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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의 지행합일론
이장희 추천 0 조회 69 16.01.03 17: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하곡 정제두의 지행합일론

 

 

정 낙 찬*

 

 

<목 차>

Ⅰ. 서론
Ⅱ. 인간관
Ⅲ. 지행합일론

Ⅳ. 결언: 지행합일론의 특징
참고문헌
Abstract

 

Ⅰ. 서론

 

인간은 삶의 과정에서 가치판단이나 행위의 선택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위해서 보편타당한 지식이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주관적 편견과 독단에 따라 행동하거나 맹목적 실천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관념 또는 앎과 행동의 분열, 대립 등 심각한 괴리 현상을 체험한다. 그래서 지와 행의 문제는 교육이론에서 매우 주요한 영역이다. 이에 조선시대 최고의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1649-1736)의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에 주목하였다.

 

하곡 정제두는 조선후기의 시대상과 교육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와 행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는 왜란과 호란이후 조선조는 사회 질서의 정립을 위해예설 (禮說))과 복제설(服制說) 등으로 표현된 정주(程朱)적 예교주의(禮敎主義)의 통제가 강화되고, 예학의 발전이 두드려졌다. 또한 윤백호(尹白湖)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을 받다가 결국은 처형되는 주자학 중심의 사상적 획일화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윤남한, 1982:202). 한편 16세기 중엽부터 전개된 당쟁이 18세기에 들어와서 극단적 정치보복으로 드러나 신임사화(辛壬士禍1721-22)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18세기에 들어와서 상공업적 분위기는 지주 중심의 사회를 동요시켰고, 그에 따라 주자학의 사회적 권위도 상실되어 갔으며, 정치적으로 붕당정치의 원리가 깨어지고 일당 전제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사회, 정치 및 사상적 상황에서 정제두는 당시의 쟁론이 의리에 있지 않고 또 시비를 따져 공론(公論)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세(聲勢)를 겨루어 공론을 정하는 폐단을 비판하였다(「하곡집」권1, 서, 상
박남계서 갑자). 또한 파당의 분영과 대립에 의한 이기적 편협성(「하곡집」권10, 연보, 술신), 예의 및 의리의 고정화와 형식주의(「하곡집」권1,서, 상박남계서 경신), 염치와 의리를 도외시하는 출세주의와 공명(功名) 사리주의(私利主義)( 「하곡집」권3 서, 답이백상서), 실심(實心)을 결여한 지식과 행동 등을 우려하는 우환의식(憂患意識)에서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하곡집」권7, 잡저. 권10, 연보 참조).

 

정제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인간 본래의 참모습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실심으로 실리를 실천했던 인물”로(「하곡집」권11, 제문, 노술찬) 문인들에 의해평가되듯이 , 그는 진실한 마음에 바탕을 둔 참다운 리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인간의 실천적 앎에 대한 온전한 주체적 자각과 이러한 앎을 구체적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구현하는하고자 했다.

그는 참다운 인간이란 앎과 실천의 주체이며, 그 안에서 앎과 실천이 합일됨을 주장했다. 이러한 합일은 단지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하곡 정제두의 지행합일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행합일론의 기초가 되는 인간관에서는 성정합일론과 사단칠정설, 지행합일론에서는 지의 의미와 지행합일론을 살펴보고, 결언에서는 지행합일론의 특징을 도출하고자 한다.

 

* 영남대학교 교수이며,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교육사상과 동양교육사상 특히 유가교육사상이다.

 

 

Ⅱ 인간관

 

1. 성정합일론

 

정제두는 마음의 본체인 생리(生理)를 양지(良知)로 표현함으로써 왕양명(王陽明)의 양지설(良知說))을 대폭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사람의 생리(生理)속에는 밝게 깨닫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두루 잘통해서 어둡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불쌍히 여길 줄 알고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할 줄 알며 사양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덕으로서, 이른바 양지라 하고 또한 인(仁)이라고도 한다(「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정제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간의 생도(生道)이며 양지는 그 측은지심의 본체가 된다고 하면서, 그 전체(全體)의 덕으로 말하면 인이라하고 그 본체(本體)의 밝음으로 말하면 양지라고 하지만 인과 양지는 결국 하나라고 말하였다. 왕양명의 양지설을 대폭 수용하여 그는 바로 이러한 전제에서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곧 생리와 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제두는 인간의 천부적인 양지 즉 생리는 사물의 리와는 달리 생신(生神) 즉 영명한 존재로서 본체 스스로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본체인 생리가 주체가 되어 능동적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하곡집」권8, 존언상, 생리허세설). 그래서 그는 생리를 도적적 자율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밝은 마음의 본체인 생리는 항상 생생(生生)하여 사물이 비록 아직 감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항상 활발하고 혼전(混全)하여 항상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은 영명한 존재라고 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생리허세설).

생리 즉 참된 본체는 항상 확연(廓然)하고 크게 공정하여 지극히 고요하여 비록 하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적연(寂然)하여 아직 발동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감통(感通)하는 것은 끝이 없다(「하곡집」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고 하여, 생리에는 약동하는 생명성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생리는 생명성을 지니고 약동하는 인간 삶의 주체가 됨은 물론 인간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도덕적 원천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제두의 리기합일론의 특성은 리와 기가 항시 겸존(兼存)·병행(竝行)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게 생리설을 제기하여 리를 주체 즉 우월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 그는 리와 기를 구분하고 이원화하여 리와 기를 본체와 현상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으나, 기의 본체를 리라 하고 마음의 본체를 성(性)으로 규정하여(「하곡집」권9, 존언중), 리를 절대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어 특이한 리기론과 심성론을 주장한다. 물론 그의 근본 문제는 리가 마음의 리와 사물의 리로 구분된다는 점에 있다.

사물의 리와 구별되는 마음의 리는 본래 허무하고 적연한 것이기 때문에 항시 고요하여 어떠한 체(體)가 없는 것이나 그 실체가 바로 생리(生理)인 것이다. 그런데 생리 그것이 바로 심성의 근원이 되는 본체 즉 천명(天命)이며, 공맹(孔孟)유학의 근본이 되는 인(仁)이 되기도 한다(「하곡집」권9, 존언중).

