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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묵상글 (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8: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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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 중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사 전례 때에 참회 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내용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행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 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내용을 소홀히 하는 형식은 율법주의적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 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보아야 하느냐? 텔레비전 통해 미사에 함께했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일일이 답해 드려야 합니까? ‘코로나19’의 감염병 창궐로 말미암아, 전례와 관련 관면이 많이 주어졌던 탓이 있겠지만, 관면의 문제보다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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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11 05:09
- '자기 좋을 대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오늘 복음은 창세기 1장의 후반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례가 1장을 어제와 오늘에 이어 둘로 나누어 읽은 것은
단지 길이가 길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창세기는 무생물의 창조 얘기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생물이 아니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내릴 대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이 아닌 무생물은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런 구분에 대해 저는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돌덩이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 것에 유감이 있습니다.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생물만 번식하고 번성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복을 주셨다는 얘기인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삐딱하게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뒤
참 좋았다고 하신 것에 관해서도 왜 참 좋다고 하시는 건지 생각됩니다.
그리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시는데도
그 복을 거부하며 번식하고 번성하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 신인류가 뭐가 보기 좋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는데
오늘날 인류가 어떤 면에서 하느님 모습을 닮았으며
온갖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같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하느님 사랑은 닮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다스려야 하는데
자기 좋을 대로 부려 먹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이것이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자기중심의 죄이고,
‘하느님 보시기 좋을 대로’에 불순종하게 하는 교만의 죄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꼬집으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데
인간의 전통을 근거로 그리고 하느님을 핑계 대며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코르반’이란 어떤 물건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아무나 사용치 못하게 한 것인데
‘코르반’을 핑계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당대 전통과 사람들을 꼬집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고 꾸짖으시는데 오늘 이 말씀이
제겐 ‘레오나르도, 너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는 말로 정확히 들립니다.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이 ‘자기 좋을 대로’
곧 자기중심을 오늘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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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11 07:08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란돌프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삼촌은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이었고, 성인의 부모는 그가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교회에 들어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삼촌의 자리인 수도원 원장 자리를 이어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세속적인 영광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 청빈한 삶과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완전히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을 성에 가두기도 하고, 매춘부를 고용해서 성인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세속을 벗어난 학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충족시켜 주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돈, 권력, 즐거움, 영광…. 성인은 이런 우상이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셨고 또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상보다 주님만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성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따집니다. 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사실 조상들의 전통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조상들의 전통이 결코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따르지도 않으면서, 아니 그 뜻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조상들의 전통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지키는 조상들의 전통은 하나의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기를 변화시킬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주님보다 첫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습들이 행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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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시간은 금이다.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라(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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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방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로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곧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는 단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관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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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 중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사 전례 때에 참회 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내용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행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 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내용을 소홀히 하는 형식은 율법주의적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 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보아야 하느냐? 텔레비전 통해 미사에 함께했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일일이 답해 드려야 합니까? ‘코로나19’의 감염병 창궐로 말미암아, 전례와 관련 관면이 많이 주어졌던 탓이 있겠지만, 관면의 문제보다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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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았습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제게 ‘마일리지’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저는 마일리지를 활용할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신부님들은 마일리지를 적용해서 항공권을 발권해 주었습니다. 저의 마일리지로 한국 가는 왕복 항공권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항공권을 마련하면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유비는 제갈공명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삼국시대를 열었습니다.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잠들었던 유럽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르네상스는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디자인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작년에 저는 창고 공사에 함께한 형제님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열정과 그분들의 헌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함께 27기 사목회를 구성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본당의 많은 일들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 속담은 우리가 가진 잠재력이나 믿음이 아무리 커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깊은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이는 성경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구슬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행위라는 실로 꿰어지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잠재된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을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세상 속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물은 믿음을 실천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지만, 사제와 레위는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잘 돌보아 달라고 청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믿음을 어떻게 꿸 수 있을까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는 구슬을 꿸 실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하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하는 작은 실천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슬을 꿸 때 방향을 잡아주는 기준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여기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실천으로 꿰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사랑과 봉사입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실로 꿰는 작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들것으로 데리고 왔던 이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웃은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어여삐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믿음과 실천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구슬을 하나도 빠짐없이 꿰어 보물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믿음의 구슬이 있습니다. 이제 이 구슬을 행위라는 실로 꿰어 세상 속에서 빛나는 보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씩 실천하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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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이날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발현 첫날을 기념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루르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여러 곳을 순례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루르드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기도 행렬과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치유의 은총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루르드에 봉헌하고 떠나간 사람들의 찬미는 아직도 그 루르드에 남아 있었습니다.
