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북방은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었으나
한반도로 활동 영역이 축소되면서 여진족 등이 거주하게 되었다.
생산력이 낙후한 여진족은
조선을 큰 나라로 섬기며 물자를 조달했다.
조선은 건국 후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여
이들을 경계함과 동시에 교린정책을 펼쳐
귀순해오는 여진족에게 땅과 벼슬, 성(姓)을 내렸다.
그러나 1403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베트남과 몽골 정복을 준비하면서
길림에 건주위를 설치하며 여진족을 회유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여진족은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의 북방을 자주 침략하였다. 특히 1432년 우량하족의 추장이며 건주본위도독 이만주의 침입은 조선의 대(對)여진정책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433년 5월 7일 세종의 명을 받은 최윤덕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만 5천여 명을 이끌고
파저강 일대의 이만주를 토벌하였다.
그리고 여연과 강계 중간 지점의 자작리에 성을 쌓아
자성군이라 칭했다.
하지만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 이어지자
이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중신들의 소극적인 간언을 뿌리치고 세종은
이천에게 군사 8천을 주어
여진족의 근거지인 우라산성을 공격하여 이들을 섬멸시켰다.
세종은 이 지역에 할거하던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무창, 우예에 2군을 추가 설치하고
4군을 완성하여 압록강 이남을 차지하였다.
한편 동북면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건국 초기부터 온건정책을 실시하였다.
태종 때에는 경원, 경성 등지에 무역소를 두어
이들이 내왕할 수 있게 했으며,
세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직위를 하사하여 회유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큰 세력이었던 우디거족과 오도리족이
자주 조선의 변방을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중앙에서는 이 지역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자는
온건론이 대두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선조들의 옛 땅을 조금도 줄일 수 없다”고
선언하며 강경하게 대처할 것임을 표명했다.
1433년 여진족의 큰 세력이었던
우디거족과 오도리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에 임명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김종서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공격하여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에 6진을 개척하였다.
6진 개척은 ‘왕이 일어난 땅’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명제를 실천한 사업이었다.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북쪽 국경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