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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에게만 반응해
“영화 어땠어요?”
진웅의 질문에 솜은 영화가 끝나긴 한 건가 싶었다.
영화가 끝났다면 왜 그녀가 영화로만 보던 김서윤이 아직까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지. 전망 좋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스테이크나 썰던 김서윤이 허름한 곱창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곱창을 씹으며 즐거워하는 건지. 태어날 때부터 슈트와 한 몸이었을 것 같던 김서윤이 어째서 무릎 나온 회색 추리닝에 후드를 뒤집어 쓴 동네 백수같은 몰골인 건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솜은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그녀 앞에 매끈한 모니터화면이 있나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영화라면 제발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생각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솜의 말을 들은 진웅은 입을 삐죽거렸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지, 달링.”
“크크크, 야 진웅이 삐졌다. 서윤아, 우리 진웅이 좀 달래줘라.”
“황기백 니가 달래줘. 얼마 만에 맛보는 곱창과 소주냐. 크-.”
“삐진 거 아니야. 달링 앞에서 나를 무슨 시기, 질투에 눈이 먼 초딩으로 만들고 있어. 달링, 나는 진심으로 질투가 나서 이 영화를 폄하하는 게 아니에요.”
진웅은 불판의 열기와 약간의 알코올로 장밋빛처럼 발그레해진 얼굴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솜은 진웅을 마주 보며 영화에는 관심이 1도 없으니 질투고 뭐고 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서윤에게 고정된 눈이 떼어지질 않았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솜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리 감정이 폭풍우가 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솜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모든 것에 흥미 없어 보였으니까.
“달링. 괜찮아요?”
진웅이 솜에게만 들리게 물었다. 영화까지는 솜이 허락한 것이었지만 이 자리는 진웅만의 결정이었다. 그래서 솜이 더욱 신경쓰였다. 솜에게 뭔가 즐거운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영화도 보고 서윤과 기백까지 동원했지만 솜의 표정은 영 변화가 없었다.
“네? 아, 네. 괜찮아요.... 저 잠깐 화장실 좀.”
진웅은 가게 밖으로 나가는 솜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백은 그런 진웅을 보며 무심한 척 물었다.
“한진웅, 재주 좋네? 저런 미녀를......”
“미녀? 누구, 달링?”
진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배우가 눈앞에 있어도 절대 예쁘다고 하지 않는 기백이었다. 기백의 눈에는 미녀배우라 한들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여배우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백은 여자라는 생물에 대한 관심도 반응도 미미했다.
더구나 지금 달링의 몰골은 민낯도 모자라 창백한 얼굴에 몸매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롱 원피스, 그보다 더 검고 긴 머리카락. 마음을 굳게 먹고 너그럽게 봐준대도 젊지만 병든 마녀, 정도였다.
진웅이 너무 정색하고 되묻자 조금 민망해진 기백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큼......근데, 니 달링이라는 여자 아파 보이던데....괜찮은 거야?”
“아파? 누가?”
서윤이 연신 바쁘게 젓가락질을 하면서 물었다.
“서윤아, 너는 그냥 먹어. 먹던 거 계속 먹어. 달링이 니 팬인 것 같은데 너는 그냥 돼지처럼 먹기만 해서어서 너에 대한 환상을 이번에 확실히 깨어주렴. 그래.”
“내 팬이라고?”
“서윤이 팬이라고?”
기백의 말에 이번엔 진웅이도 서윤이도 두 눈이 똥그래져서 쳐다봤다.
“뭐야. 왜들 이래? 한진웅, 니가 일부러 부른 거 아니야? 달링이 서윤이 팬인 거 알고 점수 좀 따보겠다고? 나는 꼽사리고...이씨...말하고 보니 짜증나내.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더구나 나는 몸 만드는 중이라 술도 못 먹고 곱창도 못 먹는데!!!!”
“달링이 김서윤 팬이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픈 건 또 어떻게 알았고? 만난 지 30분도 안 됐는데? 더구나 너같이 무딘 인간이.”
진웅은 기백의 짜증에는 관심 없고 그저 이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풀었다.
“무딘 건 내가 아니라 김서윤이지. 봐라. 지금도 달링 같은 여자가 자기 팬이라는데도 곱창에만 집착하는 거.”