새벽 시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아직 어두워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 교우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에 든든하고 기뻤습니다.
미사 중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께 성모송을 봉헌했습니다. 새벽에 노래할 수 있을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성모송을 노래로 봉헌했습니다. 이 성모송이 누군가에게 치유와 희망의 은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병자들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병자를 돌보는 이들이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정성과 사랑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희망이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희망은 정말 힘이 센 거겠죠?
얼마 전 제가 받았던 질문입니다.
희망은 정말 힘이 센 거겠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오늘을 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희망일 것입니다.
만약 희망이 없다면….
늘 절망이 우리 삶을 덮치고 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희망은 정말 힘이 세다고 생각합니다.
무거운 우리를 내일로 또 그다음 날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오늘 하루를 설레게 하기를 바랍니다.
희망이 우리 심장을 뛰게 하기를 바랍니다.
희망이 우리 다리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희망찬 하루 되세요.
희망이 우리를 앞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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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존엄한 품위의 인간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시편8.2)
자식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제자들 자랑은 괜찮겠지요. 지난 토요일에는 3명의 옛 초등학교 6학년때 여제자들이 저를 찾아와 함께 했습니다.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얼마나 반듯하고 똑똑하게 치열하게 산 제자들인지 감탄했습니다. 1977년때 6학년때 제자들이니 48년전 13살 때 아이들이 지금은 61세 환갑을 넘긴 제자들입니다. 당시 저는 29세 청년교사였습니다.
이중 한 제자는 5-6학년 2년동안 가르쳤던 제자로 유난히 고마워하며 시종일관 제 시중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보관중인 그 제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남긴글입니다. 쌍둥이 아들을 둔 제자로 다음주 결혼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큰 아들은 고등학교 영어교사입니다.
“일기장을 펴보니 나의 고민, 선생님의 격려 말씀뿐이었다.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께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선생님의 말씀 끝에 보람을 찾게 되다니. 이제 밑바닥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기쁘다. 아버지같이 정답게 느껴지는 선생님께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까?”
이 제자가 이번 만남때 편지글도 줬습니다.
“까마득한 어린시절, 진정 우리 시대의 참 선생님이였던 이수철 선생님! 선생님의 사랑과 겸손, 온유함을 보면서 또 그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어떻게 부족한 이에게 사랑을 주어야 할 지를 배웠습니다. 영원히 제 가슴 속에 제 인생의 참선생님으로서 기억됨을 감사합니다.”<2025.2.8. 제자 이정민 올림>
무엇보다 이 제자는 파워우먼으로 영원한 현역의 직장인이자 평생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적 개신교 신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잘 성장, 성숙한 참으로 자랑스런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39년전 신학대학원 1학년때 문세화 외방선교회 출신 교수 신부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분명히 하여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결같이 평생 날마다 어느 삶의 자리에서든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본분이자 보람일 것입니다. 미사전례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전 늘 감격하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라는 사제의 권고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바로 우리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원을 말해 줍니다.
