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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겟돈 전쟁 >>
1. 종말과 전쟁에 대한 기본적 이해
종말론은 생활에 접목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 책의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다. 종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는데 영혼이 지옥에 간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말 과정에 등장하는 전쟁에 대한 이해 역시 생활과 접목되어 참 신앙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만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종말의 전쟁을 통해서 보지 못한다면 종말론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토라를 들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성경을 들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을 얻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종말의 전쟁에 대한 이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종말과 연결되는 모든 전쟁 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살펴보고 하나님과의 동행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종말과 전쟁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징조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성도들의 환란으로 대표되는데, 그 가운데 전쟁은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평화적인 종말은 없다는 것이 성경의 태도이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예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전쟁이고 종말의 모든 사건들은 전쟁과 연결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주님의 재림이 대환란 속에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재림과 맞물리는 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과 성부 하나님과 사탄과의 마지막 전쟁이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종말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종말과 전쟁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현실은 이미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마비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쟁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규범으로 정해져서 지켜졌던 모든 것들이 깨진다. 전쟁이 시작되면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규범이 깨지고 실정법상의 모든 범죄가 발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전쟁 역시 어느 한쪽의 체제가 전복되는데, 하나님은 패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의 체제가 전복되고 그 체제를 유지했던 모든 것들이 깨어진다. 경천동지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이 우리 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영적 전쟁에서 패할 경우 우리 삶에서 악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작게는 사람의 혈기를 부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국가 간에 대량 학살까지, 우리 생활에서 영적 전쟁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현상들은 다양하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의 다양한 현상 속에서 어떻게 영적인 실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분별하여 종말로 치달으면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실체를 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전쟁은 폭력의 지배가 본질이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성경의 전쟁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과 박해를 동반하여 성도들의 환란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종말의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도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의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환란 속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장면이다.(계 20:9, 각주참조) 성경에 기록된 전쟁은 항상 하나님의 주도하에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안겨주시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백성들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들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과 환란을 통해서 인식해야 할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환란 가운데 보호되는 백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이다.
종말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영생을 얻는 요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했을 때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눅 13:28, 각주참조)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고 이들은 영생을 얻는 천국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리도 인간의 지략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곧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리자가 된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1-1. 성경에 기록된 전쟁에 대한 이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맥脈을 살펴보면 신앙생활이란 끊임없는 선과 악의 싸움, 즉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라.”(엡 6:12, 각주참조)고 말한다. 영적 피조물인 사탄과 육적 피조물인 인간의 싸움은 인간이 사탄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육체적인 한계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약점을 안고 사탄을 상대로 싸우는 싸움에서는 인간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의 승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만 가능하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정복하면서 싸우는 전쟁은 하나님이 그 주체일 때 승리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패배하였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삼상 17:47, 각주참조) 이 원리는 마지막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믿는 자들은 이 원리를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주체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기획은 하늘에서 하고 결과는 땅에서 벌어지게 하는 그 실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사탄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모든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힘을 실어주실 때는 전쟁이 승리로 끝났고 하나님께서 방관하실 때는 패배로 끝났다. 모세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여 손을 들었을 때는 이스라엘군이 이겼고 모세의 손이 내려갔을 때는 아말렉군이 이겼다는 것이 이것을 방증한다.(출 17:11, 각주참조) 이스라엘군이 창 한 자루, 방패 하나 없을 때(판 5:8, 각주참조) 가나안의 야빈왕은 구백 대의 철 병거를 가지고 있는 막강한 전투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판 4:13, 각주참조) 그들이 노략질을 하였을 때 들판은 비어 있었고 여행자들은 그들을 피해서 샛길로 다녔다.(판 5:6~7, 각주참조) 촌락의 거민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이스라엘군은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들의 핍박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그들을 므깃도(아마겟돈)에 결집시켜 전쟁을(판 5:19, 각주참조) 승리로 이끄신다.(판 5:2, 각주참조) 성경의 모든 전쟁은 이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창 한 자루, 방패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을 이겼다.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1-2.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에 대한 이해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전쟁은 성도들의 환란을 몰고 오고 성도들의 환란은 주님의 재림을 불러와서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과 주님의 재림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환란 중에 성도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마 24:9~31, 外 각주참조)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악이 차야만 오신다. 성도들의 환란이 극에 달하고 적그리스도의 우상화 작업이 하늘에서 묵인할 수 없을 만큼 온 세상에 충만해질 때, 그리고 성도들의 신음소리가 극에 달할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이다.(계 6:9~11, 각주참조) 핍박과 환란으로 성도들이 죽을 만큼 죽었을 때, 죽임 당한 숫자가 채워졌을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이다.
