대중주)의 향긋한 양주 맛에 취하고, 야자나무 숯으로 구운 닭고기는 대단히 맛있었다.
괜찮게 취해서 기분이 좋을 때, 그녀의 돌발적인 부탁이 있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
"아이가 수영은 해요?"
"못해요"
스쿠바 다이빙을 해 본적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 아이를 물 속으로 데려가 달라니. 간혹 스쿠바 못하는 사람을 얕은 물 속으로 데려가는 체험 다이빙은 해봤어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안됩니다. 위험해요"
"강사님, 후배에게 얘기 들었어요. 잘 가르치신다고...."
"이건 가르치는 게 아니예요. 전혀 교육도 안받았잖아요."
"가르칠 필요 없어요. 꼭 안고 물 속에만 있다가 올라오세요"
"네?"
"아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응낙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홀로 사는 여자가 아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니.
그녀는 어떤 세상을 보고 싶은지. 그녀의 애처로움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딸아이를 통해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녀가 꿈 꾸는 세상은 어디일까?
두 번 째 날, 보홀섬까지는 두 시간이나 걸리기에 새벽에 출발했다. 날씨가 안좋았다. 이슬비가 조금씩 내렸다.
다이빙 포인트에 도착해서, 난 아이에게 간단한 교육을 했다.
특히 상승시 호흡을 참지 말아야 한다.
보일의 법칙에 의해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 하기에 호흡을 참으면, 물 밑에서 고압의 공기가 상승함에 따라 팽창을 하기 때문에 폐파열이 일어나 사망을 할 수 있다.
그 외는 문제 될게 없었다. 내가 아이를 꼭 안고 다니면 되니까.
물 밑에서 아이와 재미있게 물속 구경을 했다.
수경 속 아이의 눈은 경이로움과 흥분이 동시에 보였다. 난 아이를 데리고 온 것에 만족했다.
그녀의 탁월한 결정에 찬사를 보냈다.
문제는 상승하면서였다.
비가 와서 비옷을 그대로 입고 물 속으로 들어 간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가 내뿜는 공기 방울이 상승하면서 비옷 모자에 갖혀 보일의 법칙에 따라 부피가 커져 아이의 모자는 커다란 풍선이 되어갔다.
문제는 그 모자가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손으로 아이에게 턱을 위로 향해 기도유지를 표시 할 수 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손으로 아이의 턱을 위로 바쳐주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천천히 상승을 하기 시작했다.
배에 올라왔을 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자기에게 생긴 일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고, 엄마를 안고 좋아했고 엄마도 마치 자신이 물속에 갔다온것 처럼 아이를 칭찬했다.
나 이외는 모든 것이 행복했고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날 보홀 다이빙은 나만 제외하고 순조로왔다.
"강사님, 고마워요."
"별로, 괜찮습니다."
저녁에 리조트 앞 야자나무 밑에서 탄두와이를 마시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피곤했는지 딸아이는 자고 있다고 했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홀로 살기에는 남은 세월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딸아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 준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난 것이다.
"강사님은 몇 살이세요?"
"서른 네살입니다."
"네? 저와 동갑이네요"
그 날 밤, 그녀에게서 야자 열매 향기가 풍겼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순조로왔다.
아이의 체험 다이빙 덕분에 덤으로 그녀를 안을 수 있었던가!
두마게티는 나에게 결혼을 하고 첫 외도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이라는 되먹지 않은 표현을 쓸 수 있는 것도 두마게티 덕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공항 앞에서 아내게에 전화를 했다. 주차장으로 그녀와 아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아이와 함께 다른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