제가 수도생활하면서 많은 시를 썼는데 대표적 짧은 시는 작년 후반부 탄생했습니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짧은 고백시로 참 자주 나눴어도 늘 새로웠던 두 시를 다시 또 나눕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열정에 있습니다. 평생 날마다 죽을 때까지 새롭게 폈다지는 영원한 현역, 영원한 청춘의 ‘파스카의 꽃’같은 봉헌의 삶,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제 교대시절 학장의 호가 ‘다운’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한 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불암산을 볼 때 마다 저절로 솟아나는 시입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앞에서의 삶,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는 창세기 천지창조 마지막 부분으로 매 창조시 후렴처럼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천지창조의 절정은 사람 창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1,2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삶’, 베네딕도회의 또 하나의 모토, ‘참으로 모든 일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유일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자연을, 삶을, 모든 삶의 수행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닮아가면서 명실공히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지했습니다. 하느님의 근본 법인 사랑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바탕한 일반 관행을 분별의 잣대로 삼습니다. 참마음, 참사랑을 도외시한 본질직시가 아닌 우선순위를 잊은 본말전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을 근거로 자신 불편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관행이나 율법은 참고사항일뿐 절대적 법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 하나뿐입니다. 오늘 말씀 주석을 읽으면서 공감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열왕기 상권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은 실로 지상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묻는다. 창세기가 주는 답은 ‘그렇다!(YES!)’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신다(God dwells with us, within us). 솔로몬의 성전처럼 거룩한 장소들도, 바리사이들의 손씻는 것 같은 거룩한 수행들도 하느님의 법이 선포하고 보호하는 인간의 거룩한 존엄에 비하면 모두 빛을 잃는다(all pale in).”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수행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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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마르 7,11-12)
외로운 벗을
품습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품음의 기도입니다
웅크린 벗을
돋웁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돋움의 기도입니다
서러운 벗을
다독입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다독임의 기도입니다
작은 벗들을
섬깁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섬김의 기도입니다
쓰러진 벗을
일으킵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일으킴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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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마르 7,3-4)
바리사이의 표시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네 방식이 다른 어떤 것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율법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했고, 천사들과 영의 존재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사도 23,8 참조). 그들은 엄격한 생활 방식을 따랐는데, 일정 기간 금욕과 정결을 지키는 관행이 있었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루카 18,12 참조). 율법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았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읊었습니다(루카 5,33 참조).
-다미스쿠스의 요한-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궁극적인 버림의 경험은 그대로 둠의 경험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놓아두는 경험, 신성을 신성으로 놓아두는 경험,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놓아두는 경험,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놓아두는 경험, 사물을 사물로 놓아두는 경험, 하느님을 사물 속에서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경험, 사물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경험, 안을 그대로 두는 경험. 만유내재신론을 그대로 두는 경험, 하느님이 에워싸고 있는 존재의 동아리를 그대로 두는 경험이다....그대로 둠이나 방기는 ‘놓아두다’, ‘내버려두다’ 혹은 ‘단념하다’를 뜻하는 라센(lassen)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허락 내지 묵인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카푸토도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개방성과 수용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열려 있고, 민감한 상태다. 엑카르트가 말한대로, 그것은 “모든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330)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 신심의 계시.
두 번째 요점. 복되신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고찰. 사람들이 보여주는 배은망덕함에 대한 그분의 탄식을 들어보세요. 그리스도께서 복되신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길, "이 배은망덕함이 내가 수난 중에 겪었던 모든 고통보다 나를 더 아프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배은망덕함에 대한 속죄로 두 가지를 그녀에게 요구하셨습니다. (1) 매월 첫 금요일에 성체를 영하는 것, (2) 거룩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약속도 들어보세요: "나의 신성한 주인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그분의 성심에 금글자로 새겨져 있으며, 이로 인해 결코 그것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름들은 성심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고, 성심이 알려지고 사랑받도록 진심으로 노력한 이들의 것입니다."
적용. 주님께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말씀하셨듯이 당신에게 말씀하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나에게 냉담과 무관심만을 보이지만, 적어도 너는 그들의 배은망덕함을 속죄함으로써 나에게 기쁨을 주어라. 매월 첫 금요일마다 성체 성사를 통해 나의 성심에 감사와 속죄의 행위를 하고, 나를 기리며 거룩한 시간을 보내라."
애정과 결심.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의 버림받으심 속에서 함께하며, 당신의 성심의 슬픔을 완화시키는 것이 나의 행복한 특권이 되게 해 주소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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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하느님의 법과 사람의 법이 서로 이해 충돌이 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있다면.....
