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10
10월14일[연중 제2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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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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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M-EOmSQmIw
[서울대교구 홍찬호 모세(문정2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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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 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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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fGZF2j1V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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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거짓말이 만드는 인간>
(먼저 공지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추계 사제 연수 들어가는 바람에 화~금요일(10월 15~18일) 복음 묵상은 쉬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다고 하십니다. 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이 악할까요?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가 하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새벽에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상에서 이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거야!’라고 생각하며 내려왔습니다. 이때 느꼈던 게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를 표징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표징까지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행복’이라는 모토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결혼을 생각했다가 이제 ‘하.사.시.’를 읽고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더 큰 행복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행복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마음에 저절로 지적인 호기심이 누구보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이는 그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던 중 ‘하.사.시.’를 만나게 되었고 참 행복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참 행복의 지혜가 표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로 완벽히 결심하게 만든 책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습니다. 주님은 표징보다는 참 행복의 길로 이끄는 방법으로 지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마음 안에는 믿지 않는 합리화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징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혜가 오히려 마음을 바꿉니다.
사실 표징은 내가 지혜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 때 나중에 보여주십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을 믿던 이들도 다 신앙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다가오기는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지혜가 예수님께로 이끄는데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니네베 사람과 남방 여왕의 예를 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그분에게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 자체가 그분을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을 ‘사이비’라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신앙인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이비를 만드는 이들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지혜를 원치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거짓말’에 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할 때는 제페토 할아버지의 지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포교를 하는데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열매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TV 뉴스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정보의 유입이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거기에는 마치 표징과 같은 놀라움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필요한 부분만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짜 맞춰서 가르치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속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지혜를 찾기를 원치 않는 사이비에 적합 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사이비들에게 적용됩니다. 광주대교구 최창무 주교님이 나주 율리아의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교령으로 반포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를 제가 처음 접했을 땐 저도 매우 신기했었습니다. 성체가 입 안에서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를 통해 보았을 땐 정말 믿음이 더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쥐고 있던 제병을 던진 것이라는 증언과 자료를 보고 또 입에서 성체가 피로 변하는 것은 입 안에 나 있는 상처를 터뜨려 피가 나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고,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것도 그녀가 묵고 간 곳에서 향수병이 발견됨으로써 거짓이었다는 것 등을 듣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특히나 그녀가 미장원을 할 때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녀의 오줌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 등을 보았을 때는 그런 것들에 광신적으로 빠져있는 신자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에는 항상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수원 교구에서도 최덕기 주교님께서 미리내 상주 데레사의 모든 것들도 거짓임을 교령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녀님들에 의해 그 계시 받아 그린 그림들을 보고 글을 읽어보며 신기해했었습니다. 역시나 그런 것들로 믿음이 커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며 그때 보았던 많은 것들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들이 마귀에게 속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리내 중앙에 있는 삼위일체상도 계시를 통해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간단히만 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고 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무엇에 제약받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영(靈)이시고(요한 4,24)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이가 없다고 하고(요한 1,18: 6,46) 교회의 가르침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데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이비가 점점 강하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지혜가 아닌 표징만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징만 요구하는 세대가 된 이유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가집니다. 사이비 새진리회는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 맞서는 이들은 지혜로 하나하나 설명하려 듭니다. 둘은 적대관계가 되어 서로 싸웁니다.
제가 오랜만에 본당에 왔을 때 정말 놀랐던 것은 성경, 그리고 기도서나 성가책을 제외하고는 성물방에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이유는 당시 성물방 책장에는 엄청난 책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지혜를 찾지 않게 된 이 세상은 이제 사이비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합니다.