 

물론 주자학의 성즉리설(性卽理說)과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주자가 마음 밖에 사물에 나아가 그 리를 궁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데에 반해 정제두는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근거로 사람을 떠나서는 리를 말할 수 없고 마음을 떠나서는 대본(大本)을 말할 수 없다고 한 점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주자학에서 말하는 마음을 벗어난 외물( 外物)의 리는 마치 마른 나무의 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대본이 될 수 없고, 또한 잠들어 고요할 때의 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대체(大體)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정제두의 생리설을 근거로 한 인성론(人性論)은 맹자의 이른바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호연지기의 근원은 본래 리와 기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정제두는 호연지기의 기란 바로 도의(道義)에서 나온 기(氣)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리(義理)가 발한 것이 바로 의리의 기이기 때문에 혈기(血氣)를 떠나 따로 존재하는 별도의 의리(義理)가 없다고 보았다(「하곡집」권9, 존언중). 따라서 의리와 혈기는 일원적 체계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생(生)의 리(理)’는 ‘성(性)’이자 ‘인심(人心)의 생리(生理)’이며, ‘생질(生質)의 리(理)’는 곧 ‘생(生)의 질(質)’이라고 하여(「하곡집」권15, 맹자설, 생지위성장해) 리기합일론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에 심성론에 있어서도 리기합일론에 철학적 이론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성과 정을 논함에 있어서도 성정합일론의 이론체계를 수립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 생리설에 근거한 리기합일론적 이론체계는 인간과 초목(草木)·금수(禽獸)에 이르기까지 공통성을 띠고 있다고 보는 생기(生氣)의 문제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문제이다.

정제두는 인간뿐만 아니라 초목과 금수 또한 생기가 충만하여 생생(生生)의 측은(惻隱)과 통철(洞徹)함을 지니고 있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출척측은(??惻隱)한 마음이 발동하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 초목과 금수는 영명한 체와 밝은 덕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발동하는 출척측은한 마음과 같은 것은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하곡집」권1, 서, 답민언휘서).

인간과 다른 동·식물이 모두 생기(生氣)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띠고 있으나, 인간과 달리 동·식물에게는 영명한 본체 즉 생리가 없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영명하고 통철하여 능히 출척측은한 마음을 발동할 수 있는 생리를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정제두는 생리를 근거로 한 생기, 즉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식물과는 달리 생기와 정감(情感)의 발단을 혼용하고 이를 마음의 선후 문제로 보아서 성과 정으로 순서를 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폐단이라고 지적함으로써(「하곡집」권1, 서, 답민언휘서), 간접적으로 주자학의 성정이원론을 비판하고 있다.

본래 주자학의 리기론에서는 본체인 리(理)에 의해기 (氣)가 생성되어 현상적으로는 기만이 작용한다고 하는 ‘리선기후(理先氣後)’를 주장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심성론에 있어서도 동(動)과 정(靜)을 구분하여 마음의 고요한 때를 리로서의 성(性)으로 규정하고 마음이 움직일 때를 기로서의 정(情)으로 규정함으로써 성정을 체용(體用)의 시간적 선후관계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정제두의 생리설에 있어 리와 기는 겸존·병행하는 합일적 관계로서 리는 본체임과 동시에 작용이 된다. 이러한 리기합일론을 바탕으로 그는 측은·수오(羞惡)·시비와 같은 마음의 정은 인의예지(仁義禮智) 즉 성의 덕이 발한 것이라고 본다.

결국 정이란 마음의 성리(性理) 즉 생리(生理)가 전체적으로 충만해있어 본체인 생리가 발용·유행하는 것이라 하여(「하곡집」권15, 맹자설, 사단장해)성정합일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리기와 성정을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는 주자학의 리기이원론은 물론 성정이원론과도 대비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동(動)과 정(靜)을 구분하여 고요할 때(靜時)를 리(理)로, 움직일 때(動時)를 기(氣)로 규정하는 주자학에서는 심성론에 있어서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구분한다. 그래서 도심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고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긴다고 보아 인심과 도심의 근원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이심설(二心說)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정제두는 주자학과 달리 리는 고요할 때에만 있다가 움직일 때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기 또한 고요할 때에는 없다가 움직일 때에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리와 기는 동정(動靜)에 구애됨 없이 항상 합일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

그래서 형기(形氣)와 성명(性命)을 소체(小體)와 대체(大體)로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체와 소체 모두 리와 기를 함께 갖추고 있으므로 형기를 인심이라 하고 도심을 성명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기와 리로 나눌 수 없다고 하였다(「하곡집」권9, 존언하).

그는 오히려 동과 정을 단지 마음의 나타남과 숨음, 고요함과 느낌의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의 기가 굽혔다 폈다 하는 음양(陰陽)이 되고 하나의 리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동정(動靜)이 되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 어떤 상태에서든 리와 기는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항상 합일된 존재라고 보았다(「하곡집」권9, 존언중).

 

성과 정은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리와 기가 항상 합일되어 있다. 즉 리와 기가 합일된 은(隱), 미(微), 적(寂)의 상태인 것이다. 단지 정의 경우, 즉 기가 현상화 과정에서 동할 경우 악(惡)으로 변질되어 불합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비록 기가 동하여 악으로 변하게 되는 병리현상이 생기게 된다고 하더라도 리 없는 기만 홀로 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리와 기는 항상 합일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가 동하여 리를 가리는 경우에는 ‘생리生理)’ 즉 영명(靈明)하고 명덕(明德)한 주체가 제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불합리한 병리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생리는 언제나 리와 기가 합일
되어 서로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리가 도외시되어 주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면 유독 기가 주재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기가 정상의 궤도를 잃은 병리현상이라 하며, 리의 체(體)가 상실된 비정상의 현상이라고 하였다(「하곡집」권 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병리현상은 바로 리가 무시된 상태에서 기가 동한 현상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가 무시된 기의 작용이라고하여 리가 없어졌거나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리의 체를 잃어버린 것에 불과하며, 성과 정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리와 기가 합일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리와 기는 항시 하나인 것이라서 결국은 두개가 하나의 리인 것이며, 기인 것이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만일 생리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 성의 악과 마음의 사특함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 리가 체를 얻지 못하여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현상일 뿐이다.

리와 기는 합일되어 있지만 생리 즉 리의 체가 제 기능을 잃어버려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경우를 일러 기라 칭하게 되기 때문에, 이른바 병근의 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리의 체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리와 기는 합일되어 있어 나누어 질 수 없다. 이처럼 정상의 궤도에서는 언제나 특별히 기의 독존(獨存)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하곡집」권9, 존언중).

