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하나라도 비어 있어 보였지만 돈이라는 게 뭔지, 없으니 이렇게 서러울 수 가 없었다.
결국 돌아서 나온 네 사람.
“아니, 잠만 잔다는데 아... 내가 돈 생각을 미처 못 했지, 뭐야. 하하하하하.
다른데 찾아보자.”
“다른 데도 똑같을 거야. 새해의 해를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인데.”
“아...누나. 춥다. 두꺼운 옷이라도 더 챙겨올걸. 정말 몸만 왔으니...”
세 사람이 투덜거리는 사이에 다시 발걸음을 옮겨 민박집 아주머니를 찾아온 기찬.
“아주머니, 카드 될까요?”
“카드? 아니 뭐, 요즘 한창 때라서 해놓긴 했는데 될지 모르겠네.”
“한번 해보세요. 식사제공이랑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비용이라면 낼게요.”
“돈이 없다는 녀석들이... 있었구만.”
아주머니가 카드를 긁는 동안, 뒷모습으로도 투덜대는 것이 보이는 세 사람.
“어이쿠, 좀 돈이 많은 집 아들래미 인가벼?”
“대신, 좀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그냥... 아주머니 인심 쓴거 처럼...”
“그럼, 내한테 뭐 오나?”
“홍보할게요. 돌아가서.”
“아이쿠, 아이쿠, 학생. 어쩜 그리도... 아...아이 야들아!!!
추운데 돌아 댕기지 말고 어여와!”
“저..저기 우리 부르는 것 같은데?”
아주머니는 손을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고
기찬은 그저 옆에서 연신 고개 숙일 뿐이었다. 한걸음에 달려오는 세 사람.
“그랴도, 어째 안쓰려서... 방 하나 남았으니 좁더래도 거서 지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형, 뭐 어떻게 한거야? 이런데 능력 있나봐?”
아주머니의 손을 잡으며 폴짝 폴짝 기쁨을 표하는 채경과 기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는 태웅은 뜻밖이라는 듯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찬은 그저 어깨만 들썩여 보였다.
아주머니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
“아, 추워 죽는 줄 알았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불을 죄다 끌어내려 방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이불을 하나씩 몸을 덮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이유가 뭐지?”
“안쓰럽다잖아. 안그럼...”
“우리가 워낙 잘생기고 이쁘다 보니 뭐 자식 같은 의미에서 그런 거 아닌가?”
“네 말에 동감. 잘나긴 했지. 뉘집 자식인지...”
“하하하하. 형도 인정하는 구나!”
“잘났다, 아주. 둘이 똑같애.”
“당연하지. 형이랑 나랑 무슨 관곈데...”
태웅은 마주앉은 기찬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옆에 앉아 어깨동무를 하며
채경에게 보란 듯이 으쓱대었다.
“자자 저녁도 못 먹은 것 같은데 여기 매운탕 끓였으니 먹어봐.”
“감사합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방문을 빼꼼히 열고서 작은 밥상 위에 탕이 끓고 있었고
밥과 잔 반찬까지 아주머니가 안고서 들어와 놓곤 나가셨다.
“이야, 맛있겠다!”
“이럴 때 술이 빠질 수 없지!!!”
어느 사이에 술병까지 놓아주고 나가신 아주머니.
“정말, 친절한 분이셔.”
“맛있게 먹겠습니다!”
“자자! 술잔 따르고~”
태웅이 자진하여 술잔에 차례, 차례 따라 주었고
“뭐라고 해야돼?”
“무지개를 위하여?”
“‘새해를 위하여‘로 해.”
“오~! 좋다, 형. 자, 새해를 위하여!”
“위하여!!!”
그 술잔을 쨍- 위로 부딪혀 원샷을 하는 네 사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하고 따뜻한 밥까지 먹고 거기에 술까지.
마냥, 행복한 네 사람.
.
.
.
“잠이 와?”
기찬. 태웅. 채경. 허륭
가위바위보로 잘 곳을 정해놓고 잠자리에 누운 네 사람.
눈에 보이는 건 허름한 집의 낮은 천장뿐.
“지금 몇 신데?”
“이제 12시....어?”
갑자기 일어선 태웅.
핸드폰을 들여다 본 시계는 정확히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야! 새해야! 뉴 이얼 이라고!!”
“나가자, 민박집이라면 노래방이 없겠어?”
“난 자고 싶은데...”
“아이, 어린 것이 더 활기찰 때에 그러냐...나가자!”
결국 정돈해 놓은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온 네 사람은 밤거리에 본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마다 자지 않고 새해가 온 것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바다에선 폭죽이 한창 이었다.