“헤헤. 달링이 내 팬이라니 곱창이 3.7배는 더 맛있어졌어.”
“어휴, 먹깨비 같은 새끼. 근데, 너 진짜 몰랐냐? 나랑 김서윤 같이 들어왔는데 김서윤만 보더만. 눈이 반짝 하면서. 눈은 또 왜 이렇게 커. 달링은 진짜 거짓말 못하겠더라. 마음이 너무 잘 보여. 쯧쯧.”
“잘 보인다고? 달링의 마음이? 나는 일 년 동안 달링을 매일 봐도 모르겠던데?”
“천하에 한진웅도 자기 여자에는 눈이 머는 구나.”
“내 여자 아니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씨, 그럼 왜 달링이래. 소름끼치게.”
“......이름을 몰라.”
“이런 미친!”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니 흐트러졌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보면 또 마음이 울렁거렸다. 저 안에 김서윤이 있다.
“김서윤을 만났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숨도 쉬어지고. 헤헤.”
그녀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김서윤 팬미팅의 1000명 중 한 명이 되어 보겠다고 티켓을 찾아 밤을 샌 보람이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선물처럼 그녀에게 왔다.
누가 알았을까. 진웅에게 억지로 끌려 영화를 보러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지금 맘 같아서는 진웅의 ‘달링’ 타령을 평생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곱창은 입에 댈 것 같지도 않게 생겼는데. 참 야무지게도 먹네.”
대놓고는 볼 수도 없어 이렇게 멀리, 차라리 밖으로 나와 서윤을 힐끗거리면서도 솜은 너무 좋았다. 양 볼이 빵빵해진 서윤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여기서 뭐해요?”
“앗!”
분명 가게에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기백이 제 앞에 서 있었다.
“아, 놀랬어요? 죄송해요. 저는 달링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저를 보신 줄 알고. 옆에서 한참 통화 했는데, 저. 모르셨어요?”
“아, 네.”
통화라니. 기백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기백이 통화하는 목소리는 아예 듣지를 못했다. 솜은 기백이 혹시라도 서윤을 보며 웃고 있던 자신을 봤을까 싶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마나 한심해 할까.
하지만 기백은 솜에게 다른 말을 더 하는 대신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가게 앞 간의 의자에 앉았다. 손에 담배를 한 개비 들고는 있었지만 딱히 피우려는 것은 아닌지 들고만 있었다.
“이름이 뭐에요?”
“서솜.”
솜이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하자 기백은 약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비밀 아니었어요?”
“제 이름이 뭐라고 비밀까지.”
“근데, 진웅이는 왜......”
“안 물어 보던데요.”
“아......진작 물어 볼 걸. 달링이라고 부르느라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네.”
기백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대화는 중단 되었다. 기백이 담배 연기를 뿜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무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만 같아 솜은 온 신경이 기백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번번이 기백은 아무 말이 없었고 담배만 말없이 타들어갔다.
솜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기백을 두고 가게로 들어가도 되는지 아니면 그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 잠시 고민하다가 자기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이가 없어졌다.
남자를 신경 쓰는 서솜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잘 나가는 톱배우 황기백이어도. 더구나 오매불망 사랑하는 김서윤이 눈앞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왜 여기서 힐끔거려요?”
담배연기때문인지 눈을 가늘게 뜬 기백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 차갑고 도도해보였다. 하지만 솜이 걱정했던 것처럼 그녀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네?”
“유리 너머로 서윤이 보면서 웃고 있던데.”
기백의 말에 솜은 마음이 기우뚱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몰래 서윤을 보던 것을 그에게 들킨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기백의 말이 맞았다. 서윤과 서로 이야기를 하고 눈을 맞출 수 있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니터 속 서윤을 보며 좋아하듯 가게 안의 서윤을 바라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익숙...하니까....”
그리고 안전하니까......솜은 뒤엣 말은 마음에 담았다. 누구에게도 할 필요 없는 말이었으니까. 특히나, 아무 상관없는 황기백에게는.
하지만 기백은 솜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 되묻는 대신 그럴 수 있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김서윤이 왜 좋아요?”