 

다시 말해서 정제두의 리기합일론은 리와 기를 대등한 입장에서 보는 리기겸존병존설(理氣兼存竝存說)이지만, 생리를 근거로 하여 리를 기의 본체로 파악하였다. 즉 리의 존재를 위시한 리기합일론에 철학적 이론 근거를 두고, 심성론에서 실천도덕(道義)이 지(志)에서 나온 것이야말로 진실로 천리(天理)이고, 형기(形氣)가 지(志)에서 말미암은 것 또한 천리라고 규정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정설). 따라서 성명에 근원한 것이든 그와 대립된 형기에서 발생한 것이든, 성명이나 형기에 구애됨이 없이 합리적인 경우에는 모두 다 천리의 구현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정제두는 심즉리(心卽理)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자애측달(慈愛惻?)의 마음’과 ‘수오염치(羞惡廉恥)의 마음’, ‘외경엄장(畏敬嚴莊)의 마음’, 문리(文理)를 구별하는 마음' 등이 모두 본원으로서 살아 있는 육신의 명근(命根)위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곧 성(性)의 덕이자 리라고 하였다(「하곡집」권9, 존언중). 그래서 마음이 곧 리가 되는 심리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주자학의 이심설을 비판하였다.

 

"성체(性體)로 말미암아 도심(道心)에서 발한다면 도(道)를 아는 것이 없겠지만, 만약에 인위(人爲)를 섞고 성체(性體)에 말미암지 않는다면 이것은 또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며 간사하고 아첨하여서 곧 거짓된 것일 뿐이니 이것을 또한 인심(人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둘(인심과 도심)은 모두 경중(輕重)이 있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있으니, 모두가 인심과 도심이 있다면 이것으로써 천리와 인욕을 구별할 수는 없다. 형기(形氣)에 속한 것을 모두 인심이라 할 수 없고 예의(禮義)의 속한 것을 모두 천리라고 할 수 없다(「하곡집」권9, 존언중)."

 

이것은 곧 근본적으로 도심은 성명에만 근원하고 인심은 형기에서만 발생하여 도심과 인심이 공존한다고 보는 주자학에서의 이심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제두는 심성론에서 성의 덕(德)과 성의 질(質)에 대한 이론을 수립해나가는 데, 성의 덕은 본이 되고 성의 질은 말이 되어야 한다고 봄으로써 성과 정을 본말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과 태어난 이후로 구분하거나 정(靜)과 동(動)으로 구분하여 태어나기 이전이나 정(靜)한 때를 성(性)이라 이르고 형기(形氣)를 부여 받은 이후나 동한 때를 정(情)으로 구분함으로써 성과 정을 시간적 선후관계로 구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하곡집」권9, 존언중).

따라서 그의 성정론은 체용론보다는 본말론의 이론체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는 그 본이 있고 말이 있는데 그 성의 덕은 곧 원두처가 되는 것이어서 사실상 그 본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
였기 때문이다(「하곡집」권9, 존언중).

 

성은 마치 거울과 같다고 주장하는 정제두는 거울이란 본래 상대의 움직임을 잘 반영하여 머물러 있지 않아 사물이 접해 오면 사물에 잘 응하고 사물이 떠나면 공(空)으로 돌아갈 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하곡집」권9, 존언중). 그렇다면 성은 본래 허(虛)하면서도 오직 영명(靈明)한 것인데 악은 도대체 어디서 생기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리기론에서 담일(湛一)하고 청명(淸明)한 본체와 유행하는 적의(適宜) 타당한 작용은 리와 기가 합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그리고 본체가 작용되는 현상 세계를 리와 기의 합일로 파악하였다면, 리와 기가 합일되어 있는 정상의 궤도에서는 악이 발생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병근(病根)의 기(氣)에 의해서 생리 즉 성이 은폐될 때에 악이 생기게 된다고 보았다(「하곡집」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그러나 기가 동하는 과정에 악으로 변질되어 불합리한 현상으로 노출되는 순간이라고 해서 리(성)가 없어지거나 잠시라도 쉬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가 동하여 리를 가리는 까닭에 리 즉 생리가 그 소융(昭融)하고 투철하며 주장하는 일과 발휘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하곡집」 권8, 존언상, 태극주정중용미발설). 그래서 성(리)과 정(기)은 체와 융의 관계가 아니라 본과 말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는 리기합일론을 근거로 하는 성정합일론이 성립하게 된다.

 

정제두는 “정(靜)은 동(動)의 체(體)가 되고, 성(性)은 정(情)의 뿌리가 되며, 성은 형(形)의 주가 되고, 리(理)는 기(氣)의 근원이 되니, 기 또한 리고, 리 또한 기이며, 성 또한 정(情)이며, 정 또한 성이다”(「하곡집」권9, 존언중)라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리와 기를 합일된 존재로 나눌 수 없는 논리에서 동(動)과 정(靜)을 나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性)과 정(情) 또한 나눌 수 없는 합일한 존재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성정합일론에서도 리기가 합일된 정상의 상태에서 동정의 관계를 한갓 굴신(屈伸)으로 규정하여 현(顯)·미(微)와 적(寂)·감(感)의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리와 기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합일된 존재이다. 다만 동의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리기합일(理氣合一)의 정상궤도를 꿰고 기가 리의 주제 기능을 벗어나서 비정상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볼 뿐이다.

 

2. 사단칠정설

 

정제두의 사단칠정설은 하곡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리기합일론에 근거를 둔 성정합일론의 이론형식에 따라 전개된다. 본래 리기이원론에 근거를 둔 주자학파의 이론형식은 사단과 칠정을 엄밀히 구분하여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마치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을 대립시켜 도심과 인심을 이질적 존재로 구분하였듯이, 사단과 칠정을 근본적으로 확연히 구분하여 그 근원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기합일론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성정합일론을 제시하는 그는 사단도 성(性)이며 칠정 또한 성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여(「하곡집」 권9, 존언하), 사단과 칠정을 엄밀히 나누는 주자학적 입장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단지 각기 그 이름을 달리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정에서 발하는 것으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성(性)의 정(情)이며,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는 정(情)의 성(性)이 된다고 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그래서 그는 성정합일론에서 성정을 본말(本末)관계로 논하였던 것과 같이 사단과 칠정 또한 본말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성정합일론에서 정제두는 악의 현상이 발생하는 불합리한 경우에 대해 비록 리와 기가 항시 합일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발하는 과정에서 기가 리의 체를 잃게 되어 기라 이르게 되면서 불합리한 병리현상으로 전락되어 악을 유발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단칠정설 또한 리기론의 논리구조와 같은 이론체계에 의해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희노애락이 기를 따르는 것은 포악하기가 쉬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곧 사욕(私浴)의 객기(客氣)인 것이다. 측은·수오가 리라고 하는 것은 은미하기가 쉬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본심(本心)의 천리(天理)인 것이다.