“독서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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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저는 두 가지의 동화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미운 오리 새끼’이고, 다른 하나는 ‘병아리와 함께 자라는 독수리’입니다. 두 이야기의 동기는 비슷합니다. 원래 백조인데 오리들 틈에서 자라는 미운 오리 새끼와 원래 독수리인데 병아리들 틈에서 자라는 독수리의 이야기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백조의 알이 오리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백조는 생긴 모습이 오리와 다르니 오리 사이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로 불리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물가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백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같은 백조들과 함께 호수에서 지내게 됩니다. 오리들이 볼 때는 미운 오리 새끼였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지냈던 독수리도 비슷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독수리의 알이 병아리의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면 숨어야 했습니다. 독수리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자기의 모습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두려움에 떨고, 숨어야 했던 독수리는 다른 독수리들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가 읽었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별과 구름을 만드셨습니다. 땅과 물과 숲을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물과 땅을 다니는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호수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백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이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독수리입니다.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유혹과 죄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을 겁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과 재물로 치장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보였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 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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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자 하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다.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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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보면 이 사람들이 믿을까요?
표징이라는 낱말을 보면서 몇몇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사람들은 표징을 청하지만, 표징을 보고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표징이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지만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0-12 참조). 그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표징이 주어지면 그 표징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여야 하기에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험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을 때는 자신의 불신을 감추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시]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표징을 청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표징이 던져졌고, 이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지만 어쩌면 그 세대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았던 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을 치른 세대입니다. 이날 저 날 미룰 수도 없이,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표징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 표징은 나의 믿음을 확인시켜 줍니까, 아니면 나의 불신을 드러나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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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래 표징이란,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1) 앞의 16절에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라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서 그것을 증명하시오.” 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표징 같은 것만 요구한 당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넓은 뜻으로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회개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를 거절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강제력’을 통해서 신자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억지로 신자가 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으로 압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진심으로 믿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2)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마태 12,40).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은 너희가 나를 안 믿지만, 나의 죽음과 부활을 보게 되면 믿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리스도교 내부의 교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그들은 원래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요나 예언서 전체 내용을 생각해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고 회개하여라.”, 또는 “너희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표징을 보아도 안 믿을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만 듣고서도 믿고 회개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됩니다.(요나 3,5) 그런데 그들이 멸망 선포를 듣고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요나 3,9) 분명히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렸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표징이란, 원래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혹시라도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을 예로 들면서, 표징이란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자 자신들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믿었으니까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5)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예수님 자신이 곧 표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도로표지판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표지판을 믿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가면 ‘구원’에 도달하고, 안 믿고 다른 쪽으로 가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을 보면, 재림 예수라고, 또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거짓 메시아도 많고, 사이비 종교인도 많습니다. 도로표지판처럼 보여도 진짜 표지판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 아닌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가짜 표지판이 많은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가짜 표지판들에 속아서 인생을 망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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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지난 금요일 복음을 떠올려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그들은 이미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목격하고도 더 자극적이고 특별한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께서 ‘표징’이심을 강조하십니다. 마치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인식된 것처럼 말입니다. 요나가 처음 하느님의 명령을 피하여 달아난 우여곡절의 역사는 차치하고(요나 1─2장 참조), 결국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니네베로 가서 그들에게 닥쳐온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 요나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곧 멸망하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니네베 사람들은 그런 요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의 외침을 중요한 표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자루옷을 입고 단식하며 결국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합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어떤 기적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니네베 사람들은 그의 단순한 외침에서 표징을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 언급되는 ‘이 세대’의 유다인들은 요나의 외침보다 훨씬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심지어 그분의 놀라운 기적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도, 계속해서 더 큰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주님을 믿기 위함이니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할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들, 그리고 그분께서 친히 세우신 은총의 성사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표징이 되고도 남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무엇을 청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들을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사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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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니네베는 북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입니다. 요나는 원수를 위하여 예언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시스를 향하여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태풍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요나는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하여 니네베로 갑니다.
본디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도시인데 요나는 하룻길을 걸은 다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의 외침만으로도 니네베 사람들 전부가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로 없이 임금마저 단식하였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자루옷을 입혔고 단식하게 하였으니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다 회개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표징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싫어 니네베로 가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려고 몸소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내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셨기에 사흘 동안 저승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네베에 심판 선포를 할 때 그는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 가시며 예언자직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성의 없는 표징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지만, 요나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신 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좀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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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1,29)
나이 들어가면서 가끔 저는 주책없이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의미로운 가사가 담긴 노래를 듣거나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와 관계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 목요일 부모님 묘를 다녀왔고, 토요일 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때론 남들 보기에 무척 강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전 여린 사람입니다. 다만 제 환경이 강한 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강한 척 살아왔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아졌는지 약해지고 여려져서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지나온 세월, 제가 흘렀던 눈물을 한곳에 모아 놓으면 저의 모습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은 『성경은 눈물로 쓰여 졌으며, 눈물로 읽는 자에게는 최고의 보화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더군요.