“우리도 폭죽놀이 하자, 폭죽! 폭죽!”
"그냥, 곁에서 지켜봐.“
바다로 나온 네 사람.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색깔의 폭죽들이 밤하늘에서 터지고 있었다.
“나, 그러고 보니 주머니에 만원 한 장이 있었어”
“짜식, 귀엽긴...”
그저 사람들이 터뜨리는 걸 옆에서 지켜봐야 할 처지에 놓인 상황에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 한 장을 꺼내어 보이며 해맑게 웃어 보이는 허륭.
펑- 펑-
결국 값진 만 원으로 산 폭죽들을 모래사장 옆에 쌓아두고
하나, 하나 불을 지펴 터지는 폭죽을 그저 어린 아이들 마냥 쳐다보는 네 사람.
“이쁘다.”
“우리도 참, 신세 불쌍하냐 뭐 이렇게...”
“너 이렇게 값진 폭죽 봤어? 불만 품기는...”
“내 말은... 하아.... 됐어. 뭔 말이 통하겠냐, 너한테...”
“너 자꾸 나한테 끝까지 반말할거야? 새해도 됐는데?”
“앗! 뜨거, 뜨거... 불꽃이 나한테 튀잖아.”
“누나라고 한번만 해봐. 누나, 누나!”
“니가 무슨 누...에이, 유치하게 그걸 듣고 싶어하냐? 어린애도 아니고...”
“끝까지 이게!!!”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을 들고 도망가는 태웅의 뒤를 쫓으며 달려가는 채경.
태운은 해변가에 가까워져 발목까지 오는 바닷물에 차가워 호들갑을 떨었고
그의 모습에 꺼진 불꽃을 여전히 들고서 채경은 까르르 웃었다.
그런 채경에게 도리어 달려드는 태웅은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겁을 주었다.
“채경이 누나랑 태웅이 형은 꼭 코미디 하는 것 같아.”
모래사장에 앉아 쌓여 있던 폭죽들이 하나씩 줄어가면서
자리에 털썩 앉은 기찬과 허륭.
“좋아하는 게 어디 가겠냐.”
“응?”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 넌 채경이가 싫어?”
“아니, 좋아.”
“내말이 그 말이잖아.”
“아~! 하긴, 누나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정말 순진하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보는 허륭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기찬.
“어이, 너 이거 안보이던 거다? 귀 뚫었어? 이거.. 태웅이 꺼랑 똑같은 거네.”
“아..하하하하.. 태웅이 형도 말 안했구나.”
기찬은 허륭의 옆얼굴을 보다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귀를 보게 되었고
귀볼이 아닌 귀 윗부분에 뚫은 금색의 작은 링이 눈에 띄었다.
“태웅이 형이랑 의형제 맺었어. 그래서 같이 살잖아. 아참, 섭섭해 하지마, 형.”
“섭섭해 하지 않아. 착한 녀석이잖아. 태웅이 자식.”
“그래서 친형 같이 나한테 잘해주니까 너무 고마워...”
“태웅이 녀석이 너 괴롭히면 바로 연락해.
바로 달려가서 태웅이 낀 링 뽀개버릴 테니까.”
“알았어.”
기찬은 자신의 말에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허륭의 목을 살짝 팔로 감쌌다.
추운 날씨에 반쯤 젖어서 돌아오는 채경과 태웅이 보였다.
“감기 걸리면 어쩌냐...”
“걱정마. 난 강철몸이라 안 걸려.”
“아니, 나 말이야. 난 감기에 약한데.”
“끝까지...”
채경은 몸을 웅크려 덜덜덜 떨었고 옆에서 자신의 어깰 감싸면서
같이 떨고 있는 태웅의 귀를 잡아 당겼다.
“아..아아!!! 앗!”
“어? 잠깐만...”
“아, 아퍼, 아퍼..아프다..”
오도방정을 떨며 폴짝 폴짝 뛰는 태웅의 귀를 살짝 잡고서
멀리서 비추는 빛을 이용해 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채경.
“귀고리 한 쪽이 없네?”
“줬으니까 그렇지.”
“다른 쪽은....이건 안 보던 거네?”
다른 쪽 귀를 보던 채경은 밤이라 색깔이 드러나지 않지만
푸른색인 듯해 보이는 귀걸이를 보며 물었다.
“그건... 받은 거야.”
“오호! 이 자식, 이 누님 몰래...”
“그런거 아니야. 아, 추워 추워~! 어서 가자!!”
