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나누는 생명의 빵
주일 저녁에 날아간 제주도의 휴가는 김민기 씨의 사망 소식으로
자연스레 우리만의 바닷가 추모음악회가 펼쳐졌다. 친구 신부들은
金敏基의 음악으로 떼 창을 하며 술에 젖은 이야기가 익어갔다.
44년 전 신학교 입학을 위해 부모님과의 가족 송별식 날,
“나 이제 가노라”라며 <아침이슬>을 목청껏 불렀었고, 우리는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 때 문화원의 헌정 영상 <어두움에 빛을>의
배경음악을 위해 노래 <금관의 예수> 사용을 기쁘게 허락해 주던
김민기 형제와의 사연을 나누며 노래했다. <친구>를 함께 부르며
천국으로 떠난 동창 신부들을 소환했고 <가을편지>, <꽃피우는 아이>,
<아름다운 사람>, <작은 연못>, <상록수>, <바람과 나>, <잘가오> 등등
이어지는 노래들에 마른 눈동자들은 이내 촉촉해졌다.
불의했던 한 시대에 그의 음악은 그렇게 우리의 고마운 양식이 되어준 게다.
제1독서는 불평 가득한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주시는
내용의 말씀이다. 그분은 묵묵히 성실하게 사랑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
제2독서처럼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은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창조되는
새 인간이 되도록 거룩한 양식을 선사하는 것이다.
마침내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선포한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음’(요한 6,35 참조)을 선언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힘쓰는 것이
신앙임을 깨우쳐 주는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주일이다.
‘생명의 빵’인 주님 안에 담긴 진리와 진실을 전하는 문화 사목으로
또 하나의 영화작업이 세상에 나오는 시점이다. 오는 8월 15일
다큐멘터리 영화 <1923 간토대학살>이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101년 전 간토(關東, 관동) 지역에서 행해졌던 조선인 대학살은 인류
역사에 유래를 볼 수 없는 반인륜적인 범죄이자 제노사이드(genocide)인
학살 사건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그런 과거를 끊임없이 부정해 왔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 인들이 있어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와 스기오 의원 등 일부 일본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역사학자, 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고군분투한
끝에 역사의 사실을 세상에 내어놓는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지난 5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상영되었고,
5월 13일은 일본 국회에서 상영되어 파란을 일으킨 영화가,
휴가 중인 7월 2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제작진이 출연하며
이제 일반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태영, 최규석 감독의
헌신의 산물인 <1923 간토대학살>은 가톨릭문화원이
영화의 ‘공동 제공’으로 완성을 함께 한 작품이다.
미사에서 나누는 ‘천상의 양식’은
삶의 현장에서 시대와 문화에 필요한 양식이 되어야 한다.
故 金敏基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잔잔하지만 도도하게 양식을 나누어주었고,
천상의 빵은 그렇게 누군가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 누군가의 고단하고 지난한 땀방울에 고마움의 박수를 보낸다.
글 : 朴庾眞 Paul 神父 – (사)인천가톨릭문화원 원장
모태 신자의 필수(?) 코스, 냉담
저는 ‘젬마’라는 세례명을 호적에도 등록해서 본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풋풋하고 창창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 일단 좀 묻어가자는
마음으로 첫 단체 소개팅 이벤트에 제 인생 처음 ‘한○○’ 가명 사용을
시도했는데…. 아뿔싸! 단체 소개팅에서 가명을 쓰고자 했다면
친구들 모두에게 제 가명을 공유하고 숙지시켜야 했건만, 저 혼자만 가명을
파트너에게 발설했으니! 단체 소개팅으로 함께하는 친구들은 저를 당연히
‘한젬마’로 불러대는 바람에,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코미디 사태가 발생!
그렇게 용감하게 가명을 질러댔다가 소개팅을 망치고 그냥 줄행랑을 쳐버렸던
인생 최대의 실수 이후, 저는 그나마 가명 사용도 철회하였습니다.
평범하게 살기는 애초에 힘든 인생이 이름에서부터 주어진 것 같아요.
이 특이한 이름에 대한 반응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어머 참 특이한 이름이네요?” 혹은 “아, 세례명이네요? 가톨릭 신자시군요?”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의 경우, 한자로도 표기할 수 있는 이름을 세례명과는
별도로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조건 세례명만 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그것만으로도 골수 가톨릭 집안임을 드러내는 기회이긴 했습니다.
“어머 천주교 신자시죠? 세례명이죠? 하느님, 믿으시나 봐요?”
천주교 신자 맞고, 세례명 맞고, 다 맞는데….
근데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는 왜 그렇게 숨이 턱 막히던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에 모태 신자로서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자신 있고 당당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 늘
고민해야 했고, 그래서 되레 오랜 냉담의 울타리로 들어가 끙끙 헤매야 했으며,
벗어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을 찾고야 말겠다. 내게
믿음이 필요하다. 확신을 가지고 싶다.’라고 하면서 방황하던 기나긴 시간들
이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순종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곁에 계신
하느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밀어내고 등잔 밑이 어두웠던 시절이었죠.
늘 그 사람에게 딱 맞는 무게, 방향, 방법으로 부르시는 그분은 정말 호되게
저를 당신 앞에 끌어다 놓으셨습니다. 또한 교만과 거만으로 무장하여
천근만근 치장이 화려했던 제 날개를 꺾어 떨어뜨리셨습니다.
저는 추락한 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비로소 저를 기다리고 계시던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을 향한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이내 성큼성큼 걸으며 큰 날갯짓을 시작했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그분을 찬양하는 일꾼이 된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태 신자들에게 냉담은 필수(?) 코스라고 말하며
기다려 주면 어떨까요? 의심도 하고, 검토도 하고, 비교도 하면서
방황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는 것, 그 자체로 인정해 준다면,
냉담하고 있을 많은 모태 신앙 신자들도 돌아오기가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냉담도 부지런히 열심히! 반항과 방황도 뜨겁게!
하느님은 그 모습도 인정하십니다.
글 : 한젬마(Gemma) – Creative Director,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