기백은 스스로도 무슨 질문이 이래, 하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윤을 향한 솜의 반짝이는 눈빛이 기분 나빴다. 이건 확실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곱창만 쳐 먹고 있는 김서윤은 기백을 더 화나게 했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서윤을 힐끔거리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있는 솜은 기백에게 카운트 펀치였다.
“나는요?”
당연한 얘기지만 내뱉는 순간 기백은 후회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도 않은 맨 정신으로 이 말을 했다는 걸 수습할 수 있는 변명이 있을까 싶었다. 진웅이 말대로 나의 정신은 아직도 초딩을 넘지 못했나, 뜬금없는 자책도 이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서윤이도 좋지만, 나도 뭐 꽤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을....할 수도 있잖아요, 달링이...아니, 서솜씨가....그러니까, 혹시 뭐 내 연기에 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냐, 뭐 그런 거죠. 의견, 그래 관객의 객관적인 평가를 들어 보고 싶은 그런 어떤.......”
말을 하면 할수록 꼬였다. 그리고 눈 앞에는 길 잃은 기백의 말이 어디쯤에서 멈출 것인가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 솜이 있었다.
“없어요? 나에 대한 의견이?”
“......”
“그러니까, 저기, 내가 누군지는 아는 거죠? 알죠?”
“......네.”
“아, 아는구나. 다행이네......”
기백은 왜 자신이 솜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당황하고 작아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솜과 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저기, 저기, 또 저기도.”
금방이라도 몸을 홱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갈 것 같던 솜이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기백의 눈은 저절로 솜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가게 벽에 붙은 소주 광고 포스터, 통신사 대리점 앞의 등신대, 건물 위 대형 전광판의 아웃도어 CF속의 황기백이 있었다.
“황기백씨를 모르는 여자가 있을까요.”
솜은 기백의 질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의 손짓 하나, 미소 하나에 열광하는 여자 팬들이 전 세계에 넘쳐났다. 티비를 틀면 시도 때도 없이 그가 출연한 광고가 나왔고 연예기사 메인에 그에 관한 기사가 오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무리 관심이 없는 서솜이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아무 관심이 없어도 이렇게 물량공세를 하니 모를 수가 없다, 뭐 이런 얘긴가......”
기백은 솜의 친절한 설명에도 점점 기분이 쭈굴쭈굴해졌다. 서윤을 보던 눈빛과는 천지 차이였다. 기백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솜의 표정에는 감정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니 얼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두 눈 뜨고 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뭐 이런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제가 괜히 김서윤 팬님을 곤란하게 해드렸네요.”
기백은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축 쳐져서는 슬리퍼를 찍찍 끌며 가게 입구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니 솜은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쓸 것 같지 않은 이미지의 황기백이 자꾸만 그녀의 말에 꼬투리를 잡는 것도 이상했고,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솜이 그에게 큰 실수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러는지 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데 그거 아세요?”
솜은 기백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갑자기 뒤돌아선 기백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기백 역시 그녀의 시선에 잠깐 당황한 듯 했지만 얼른 말을 이었다.
“나만 알았어요. 나만, 서솜씨가 김서윤 팬인 거 알았다고요. 아-무도 몰랐는데. 나만 알았다고요.”
입술을 삐쭉하며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는 그 찰나의 황기백이 사진처럼 찍혀 서솜의 머리에 저장되어 버렸다. 누가 버튼을 눌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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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5편!
하루에 한 편씩 올리는 것은 오늘까지 입니다.
사건이 느리게 흘러가니 이제야 기백과 서솜이 만났네요. 힛.
6편 부터는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더 빨리 써지면 더 일찍 올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주일은 넘기지 말자, 가 저의 소박한 바람이랄까요.
날씨가 급 겨울이 되어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모두 행복하세욥!!!
첫댓글 ㅋㅋ 잼나네요 아하 달링 서솜에 기분은 꿈에도 그리던 스타를 눈앞에서 보는 소감???
이름을 몰라 달링이라 ㅋㅋ 물어본적도 없고 진웅에 성격 넘 잼나요 ㅎㅎ
댓글 감사해요!!!! 진웅이는 이름은 곰(?)같지만 스윗가이랍니다~^^ 밋밋하게 살기를 바란 솜의 바램은 아마도 끝난듯해요. 기백이의 폭풍 대쉬를 기대하며!!!! 6화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