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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 관련자 호위무사 채동욱
광주사태 주동자 박형선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저 멀리 부산에 와서 대형금융비리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떡검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아래 도표는 검찰 고위급이 로비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부산저축은행에만 광주일고 동문들이 우르로 몰려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검찰에도 호남출신임을 자랑하는 채동욱과 그의 호위무사 김윤상 등이 있었다. 좌파 매체 뉴스타파가 제작한 아래 동영상은 좌파가 보기에도 채동욱은 떡검이었음이 솔직한 사실임을 말해 준다.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을 즈음하여 부산에서는 스폰서 검사 사건도 있었던바, 뉴스타파가 이 영상물로 고발하는 사실은 스폰서 검사 사건 때 채동욱이 부산의 스폰서 검사들, 즉 부산떡검들의 비리를 은폐해 주는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이다. 2010년 4월 MBC PD수첩에서 '검사와 스폰서'편을 방송하자 사흘 후에 검찰은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하였던바, 진상조사단장이 채동욱이었다. 그때 채동욱이 지금 전두환 전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듯이 수사하였던가? 아니다. 그 때도 50일간 조사하였으나 그 발표는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발표였다.
떡검들이 5.18 재판 때 전두환 피고인 사형을 구형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뇌물 수수 혐의를 조작하였을 때 그들은 청렴하여서 그렇게 하였는가? 아니다. 5.18떡검들이 바로 뇌물 수수 집단이었다. 위 동영상 3분 26초는 일개 건설업자 정용재씨가 떡검들에게 매달 2회씩 주어야 했던 돈 봉투 내역이 나온다. 부산지검 동부지청 등 지청장들에게 매 달 100 만원씩 갖다 주어야 했으며, 평검사들에게도 7년 동안 30만원씩 든 돈 봉투를 월 두 차례씩 갖다 주었다. 도대체 검사들이 사업자들을 위해서 해 주는 게 뭐가 있다고 업자들로부터 이토록 많은 액수의 뇌물을 받았는가? 그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오대양 육대주에 한국 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수출 시장을 열어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정용재씨같은 소규모 건설업자한테서까지 그토록 거액의 뇌물을 한 달에 두 번씩 받아 챙겼다는 말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검사들이 바로 뇌물 수수 집단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은 세계 제일의 경제 석학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1980년대에 국제 무대에서 경제 건국 전략을 마련하고 실행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떡검들이 뇌물 수수를 하면 지역 경제가 발전하는가? 아니다. 가련한 영세 사업자들이 떡검들에게 이토록 엄청난 상납을 해야 하는 것은 경제의 암이요, 독버섯이다. 금품 뇌물은 물론 성 접대 뇌물까지 받는 집단이 그것이 죄인 줄을 보지 못하고, 비자금 누명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만 물어 뜯으며 친인척 재산까지 강탈할 때 이것은 위선이요, 도덕적 문제가 있다. 떡검들에게 이런 도덕적 문제가 있을 때 그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운 비자금 누명은 결코 법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 정의를 위한 심판이 필요한가? 그러나 도둑이 심판의 칼을 망나니처럼 휘두룰 때 그것은 위험하다. 만약 도둑이 사법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오면 그것은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법 철학의 과제이다. 사회에서 가장 지저분한 뇌물 수수 집단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누명을 씌웠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는 떡검들의 뇌물 수수 실상에 대하여 말하여야 한다. 떡검들의 뇌물 요구 관행에 여러 해 시달렸던 정연재씨의 외침이 어찌 한 사람의 외침이겠는가? 도둑이 사법의 칼자루를 휘둘러서 실현되는 사회 정의는 없다. 사법 권력이 뇌물 수수 수단으로 전락하였을 때 그것은 큰 도둑 범죄의 온상이 될 뿐이다. 가련한 영세 사업자들이 떡검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그곳에서 노무현의 사람들이라는 큰 도둑이 부산저축은행 돈을 수백 억 단위 혹은 조 단위로 마구 가져갔다. 사법 권력 위에 군림하는 큰 도둑의 그런 범죄를 누가 막을 것인가? 노무현의 사람들의 충견 채동욱이 막을 것인가? 서울에는 금융감독원이 있고 부산에는 검사들이 많았으나 아무도 막지 않는다. 떡검들은 금융비리를 막아주지 않는 이것이 바로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이었다. 떡검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 친인척 계좌 추적을 하고 소환하였을 때 사회 정의를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그것은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라는 초대형 비리를 저지른 노무현의 사람들을 호위해 주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지금 채동욱이 감찰을 거부하고 사표를 낸 것이 어째서 정치권에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는가? 그것은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로 막대한 비자금을 챙긴 노무현의 사람들에게는 채동욱이라는 그들의 충견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를 저지른 쪽에서는 그들의 호위무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정치권에서 일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채동욱이 1999년부터 근무하였던 부산지검 동부지청이 스폰서 검사 사건의 발원지였으며 내연녀 임정순씨와의 그의 관계도 이 시절에 시작되었다. 임정순 여인이 언론사들에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주점 사장이 검사와 내연의 관계를 맺을 때는 술집 운영을 위한 호위 무사가 필요하다는 이해관계가 있었다. 채동욱이 받은 접대의 경우 그런 독심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임여인 스스로 호위 무사가 필요해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임여인이 편지에서 "제가 가게를 하면서 주변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해서였다고 설명하였을 때 그 말을 김윤상 떡검의 용어로 표현하면 호위 무사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누명을 씌운 채동욱의 논리대로 임여인의 접대는 검사가 가게를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대가성 뇌물이었다. 과연 검사의 직책을 이용해 성 접대 뇌물을 받는 겻이 청렴인가? 다수의 국민의 판단에는 그렇지 않기에 그의 내연녀가 술집 마담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이처럼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누명을 씌우고 17년간 괴롭혀 온 채동옥 자신이 뇌물을 받는 검사였다. 부산 떡검들 사이에서 성 접대 뇌물을 십 여 년 전부터 받아 부패의 선배격인 채동옥이 스폰서 검사 사건 진상규명단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상규명을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직책을 이용해 제보자에게 보복하였다. 임여인의 편지에서 술집에서 본 채동욱은 부하들이 잘 따르는 자였다. 임여인의 말하는 채동욱의 부하들이란 단체로 술집을 출입하는 떡검들이었다. 스폰서 검사 사건 제보자 정연재 사장의 말대로 단체로 술집을 출입하는 떡검들이 있었다. 그들은 회식 접대라는 뇌물을 받기 위해 단체로 술집에 오는 떡검들이었으며, 임여인의 말대로 채동욱의 부하들이었다. 그러면 스폰서 검사 사건 때 채동욱이 자기를 잘 따르는 떡검들을 제대로 수사하였는가 아니면 호위무사 노릇을 해 주었는가? 뉴스타파가 위 영상물로 입증한 바에 따르면 채동욱은 스폰서 검사 사건 때 부하들의 보호막을 쳐주는 자였다. 