그러므로 희노애락이 리가 되는 것은 그 천리가 또한 측은과 다를 것이 없고, 측은·수오가 기를 동(動)하는 것은 그 객기가 또한 희노(喜怒)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정제두는 주자학에서 리기이원론에 근거하여 사단은 성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보는 견해는 곧 사단이 리가 되고 칠정은 기가 되어 사단과 칠정이 각각 그 발하는 바가 다르게 된다고 하여 이것을 문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단과 칠정은 순수한 것을 가지고 말하되 리가 기에 섞인 것을 이르는 것이지 리와 기를 구별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만일 리기를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성(性) 가운데 순수한 것을 칠정이라 하지만 기 또한 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칠정이 리에 순수하다고 한다면 이 또한 사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를 따르게 된다면 이 또한 칠정이 기를 따르는 것일 뿐이니 사단에도 기가 있고 칠정에도 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리기이원론에 근거해서 사단을 오직 리에만 전속시키고 칠정을 기에만 전속시키는 것은 사단과 칠정을 완전히 이원화시켜서 그 둘의 근원을 각각 다른 데로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은 결국 사단과 칠정이 두 개의 정(情)이 되고 마는 모순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성(性)은 형체의 근본이 되고 리는 기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이미 이것이 천리라면 근원이나 말단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리이기 때문에 그 리는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이 천리가 되지 못한다면 그 근원이나 끝이나 모두가 기일 뿐 리가 기가 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하곡집」권9, 존언하)."

 

 

정제두는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여 리와 기에 분속시키거나 성과 정을 구분하여 리와 기로 분별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문제를 리와 기로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모순이 된다고 비난하였다. 그래서 사단칠정설의 이론체계도 리기합일론에서의 같은 논리에서 리가 주체가 된 경우는 사단과 칠정 모두가 합리적인 것이 되고 만일 리의 주체가 상실되어 기의 동(動)에 이끌리게 되면 사단과 칠정 또한 전락되어 병리현상을 유발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단칠정설의 이론체계뿐만 아니라 정제두가 전개하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의 논리형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그 중 동(動)한 것에 대해서 말한다면, 칠정은 인심이요, 사단은 도심이며, 형기는 인심이요, 도의는 도심이며, 운용은 인심이요 주재(主宰)는 도심이다. 그러나 자세히 나누어서 말한다면, 칠정과 형기는 진실로 인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형기와 칠정의 발하는 것이 저절로 도(道)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형기와 칠정을 오로지 인심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단과 예의(禮義)는 진실로 도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사단과 예의 가운데에 또한 인심이 섞인 것이 있다면 예의와 사단에도 또한 인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볼 때, 정제두는 칠정은 인심이며 사단은 도심에 해당한다고 하는 주자학파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인심과 도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리 또한 기며 기 또한 리”(「하곡집」 권 9, 존언하)라고 하는 리기합일론에 근거하여 인심과 도심은 리기로 나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심을 리(성명)에, 인심을 기(형기)에 각각 분속시키고 있는 주자학적 입장에 반대하였다.

 

나아가 정제두는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성정의 문제와 연계하여 '중용'에 나오는 중화(中和)의 문제와 논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비록 희노애락의 정이라 하더라도 그 본체가 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기에 움직이지 않으며 순수하고 지극히 올바른 것을 가지고 말하면 이른바 미 '발지중(未發之中)'이라 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여기서 '미발지중'이란, 발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연하여 부동(不動)한 본체를 뜻한다. 반면 희노애락의 정은 그 용(用)을 절차에 합당하게 하고 리에 알맞게 하는 것과 그것이 각각 마땅한 것을 얻지 않음이 없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른바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는 것'(發而中節之和)이라고 보았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그런데 여기서도 ‘발의 화’란 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가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즉 ‘미발지중’은 순수하여 치우치거나 얽매임이 없는 적연부동한 본체를 의미하고, ‘발이중절지화’는 품절이 본체에 타당하여 알맞게 되는 감이수통(感而遂通)한 작용을 의미한다. 전자는 치우치거나 얽매이지 아니하여 리에 알맞고 의에 부합되는 본체이며, 후자는 리에 알맞고 의에 부합하여 치우치거나 얽매이지 않는 작용이다. 그런데 적연부동한 본체가 바로 감이수통하는 현상작용의 주체가 되며 그러한 본체는 바로 현상작용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체는 용 가운데 있고 용은 또한 체 가운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바, 체용은 결코 두 가지가 아니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따라서 미발의 성과 이 발의 정의 관계 또한 주자학에서의 같은 시간적 선후를 지닌 이원적 관계가 아니라, 성은 적연부동한 본체를 의미하고 정은 감이수통하는 현상작용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어서 성정은 하나의 감응 과정에서 합일적 관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제두는 사단칠정설의 이론체계를 현실적 사회생활의 기본 욕구가 되는 식색(食色)과 이해(利의害) 문제와 관련시키면서 리기론에 근거를 두고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식색과 이해는, 리와 리 아닌 것을 겸해서 말한다면 본래부터 착하지 못한 것이 있지만, 만일 리에서 나온 식색이나 이해라고 한다면 이는 진실로 순수하고 지선(至善)한 것이다. 인·효·충·신은, 오로지 리에 나아가서만 말한다면 진실로 본래 착한 것이지만, 만일 지식이나 전문에 얽매어 차별이 있다면 또한 지선이 될 수 없다.……식색과 이해가 욕을 추종하는 데 절실함이 많은 것은 곧 사욕의 객기이며, 인·효·충·신이 리를 따름이 은미함이 많은 것은 바로 본심의 천리이다. 그러나 식색과 이해가 리를 따르게 되면 바른 리가 되니 인효와 다를 것이 없으며, 인·효·충·신이라 하더라도 치우친 것은 사사로운 데 얽매인 것이 되기 때문에 식색이나 이해와 다를 바 없게 된다는 것이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성리학자들 일반이 비교적 경시하는 현실적 사회생활의 주요 과제가 되는 식색과 이해문제를 정제두는 차원 높은 의리실천의 문제 즉 사단과 칠정의 문제와 관련시켰다. 그래서 비록 식색과 이해의 문제라 할지라도 리가 주체가 되면 도덕적 의리와 다를 것이 없는 한편 도덕적 인 효 충 신의 문제라 할지라도 편벽되어 사사로운데 빠지게 되면 식색이나 이해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정제두 특유의 사단칠정의 논리형식을 적용시킴으로써 근대화 과정에 요청되었던 현실적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교육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인간관에서 정제두는 리기합일론을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여 성정합일론을 도출하는 한편, 사단칠정설을 성정합일론의 이론형식에 적용하여 일일이 분석함으로써 인간관에 새로운 이론체계를 수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관 위에 자신의 지행합일론을 전개하였다.