전쟁과 성도들의 환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도들은 수치와 모욕과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의 악을 하늘에서 묵인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오셔서 환란으로부터 구해지는 것이다. 성도들이 환란을 피하여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2. 요한계시록의 다른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전쟁들은 종말의 전쟁이다. 종말의 전쟁을 살피는 이유는 이 전쟁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 9장과 11장, 13장에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성도의 핍박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요한 계시록 9장의 전쟁이나 요한계시록 11장의 전쟁, 요한계시록 13장의 전쟁은 모두 아마겟돈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이라는 것은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는 징표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전쟁들의 개략을 살펴보고 이 전쟁들에 대한 고찰을 묶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2-1. 요한계시록 9장의 전쟁
요한계시록 9장의 전쟁은 유프라테스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리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고 그 연, 월, 일, 시를 위하여 예비해 둔 자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계 9:14~15, 각주참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한 고대 강국은 앗수르, 메데, 페르시아, 바벨론인데 성경에 언급된 네 천사의 해방은 이 강국들의 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고 메데와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요한계시록 9장에 기록된 전쟁은 중동전쟁을 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는데 이것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삼분의 일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의 삼분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동태에 관해서는 “자신의 행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귀신들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한다.”(계 9:20~21, 각주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의 특징은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는 것, 즉 많은 희생자가 따른다는 것과 연, 월, 일, 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예비 된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목적인지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그러나 이 전쟁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이것은 곧 마지막 때의 어떤 전쟁을 위한 전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마지막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기 때문에 아마겟돈 전쟁, 곧 마지막 때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예표로서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는 지독한 살육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 살육의 광란은 믿는 자들의 핍박으로 이어져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 있었던 열 번의 박해와 같이 성도들을 죽여서 그 수가 가득 채워질 것이다.(계 6:11, 각주참조) 그리고 성도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에 닿으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이 극에 달한다는 것이다. 7년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환란으로부터 성도들이 보호된다는 세대주의의 종말론은 성경과 무관하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2-2. 요한계시록 11장의 전쟁
요한계시록 11에 기록된 전쟁은 9장에 기록된 전쟁보다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흔두 달 동안 거룩한 도성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다는 기록이 나오고,(계 11:2, 각주참조) 그 후에 두 증인이 1260일을 예언하고(계 11:3, 각주참조) 이들이 증거를 마칠 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두 증인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이기고 또 죽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계 11:7, 각주참조) 그리고 그들의 죽은 몸들이 도성의 거리에 놓이는데 그곳을 영적으로는 소돔과 이집트라 부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계 11:8, 각주참조)
이 전쟁은 거룩한 도성, 즉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마흔 두 달1260일 동안 이방인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과 하나님의 두 증인, 즉 선지자들은 1260일 동안 예언을 하고 하나님을 대변하며 활동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일을 빌미로 하여 무저갱에서 짐승이 올라와 두 증인들과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죽은 시체들은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갖다 놓고 사흘 반 동안 구경거리가 되게 하고 장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계 11:9, 각주참조) 그리고 사흘 반 후에 하나님께서 그 죽은 자들을 살리시어 일어나게 하시고, 그 다음 그들이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계11:21, 각주참조)
이 전쟁의 특징은 주님의 재림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어 일어나게 하신 것은 곧 부활을 의미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휴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부활과 휴거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있게 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지명이다. 예루살렘과 골고다 언덕의 지명이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항상 요한계시록의 전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전쟁의 중심에 선 이스라엘은 온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충만한 수가 채워졌을 때 주님의 재림이 있게 되고 천년왕국을 거쳐 백보좌 심판이 시작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3. 요한계시록 13장의 전쟁
요한계시록 13장의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 임박해서 있게 되는 구체적인 사회적 현상들에 관한 기록으로 이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과 666 짐승의 표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지면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미혹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을 미혹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적들을 행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마 24:24, 각주참조)
이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들은 미혹될 수밖에 없는 기적과 이적들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3장 3절의 내용을 보면 “머리에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여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자를 눈앞에서 본다면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을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엘리야와 같이 불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한다면 어떻겠는가?(계 13:13, 각주참조) 이런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따르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이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해무리를 일으키고 구름의 모양을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키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선지자의 이적과 기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매매를 위한 짐승의 표에 관한 것이다.(계 13:16~17, 각주참조) 666짐승의 표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비롯하여 종말을 거론하는 자들의 입에서 한 번은 거론되는 내용이다. 한때는 바코드가 666표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베리칩이 666표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하였다. 어느 것이 666 짐의 표인지는 아직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의 내용대로 매매를 위해서 어떤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게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무엇이 666 짐승의 표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666 짐승의 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거짓 선지자의 이적과 666 짐승의 표가 현실화되면 주님의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라는 것을 인식하면 될 것이다.