사실 2010년의 스폰서 검사 사건은 한 건설업자 정용재씨가 자신이 부산에서 떡검들을 접대한 것만 제보한 것이었으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최근 채동욱이 전두환 전 대통령 친인척 신상털기를 하였듯이 그때도 신상털기를 하였는데, 조사 대상이었던 스폰서 검사들 신상털기를 하였던 것이 아니라, 제보자 지인과 친인척의 신상털기와 계좌 추적을 함으로써 제보자를 압박하였다. 채동욱의 조사단은 50일간의 조사 기간 내내 제보자를 압박하였으며, 이것이 그가 그의 부하 떡검들을 보호하여주는 방편이었다. 그 사건 때 그가 이렇게 호위하여 준 떡검들 중에는 2007년 2월부터 부산지검 부부장이었던 김윤상도 있으며 그때 진 신세를 갚기 위해서인지 이번에는 김윤상 대검 감찰과정이 채동욱 호위무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금번 채동욱의 혼외자 의혹 사건이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채동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스폰서 검사 사건과 한 선상에 있는 사건이요, 떡검들의 조직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술집 마담 혹은 술집 여자들과의 혼외 정사를 즐겼던 부산 떡검이 채동욱 단 한 명뿐이었던 것이 아니다. 회식 접대와 금품 제공으로도 부족하여 정연재씨 한 명의 사업자가 부산 떡검들에게 제공한 성 접대를 받은 검사들의 숫자가 백 명을 넘는다. 검사가 성 접대 뇌물을 기대하며 받았다는 사실은 5.18떡검 채동욱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엉큼한 비밀이 채동욱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떡검 집단이 공유하는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떡검들이 서로를 위한 호위 무사가 되어 주었다. 위 동영상 05:00부터 부산 떡검들 접대 장소였던 룸살롱이 언급된다. 1차 접대 장소가 횟집이었고, 2차 횟집 장소가 룸살롱이었다. 채동욱이 임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 동부지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만만룸살롱은 부산지검과 동부지청 사이에 있다. 떡검들에게 그들의 사법 권력이 바로 금권이었다. 그들이 성 접대와 돈 봉투 등의 뇌물을 받은 것이 바로 사법 권력 남용이었다. 법이 떡검들이 뇌물을 착취하는 수단일 뿐이라면 도대체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떡검들에게 그들의 사법 권력은 성 접대와 돈 봉투 등의 뇌물을 받는 수단이었다. 떡검들이 꽃미남들이라 성 접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법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 접대를 받았다. 법이 권력의 시녀가 될 때 사회정의는 무너진다. 사회정의가 무너지는 곳에서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라는 초대형 금융비리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정의를 무너뜨린 떡검들이 사회정의를 세운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 누명을 씌우고 망나니처럼 사법의 칼을 휘둘렀다. 건설업자 정연재씨도 떡검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떡겁의 사법 권력은 정당한 권력 사용이 아니므로 대검의 감찰 대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떡검들을 감찰하러 온 감찰 검사들 역시 떡검들과 한데 어울려 접대와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위 영상물 4분 33초부터는 부산지검 감찰팀이 접대를 받은 사실을 보여준다. 부산지검 떡검들과 떡검들을 감찰하기 위해 온 감찰검사들이 한데 어울려 1차, 2차, 3차 접대를 받았다. 도둑과 경찰이 함께 그런 접대를 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는 경찰과 도둑은 이미 한 편이다. 이처럼 떡검들과 감찰 검사들이 떡검들과 뇌물 수수 공범이 되어 있었을 때 그것은 검찰의 총체적 부패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부패의 중심에 채동욱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은폐하였다. 그러면 스폰서 검사 사건을 은폐하는 떡검이 도대체 어떻게 검찰을 개혁한다는 말인가? 그가 말하는 검찰 개혁이란 주변에 김윤산 같은 호위 무사들을 두어 검찰을 사조직화하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대검 감찰과장 김윤상이 자신의 임무가 채동욱 호위무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채동욱이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를 한다면서 전혀 비자금과는 상관 없는 친인척들의 사업들을 수사하는 방법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압박하였다. 예를 들어, 오산 양산동 땅값을 채동욱이 시세보다 다섯 배 이상 부풀려 발표하며, 500 억짜리 땅을 350억에 판 것은 탈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트집잡으며 이창석씨를 구속하였다. 깡패 검찰이 이렇게 부동산 시가 수치를 조직하며 트집잡을 때 그 누구에게든 탈세 혐의를 씌워 구속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을 우리는 깡패 검찰의 독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수법으로 압박하는 방법을 스폰서 검사 사건 조사 때도 채동욱이 사용하였는데 문제는 떡검이 아니라 제보자가 압박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보자에게 수갑 채울 목적으로 표적 수사를 하였다. 심지어 제보자 자녀 학교 선생들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교감되기 위해 정용재로부터 돈 받은 적 없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지인과 친인척들 신상을 털고 개인 정보를 도둑질해가고 지인과 친인척 계좌들을 광범위하게 추적하고 지인 및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위압감을 주는 전화를 거니 집안이 망신창이가 되었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 자녀 친인척에 대한 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출 기업에도 사업 비밀은 기업의 생명인데 비자금과 무관한 일로 장인 기업 조사를 하겠다며 장모 등 처가댁 사람들을 깡패 검찰이 줄줄이 소환하였을 때 전재용씨가 겪었을 심적 고통은 위 동영상에서 정연재 사장이 털어놓는 심경으로도 알 만하다. 채동욱에게 이런 못된 버릇이 있었으며, 그래서 안상영 전 부산시장 등 채동욱에게 조사받다가 자살한 인사들이 여러 명 있다.
지금 채동욱이 법무장관이 지시하는 감찰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자신의 계좌 추적이 두려워서이다. 누가 2010년 채동욱에게 스폰서 검사 사건 제보자 지인들 및 친인척 계좌들을 추적할 권한을 주었는가? 이것은 불법이요 월권 행위였다. ( 최근 채동욱이 수사를 하면 할 수록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아무런 비자금이 없었다는 진실만 드러날 뿐이자 친인척들에게 탈세 혐의 등을 씌우려는 엉뚱한 목적으로 광범위한 계좌추적 등 신상털기를 하였던 것도 불법이요 월권 행위였다.)
자기 아들 채도경의 유전자 감식에 응하겠다고 하였을 때 그의 심경은 참으로 복잡한 것일 것이다. 어쩌면 유전자 감식이 평소의 희망 사항일 것이다. 술집에서 눈이 맞은 내연녀가 아들을 낳아 주었다. 그러나 성 접대를 받은 떡검도 한 두 명이 아니요, 주점 마담의 성 접대 대상도 한 두 명이 아닐 테니 정말로 자기 씨를 받은 아들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평소의 희망 사항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갖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채동욱의 복잡한 사생활의 문제였다. 만약 유전자 감식 결과 채도경이 친자임이 확인되면 그에게는 비보이자 희소식일 것이라는 데에 이번 사건의 묘미가 있다.
채동욱이 자기는 뇌물을 안 받는 청렴한 검사였기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혐의 올가미를 씌워 사형을 구형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는 뇌물을 안 받기는커녕 성 접대 형식의 뇌물까지 받는 자였다. 공직자가 성 접대를 받는 것이 부패인데, 그런 부패의 장본인인 그가 노무현 정권 시절 부패방지위원회 법무관리관 자리와 국가청렴위원회 법무관리관 자리를 모두 꿰차고 있었으며, 그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 자리 외에 이런 자리들까지 꿰차고 있던 바로 그때에 부산에서 스폰서 검사 사건 및 부산저축은행 대형금융비리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패방지 검사의 직함을 가진 채동욱이 그 막강한 검찰 권력으로 든든한 부패의 호위무사 노릇을 하던 때에는 그런 비리 사건들이 은폐되고 있었던 것뿐이요, 실상은 채동욱 떡검이 있는 곳이 검찰 부패와 금융 비리의 온상이었다.
