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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아들 줄 알았던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지난 23일 정부는 위기경보를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으며 대응 체계 대폭 강화를 선포했다. 여러 기업, 학교, 상가는 휴업을 결정했으며 시민들도 외출을 자제, 감염을 주의하고 있다. WHO(세계보건기구)는 “각 국가별로 판데믹(WHO에서 지정한 여섯 개의 전염병 단계 중 최고 단계인 범유행단계)를 대비를 해야한다”고 전했다. 이렇듯 전 세계가 코로나 19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현 상황, 바이러스 전염병을 소재로 했던 영화들도 재조명 받고 있다. 해당 작품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무엇에 집중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까. 여덟 편의 바이러스 소재 영화들을 소개한다.
<감기>진짜 재난은 무능한 국가 기관
<감기>
아마 국내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은 김성수 감독의 <감기>일 것이다. 개봉 당시 약 3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2015년 메르스 바이러스 사태에 이어 이번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영화다. 감염 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의 전례 없는 호흡기 바이러스가 창궐해 패닉에 빠진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살처분하는 현장, 격리소를 벗어나려는 환자들을 학살하는 장면 등 가히 지옥 같은 혼란이 펼쳐진다. 국가 기관의 미숙한 대처 방식도 꼬집었는데, 우리가 바라는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대통령(차인표)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관료들은 문제의식 부재, 편의주의에 찌든 모습이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고통은 배가 되며 무능한 통치야말로 ‘진짜’ 재난임을 보여줬다.
<아웃 브레이크>바이러스 재난 영화의 표본
<아웃 브레이크>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아웃 브레이크>(1995)는 바이러스 재난 영화의 표본이 된 작품이다. 주인공 샘(더스틴 호프만)은 국방부에 소속된 전염병 관리센터 의사다. 그는 아프리카 자이르에서 미국으로 확산된 바이러스를 막으려 하고, 관료들은 모종의 이유로 사건을 덮으려 한다. 영화는 그 팽팽한 줄다리기를 양파 껍질을 까듯 전개하며 긴장감을 높였다. 바이러스가 변종을 일으켜 전염성이 높아지고, 바이러스의 원흉이자 백신이 되는 존재가 밝혀지고, 정부의 흑막이 드러나는 등 극적 사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지금 보면 진부한 설정들이라 할 수 있지만, 생화학 재난 영화의 여러 클리셰를 확립했다.
<컨테이젼>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티
<컨테이젼>
편집의 귀재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은 현재 국내 VOD 시장에서 <감기>를 넘어서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맷 데이먼, 주드 로, 로렌스 피시번, 마리옹 꼬띠아르, 기네스 펠트로, 케이트 윈슬렛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 영화는 여러 인물들을 균등하게 배분하며 각각의 행동과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컨테이젼>이 다시 주목받은 이유는 쟁쟁한 출연진 덕이 아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현실’에 입각한 바이러스 영화를 만들었다. 일례로 여러 바이러스 영화에서 ‘해결책’으로 여겨졌던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고, “이제 해결되는 것 아닌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지만 “백신 개발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실제 바이러스의 백신은 단번에 만들어질 수 없으며, 대부분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대사로 단번에 클리셰를 날린다. 바이러스 사태 진압의 필수 과정인 역학조사를 내세워 리얼리티를 끌어올렸다.
<93 데이즈>영웅을 위한 헌정
<93 데이즈>
가장 엄숙한 바이러스 소재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93 데이즈>는 2014년 나이지리아에서 첫 에볼라 바이러스 환자를 발견하고 확산을 막은 내과의사 아메요 아다데보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처음 발견된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는 근접 국가인 라이베리아의 재무부 관료 패트릭 소여다. 아메요는 그의 증상에 의심을 품고 격리 진료를 주장하지만, 소여는 증상을 속이며 퇴원하려 했다. 이에 라이베리아 대사가 병원 측에 압력을 행사하는 등 바이러스 진압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메요와 동료 의사들의 노력으로 큰 확산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메요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돼 목숨을 잃었다. <93 데이즈>는 존경 어린 시선으로 아메요를 향한 헌정을 담았다.
<더 베이>바이러스가 호러를 만났을 때
<더 베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 영화도 있다. <레인맨>, <벅시> 등을 연출한 배리 레빈슨 감독의 <더 베이>다. 작은 어촌 마을에 정체불명의 벌레가 나타나고, 온몸을 썩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이야기다. 국내 영화로는 같은 해 제작된 <연가시>와 유사한 설정이다. 영화의 배경지가 된 체서피크 해변은 실제로도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곳이며 베리 레빈슨 감독은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려 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경각심을 위해 <더 베이>를 모큐멘터리 호러영화로 만들었다. 호러 장르답게 영화는 중간중간 파운드푸티지(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하위 장르로 1안칭 캠코더로 촬영한 것 같은 영상물)를 통해 공포스러운 현장감을 끌어올리며 강한 몰입감을 자아냈다.
<12 몽키스>바이러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간 여행의 결합
<12 몽키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가 테리 길리엄 감독은 <브라질>(1985) 이후 <12 몽키즈>에서 다시 미래를 배경으로 잡았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류의 99%가 몰살된 2035년, 남은 인류는 생존을 위해 자하를 새로운 터전으로 살아간다. 과학자들은 죄수로 복역 중인 제임스(브루스 윌리스)를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보내 백신을 개발하려 한다. <12 몽키즈>는 바이러스 사태의 과정, 공포를 면밀히 보여주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미래가 짧게 비칠 뿐이다. 거기에 테리 길리엄 감독 특유의 컬트적 요소가 더해져 마치 판타지 세계 같은 공간을 완성됐다. 그러나 과거로 보내진 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설파하는 제임스의 모습은 시간 여행으로 반쯤 미쳐가는 정신과 맞물려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바이러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간 여행을 결합해 장르적인 매력을 끌어올린 신선한 작품이다.
<눈먼자들의 도시>벼랑 끝 인간들의 추악함
<눈먼자들의 도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자들의 도시>도 바이러스가 핵심 소재다. 다만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맹인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시력을 잃어가는 세상 속에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감염자 인척 연기해 격리 병동으로 들어가는 여자(줄리언 무어)의 이야기다. <눈먼자들의 도시>가 담고자 한 것은 리얼한 재난 사태가 아닌, 극단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함과 그 속에서도 존엄을 유지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온갖 고통을 감내하는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성에 대한 사색에 빠져들게 된다. 비록 영화는 소설의 감흥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날선 비판과 지루할 틈 없는 속도감 등은 유지해 작품을 영화로 처음 접한 이들에게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퍼펙트 센스>무엇이 사랑을 유지시켜 주는가
<퍼펙트 센스>
아마 가장 색다른 바이러스 소재의 영화가 아닐까. 마지막은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멜로 영화 <퍼펙트 센스>다. 오감이 차례차례 사라지는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사랑에 빠지는 수잔(에바 그린) 마이클(이완 맥그리거). 그들은 점점 서로의 체취를 맡지 못하고,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남은 감각으로 서로를 느끼려 애쓴다. 그들뿐 아니라 패닉에 빠진 전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퍼펙트 센스>는 멜로 장르의 본질과도 같은 “무엇이 사랑을 유지시켜주는가”라는 질문을 감각의 부재와 연관시켜 참신하게 풀어냈다. 사랑의 필수 조건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지워져가지만, 결국 ‘완벽한 감각’에 다가서는 둘의 모습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글 김진우(뉴미디어팀 기자) 2020-02-28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