3.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이해
16 그가 그들을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모으더라. (계 16:16, 한글킹)
주님의 재림과 맞물려 발생하는 사건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기록은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 나오는데, 그 전에 13절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계 13:13-14, 각주참조)
그 영들이 하나님과의 전쟁을 위해서 아마겟돈이라는 지역으로 세상의 왕들을 모은다. 이 전쟁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은 스가랴 13장과 14장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겟돈 전쟁의 주체는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이다.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 아마겟돈 전쟁의 목적은 용이라 불리는 사탄과(계 20:2, 각주참조) 짐승이라고 부르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잡아서(계 19:20, 각주참조) 무저갱에 넣고(계 20:3, 각주참조) 사탄의 유혹이 없는 천년왕국을 이루는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 후에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때 첫째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들과 환란 가운데 살아남아 휴거에 동참하는 성도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구원의 요소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만이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다.
3-1. 아마겟돈Armageddon이라는 장소
성경은 아마겟돈이라는 곳으로 왕들을 모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 “아마겟돈Armageddon”은 히브리어로 “할 므깃도Har-Meggiddo”로서(각주참조) 구약성경에 기록된 므깃도라는 지역의 산을 지명한 것인데,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최고의 요새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곳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므깃도의 위치는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을 펼쳤던 갈멜산 아래에 있는 이즈르엘 평야에 있는데 갈멜산으로부터 6마일, 나사렛으로부터 11마일 떨어져 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Smith's Bible Dictionary와(각주참조) Holman Illustrated Bible Dictionary에서(각주참조) 설명하는 므깃도의 내용을 각주를 참고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3-2.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성경의 기록
요한 계시록에서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설명은 16장 12절부터 시작된다. 아마겟돈 전쟁을 도모하는 실체는 요한계시록 16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나오는데 하나는 용의 입에서, 또 하나는 짐승의 입에서, 마지막은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용은 사탄을 가리키고 짐승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세상의 권력자를 가리킨다.(각주참조)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는 거짓 종교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각주참조) 여기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기독교의 탈을 쓰고 양들을 속여 온 가짜 기독교, 거짓신앙의 목사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본래의 에덴동산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 후에 도래하는 천년왕국은 본래의 에덴동산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아마겟돈 전쟁은 에덴동산을 파괴했던 사탄을 무저갱에 감금시키고 사탄의 방해가 없는 본래 모습의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사탄과 사탄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켜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째 부활에 동참한 자들과 휴거된 자들과 함께 통치를 하시기 때문에 아마겟돈 전쟁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즉, 전쟁의 주체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곡과 마곡의 전쟁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사탄이 없는 천년왕국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다. 사탄의 모든 세력을 무저갱에 가두는 것이 이 아마겟돈 전쟁의 목적이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의 개요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마겟돈 전쟁의 시작이다.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징조는 요한게시록 16장 12절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특히 유프라테스 강江의(각주참조) 강물이 마른다는 기록을 주시해야 한다.(계 16:12, 각주참조) 아마겟돈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징조는 스가랴 12장 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천하만국이 이스라엘을 치려 모이리라.”는 구절이 그것이다.(슼 12:3, 外 각주참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현재 유프라테스 강의 수량水量이 줄고 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국가들의 연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이 마르고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해서 국가 간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아마겟돈 전쟁의 시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지명은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하였다. 성경의 기록은 사실이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도 사실이었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도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기록이 모두 상징이라면 성경은 허구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고 동행하지 못하는 거짓신앙에서는 성경의 기록이 상징으로 보일지 몰라도 성경의 기록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3-3. 아마겟돈 전쟁의 시작과 끝
아마겟돈 전쟁은 주님의 재림으로 시작된다.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의 환란이 극에 달할 때 있게 되는데,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죽이고(계 13:15, 각주참조) 짐승의 숫자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사고파는 것을 금하는 등(계13:17-18, 각주참조) 핍박이 극에 달하여 성도들의 신음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출 6:5, 각주참조) 있게 된다.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그들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잠깐만 좀 더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계 6:9, 각주참조)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을 향한 사탄의 핍박이 극에 달하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면서 사탄이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 때, 저들의 패악이 온 세상에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고 계실 수 없을 때 있게 된다.
이때 주님의 재림을 보고 짐승과 땅의 왕들이 주님의 군대에 대적하려고 다함께 모여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계19:19, 각주참조) 그 결과, 짐승도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잡혀 이 둘은 유황불에 던져지고(계 19:20, 각주참조) 사탄인 옛 뱀을 잡아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면서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회심이다. 바울 사도는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할 것이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롬 11:26, 각주참조)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즉 주님이 재림하실 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심을 끝으로 구원의 문은 닫힌다. 천년왕국을 지나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과 지옥, 즉 영생과 영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략)
[회복시리즈 09. 성경적 종말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자세한 내용은 책과 카페(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에서 강의를 참조하세요. 회복시리즈와 신앙의 강요는 반드시 모두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헝클어져 가닥을 추리지 못했던,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 (http://cafe.daum.net/onlyjesus1924) 카페에서 강의영상을 꼭 보세요.
간증들도 읽어 보시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주시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성경 속의 인물들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이젠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영혼구원의 문제를 내일로 미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책은 아래에서 구매하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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