만약 채동욱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부산 떡검이었을 때 부산을 무대로 노무현 정권 사람들이 벌인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에서 조 단위의 비자금을 갈취해간 노무현의 사람들과 채동욱은 전두환 비자금 추징법을 만들고 여론을 그쪽으로 끌고가는 방법에 의해 자신들의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를 다시 한번 은폐하였다. 스폰서 검사 사건을 은폐한 채동욱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야수처럼 달겨들어 물어뜯고 망나니처럼 사법의 칼을 휘둘렀다. 뇌물을 받는 떡검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법의 칼을 휘둘렀다. 전 전 대통령은 채동욱처럼 성 접대를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정치자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받은 약간의 정치자금이 있었다면 그 돈은 모두 1980년대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경제 건국하는데 사용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경제 건국의 찬란한 업적이 있다. 채동욱이 받은 뇌물은 단 한 푼이라도 국가를 위해 사용되었는가? 아니다. 그는 술집 마담과 두 집 살림하는데 허랑받탕 낭비하였을 뿐이다. 위 영상물이 1:03부터 보여주듯이 채동욱이 부산 스폰서 검사 사건을 은폐하였다. 자신의 떡검 비자금이 탄로날 사건은 꽁꽁 은폐하던 채동욱이 전 전 대통령에게는 비자금 누명을 씌우며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게 사법의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비단 스폰서 검사 사건뿐만 아니라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도 검찰이 수사를 하지 않는 사건이다.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며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를 17년째 악착같이 하였던 채동욱이 어째서 그 비자금 액수가 조 단위인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하지 않는가? 피해자들 중에는 6.25 전쟁 때 나라를 지켰던 가난한 노인들도 많다.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생 아껴 모은 전 재산을 큰 도둑에게 빼앗긴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다. 이 큰 도둑놈들이 갈취해간 비자금들을 환수하여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피해자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시절 자행된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채동욱이 전혀 수사를 하려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은 단 한 명의 피해자도 없는 정치자금이었다. 그 자금은 나라 경제를 발전시켜 나라 빚을 전부 갚고 한국 기업들이 오대양 육대주에서 수출하여 외화벌이를 하게 해 주는데 사용되었으므로 단 한 명의 피해자도 없고 전 국민이 큰 혜택을 보았다. 그런데, 노무현의 사람들이 부산저축은행 금고에서 돈을 맘대로 꺼내가 비자금을 마련한 사건은 수천 명의 소시민 에금주들이 모두 피해자가 된 사건이었다. 아래 도표는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 때 '광주일고' 출신들간에 은행 돈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의 자기 딸에게 송금한 600만불이 어디서 났는가? 박연차가 준 것이었다. 박연차는 그 많은 현금이 어디서 났는가? 부산저축은행 돈을 자기 지갑 돈처럼 꺼내 쓴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정부 금융감독원이 감독을 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망을 봐 주었기에 가능한 비리였다. 채동욱이 부산 떡검이엇던 바로 그 시기에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은 금융감독원에 압력성 청탁 전화를 한 대가로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70억원을 받아 챙겼다. 노무현의 600만불은 노무현의 사람들이 뇌물 명목 등으로 부산저축은행에서 가져간 천문학적 비자금의 극히 일부분일 뿐인데 노무현이 자살하였다고 해서 그 비리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가? 불과 몇 년전 사건이라 지금이라도 수사하면 부산저축은행에서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아 환수하여 피해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을텐데 왜 수사를 안하는가? 피해자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을 학수고대하였으나, 채동욱은 부산저축은행 대형금융비리를 덮는 방법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전액 환수 나팔을 불었다. 사실 환수라는 용어가 잘못 되었다. 노무현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은행 강도였다. 단지 은행 강도짓에 총과 칼 대신 사법 권력을 사용한 것이 다를 뿐 큰 도둑이었다. 은행감독원과 검찰이 큰 도둑과 한편이었을 때 그 비리를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큰 도욱이 부산저축은행에서 가져간 돈은 환수 대상이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단 한 푼도 은행 돈을 가져간 적이 없는데 무엇이 환수 대상이라는 말인가? 광주일고 동문들이 부산저축은행에서 집어간 돈의 흐름은 수사만 하면 금방 나온다. 그러나 채동욱은 꼭 해야 할 이 수사를 하지 않고 엉뚱하게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칼을 겨누는 나팔을 붐으로써 문재인 등 노무현의 사람들을 호위하여 주었다. 뉴스타파의 표현대로 채동욱은 노무현 권력의 충견이었다.
그러면 노무현 정부 시절 부산에 우르르 떼로 몰려와 부산저축은행에서 초대형 금융비리 저지른 광주일고 동문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광주운동권이요, 윤한봉, 윤상원, 정찬용, 윤강옥 등과 더불어 광주사태 주동자로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인 박형선이 부산에서 저지른 저축은행 비리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김홍일 검사장)는 5월 27일 (2011년) 불법대출에 관여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으로 부산저축은행 2대 주주인 박형선(59) 해동건설 회장을 구속했다. 그런데 박연호와 박형선 등 광주일고 출신들이 부산에 가서 저지를 이번 비리 사건은 그 뿌리가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이었던 광주운동권이 모두 광주일고 동문들이었다.
민청학련과 남민전 사건과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에 광주일고 출신들이 많았던 사연은 이러하다. 4.19 때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친 김일성은 1960년대 중반에 김종태 등 몇몇 운동권을 북한으로 데려다가 훈련시킨 다음 남파시켜 전라남도와 서울을 거점으로 통혁당을 창당케 하였다. 통혁당이 서울에 학사주점을 설립하고 대학생 포섭 활동도 많이 하였지만,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던 학교는 광주일고였다. 광주일고 6회 때부터 광랑이란 운동권 서클이 있었는데, 이 광랑이 통혁당이란 지하당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으며, 광주운동권을 배출하였다.
1. 인민혁명당과 광주일고 동문의 연결고리
이번 저축은행 비리 사건의 장본인 박형선의 처남이 바로 광주일고 동문이자 5.18기념재단 설립자인 윤한봉이다. 따라서 이번 비리 사건은 5.18기념재단 설립자 및 운영자들 친인척의 도덕성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조희연에 따르면, 통혁당은 개개인을 세미나에 참여시켜 기초적 교양을 하는 과정에서 잠재력이 있는 인자가 발견되면 '심화학습'(원전 혹은 북한 책 등)을 통해 통혁당 조직원으로 참여케 하였다 (조희연 1990, 110). 그런데 윤한봉은 정말로 광주일고 선배들 중에서 정말로 가방에 그런 불온한 이념 서적들을 담고 다니며 광랑에서 그런 심화학습을 받다가 통혁당에 참여한 운동권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인자 그 광랑이 빛 광자 광주사내, 사내 랑자 해가지고. 광랑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이 광랑이라는 서클이 6회인가에 선배들에 의해서 6회 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6회, 6회들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 그 광주사내들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이제 학습을 하는데 독서회 같은 거니까. 당시로는 아주 불순한 공부들을 했다고. 그래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랑가는 몰라도 쿠바인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 맹비판을 한 리슨 양키라는, 양키야 들어라 뭐 그런 책이 4.19 이후에 출판이 됐었다고요. 금서로 돼 있다가. 그런데 5.16 쿠테타가 나면서 다시 금서가 됐지. 그게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책인데. 그런 책을 놓고 미제국주의의 진면목이 무언가를 공부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해갖고 어떻게 보면 쪼금 붉으스름했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자칭 사회주의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정돈데. 거기에 선배들 중에서 9회 선배가 이제 반공법사건 같은 걸로 좀 들어가고. 10회가 통혁당 막둥이로 어린 통혁당으로 해가지고 고생도 하고.
면담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술자: 근게 9회 조용호, 김민혁, 아니 조용호씨가 이상한 책들 붉으스름한 책들 가방에 담고 기차 타고 내려오다가 비슷한 가방하고 바꿔 들고 나와 브렀어. 그래 갖고 인제 그 다른 사람이 집에 가서 본 게 이상한 책들이,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가지고 혼난 사건이고. 10회가 박경호 선배가 인자 통혁당 막둥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인제 일고 14회, 그러니까 내 3년 후배들이 이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정상용, 국회의원. 5.18항쟁지도 대변인 아니 외무부, 외무부장 맡았었지. 이양현 거기도 5.18당시 그 기획의원으로 도청항쟁지도부 있었고, 김이택 그것도 이제 나중에 긴급조치로 빵잽이하고, 민청련 의장도 하고 그랬지. 지금은 공직에 가 있는데. 박영규, 영신이 김영신, 박영신, 그렇게 되고 이제 16회가 최철희, 19회가 정용화, 정용화도 5.18관련해서 그렇고.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 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1-2).
이렇듯 광랑에서 반미・친북・친공 이념으로 의식화된 광주일고 출신 중 10회에 통혁당 간첩단 사건 관계자들이 있었으며, 11회와 14회가 바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광주운동권이었다. 광주일고 운동권 서클 광랑의 출발점은 향토반이란 특별활동반이었다. 여기 몸 담았던 학생들이 광랑을 조직한 후 광랑이 향토반을 장악하였다. 광주일고 광랑 출신들이 전남대로 진학한 후 광랑 후신 서클로서의 '민족사연구회'(약칭, 민사련)를 조직하여 전남대 학생활동을 장악하였다. 이렇듯 오늘날 5.18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전남대 운동권의 뿌리는 민주주의 철학이 아니라, 통혁당으로부터 전수받은 반미・친북・친공 이념이었다. 그 당시 현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과 더불어 민청학련 활동을 하다가 그의 처남이 된 윤한봉은 광주일고 광랑이 전남대 운동의 맥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면담자: 선생님 잠깐만요, 향토반이 일고에 있는 동아리죠?
구술자: 일고에 있는 일종의 동아리지. 특별활동 아니 동아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활한 동아리지. 독서 발표 같은 거 하고 방학 때 농활을 했던 것이 향토반이야. 거기 최초의 향토반을 만든 사람이 지금 곡성군수 고현석씨에요. 6회들. 이사람 이외도 두 사람, 세 사람이 만든 건데, 이 광랑이 인제 향토반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좌지우지하게 된 거지.
면담자: 광랑은 일고생들의 모임인 거죠? 향토반 출신의 전남대생이 아니라.