 

 

Ⅲ. 지행합일론

 

1. 지의 의미

 

정제두는 있어서의 ‘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정제두는 양지를 인간의 보편적 생명의 원리, 즉 생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고유한 덕으로서 양지를 인심의 생리라고 하고 지의 선천성과 무한한 변통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개 사람의 생리(生理)는 능히 밝게 깨닫는 바가 있어 저절로 능히 두루 통하여 어둡지 않으니, 이에 측은, 수오, 사양, 시비 어느 것이나 다 능히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그 고유한 덕으로서 이른바 양지란 것이며 또 이른바 인이라는 것이다(「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정제두는 나정암(羅整庵)이 양지를 지각으로서의 용이라 하고 천리를 성으로서의 체라고 하여 천리와 양지를 실체(實體)와 묘용(妙用)으로 갈라 본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양지가 곧 천리라고 하였다(「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이에 그는 양명의 심즉리설을 마음의 조리가 곧 리라고 풀이하고, 이러한 심체(心體)가 밝으면 만 가지 이치
가 밝아지며 만 가지 이치가 모두 이것으로부터 나와서 부족함이 없고 다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심체의 지인 양지 자체는 생리 즉 생생(生生)의 리로 측은지심과 같은 만 가지 이치를 스스로 발현한다. 이에 그는 마음의 생리란 마음에 있는 법칙으로서 내 몸을 낳아 준 생명의 근원이며 영통묘용(靈通妙用)하여 만 가지 리를 주재하기 때문에, 만사와 만리(萬理)가 이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하곡집」권8, 존언상, 일정생리설)

 

둘째, 정제두는 양지를 천지가 유행하고 발육하여 만물이 화생하는 것 일체를 포함한다고 본다. 이러한 면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천지가 능히 유행, 발육하고 만물이 능히 화화생생(化化生生)하는 것, 그것은 양지양능이 아닌 것이 없다. 자연의 이치는 모두 이 체 아님이 없다. 우리가 능히 측은하고 수오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며, 이로써 중화를 이루어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길러나게 하는 것까지도 모두 우리의 양지양능이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이 나에게 준 생각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 저절로 가지는 본연의 체도 이 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이치를 하나로하고 지와 행을 합하여 나눌 수 없는 것이다(「하곡집」 권1, 서, 답민성제서)."

 

이처럼 정제두는 양지를 모든 존재가 지니는 생명의 본원으로 보았다. 또한 우리가 일체의 존재에 대해가지는 사랑과 정의감을 바탕으로 중화를 이루어 질서와 번영의 체계를 이루는 것도 나의 양지양능에 의한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양지는 보편적 생명 및 질서의 원리 또는 그 힘이며, 생명의 기운에 대한 영명처(靈明處)이고, 만물에 통하는 도리(道理)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정제두의 지는 인식론적 의미보다는 존재론적 의미의 지를 말한다. 그는 성체(性體)의 지, 성(性)의 대본(大本), 명덕(明德), 오상(五常)의 지 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지란 「대학」의 명덕이요, 오상의 지이니 바로 성이다. 만약 ‘지’자만 말하면 정(情) 한쪽에 떨어져 그것이 지식, 지각의 지의 얕고 깊음과 정밀함과 조야함과의 구별이 없게 될까 두려워 특히 양지라고 말한 것이니, 바로 그것이 성체의 지요 본연의 선(善)으로 즉 오상의 지이며, 성으로 대본이 됨을 밝힌것이다(「하곡집」권1, 서, 답민언휘서)."

 

양지는 지식이나 지각의 지와 구별되며, 그것은 선천적인 명덕이며 그 자체로서 본래 선한 인간 본심을 이루는 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제두의 지는 경험으로부터 획득된 지식도, 경험을 가능케 하는 지각도 아니다.

 

넷째, 정제두의 지는 무수한 대상에 적절하게 응하는 일종의 궁극적 표준이며, 창조적 지성을 말한다. 그래서 양지는 마치 밝은 거울이나 수평을 유지하는 저울과 같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良知)은 마치 거울이 빈 것과 같아서 검고 흰 것이나 아름답고 추한 것이 오직 밝은 거울에만 있으며, 저울이 수평한 것과 같아서 저울대가 오르 내리는 것을 맘대로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의(義)인 것이며, 그 체(體)가 인(仁)이 되는 것이다(「하곡집」권9, 존언하)."

 

양지로서의 지는 저울이나 거울처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역(變易)하여 그 상황에 따라 마땅하게 하는 것, 즉 시중(時中)의 의(義)를 구성해 내는 일종의 창조적 지성이다. 그래서 정제두는 지를 개별적 사물들의 상대적 가치와 중요성 및 과부족을 평가하는 능력, 즉 구체적 상황에서 시의(時宜)에 합당하게 판단하는 시중의 지로 보았다. 그는 공자가 순(舜)을 대지자(大知者)로 일컬었을 때의 그 지란 바로 시중, 대중(大中)을 의미한다고 보았다(「하곡집」권12, 중용설, 중용).

 

 

다섯째, 정제두의 지는 시비를 분별하고 사물의 조리(條理)를 다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이기 때문에, 천지만물에 이르러서는 그 시비를 알고 조리를 다 하며 분별하지 않음이 없고 능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하곡집」권8, 존언상, 성학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사물의 궁극적 원리를 알며, 개별적 사물들의 이치를 분별하고, 그에 따라 능히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궁극적 원리와 사물들의 일반 원리, 그리고 사물들 간의 상호관계 및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평가의 능력으로서, 이른바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해 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정제두는 양지를 인간의 리지(理知)에 한정하지 않고, 일체의 심리적 지각 내용, 즉 아픔, 측은(惻隱), 상심(傷心) 등의 감정 그 자체로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아파함이 곧 지이며 가려워함이 곧 지이며 그 측은함이 곧 지이며 상심하는 것이 곧 지이며, 이것들 밖에 따로 한 가닥의 지란 것이 있어 이른바 알게 하는 것이 다시 그 뒤에 있겠는가?(「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라 하였다.

그는 일종의 감정인 측은지심과 별개로 그 감정의 근원을 양지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여 측은지심 그 자체가 곧 양지라고 하였다. 그에 있어서 양지란 능히 앎을 가지는 마음의 본체 전부를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단지 사유와 통찰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정제두에 있어서 지의 특징은 첫째, 생리로서 지는 선천적인 명덕(明德) 즉 그 자체 능히 깨닫는 지성이며, 사단의 마음과 오상(五常)의 성을 그 내용으로 삼는다. 동시에 그것은 이것들을 능히 두루 실현하는 기능
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지는 리지(理知)와 감정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중화를 이루어 개별적 사물의 이치를 구현하여 질서지우며 천지의 유행, 발육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2. 지행합일론

 

정제두는 심과 리, 양지와 체와 용,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나눌 수 없고, 동시에 지행이 합일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왕씨는 심으로 리를 삼았으니 곧 양지이다. 마음의 양지는 체가 되며 사물의 작용은 용이 되니 사물의 리라고 한다. 리는 모두 마음에 갖추어져 있고 심에는 저절로 양지가 있으니 알지 못하는 리가 있지 않은 것이다.……이런 까닭에 체와 용은 있어도 내외정조(內外精粗)가 없다.