강만연 [fisherpeter] 250211. 03:02 ㅣNo.179978
오늘 복음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묵상해봤습니다. 저는 과거에 여러 신부님과 또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빠스님이 두 분 계시는데 두 분 중에 한 분, 야고보 아빠스님께도 여쭤본 적이 있는 질문입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 폰에는 고성수도원원장 신부님으로 저장이 돼 있습니다. 아마 2012년 아니면 2013년쯤에 저장했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과 아빠스님으로부터 듣게 된 공통된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답 같은 것은 없지만 정도는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본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어를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특히 외국어를 지도한 사람으로서 이 말씀에 누구보다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학원을 경영했을 때 아이를 상담하며 학부님께 꼭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 처음 일주일 정도는 초등학생이 오나 중등이 오나 고2가 오나 이 시간은 누구나 다 제 수업을 들으려면 꼭 이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어떤 학생은 왜 이런 걸 지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학원을 다니지 않고 다른 학원을 다니겠다고 그만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이수한 학생도 처음엔 따분하고 좀 지루하긴 했지만 어떻게 저한테서 오랜 시간 동안 지도를 받게 된 학생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 애들이 먼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형제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형제는 터울이 좀 납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과정을 듣게 되는 건 그들이 집에서 어떤 경우는 서로 말을 하거나 또 애들 학습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는 그런 상황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이 봐서는 어떻게 동생이 배우는 것을 나는 동생보다 더 잘하는데 똑같은 것을 배우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나중에서는 왜 제가 그런 지도방법을 고수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건 무엇이냐 하면 영어라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에서 계속 뿌리가 확장이 돼서 새로운 개념과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또 다른 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개념을 모르면 뿌리는 같은데 실상은 다른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문을 이해하는 눈이 벌써 달라짐을 본인 스스로가 느끼게 됩니다. 그럼 그렇다고 제가 가르치는 일주일의 시간이 뭐 아주 특별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의 교재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초등 고학년, 아니면 중등 초급과정에도 언급된 내용입니다.
근데 보통 보면 그 과정을 대부분 등한시합니다. 그게 교재에 있어도 그냥 넘어갑니다. 이런 강사는 마치 100미터 정도의 산을 등산하고서 마치 해발 1000미터 정상의 산도 그냥 지금처럼 해서 900미터만 더 올라가면 그 산도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야 그럴 듯합니다. 근데 막상 해보면 결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기계라면 가능할 겁니다. 기계는 다른 변수가 작용할 여지가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령 거리는 수직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평지라고 해서 생각해보면 동일한 속도로 어느 시간 후에 그 시간만큼 이동했을까요? 가면서 에너지가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수학공식처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신앙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등산에 비유하겠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 그게 완성이라고 한번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도 중산리를 통해서 오를 수도 있고 전라도 지역이면 뱀사골로 해서도 오를 수 있고 장터목으로 해서 오를 수도 있고 다양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지리산은 사람에 비유하면 여자와 같은 산입니다.
설악산은 남자와 같은 산이라고 일반적으로 산악인들은 그렇게 비유합니다. 아무리 지리산도 어려운 산 같아도 해발 고도가 낮은 산에서 기본적인 산악기초에 충실해서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속도가 느릴 수는 있지만 충분히 천왕봉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악산 같은 산은 지리산을 등반하는 방식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잘 알아야 설악산도 악산이라고는 하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산입니다. 이런 내용을 왜 장구한 설명을 드리는지 조금은 의아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사실 각각의 사실에 대입해보면 신앙에서도 거의 통하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이제 오늘 복음 안으로 들어가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사람의 법, 두 법이 있습니다. 서열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두 법은 엄연히 성격상 완전 다르고 또 서열을 말하자면 당연히 하느님의 법이 사람의 법보다 더 상위법이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개념을 놓고 보면 상위법은 하위법과 형식면에서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하위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근본정신을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전제라면 하위법을 어기면서 상위법을 만약 준수했다면 과연 상위법을 제대로 준수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설령 표면적으로는 지켰다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순입니다. 마치 이건 사람이 태어나 서는 법도 모르면서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조건 하느님의 법 규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와 같은 것에만 집중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조건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행동을 과연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 같은지를 한번 묵상해보면 바로 자명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번 오늘 복음을 가지고 실제 우리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해서 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이 자리에서는 피하겠습니다.