구술자: 일고의 광랑이라는 독서서클이, 일종의 불온한, 요즘 말로 하면 서클이 있었는데 이 서클맴버들이 대부분 다 향토반에 들어가 있었지. 그래가지고 향토반에 영향을 줬지. 향토반 출신들이 또 많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 광랑이 벌써 9회 조용호 선배가 감방에 가고 10회 박경호 선배가 감방에 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서클이었지. 요 출신들이 14회가 대거 전남대에 와가지고 정상용, 이양현이가 전남대에 민족사 연구회를 만들어요. 여기에 일고출신과 일고출신 아닌 사람들도 일단 요즘 말로 하면 사회과학 서클이야. 이념서클 같은거. 면담자: 민사련이요. 구술자: 그렇지. 민족사회연구회가 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전남대에 운동의 맥을 형성해. 그러고 이 사람들이 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교련반대시위 여기에 주축이 되지. 주도, 여기서 주도를 해요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1-2).
1980년 봄부터 진행되었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들이었던 윤한봉, 정상용, 이양현, 김상윤, 문국주, 김영철 등의 광주운동권 전원이 광주일고(광주제일고)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1971년 전남대에 민사련을 조직한 광주일고 출신 운동권이 바로 1980년 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이었다는 점에서 통혁당과 광랑, 광랑과 민사련, 민사련과 광주사태는 하나의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내란음모사건 주동자들 중 하나였던 김상윤도 광랑 출신이 광주지역 대학생 운동권을 형성하였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 나는 광주에서 서석국민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일고 내에 피닉스, 원시림, 광랑 등의 서클이 있었는데 특히 '광랑' 출신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많이 주도했다” (김상윤 1989).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을 운동권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북한측 당사자였던 거물 간첩 김용규의 시각에서는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 (김용규 1999, 285-289). 평양의 대남공작기관이 직접 관리하였던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 정부를 뒤엎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도했”던 사건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중에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와 안암동에서 하숙하다가 남파 공작원에 포섭되어 공작원이 마련해 준 원남동 하숙방에서 하숙하다가 평양에 가서 혁명학원에서 간첩 훈련을 받고 돌아온 서울 법대생이 있었다 (김용규 1999, 236-289, 300). 그 당시 남한에는 북한이 직접 관리하는 운동권 조직이 94개나 있었는데, 평양에 다녀온 운동권 수만 무려 백 명에 달했다 (김용규 1999, 303-305).
1973년 광주일고 출신 전남생들이 대거 민청학련에 가입하게 된 데는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 조종이 있었다. 민청학련은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배후조종하고 있었고, 인민혁명당 재건위는 북한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당시 민청학련이 북한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박갑동은 김일성의 어록을 인용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서 미국이 왜 박정희를 지지하는가가 문제인데 그것은 그가 반공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신용은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민청학련이나 목사들은 북과 결부하려 하고 있습니다” (박갑동 2005, 98).
인혁당 재건위와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의 관계는 이러했다. 인혁당 이수병이 여정남을 지도하였으며, 여정남으로부터 받은 인혁당 자금을 들고 이철이 직접 광주로 내려와 윤한봉 등 광주운동권을 포섭하엿다.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혁당과 1974년의 민청학련의 관계를 김정래는 이렇게 기록한다:
2차 인혁당 조직은 1960년대 후반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변혁운동 내부에서는 1960년대 전반에 걸친 정치논쟁을 통하여 대오를 일원화하고 있었다. 지도부 건설은 고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추진되었고 경락연구회는 지도부 건설의 초기 단계에 해당되는 협의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서울 우홍선, 대구 서도원, 광주 김세원, 부산 000 이 조직을 분담하였으며, 학원·문화계는 이수병에게 위임되었다. 경락연구회는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맺는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은 대구지도부에서 서울지도부로 파견되어 이수병, 김용원의 지도를 받아 민청학련 봉기계획에 착수하고 조직활동을 벌여 나갔다 (김정래 2011, 175).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극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나상기(농민문제연구소장, 당시 KSCF), 박석률(서강대 배후조정), 김경남(민중신학 계열 목회자, 당시 한국신학대학 재학), 윤한봉, 김상윤, 김정길(전남민주연합집행위원장) 윤강옥(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 이강, 정찬용, 광주일고 동문 서울대 재적생 나병식 등 광주운동권19명과 인혁당재건위 조직원 2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4).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당시 민청학련 소속 광주운동권 전원이 광주일고 동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광주운동권’은 사실상 광주일고 광랑 출신 동아리였다. 따라서, 광주운동권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였던 것이 아니라, 광주일고 광랑 시절부터 의식화된 반미・친북・친공 이념을 대표하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그갼의 운동권 주장과 달리 민청학련 배후가 인혁당 재건위였다는 것이 사실이었음을 당시 변호 의뢰를 받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1993년 인권변호사들끼리만 모였 좌담회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김형태 변호사: 그때 인헉당 사건의 여정남 등의 번론은 왜 안 맡으셨나요.
홍성우 변호사: 아이구, 그때는 나는 헉신계 소리만 들어도 떨릴 때였어요. 정말 그래서 민청학련 조직을 가능하면 인혁당과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때 이철이 여정남과 연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이돈명, 조준회, 홍성우, 김형태 1993, 683).
지승호도 이철의 말을 인용하여 여정남과 민청학련이 접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임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대구경북 지역은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이철 전 의원도 ‘유신반대전국시위에서 대구 광주는 주요 거점도시였으며, 경북대와 전남대는 중요한 학교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고 여정남씨와 민청학련과의 접촉이 있게 된 것이고, 학생운동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유신으로 철퇴를 맞고, 73년 다시 복원이 된다” (지승호 2005, 173). 인혁당 마지막 생존자 임구호도 당시 학생데모 배후에 혁신계 선배들, 즉 인혁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인혁당 여정남 출신학교 경북대 운동권은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내린 지령에 따라 민청학련 사건을 초기에 주동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혁신계 선배들은 서울,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서로 왕래를 하면서 자기 지역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 논의들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저하고 정남이형 두 사람이 서울 올라가서 유인태, 서중석이를 만나서 서로 조직적 관계를 강화해서 앞으로 저항을 하는데 있어서 조직적으로 대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다음에 연계망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것까지 다 논의가 되죠. 이철은 군대 갔다가 복학해왔으니까 학생이고, 경북대학 같은 경우는 정화영이나 임규영이 학생이고, 학생은 학생끼리 교류를 하고, 이철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정화영하고 저하고 연계를 갖고, 저는 이철을 만나지 않지만, 나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이런 형식으로 조직적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만들다가 73년 10월 2일에 서울 문리대 반유신데모가 있고, 11월 5일 경북대학교 반유신데모가 있는데, 이것은 조직끼리 연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 물리대가 먼저 해가지고, 그때 유언비어와 대남방송에서 이게 나오니까 우리가 이걸 빨리 따라잡아서 한판을 해야 된다고 해서 경북대에서 총동원을 해서 11월 5일 시위를 하게 되고, 그게 성공을 했어요 (지승호 2005, 174-175).
윤한봉도 여정남의 인혁당 동지들을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배후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 분들 중에서 한 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6).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 분들 중에서 한 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6).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대남공작원이었으며, 1999년에『소리 없는 전쟁』을 저술한 김용규는 그 시절 대부분의 운동권 단체들이 북한 자금 지원을 받거나 북한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고 기록하는바, 그 대표적인 단체가 인혁당이었다.