“어, 어어!! 이거 놔!”
태웅은 그녀에게 붙잡혀 빨개진 귀를 감싸며 몸을 웅크리다가
채경을 번쩍 들어 기찬과 허륭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
.
.
쏴---아. 쏴---아.
가까이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깐 채 그 위에 이불로 돌돌 몸을 감싸 누워 있는 세 사람.
겨울의 물놀이에 반쯤 젖어 덜덜덜 떠는 몸으로 민박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온수로 몸을 녹이고 따뜻한 방에서 자려던 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겠노라고 그 추운 바다 바람을 견뎌 보겠다며
결국 돗자리와 이불들을 꺼내와 모래사장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태웅의 품에서 곤히 잠든 채경은 고개방향을 돌려 누웠고
그런 채경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다 그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는 태웅.
태웅은 그녀를 안은 팔을 더 꽉 끌어안았고 그녀의 볼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채경아...”
자신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채경의 이름을 부르는 태웅.
또 다시 그의 얼굴로 가까이 들이밀어 볼이 아닌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레
대어 보려는 순간, 날아오는 손.
“아이, 씨... 겨울에 왠 모기야...”
“으윽....”
태웅은 혹시나 잠이 깰까 큰 소리로 내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맞은 자신의 입술을
감쌀 뿐이었다.
“일어나봐!”
이미 깨어 있던 기찬은 바다 너머를 바라보다 돌아오더니, 한 사람씩 깨우기 시작했다.
진작에 깨어 있던 태웅이 잠을 자는 채경을 흔들어 깨웠고
기찬이 흔들어 깨우는 통에 이불이란 이불에 휘감겨 허우적대며 일어나는 허륭.
“해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웅은 바다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붉은 색을 띤 해를 보았다.
“해? 어? 진짜 해다.”
“우와~! 멋있다.”
“멋있지.”
모두가 일어나 누구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네 사람.
오늘로 그렇게 새해의 첫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다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려 하자
어느 순간 뛰어 올라 둥근 태양의 모습으로 어두운 하늘을 점점 밝혔다.
“소원 빌어야지.”
해를 바라보다가 손을 모아 눈을 감은 태웅.
그런 그를 보며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일제히 눈을 감았다.
“이야~! 환상적이다!”
“이걸 담아야지!”
“좋아, 좋아!”
외출할 때면 항상 따라오는 디카를 집어 들어 언제 준비를 해 왔는지
지지대를 펼쳐 그 위에 디카를 놓는 기찬.
그리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나란히 선 세 사람의 곁으로 뛰어가 섰다.
디카는 빨간 불을 깜빡 깜빡 거리더니 찰-칵! 사진을 찍었다
각양각색의 포즈를 취하며 그 순간을 즐기는 네 사람.
“뭐라고 빌었어?”
이미 떠 오른 해를 바라보며 돗자리에 앉아 이불을 하나씩 덮은 네 사람.
잠시 동안 바다와 해를 번갈아 보며 감상에 취하던 차에 기찬이 물었다.
“그럼, 형은?”
“난...”
잠시 뜸을 들이는 기찬.
‘어머니... 어머니...
제가 아버질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을 주세요.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계시죠. 이제 시작입니다.
저의 소중한 친구들. 이름이 무지개에요. 성공 할 수 있게 응원해 주세요.
그리고...‘
“소원은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래.”
채경이 한 마디 덧붙이자 이내 질문도 그에 따른 답도
각자가 소망했던 소원들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침묵을 지키며 해를 바라본 채,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제 가족 보살펴 주시고 계시죠? 아버지.
저 성공할 거란 거 아시죠? 아버지는 항성 절 믿으시니까.
끝까지 응원해 줘요. 무지개에요. 저희가 이룬 밴드 이름이요.
꼭 성공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그리고...‘
“자!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프다.”
침묵을 깨고 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이내 해를 등지고 돌아서서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있다는 거 믿지 않습니다만,
정말 계신다면 이 불쌍한 청년 소원하나 들어주시죠.
아버지, 엄마 지켜주십시오. 적으로부터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또 하나, 저의 첫사랑.. 좀 이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무엇보다,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상입니다.
참, 잊을 뻔 했습니다.
그리고....‘
“형! 같이 가...”
둘둘 감싸고 있던 이불을 풀어헤치고 태웅의 뒤를 쫓는 허륭.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해요. 이런 거 오랜만이라 잃고 싶지 않아요.
이 형. 저의 형이 되어주었습니다.
여기 누나 형들. 저의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참, 잊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있어요. 찾고 싶어요. 정말로...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