그러므로 명덕과 신민은 하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지와 행은 합일한다.

지란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이름(知之至)이다. 그러므로 도는 하나일 뿐이고 성(誠)일 뿐이며 둘이 아니며 갈라질 수 없다. 내 몸으로부터 사물에 이르고 천하만물에 이르기까지 다만 이 하나로 관통할 뿐이다. 그래서 천지를 일체로 삼고, 천하를 일가로 삼는다. 비록 다스리지 않아도 다스려질 것이며,

……다만 성심(誠心)으로 실(實)에 힘쓸 뿐이다(「하곡집」권9, 존언하)."

 

주자가 사물의 당연한 리를 궁구하는 것을 지로, 그 당연한 법칙을 지키는 것을 행으로 이해한 것과 달리, 정제두는 지와 행이 하나임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마음의 양지와 사물의 성, 즉 심지체(心之體)로서의 양지와 심지용(心之用)으로서의 사물의 작용(理)은 안과 밖, 정밀함과 거침이 없다는 것에서 찾았다. 또한 이러한 까닭에 명덕과 친민도 하나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명덕은 체요, 친민은 용으로 하나이며, 그러한 합일의 도를 성(誠)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정제두는 인심(人心)의 생리(生理)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지행이 하나가 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의 생리란 능히 밝게 깨닫는 바 있어 스스로 능히 주류통달(周流通達)하여 불매(不昧)하며 능히 측은, 수오, 사양, 시비 어느 것이나 다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그 고유한 덕으로서 이른바 양지(良知)인 것이며 또한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다(「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정제두는 사람의 생리에 대해설명하기를 , 명각(明覺)하여 주류통달하여 사물을 밝게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히 사단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생리는 곧 고유의 덕이며 양지인 것이다.

따라서 생리는 일종의 그 자체로서 좋은 지(良知)인 동시에 인으로 대표되는 인간 고유의 덕성의 실천력이므로, 지행은 합일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인심의 생리는 사단의 덕을 그 내용으로 하며, 마음의 생리의 발용 유행은 마치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나오고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하곡집」권15, 맹자설 하, 사단장해)

즉. 그는 마음의 생리는 사덕에 대한 앎과 그 자체 스스로 발용 유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 원리는 덕에 대한 자각과 그것의 실현을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정제두는 인간의 생리이며, 성체(性體)로서의 양지를 고정된 것이나 단순한 잠재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양지 그 자체는 유행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면은 “어찌 다만 그 혈기만이 생생(生生)하여 쉬지 않겠는가? 그 양지도 역시 생생하여 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성의 체인데 연어(鳶魚)와 천류(川流)에다 비유한 것을 무슨 까닭에 의심하는지 알지 못하겠다”(「하곡집」권9, 존언중)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생도(生道)로서의 양지는 그 스스로 유행하는 작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생리는 전체의 덕으로서 말하면 인이고, 그 본체의 밝음으로 말하자면 양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제두에 있어서는 인이나 양지, 덕 등은 모두 인심의 생리에 대한 별명으로, 생리란 그 자체가 지행의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대개 그 전체의 덕으로 말하면 인이라 하고 그 본체의 밝음으로 말하면 양지라 하기 때문에, 그 가리켜 부르는 이름은 비록 이러하나 그 전체가 어찌 본체가 아니겠는가? 본체가 어찌 전체의 밖에 있겠는가? 오직 하나의 물이기 때문이다(「하곡집」권1, 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정제두는 인심의 본체로서의 양지를 체와 용으로 주장하면서 그 자체가 지니는 밝음을 체로, 비춤을 용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지라 그 영명한 체로서 말하면 상제요, 그것은 알고 깨닫는 작용으로써 말하면 화공(化工)이니, 곧 하나의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

……그 체를 가리켜 양지를 말할 때가 있는데, 마음의 본체이며 미발의 중이란 것이 이것이다, 그 용을 가리켜 말할 때가 있으니, 선을 알고 악을 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치 불이 본래 밝음은 그 본체요, 그 빛이 사물에 비추임은 그 용인, 밝음 하나뿐으로 불의 밝음과 비춤에 있어서의 밝음은 분별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하곡집」권1, 서, 답민성제서)."

 

 

정제두는 양지를 본연의 영명한 마음의 본체(體)로 그 자체가 미발의 중이며 지선(至善)이고,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 선악을 구별하는 작용(用)을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구체적 사건에서 선악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작용 즉 행위가 바로 양지의 용인 것이다. 양지의 체용은 곧 마음의 체용이며, 중화(中和)로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본체는 순수하여서 치우치고 얽매임이 없는 까닭에 중이라 이르는 것이고, 그 품절이 리에 타당하여 알맞게 되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에 화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에 알맞고 옳은 데 부합하는 것은 치우치고 얽매임이 없는 것의 용이요, 치우치고 얽매임이 없는 것은 리에 알맞고 옳은 데 부합하는 것의 체이다. 체 가운데 용이 있고 용 가운데 체가 있으니, 체와 용은 두 가지가 아니다.

……용은 체가 아니면 능할 수 없고 체는 용이 아니면 행할 수 없으므로 체와 용은 서로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정제두가 체용이 하나임을 주장한 것은 순수하여 치우침이나 얽매임이 없는 마음의 본체와 이러한 마음이 다양한 사건에 합당한 이치를 구현하는 작용이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본체의 중과 그 용의 화 사이에 단절이나 간격이 없으며 하나라는 것이다.

결국 양지의 체용은 양지양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체 곧 지행이 하나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 행은 하나의 양지이며, 양능인 것이며 명(明)이고, 성(誠)이며 박학(博學)이고 독행(篤行)이다
(「하곡집」권9, 존언중).

 

정제두는『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이나 치지(致知), 명호선(明乎善)이란 양지의 지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양지와 양지를 실현하는 양능이 하나임을 의미한다. 즉 양지와 양능을 구분하지 않고 천지만
물에 이르러 그 시비를 알고 조리를 다하여 분별하지 않음이 없고 능하지 않음이 없는 지라고 함으로써 지의 자체에 지와 행이 함께 있음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가 능히 측은하고 수오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며, 이로써 조화를 이루어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길러나게 하는 것까지도 모두 우리의 양지양능이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이 나에게 준 생각지도 않고 저절로 가지는 본연의 체도 이 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이치를 하나로 하고 지와 행을 합하여 나눌 수 없는 것이다(「하곡집」권1, 서, 답민성제서)."