인혁당 여정남이 민청학련을 접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명백한 증거로서 김지하는 여정남이 유인태와 이철 등 민청학련 조직책들에게 직접 활동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든바 있다. 김지하가 말하듯이 “모든 조직운동은 자금이 가장 중요하다. 수사를 할 때 자금원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김지하가 증언하듯이 민청학련 자금원은 인혁당이었다. 김지하는 그 자금은 “죽은 여정남씨가 유인태씨든가 이철이든가 막걸리값 하라고 준 것”이라고 증언한다 (지승호 2005, 184). 그 자금이 화폐 가치와 경제 수준이 다른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거액이 아닐 수 있겠으나, 이철이 전국 포섭 대상자들에게 푸짐한 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만한 자금이었다. 여정남이 한 두 사람이 아닌 전국의 그 수많은 운동권 막걸리값을, 당시로서는 꽤 큰 자금을 민청학련 조직책 이철에게 제공해 줄 이유가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윤한봉은 이철이 자신을 민청학련 광주 조직책으로 포섭하였을 때 여러 차례 푸짐한 술 파티를 제공받았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어떤 동시다발적인 시위준비를 하자 이런 요지였는데, 그게 인자 광주로 내려와 가지고 전남대의 인자 그런 역할을 책임 있게 대표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인자 당연히 끼리끼리 이 뭐야, 함성, 고발지 사건으로라든지, 이강씨 이렇게 접촉을 해 가지고, 김남주 등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 그래가지고 인자 내가 추천된 거지. 김정길이가 와갖고 날더러 한번 만나자 하드만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그래요? 그럼 한번 만나 보실라요? 좋다. 그래갖고 인제 만난 것이 이철이랑 나병식씨, 황인성이, 이런 친구들이 내려왔었는데, 그래갖고 인자 만났지. 만나서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지 척하면 삼천리였으니까. 좋다, 하자. 그래가지고 인자 나는 그날부로 이철이랑 전북으로 가가지고 이철 친구 지금 국회의원 돼 있지. 최규선인가 그 친구 만나고 전북대 출신, 요 전북출신인데 그래가지고 전북대 법대생들을 세 명인가 소개를 받았어. 내가 인제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 하여튼 인자 호남지역을 맡기로 하고, 그래서 인제 다음 어디서 만나기로, 그래가지고 다음부터 대전, 속리산, 조치원, 구포 등등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만났는데, 천안 등등. 어쨌든 rfo가지고 인제 전북대생들을 그 뒤로 약속해갖고 만나고 그쪽 한 7,8명 된 사람들하고 만나고 보냈는데 이게 일정한 거리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애매한 거여 이제. 내가 술을 못하는데, 선천적으로 못해요. 내가 알콜 분해요소가 안나오니까. 근데 이제 그런 이야기 할라믄 호탕하니 호탕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요강만 하다고 했는디 이렇게 큰 맥주잔을 두세 개 마셨는디 아조 우아래로 동시에 앉아서 동시에 뿜어내는데 아 죽어 브렀어. 맥주잔 세 개 먹고, 내가 일년이면 맥주 한잔도 못 마시는데, 한 컵도.
면담자: 집안이 그러신가요?
구술자: 그래, 유전이야. 우리 아버님이 술 한잔도 못하셨어. 하여튼 이만큼도 못해. 감주, 보리 쉰밥으로 만든 감주 먹고도 마루에서 떨어져 브렀다고. 내가 초등학교 때. 마당으로 떨어지고 그랬는데, 산딸기 먹고 산에서 취해서 잠들어 블고. 그 정도로 내가 술에 약한데 맥주 이만한 놈을 마셔가면서 막 떠들고 어쩌고 했지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3).
김정래도 경락연구회라는 위장회사 명칭을 사용하던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 배후였다는 것이 사실임을 이렇게 기록한다: “경락연구회는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맺는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은 대구지도부에서 서울지도부로 파견되어 이수병, 김용원의 지도를 받아 민청학련 봉기계획에 착수하고 조직활동을 벌여 나갔다” (김정래 2011, 175).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윤상원과 더불어 광주운동권 핵심이었던 윤한봉과 김상윤을 1973년 11~12월에 인혁당 재건위가 포섭하였으며, 인혁당 재건위의 여정남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이철이 있었다. 『正史5・18』은 민청학련 조직책 이철이 훗날의 남민전 전사 김정길과 더불어 윤한봉과 김상윤을 포섭하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73년 11월께 광주에 온 이철에게 드러나지 않은 윤한봉을 전남지역 총책으로 천거한 김정길의 말이다. 김은 한 달 뒤 당시 동신다방(현 충장로 4가)에서 윤에게 “전남책을 맡아달라”고 어렵게 말한다……윤은……역시 드러나지 않은 김상윤에게 위를 통해 접근, 문리대 등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권유한다……한봉이 형이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그러면 해봅니다” 하고 학비를 벌던 학원강의까지 때려치우고 조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김은 문리대를 비롯 의대,, 조선대 의대까지 넘나들며 분주해진다 (광주매일『正史5・18』 1995, 36).
1980년의 광주사태 때처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때도 광주운동권이 전국적 규모의 봉기를 조직하는 주동자들이었으며, 광주가 그 본거지였다는 사실을『正史5・18』은 이렇게 기록한다:
조직이 무르익어 가던 12월 말 이철, 나병식, 황인성이 또 광주로 내려와 당시 조직된 사람들과 재접촉이 이뤄진다. 이어 다음 해 1월, 전국상황을 함께 점검하는 자리가 속리산에서 시도된다. 이미 조직이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감지한 민청학련 전국 조직책들은 조치원에서 만나 통행금지가 없었던 속리산으로 유람객을 가장해 자리를 마련했다.
전남대에서 윤한봉・김상윤이, 서울대에서 황인성(독문 4) ・전홍표(철학 4), 경북대에서 임규영 등이 모였다. “전국에서 동시에 일시에 궐기하기 위해 3월에 마지막 점검을 하자”고 약속한대로 3월에 부산 구포구에서 만난 전국 조직책들은 시내에서 역사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서울의 황인성, 경북대 이강철・황철식, 전남대 김상윤 등은 이 자리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선언문을 작성, 장기표가 작성한 <민중의 소리>를 함께 소지하고 귀향한다 (광주매일『正史5・18』 1995, 37).
아마 본인들은 인혁당이 주는 돈은 북한이 주는 자금인 줄 몰라겠지만 이철과 황인성이 광주일고 출신 운동권을 포섭하기 위해 광주로 여러차례 내려왔다는 사실이 여기서 다시금 분명히 확인된다. 그런데 이철과 황인성이 나병식과 같이 왔다. 나병식이 누구던가? 나병식 역시 광주일고 동문이었다. 이처럼, 인혁당 재건위와 광주일고 광랑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의 연결고리는 인혁당측의 여정남과 민청학련측의 이철의 연결고리, 그리고 광주일고 동문 나병식 등을 접선 매개로 한 이철과 전남대 광주일고 출신 운동권의 연결고리였다.
이렇게 민청학련 조직망을 키워주는 방법으로 학생 운동권을 표면에 세운 인혁당 재건위는 서울 쪽은 보안유지가 매우 어려워 거사 시기가 4월 초순을 넘기지 않기를 바랬다. “조직이름도 정식조직이 아니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선언문도 미리 사용치 말고 데모 전날 일제히 뿌리기로 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7). 그러나 계획은사전에 누설되고 지도부가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기 시작, 공동연합시위는 무산된다. 4월 3일 서울 주요 대학에서 소규모시위가 터져나오고 민청학련 이름으로 된 <민중・민족・민주선언>과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배포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7).
이렇게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자 윤한봉과 박형선과 김상윤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오히려 일을 더 크게 터뜨렸음을 『正史5・18』은 이렇게 기록한다:
4월 8일까지의 자수기간 중 잡히지 않으면 9일 데모 후 잡혀가자고 결의한 전남 쪽은 8일 저녁 당시 불로동 2층 술집 블론디에서 모인다. 김상윤은 김정순(당시 국문과 여학생)과 애인으로 가장해 자신의 학동자취방 벽장에 숨겨 놓았던 유인물(윤한봉이 작성한것. 민청유인물은 사건이 발표돼버려 사용 안 함)을 가져와 배부한다.
9일. 윤한봉・김상윤・박형선・최철(농1)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당시 스쿨버스 정류장이 있던 계림동으로 가서 차 안에서부터 유인물을 뿌리면서 살포하다 대기중인 경찰에 연행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37).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음 두 명이 구속되었을 때 간첩단이 가족들에게 1인당 5만원씩 위로금을 전달해 주었을 만큼 김용규는 이 사건의 북한측 관련자였다 (김용규 1999, 299).
2. 광주일고 동문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
윤한봉도 5・18 진영 기자들도 광주사태를 윤한봉의 1970년 후반의 운동의 산물로서 이해한다. 그러면 윤한봉이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에 대하여서는 광주운동권이 오랫동안 함구해온 비밀이었다. 그가 1978년부터 어떤 단체들을 조직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증언과 보도가 있었으나, 그가 1976~77년에 어떤 음모를 꾸미며 추진했었는지에 대하여는 2006년 이전까지는 엄격한 비밀이었다. 그와 그의 조직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그런데 7~8 명의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의 간접적 산물이 광주사태였다.