어느 순간 성서를 읽거나 묵상할 때 하느님 앞에서 제가 살아 온 삶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 곧 마치 숲을 산책하다가 길을 잃었을 때처럼 어둡고 두렵고 힘들었을 때가 떠오르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이 눈물은 제가 어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잊지 않으시고 저를 찾아 주시고 저를 위로해주셨던 하느님 손길의 따스함을 다시 느낄 때 흘린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단테의 지옥 편에 보면, 주인공은 돌연히 길을 잃게 되고 그때부터 계속되는 지옥의 층층을 시작하는 순간을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서 나는 캄캄한 숲에 들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서 때론 그런 숲에 든 적이 있고 숲에서 길을 잃은 적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해는 지고 숲은 어둡고 캄캄한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이 홀로 그 숲에서 날이 새어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단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께 매달려서 기도밖에 할 수 없었던 날들을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 근처에 태평스러운 소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소녀는 호기심이 많았고 모험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숲속 깊이 들어갔고,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불안했고 숲을 헤매다 점점 더 깊이 숲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숲을 뒤지면서 딸의 이름을 부르고 찾아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온밤을 지새우며 찾으려고 했지만, 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 또한 한밤중에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산을 헤매고 다니다 넘어지고 지쳐서, 공터의 커다란 바위 위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간 이후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딸을 찾아 헤매다 새벽녘에서야 공터 한가운데 바위 위에 잠이 들어있는 딸아이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갔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볐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아빠를 끌어안으며 외쳤습니다. “아빠, 드디어 아빠를 찾았어요.”라고.』
우리 모두 인생이란 여정을 걸으면서 길을 잃고 헤맬 때 아빠 하느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빠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아빠 하느님께서 찾아 헤매시면서 찾아오십니다. 회개란 무슨 특별한 표징을 받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표징입니다.(루11,32 참조) 흔히 회개란 아빠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때 저는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요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 안에 숨지 않고 기다리며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찾기 위해 헤매시다 잠든 우리를 발견하신 아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 일어난 그 소녀처럼 ‘아빠, 드디어 아빠를 찾았어요!’라고 아빠 하느님의 따뜻하고 사랑스런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스런 아빠 하느님의 품에 안겨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두려움이 아닌 평화를 누리면서, ‘살았다.’라는 안도의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표징이란, 우리를 찾아 헤매시는 예수님이 바로 표징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아빠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며,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표징을 다 안다고 해도 아빠 하느님의 마음, 구원 의지와 계획을 읽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결국 각 사람의 인생 여정이란 그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하여 걷고, 그 길을 어떻게 걷던지 그 길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수 있도록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아!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면 언제나 우리는 마음이 무딘 사람이며 악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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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집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립니다.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자,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사무실 컴퓨터가 이상해요. 직원이 없어서 신부님께 물어보러 왔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컴퓨터를 켜니 익숙한 윈도우 화면이 아닌 파란색 화면에 알 수 없는 영어가 가득 채워 있다는 것입니다. 얼른 가서 보니 CMOS 설정이 켜져 있습니다. 이 설정은 주로 컴퓨터의 시스템 시간, 날짜, 하드웨어 구성 정보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며, 시스템 부팅 시 하드웨어를 인식하고 초기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마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뒤에 키보드를 꺼내면서 실수로 CMOS 설정으로 들어가는 F2 키를 누르신 것 같습니다.