 

 

말하자면 양지는 그 자체 사랑으로 만물을 화육하는 유행의 공능으로서 양능과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는 곧 행과 하나이다. 또한 정제두는 치양지(致良知)를 본연의 지에 따르는 것이며 솔성(率性)하는 것이라 하여 지행이 합일임을 거듭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치양지는 그 본연의 지에 따르므로 이미 성을 따르는 것이 되어 성에서 떠날 수 없다. 오직 그 실을 채우고 그 체를 따르면 지는 이미 행을 가지게 되고 행을 그 지를 지니게 된다. 오직 그 실을 채우고 그 체를 따르면 지는 이미 행을 가지게 되고 행은 그 지를 지니게 된다. 그 이른바 지행이 이러할 뿐이다. 그 체용은 동정에 무관하여 하나가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본체를 지라 하고 그 공용을 행이라 한다.

그 지의 체는 대본(大本)이 되고, 그것을 행에 이르게 하면 달도(達道)가 되고, 그것이 자기에게 있으면 명덕(明德)이 되고 물(物)에 드러나면 친민(親民)이 되기 때문에, 모두 하나로서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하곡집」권1, 서, 답민성제서)."

 

정제두에 의하면, 이미 양지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 지 가운데에는 이미 행이 있고, 그 행에는 또한 지가 있다고 한다. 즉 치양지란 본체로서의 지와 공능으로서의 행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체용은 하나이다. 그 지의 체는 대본이고 그것이 행위로 구현될 때 달도(達道)가 되며, 그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명덕이고 물에 드러나는 것은 친민이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일 뿐이며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지행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 주체의 본연의 지 즉 양지나 심성을 따르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제두는 지행합일의 본체인 명덕을 은폐시키거나 이것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마음 가운데서의 기품의 매임과 사욕의 가림, 나쁜 습관에 젖은 습염(習染)의 어두움 등으로 보았다.

 

 

"자기가 마음 가운데의 기품이 이를 얽매고 사욕이 가리며 습염이 어둡게하기 때문에 비록 지극히 넓고 지극히 밝은 체가 있다 해도 능히 이것을 확충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능히 그 가려진 것을 제거하고 밝히고 그 단서를 넓혀 확충한다면 자연 밝아져서 옳게 되지 않음이 없다(「하곡집」 권8, 존언상, 치지설)."

 

 

정제두는 옳은 행위를 본래 마음의 명덕을 회복하는 것, 즉 기품의 매임과 사욕에 의한 은폐, 습염으로 인한 무지(無知)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명덕을 밝히는 것과 옳은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곧 지행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정제두는 덕을 밝히고 확충하여 본체의 지행합일인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중용』의 미발의 중과 중절의 화는 성정의 본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니 이 것은 도심과 천리의 조목이며, 『대학』의 성의와 정심은 공부를 가지고 말한 것이니 곧 중화 공부를 하는 순서이다.

……대저 성의란 그 사사(私邪)와 죄악의 공(功)을 중화에서 이기고 다스려서 초절(初節)의 공부를 삼은 것이고, 정심이란 것은 그 얽매고 얽히거나 치우치고 편벽된 일을 중화에서 소융(昭融)하는 것으로, 이것은 정미롭고 극진한 공부인 것이다.

……사사와 악욕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착한 가운데에 나아가 동하는 기에 매여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짓거나(作好作惡), 뜻하거나 기필하거나 고집하거나 사사로이 하거나(意必固我), 치우쳐서 올바르지 못하거나(偏倚不正), 어둡고 게으르고 방탕하거나(昏惰放逸), 보내고 맞이하고 일어나고 눕는 것(將迎起伏) 등에 있어서 일체의 은미한 병통이 모두 부서지고 없어져서 얽힌 것이 없다면, 이것은 심체의 올바른 것이 되어 감공(鑑空: 거울이 비어있음)하고 형평(衡平: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음)하여서 치우친 바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미발은 중의 대본이요, 이른바 명덕이요, 도심인 것이다(『하곡집』권8, 존언상, 사단칠정설)."

 

 

명덕, 중화, 대본, 도심을 이루는 것은 우선 사심과 악념을 제거하는 노력으로서의 성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에 얽매이거나 편협하고 치우친 병통을 없애는 것이 정심이다. 이것은 양명이 성으로써 『대학』의 성의·정심이나 「중용」의 계신·공구를 총괄해서 설명한 것과 다르다.

오히려 정제두는 성의·정심의 선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의(意)가 성(誠)해야 할 뿐 아니라 심체의 중과 그 용이 절도에 부합하는 실(實)이 있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어』의 절사(絶四)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고집하거나 기필(期必)하는 마음이 없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노력으로 지행합일의 명덕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순(舜)의 대지(大知)라는 것도 의필(意必)과 주객(主客)의 단절 이기적 계산을 배제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그 도심의 유행이 인심의 리에 광명통철(光明洞徹)하여 의필하는 바가 없고 가리고 막힌 바가 없으며, 천하의 뜻에 통하여 사이가 없고, 천하의 선에 합하여 하나가 되어 사사로운 감정이나 조그만 잔꾀를 용납하지 않으며, 이로써 광대고명의 지극함을 다하니 순(舜)이 순되는 소의(所以)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성(誠)으로부터 명(明)에 이르러 도(道)가 행해지는 것이다(「하곡집」권12, 중용설, 중용)."

 

 

정제두의 입장에서는 인간 본심으로서 도심은 밝고 내외를 두루 관통하여 살피는 것으로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치우침이 없는 것이 대지(大知)이며, 그것은 성(誠)에 근본한 지(明)으로서 행도(行道)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덕을 밝히는 것과 치지를 통일시하여, 그 공부가 곧 ‘자신을 속이지 않음’(毋自欺)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명덕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어서 어둡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천리의 밝은 곳이 사물의 법칙이 되는 것이니, 밖에서 구하여 쓸 수 없는 것이다. 그 공부는 오직 그가 아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자 하여 그 아는 것을 속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치지라고 한 것이다(「하곡집」권8, 학변)."

 

 

정제두는 본(本)으로서의 명덕은 말(末)인 친민과 하나이기 때문에, 덕을 밝히는 일은 곧 백성을 사랑하는 일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명덕의 방법을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음’ 즉 그 양지를 속이지 않음이며 그 양지에 만족함이라고 하고, 그것을 곧 치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치지는 곧 심체의 본연의 지, 즉 양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때 곧 지행은 합일하는 것이다.