1980년 5월 17일 밤 박형선이 예비검속되었다. 왜 그가 예비검속되었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규모 봉기를 국가가 막기 위하여 사전에 손을 써야 할 때가 바로 5월 17일이었다. 그러면 누가 예비검속의 대상이었던가? 과거에 연행된 적이 있었던 운동권이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그리고 박형선이 과거에 두 번 연행된 경력이 있었던 운동권이었다. 1978년에는 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그를 연행하였는가? 대통령 암살음모 진행 과정에서 생긴 간첩단 사건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음모의 꼬리가 길면 때로 꼬리가 잡히고 그림자가 드러나는 법이다. 윤한봉의 조직의 대통령 암살 음모 자체는 한번도 수사당국에 적발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노출되어 빅형선 등 그 조직원들이 정보부로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박형선과 정상용 등이 임기웅변으로 수사관들을 속이고 무사히 빠져 나왔지만 그 기록은 정보부에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예비검속 대상이었던 것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정상용과 이양현이 함평으로 도망가 숨어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정상용은 자칫 다시 연행되는 날에는 과거의 비밀에 취약했다. 그리고 대통령 암살 음모 동지였던 박형선이 이미 연행되어 있었을 때는 그 가능성이 더욱 컸기에 정상용은 이번에는 몸조심하고 싶었었다.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은 5・18기념재단의 역사기록을 남겨두기 위해서도 중요하므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 즉 정상용과 박형선과 조계선과 자신 광주일고 광랑 출신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이 1976~77년에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구술자: 이게 어제부터 지금까지 광주 운동사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사석에서는 몇 군데서 이제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하고 넘어갔는데, 공식적으로는 이제 언급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어요. 이 사건을 말을 할까 말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내 건강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또 이제 공소시효가 지났어요, 이게. 인제 말해도 돼. 에. 76년 7년 사건이니까 음...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거든. 그래봤자 2002년 정도 되면 다 끝난거야. 근게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래도 할까 말까 하다가 518기념 재단이 임의단체도 아니고 두고두고 이런 활동을 할텐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관련자들의 동의는 내가 안구하고 에. 심정적으로 충분히 동의를 할 몇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먼 일이 있었냐면은 어제 내가 이야기할 때, 4월 9일 75년 4월 9일. 인자 전남대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 사형당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악을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어떻게 마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던지 아, 요 정권에게 유인물이나 뿌리고 시위 집회나 하는 식으로 하고 도저히 엄두가 안나. 참아낼 수도 이겨낼 수도 없고 오래걸릴 것 같고. 그래서 봐불라면 적장을 보라고 박정희를 암살을 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죠. 추진을 했죠. 한 명 두 명 이제 끄집어들였죠. 우리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무지막지한 학살 정권, 독재정권을 꺼꾸러들일 수 있겠느냐. 적장을 봐블자. 그래가지고 인제 한 일곱 명, 일곱 명 정도 끌여 들였죠. 나까지 해서. 근데 그 중에 나를 포함해 네 명은 이름을 인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인제 5월 항쟁 당시 지도부에 외무부장을 맡았던 그 사람인데, 정상용 국회의원도 했었죠. 71년 교련반대 시위 때 강제 입영되었던 친구죠. 학교도 그냥 자퇴를 해버렸어요, 이 친구가. 교수들한테 교수님의 기름기 낀 얼굴과 튀어나온 배를 보고 강의를 계속 듣는다는 것이 곤혹스러워서 그만둡니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퇴를 해분 친구들이 둘이나 있어요. 강제 입영당했던 친구 중에. 그 친구 중 하나가 정상용, 하나가 이양현 그런데. 인제 어쨌든 간에 정상윤하고 내 매제인 박형선이하고 그 다음에 이제 농민운동하다가 나중에 남민전으로 들어가서 혼나고 나온 조개석[조계선]이라고 있어. 거리해서 나까지 네 명, 나머지 세 사람이 있는데 인제 추진했는데. 세 사람은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공직에 있기도 해서. 그때 내가 이야기를 하기를 우리가 무슨 특수 훈련을 받아가지고 저격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찾기도 어렵고 그런 성능 좋은 총도 구입하기 어렵고, 영화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그런 정밀한 방법으로의 암설은 포기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해서 폭탄으로 봐버리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수류탄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폭 형식으로 안고 뛰어드는 그 방법밖에 없다. 확실하니 봐불라면 그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에 동의해 갖고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을, 인제 물었어요. 어디서 이걸 구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저렇게 구할 방법이 군대 밖에 없어요. 수류탄. 그래서 군에 입대해 있는 좀 말이 통하는 선후배 친구들을 찾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이제 찾아서 수류탄을 세 개 확보하고 인자 다이너마이트를 두 박스 뇌관까지 해서 확보하고. 준비를 해놨는데 근데 그때 양이 덜 차. 더 많이 준비해서 하나가 실패하면 또 봐불고. 이런 식으로 할라고. 이제 그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가, 그러면서 내색 전혀 안했지. 그 쪽에서 갑자기 내가 활동을 안하고 딴짓거리 하는 것처럼 보이면은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해가지고 집중적으로 또 사찰을 다닌다 그래가지고 계속적으로 평상시에 하던 대로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조용히 추진하다가 인자 (교도소에)들어가버린 거예요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2-4).
윤한봉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였을까? 위의 증언에서 윤한봉은 그 이유를 8명의 동지들을 복수심의 발로로서 표현한다. 광주일고 광랑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동지로 여겼다는 사실, 복수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집념을 불태우고 철저한 실행 준비를 하였을 만큼 동지로 여겼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독자들은 뜻밖의 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첫째로, 양자 모두 통혁댱 잔당이었다. 1980년 봄 광주사태 당시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유신잔당’이란 용어를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그들은 최규하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도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모두 유신잔당이라고 불렀다. 전두환이 유신잔당이었다는 주장은 그들의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와 앞뒤가 전혀 안맞으니깐 십 년 후 부터는 말을 바꾸어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은 전두환은 유신잔당도 신군부도 아니었다. 만약 전두환이 유신잔당이었다면 그가 신군부였다는 5.18측의 현재의 주장이 거짓말이 되며, 만약 전두환이 신군부였다면 그가 유신잔당이었다는 광주사태 당시의 그들의 주장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도 광주운동권도 그 원 줄기가 통혁당과 한 통속이었으므로 통혁당 잔당이라 부를 만하다.
둘째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여정남이 건네준 공작금으로 이철과 광주운동권이 술잔을 주고 받으며 동지애를 키웠으니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동지로 여겼으며, 민청학련 주류가 광주운동권이었다. 윤한봉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위해 남달리 복수심을 붙태웠던 이유도 이런 끈끈한 유대 관계로 설명된다.