간단히 ESC 키를 누르고 yes 버튼을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지만, 이 자매님께서는 처음 보는 화면이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저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1983년부터 컴퓨터를 만져본 저로서는 이 CMOS 설정이 너무나 익숙했고, 그래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으면 두려움부터 몰려옵니다. 온갖 부정적 생각이 함께하게 됩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알아서 익숙한 사람은 자기 삶 안에서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모르고 그래서 익숙하지 않으면 불안과 걱정 등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알도록 만드는 기도가 중요하고, 더불어 주님을 알기 위해 성경 읽기를 비롯한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삶 안에서 특별한 상황은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냥 포기하고 좌절하는 무기력한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힘차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알아야 하고, 익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구원의 길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표징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표징만을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 자비를 알아들었기에 이방인이었던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에 모두 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구원은 계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표징을 보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고 있나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님께 익숙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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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우물을 알려주면 물을 퍼마시는 것은 그의 몫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떤 일을 하든지 기쁘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줄리아르 성녀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 시켜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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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당신과 나>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당신과 나>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당신
나를 믿으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믿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당신
나를 바라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바라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당신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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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나, 예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나>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2)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살기 위해 도망쳤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주님 말씀의 선포를 거부했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9-10)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는 두려움 없이 외쳤습니다. 니네베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로부터 구원이 오니까요. 쾌락과 탐욕에 제 몸 던지고 우상 숭배를 탐닉하던 니네베 사람들은 준엄함 심판을 선포한 요나를 죽이는 대신 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힘껏 부르짖었습니다.(요나 3,6-7 참조)
예수님께서 분열, 불평등, 억압, 배척, 탐욕에 물든 악한 세대에게 회개하라 외치셨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악한 세대가 살길이니까요. 비록 이 외침이 당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광기어린 음모를 자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외치고 외치고 외치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참회의 피눈물 흘리며 가슴을 찢지 않고 자신들을 살리려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모질게 때리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서.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죽였습니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의 자리에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저를 놓아봅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제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스스로 들어봅니다.
큰 물고기의 밥이 되기 전제 살길 찾아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던 요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움 없이 외침으로써 니네베 사람을 살린 회개한 요나를 닮은 제2의 요나 예언자가 되어야 하는데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온갖 질시와 비난 속에서 십자가 수난 여정을 당당히 걸어가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때때로 약하고 비겁하며 아직은 때때로 두렵고 흔들립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시작해야죠. 오늘 제게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네가 나의 참 사제가 되고자 하느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라. 내 십자가의 표징을 뼛속 깊이 간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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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말하실 뿐입니다. 곧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다는 것과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 곧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표징으로 말씀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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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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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표징,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1.8)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 때 마다의 체험이 늘 새롭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나라 체험(?)’입니다.
“자비의 집
숙소 문 열 때 마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푸른 산
황홀한 풍경
향긋한 공기
그리운 당신
보고싶은 당신
이 기쁨에
이 행복에 산다
내 성명은 이 행복!”<2024.10.14.>
아마도 회개의 기쁨, 회개의 행복이 이러할 것입니다.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 없이는 겸손도 없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해서도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주변에서 도대체 사과할 줄,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도 무수히 만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바로 문제는 나에게 있고 회개가 답임을 일깨웁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비난하는지 살펴보면 나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다산, 정약용>
인도의 성자라는 간디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주 “내가 잘못했다(I was wrong)”는 잘못의 고백에서 그가 얼마나 ‘회개의 달인’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론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내적부패를 막아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꿔줍니다. 부패에서는 악취이지만 발효에서는 향기입니다.