 

"대저 심체는 본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다만 사람이 그것을 이르게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 지를 이르게 하여 다 하지 않음이 없으면, 생각하지 아니하고 힘쓰지 아니해도 강물 터놓은 듯이 줄기차게 흘러 나오게 되는 것이다. 지가 진실로 이르게 되면 앎이 곧 행이며, 행이 곧 지이다. 그 가리킨 명목은 비록 두 가지이나 그 일은 하나일 뿐이다(「하곡집」권1,서, 여민언휘논변언정술서)."

 

마음이 본체가 지니고 있는 온전한 지에 이르면 곧 지행은 하나이다. 지행의 분리는 단지 그러한 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제두는 이러한 노력은 '신독(愼獨)'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하였다.

 

"성인은 하늘이 명하여 심원(深遠)하여 그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어느 곳에 공리(功利)의 사사로운 뜻이 협잡(挾雜)할 수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공부를 강하고 넓힐 때에는 반드시 신독을 주로 하였으니, 이것이 곧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며 곧 천명의 성이다.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기르는 것이라도 중화 위에서 기르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별도의 다른 일이 없다. 오직 신독하면 중화를 이루는 것이고,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이다(「하곡집 」권10, 연보)."

 

정제두는 부단한 신독의 공부야말로 곧 중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하여, 모든 일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근본처가 된다고 본 것이다. 이에 그는 『대학』의 핵심을 이루는 성의·정심과 『중용』의 계신·공구가 모두 신독의 뜻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독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실현의 근본임을 주장하였다.

 

"대개 천하의 모든 일은 기강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 근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으며, 마음을 바르게 하는 근본은 또한 신독에 있다. 천리(天理)와 사의(私意)를 팔자타개(八字打開)하듯이 밝히는 것이 신독의 공부에 있고, 천덕과 왕도의 공효가 넓어지는 것도 신독의 공부에 말미암는다(「하곡집」권10, 연보)."

 

정제두는 정치의 기강은 정심에서, 정심은 신독에서 나오기 때문에, 천덕과 왕도의 공효가 넓어지는 것은 신독 공부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독은 인간의 덕성을 실현하고 확충하여 치중화와 왕도를 실행하는 요체가 되기 때문에 지행합일의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Ⅳ. 결언: 지행합일론의 특징

 

정제두는 인간의 천부적인 생리(生理) 즉 양지(良知)를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판단력과 능동적 작용성을 지닌 도덕적 자율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리설을 근거로 한 그의 인간관은 맹자의 이른바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호연지기의 근원은 바로 도의에서 발단된 기(氣)에 해당하는 의리의 유발이기 때문에, 혈기를 떠나 따로 존재하게 되는 별도의 의리가 없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식물 모두가 생기(生氣)를 지니는 것은 공통이지만, 동·식물에게는 생리가 없기 때문에 출척측은한 마음을 발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그는 오직 인간만이 영명하고 통철한 생리를 지니고 있어 출척측은한 마음을 능히 발할 수 있게 된다는 인간관을 도출하였다. 위와 같은 인간관에 기초한 정제두의 지행합일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양지를 소당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론적 특성을 지닌 명덕과 성, 생리 등으로 소이연의 존재로서 고찰한 것이다.

둘째, 경험을 통해 빌려온 리에 대한 추상적 지와는 달리 양지를 생리로 주장함으로써 양지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인간주체의 선천적인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명덕은 천리의 지각과 실현의 능력으로서의 지와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덕 자체가 지니는 밝음과 그 비추임의 작용이 지와 행으로 별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넷째, 생리는 그 스스로 명각(明覺)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 의, 예, 지의 네 가지 덕을 갖추고 있어 이것들을 두루 스스로 능히 구현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심성의 본체로서의 양지와 그 작용으로서의 사물의 리의 구현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섯째, 양지의 체용을 불의 밝음과 비춤에 있어서의 밝음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에 비유함으로써 양지 자체에 행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곱째, 대본과 달도, 명덕과 친민, 지와 행은 체와 용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실상은 하나라는 것이다.

여덟째,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지와 행에 대한 철저한 주체적 자각과 진지한 실천적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행합일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지만 현실의 인간은 기품과 사욕, 세속의 그릇된 습관으로 지행의 본체를 가리고 은폐시켜 온전한 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째, 신독이 지행합일을 이루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치중화를 통해천지를 자리 잡게 하고 만물을 기르는 것, 만사의 근본이 되는 정심보다 더 근원적인 것, 그리고 천리(天理)와 사의(私意)를 밝히는 것, 나아가 천덕과 왕도의 효용을 넓히는 것이 모두 신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하곡 정제두 지행합일론은 편당이 극심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극복하기 위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지성의 소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오늘 날 지적 편중교육에서 야기된 인간성 상실과 소외, 가치관의 혼란 등의 비인간화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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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eory of Unity of Knowledge and Conduct of Hagok, Jeong Jae Doo

 

Jeong, Nak-Chan

 

Hagok Jeong Jae Doo believed that man is, as a principle of life, equipped with the good knowledge, or the moral autonomy capable of judging right and wrong. He formed his ideas on man based on this principleof lifet heory. Thec haracteristics of his theory on conduct and knowledge, which was formed based on his such ideas about mankind, area s follows.

 

First, he understood this 'good knowledge' not as a natural and reasonable state, but as 'the reason why' on which it was based upon. Second, by contending that good knowledge was a principle of life unliket hea bstract knowledgeabout principles wei nfer from experience, he emphasized the activeness and creativeness of good knowledge. Third, the theory contends that the bright virtue(明德)-the inherent fundamental characteristic of the subjective person-is comprised of knowledge and ability required to become aware of and realizet hep rinciples of thehe avens. Fourth, the principleof life is self enlightening, and simultaneously possesses the four virtues and realizes them aptly. Fifth, good knowledgea s thee ssenceof them ind and the realization of the principles of objects through its application cannot be separated. Sixth, the physical application of good knowledge is metaphorically explained as the inability to tell apart the brightness of a light and theb rightness of shining a light, meaning that practiceis incorporated in the good knowledge itself. Seventh, the fundamentals (大本) and achieving morality(達道), bright virtue and closeness with the people(親民), knowledge and conduct is only represented in the form of learning and application, but are all one and the same. Eighth, in order to recover the essence of unity of knowledge and conduct, efforts to remove personal greed, physical restraint, and bad habits must bem ade to reach thes tageat which oneis ablet o practice morality and virtue even when alone.

 

 

Key wrds: Hagok Jeong Jae Doo, ideas on mankind, life principle, quality knowledge, theory of unity of knowledge and conduct, ability to practicem orality and virtue

 

(2008. 11. 15 원고접수 / 12. 6 심사완료 / 12. 13 게재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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