그런데, 윤한봉이 박형선과 정상용 등 광주일고 동문들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증언을 2006년 1월 24일 박현정 구술자에게 하기 10 여년 전인 1989년 11월에 정상용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제목의 증언록에서 그가 1970년대 후반에 광주일고 선후배들과 더불어 그런 불온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모험주의”라는 단어로 가볍게 시사한 바 있다:
결국 학내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운동의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왔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때 내가 노래했던 '혁명'은 다분히 감성적인 면에 치우친 낭만적인 가치였다. 주위의 선후배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이 궁리 저 궁리 해보았으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을 실현하기엔 현실은 너무나 험란했다. 상황이 어려운 때인만큼 우리들의 생각도 그만큼 조급하고 모험주의적으로 흘러 결국은 학교를 뛰쳐나온 뒤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일은 거의 없었다 (정상용 198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부터 김재규와 광주운동권은 동맹 관계가 된다. 그러나, 그 전에 2년간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광주운동권 사이에 숨바꼭질 게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2011년 이명박 정부 중앙수사부 수사대상이 된 박형선이 1978년 잠시나마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수사 대상 명단에 오르게 되었던 에피소드를 그의 처남 윤한봉은 2006년의 구술녹취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구술자: 인제 나는 나가서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 준비해놓은 것도 있고.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인제 우리 형하고 하튼 누가 면회를 왔어요. 근디 이제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를 안 시켜줬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형선이가 내 메가 왔는데 이 친구가 못 들어오고 창문 밖에서 이라고 손만 흔들고 갔어요. 면회를 했는데 인제 그때 그래요. 형선이가 책 가져와서 책 넣었다. 알렉세이『뿌리』 들어왔는데 아 인제 당연히 그날로 책이 들어와야 하는데 책을 안 넣어줘요. 독촉을 했지. 왜 안 넣어주나. 안 넣어주고 그날 넘어가. 그 다음날 또 안와. 막 문을 차고 왜 책을 안 넣어주냐고. 그런게 이제 책이 들어왔어. 그래서 이제 재미난 소설부터 먼저 읽는다고 해가지고 알렉시이 『뿌리』를 보는데 한참 읽다보니까는 볼펜으로 활자 사이에다가조. 딱 하나 쓰였어. 예감이 이상해서 살펴가면서 보니까는 조. 그 뒤에 글짜 써진거 보니까 직, 의, 명, 령, 이, 오, 빨리 나오시오. 그래놓고 뒤에다가 인자 자기들 별명을 늘어놓은 거에요. 이 원수들이. 하마, 참새, 이러니 뭐 이러고. 그러니까 그 때 교도소에서는 이 책을 돌려보거든. 보고나서 다른 사람 주고 그랬는데. 근데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런디 나는 또 생각없이 볼펜으로 째깐한 글씨니까 지위부써 이제. 그래갖고 이제. 그랬는데 그 다음날 운동을 갔다 왔는데 그 시간에 이놈들이 들어와가꼬 책을 글씨를 어떻게 했는가 본 거에요. 내가 안지웠으면 넘어가는 건데 지위노니까 문제가 된 거에요. 나중에 사건이 끝나고 보안과에서 가서 기록을 보니까 처음에 책에 대해서 대장에게 ‘불허’, 그래갖고 ‘낙서’. 근데 그 다음에 이걸 끗고, ‘허가’ 그래놓고는 가로 해놓고 ‘공작상’ 그라고 써 있드라고. 공작상 어떻게 된가 하고 넣어본 거에요. 거기에 내가 걸린 거죠. 아, 이거 뭐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우연히 그놈들한테 걸린 거지…… 그런데 그 시간에 인제 나중에 인자 확인해 본께 먼일이 있었냐면 딱 내가 이걸 지운 것이 드러나자 정보기관에서도 그러더만. 수평적으로 광주 정보부하고 협조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 본부에다가 이야기를 해가지고 헬리콥터가 떠버린 거에요. 급히 광주로. 조직을 잡을라고. 와가지고 광주 정보부 한쪽 칸 비우라고 그래가지고, 정보도 안줘블고 여기다가는, 그러드마 그놈의 시키들. 그니까 자기들이 일종의 비상 수사관을 하는 거야……그니까 이제 그 친구들이 하마부터 참새 다 정보부로 간거여. 그래갖고 문 뚜드리고 요리 들어와갖고 나를 왜 찾소? 너 누구여 그런게 아 내가 당신들이 찾는 하마요. 왜 날 찾았소? 왜 날 찾어. 넌 누구여. 같이 간 것도 아니고 따로따로 들어가갖고. 내가 참새라는 사람이오. 어째 참새같이 안 생겼소? 누구같이 생겼소? 이 사람들이 기절해버리지……그래가지고 3일째 되는 날 이제 오후에 정보과장이 나와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보고 쓰래.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것을 그들이 기대한 대로 야무지게 써준 게 도 이놈들이 놀랜 거야. 나는 내 나름대로 관점을 쓰는 것이니까. 아,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 같다고. 아 머, 하도 빨갱이로 몰아싸코 하니까 내가 솔직하니 내 심경대로 쓴거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먼 밥을 시켜주고 그러믄서 대우가 달라져.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 그래서 뭔가 감이 좀 잡혀서 아, 내가 더 늙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어쩌고 저쩌고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빨리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끝이 쭈뻣쭈뻣 스니까 빨리 나가야지, 나가서 이 일을 수습해야지, 큰일나게 생겼다. 그렇게 해서 살겠다고. 법도 잘 지키고, 그래가지고 몇일후에 석방되어서 나갔어요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위의 인용문은 상당히 긴 녹취문을 발췌한 것인데,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이다. 박형선과 정상용으로 구성된 광주일고 동문 동아리는1978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결행하려 하였는데, 문제는 7명의 조직원 중에 한 명 윤한봉이 아직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그 조직은 윤한봉에게 각서 안 쓰겠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으며, 그 역할을 윤한봉의 매제 박형선에게 맡겼다. 박형선이 책을 하나 넣어 주면서 거기에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라고 써놓고 자신의 별명 하마 등 조직원들의 별명으로 서명하였다. 윤한봉이 책을 읽은 후 “하마” “참새” 등의 글자들을 지우는 것을 눈여겨 본 교도소 보안과에서는 간첩단 암호가 아닌지 의심스러워 수사당국에 보고하였고, 서울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와 직접 수사하였다. 그때는 박형선과 정상용 등은 하마와 참새 등은 암호가 아니라 별명이라고 해명하고, 자기네 조직은 구속자회라고 둘러대어 모두 무사히 금방 풀려났다.위의 인용문은 상당히 긴 녹취문을 발췌한 것인데,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이다. 박형선과 정상용으로 구성된 광주일고 동문 동아리는1978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결행하려 하였는데, 문제는 7명의 조직원 중에 한 명 윤한봉이 아직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그 조직은 윤한봉에게 각서 안 쓰겠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으며, 그 역할을 윤한봉의 매제 박형선에게 맡겼다. 박형선이 책을 하나 넣어 주면서 거기에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라고 써놓고 자신의 별명 하마 등 조직원들의 별명으로 서명하였다. 윤한봉이 책을 읽은 후 “하마” “참새” 등의 글자들을 지우는 것을 눈여겨 본 교도소 보안과에서는 간첩단 암호가 아닌지 의심스러워 수사당국에 보고하였고, 서울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와 직접 수사하였다. 그때는 박형선과 정상용 등은 하마와 참새 등은 암호가 아니라 별명이라고 해명하고, 자기네 조직은 구속자회라고 둘러대어 모두 무사히 금방 풀려났다.
당시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윤한봉과 박형선의 동지들은 대통령 암살 음모 조직원인 동시에 구속자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이 구속자회 회원 동지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간첩단 혐의는 쉽게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광주운동권 형성 과정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있다. 민청학련 사건의 북한측 당사자였던 김용규는 당시 구속자회는 1974년에 간첩단이 북한자금으로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남한 운동권 양성의 포석으로 간첩단이 학생운동권을 시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들 가족을 방문하여 금품을 전해주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용규 1999, 284-289). 김용규는 형권이란 가명의 남파 공작원이 여성 보호막으로서 송 마담과 평양에서 간첩 훈련을 받고 돌아온 서울 법대생 박군을 시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가족들에게 금품을 전하였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가도 좋겠지만 당신이 가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가서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위로만 해주고 와. 알았지?" 이렇게 형권(가명)은 송마담으로 하여금 박군을 앞세우고 최군과 이군의 가족들을 방문하고 위로금으로 각각 5만원씩 전하도록 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현상수배된 이철, 유인태에게 걸린 현상금 20만원에 비하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모한 투자가 아니었다 (김용규 1999, 289).
그런데, 바로 그 해에 윤한봉이 박형선, 이강 등 광주일고 동문들과 더불어 그 구속자회를 이어받아 구속자협의회란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그만큼 간첩단은 구속자회 성원이었던 광주일고 동문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윤한봉 편에서 정보부는 원수였다. 윤한봉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던 이유도 실은 정보부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 수사는 정보부가 했던 것이지 대통령이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보부에 대한 그의 원한의 화살 표적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보부 편에서는 윤한봉이 전혀 원한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정보부 정보과장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출소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만 물어보고 그 답변을 근거로 사건 종결은 물론 교도소 석방 절차까지 도와주었다.