결국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우선적 응답도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하는 회개입니다. 한 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이니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참된 겸손이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나의 표징’에 관한 내용인데 역시 주제는 회개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는 말씀, 시공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악한 세대는 무지한 세대입니다. 무지한 세대가 표징을 찾습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이요 새삼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오셔도 똑같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 요나의 표징 하나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의 표징뿐 아니라 눈만 열리면 온통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성인들은 물론 무수한 회개의 표징들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하늘의 표징이요 회개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겠는지요.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던 남방 여왕의 예를 통해, 또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베 사람들의 신속한 회개의 예를 통해 당대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아주 결연합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 이 세대에 주시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심판 때 단죄받기 전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인생이요 죽으면 회개도 끝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의 절박성을 말씀하십니다. 이어 오늘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영원한 회개의 유일한 표징이 당신이심을 천명합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솔로몬보다 더 큰 분,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주님과의 만남이 회개에 결정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평생 매일 거행하는 전례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를 이뤄줍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런 선택-훈련-습관은 제가 늘 강조하는 지론이요, 이런 끊임없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차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른 성전에서의 평생 공동전례가 참 고마운 것입니다. 새삼 엊그제 복음 말씀도 우리의 회개의 일상화, 생활화에 결정적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 역시 평생 선택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런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이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시키고 회개의 일상화를 이루어 줌으로 점차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참자유, 참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새삼 값싼 자유, 값싼 행복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부단한 회개 은총과 노력의 열매가 참자유, 참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 결론 부분도 바로 바오로 사도의 체험적 고백이자 회개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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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을 한번 봅시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한 것 때문에 악한 세대라는 심한 욕을 주님께 듣습니다.
그런데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하다는 것인지 저는 저의 체험이 있기에 즉시 압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한 달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영적 상태는 이런 상태라면 서원을 도저히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이 서원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지 아무 느낌이 없는,
다시 말해서 영적 무미건조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피정을 통해 그것을 확인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피정에 임했고, 그래서 한 끼 한 숟가락만 먹는 단식 피정에 돌입했습니다. 한 십여 일 지났을 때 아주 일찍 잠이 깼습니다.
그때 그곳은 조명시설이 열악했기에 불을 켜도 형광등이 바로 들어오지 않고, 제멋대로 그러니까 어떤 때는 즉시, 어떤 때는 십분 있다가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초와 성냥이 늘 머리맡에 있었는데 그날도 불이 바로 들어오지 않아 성냥에 불을 켜려는 순간 악마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성냥 불을 켜는 순간 동시에 형광등 불이 들어오면
그때 저는 하느님께서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서원을 원하시는 것으로 알겠으니 그리 알고 표징을 보여달라고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고 요구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저는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두려움이랄까 압박감에 짓눌리어 몇 시간을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기적이라는 생각과 그렇지 않고 우연이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과학 현상이라는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뜨면서 몸이 풀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때 마침 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붉은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습니다.
매일 해가 떠오르는 것이 하늘의 표징이 아니냐? 저 해가 매일 떠오르도록 네가 한 것이 무엇이냐? 저 해가 매일 떠오르도록 너도 누구도 한 것도 없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아무 수고 없이 저 해가 매일 떠오른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뭐냐?
이런 하느님의 꾸짖음 같은 내적 질책이 이어지면서
완고한 마음과 교만 때문에 널려있는 하늘의 표징은 보지 못하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했던 저 자신을 보고 반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요나보다도 더 강력한 하늘의 표징인 주님을 보고도,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진정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청구서 없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등록금 주는 엄마의 사랑에게서 사랑을 보지 못하고 특별한 사랑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철부지 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번 느껴봅시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봅시다.
매일 내려주시는 햇살에서 하느님 사랑을 느껴봅시다.
고집스럽게 땅만 보고 악한 사람들만 보느라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하늘을 보며 널려있는 하늘의 표징들을 한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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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회개로의 초대!>
오늘 복음(루카11,29-32)은 '요나의 표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많은 표징을 보고도 사람들이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6)
요나 예언자는 회개하지 않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위해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개가 그들에게 내리려던 하느님의 재앙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요나도 처음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게 됩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하자,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남방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멀어져 있었던 이방인입니다. 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듣고 모두 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간 요나나,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선 니네베 사람들처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주님께로 돌아서야 한다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징인 십자가 표징과 성체와 성혈의 표징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고, 이 표징이 늘 우리를 회개로 초대합니다.
이 초대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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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 32)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람은
회개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며
사람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길이 되시고
사랑이 되시고
삶의 반성이
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회개를 배우고
행복을
배웁니다.
그만큼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거짓을 벗겨주는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신앙은 회개로
사는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은
모순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돌보는
것은 분명
회개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삶은 회개로
다시
시작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오늘을 사랑하는
성장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크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회개로
깊어지고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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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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