그런데, 석방되기 전에, 즉 간첩암호 의혹 소동이 막 벌어졌을 때 윤한봉이 도둑이 제발 저려 자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음을 그는 이어 이야기한다. 첫날 수사를 받고 돌아와서야 그는 박형선 등 그의 동지들이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의 목표가 달성되려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윤한봉에게는 그때가 또한 가장 겁에 질리는 순간이었다. 줄줄이 엄청난 일들을 저지르는 그에게도 겁은 있었으며, 자살 충동을 느꼈을 만큼 겁이 많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첫날, 첫날 가서 수사를 받고 들어와 가지곤 밤에 잠이 안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이구야 큰일났다. 지금 틀림없이 밖에서 난리가 났을건데. 이거 보통사건이 아니다. 자칫하면 천지가 쑥밭이 되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 에라. 너무 절박해분거죠. 너무 심각해분거에요. 사건 자체가. 그래서 자살기도를 했는데. 그대 뻔히 혼자 독방에서 방법이 있나. 화장실을, 기둥 모서리가 이렇게 각이 진 기둥인데. 정확하니 여기(이마정수리)를 중앙으로 해서 들어 받아블면 머리가 쪼개져서 죽을 것 같다고 판단이 돼서 고놈을 잡고는 그냥 그대로 받었는데 그래갖고 정신을 잃어븟지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윤한봉이 5・18기념재단 역사는 1976~77년 광주운동권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일곱 명의 암살 음모 조직원들 중 다섯 명이나 광주사태 주동자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윤한봉은 그 조직원들이 연행되어 김재규의 정보부 수사를 받고 풀려난 이후 당분간 조심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등 모든 암살 음모 증거물들을 없애 버렸으나, 그 중 자신을 제외하고도 빅형선과 정상용과 이양현 등이 광주사태 주동자들로 알려지게 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놓고는 조심을 당분간 해야한다 그래가지고 증거는 없어졌지만, 증거물, 아이고 정말 조심하면서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저놈들이 내가 나가면 법을 지키고 어찌고 한께는 혹시나 해가지고 전향은 아니지만 내 각서같은 것을 아 이자식이 진짜로 그러나 하고 보는디 뻔하죠 뭐. 나오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고 사건이 이제 5․18이후에 어떻게 되냐면은 항쟁지도부에가 그 사건에 관련된 살마이 세사람 있었어요. 항쟁지도부에가. 근게 또 이놈들이 예비검속된 사람중에 형선이도 들어있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오, 요 새끼들 봐라. 또 이렇게 된 거에요. 이제. 응 이상하게 생각한거지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광주사태에는 몇 가지 역설적인 사실들이 있다. 광주일고 동문들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었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그들은 모두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도망갔다. 대표적 시민군으로 인정받았기에 1988년 광주단체들의 지원으로 국회의원 신분이 되었던 정상용도 실은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처음 닷새 동안은 몸을 숨기며 도망다녔던 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1일은 시민들 손에도 총기가 들어와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전면전으로 접어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한 끝에 인원과 화력이 부족하여 계엄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민들의 무장을 지켜보면서도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시를 장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중에라도 피해는 모두 운동권이 입게 될 것이라는 철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각자 몸조심하기로 하고 헤어져 오후 4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군인가족들이 모여 사는 상무대 부근이어서 안전지대로 생각했는지 노동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집에 피신와 있었다. 이들의 의견도 지금 우리의 힘은 약하니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상황을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낮에 군인가족들이 학생들을 비난하여 사소한 시비가 있었다면서 무조건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차에 타고 가면서도 얘기를 계속했다. 현장을 떠난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지만 두려움 때문에 나는 결국 광주를 등지고 피신을 했다. 그날 밤 광주를 벗어나 광산군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계속해서 논의를 벌였으나 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자, 잠시 더 관망하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자,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일단 이 상황은 피하자는 3가지 의견으로 분분했다. 다음날(22일) 아침 일찍 친구 이양현의 집이 있는 함평으로 피신했다 (정상용 1989).
정상용은 이 증언을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하였다. 그가 1988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에서 평민당 후보를 추천하였을 때 광주운동권 출신으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에 따라 대표성을 가질 만한 인사”를 후보자 선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정상용은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윤한봉 1996, 58), 5월 25일 윤상원이 비로서 학생수습위를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한 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외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의 자격으로 윤상원이 임시혁명정부로서의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그 명칭을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산하조직 ‘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서 그대로 따왔다. 도청 점거 목적은 임시혁명정부 수립이요, ‘투쟁위원회’는 임시혁명정부, 즉 시민군(무장혁명군) 점령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한 기구로서 조직되었다.
그래서 이정로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민중의 임시적 권력기관” “임시혁명권력” 등으로 부른다 (이정로 1989, 31). 이정로는 또 이렇게 역설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유일한 '봉기의 지도기관'이자, 광주 지역의 '임시혁명권력'이었다. 민중 무장의 모든 역량은 이 기관에 총집결되었으며, 그들은 내무, 외무, 치안, 군대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을 혁명권력으로 보지 않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35). 이어 이정로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혁명권력을 탄생시킨 것은 공산혁명의 한 수순이었음을 러시아 공산혁명사 실례를 들어 이렇게 밝힌다: “러시아에서는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 투쟁의 성과로서 [소비에트]라는 혁명적 권력을 탄생시켰다. 남한에서 진행된 1980년 5월의 광주무장봉기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또 다른 임시혁명권력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 35).
최정운도 시민군이 “국가의 의례를 집행하기 시작하고, 시민들을 징병하고, 재산을 집행하는 등 국가권력을 행사했으며, 스스로 무장력을 갖춰 시민군을 조직하는데 이르러 국가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최정운 1999, 146-154). 또한 그는 ‘전남민국’, ‘광주공화국’이란 명칭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었음을 긍정한다 (최정운 2001, 326). 그 당시에는 국가 전복 기도가 중요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사실을 감추는 것이 중요한 5.18측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란 그 당시의 공식 명칭 대신 ‘항쟁지도부’란 신조어 별명으로 광주사태를 기록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항쟁 대상도, 항쟁 이유도, 항쟁 개념도 없었으며,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이정로가 말하듯이 임시혁명권력이었다.
이정로는 광주일고 동문들이 요직을 독점한 이 임시혁명권력에는 자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음을 이런 말로 높이 평가한다: “자본가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무장봉기에 의하여 수립된 권력에는 자본가는 철저히 무력화되고 단 한사람도 참가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진정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정로 1989, 36). 광주사태가 일어난 지 9년째 되는 해에는 이정로가 이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 31주년에 광주일고 동문들의 대형 금융비리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였는가? 부산저축은행의 최대주주도 광주일고 동문이라고 한다. 이 비리 사건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선의의 자본가가 아니었다. 1980년에는 노동자 계급을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자들이 권력과 부를 거머쥐기 시작하면서 서민과 노동자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게 하는 비리를 저질러 왔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민우(윤상원)와 신애(전옥주)가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그 모티브는 박형선의 여동생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남녀 위장취업 1호였던 이 한쌍의 전남대 출신 운동권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른바 '운동권 애국가'로 자리매김할 만큼 윤상원이 좌파 진영에서 영웅시되는 이유는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다른 광주운동권은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정상용은 자신이 처음 며칠은 도망다녔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민들의 무장을 지켜보면서도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시를 장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중에라도 피해는 모두 운동권이 입게 될 것이라는 철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상용 1989).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꾸몄던 사실이 언제 탄로날지 모른다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서툴게 암호를 사용하다가 1978년 김재규의 정보부로 연행되었을 때는 임기웅변의 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5월 17일 야간에 박형선이 예비검속된 이 마당에서는 언제 그의 입에서 조직 비밀이 발설될지 몰랐던 것이다. 동지들이 이렇게 노심 초사하며 도망다니는 와중 박형선이 이번에도 꾀병으로 미꾸라지처럼 수사를 피한 사실을 윤한봉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니까 또 형선이가 또 꾀를 내가지고 요가를 많이 했는데 이불을 둘러쓰고 요가를 해가지고 심호흡을 해가지고 온 몸에 땀이 줄줄줄 새부러요. 그렇게 되니까, 짠거지, 그래가지고 헌병을 물고 해싼게 땀이 막 비오듯이 쏟아지고 이러니까 이불 들러쓰고 그 무더운 여름에 그러니까 병원으로 와서 우리 전남대 병원으로 와가꼬는, 전남대 병원오면 맨 광주일고 선후배들이 의사들이나 이놈들이 어마어마한 위기의 상황인 것처럼. 이 보안사놈들이 와서 보면 아조 큰 병인 줄 알아고,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어쩌고 해가지고 그 위기를 넘겨버리고 그런 적도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때 당시에 수배죠. 만약 잡히면 그 사건까지 한꺼번에 나올 거 같아서 더 마음 졸이고 그러고 있었는데. 야튼 광주에서 그런 비사가 있어요. 하기야 그게 그런 사건으로 끝나서 다행이죠. 진짜로 그 일을 추진했다가 던졌는데 박정희는 안죽고 그래블면 난리 나부러. 생사람 수없이 죽을 판인데. 에 어쨌든간에 그렇게 해서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박형선의 처남 윤한봉의 이 증언에서 금년 2001년의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에서 드러나긴 시작한 박형선과 그의 광주일고 동문들의 사기 행각은 그 뿌리가 광주사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감을 본다. 도주한 윤한봉에 이어 광주사태 발생 원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었던 박형선이 꾀병을 부려 전남대로 후송되자 광주일고 동문들이었던 전남대 의사들이 중병인 것처럼 허위진단해 주어 병원에 장기 입원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에서 광주운동권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수사 당국이 소상하게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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