실제 보면 하느님의 법이 물론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의 법과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따로 놓고 하느님의 법에만 맹목적인 신앙으로 초점을 맞추게 됐을 때 실제 현실인 신앙 공동체에서는 갈등 아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왜 그런 문제점이 발생했는지 그 이유를 철저히 고민해서 알아야만이 개인 한 사람에게도 신앙적으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신앙 공동체도 더 성숙한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다시 오늘 복음을 한번 묵상해보시는 것도 색다른 묵상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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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형식만 따르는 우리도 현대판 코르반 /
박윤식 [big-llight] 250210. 19:13 ㅣNo.179964
우리도 이제 고령화 시대에 산다. 이미 노인네 된 칠십 대가 부모님도 모신다. 허나 많은 이가 이런저런 핑계로 나이 드신 부모님 모시는 걸 피하려든다. 그러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꼼짝 못하고 매여 산다. 몸이 아픈 황혼의 어느 자매님이 늙으신 시어머니 모시는 게 너무 힘이 든다나.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부모님 공경은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자식의 도리다. 황혼에도 많은 어려움 이기며 부모님 공경하는 분들의 효도는, 석양보다도 더 아름답기만 하다.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나머지 일곱은 사람 사랑이다. 이렇게 십계명은 사랑하라는 거다. 사람 사랑의 첫 번째는 ‘부모 공경’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게 이웃 사랑의 첫걸음이라나. 부모님 공경의 교회 가르침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라며 정말 엄격하다. 그런데 일부 유다인들은 부모님께 돌아갈 몫이 아까워 그것을 ‘코르반’ 공양이라고 선언했다나. 이는 하느님께 바칠 예물이니, 부모님에게 드릴 몫이 아니라나.
즉 그것은 일반인은 사용 못하고 반드시 성전에만 바쳐야 한단다. 이 코르반 서약은 부모님을 모시지 않으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이는 의당 부모님 공경의 계명을 저버리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는다. “너희는 거짓 전통을 명분삼아 하느님 말씀을 폐기하는 못된 짓들을 너무 많이 한다.” 율법이 인륜을 저버린 짓이라며, 그들을 엄히 지적하셨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화려한 성전을 지어 놓고 주님을 위한 봉헌이라면서, 실제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위화감만 안긴다. 이처럼 가진 자만의 교회로 만든다면, 이를 두고 현대판 코르반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주님, 사랑합니다. 제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라면서 가난한 이에게 인색하면 이 또한 그분에게 가면을 쓰는 격이 될 게다. 교만과 위선에 갇힌 인간으로는 절대 드릴 수 없는 기도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 주변에는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이들을 종종 만난다. 믿었던 이에게 사기당하고 가까운 이의 숨겨진 추악함과 가식에서 우리는 자괴감을 맛본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시는 그 이유는?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어, 우리 안에 당신 닮은 모습을 심어 주셨기에. 그러기에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전통이 그분 모습을 닮으려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닐 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정신이 하느님의 자유와 평화로 향하게 하지 않고, 우리가 만든 거짓 율법의 형식 안에만 가두려는 위선적 태도를 엄히 비난하신다. “너희는 오직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나를 헛되이 섬긴다.” 라며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혀 형식주의나 교회의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을 호되게 비판하신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정작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에 무관심해진 것이 아닌지를, 주의 깊게 되돌아보게만 하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이 코르반 서약의 악용을 심히 꾸짖었다. 자신의 것을 약자나 의당 연세 드신 부모님께 드리는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기에. 곧 코르반 제도를 종교적 가면을 쓰고 정작 자신의 체면만 몽땅 챙기려했기에. 우리도 말로만 거창하게 치장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저 ‘코르반’을 외친 저들과 어쩌면 하등 다를 바 없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 태도는 어떠한지? 겉치레인 형식만 신앙인이지, 내용은 속세의 계산에만 얽매인 것은 아닌지를 곰곰이 되새겨 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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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자주 대립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집단의 특징은 목적과 수단을 뒤바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전통과 계명, 입술과 마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사회 지도층이라는 그들은 왜 그렇게
본래의 목적을 무시하고 수단에 집착할까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척하지만 ‘코르반’이라는
주술적 공식 하나로, 곧 하느님께 바친다는
명분으로 부모에게 줄 것을 빼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숨은 지향을 꿰뚫어 보시기에,
자기네 사리사욕을 위하여 사람의 전통을 내세워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전통은 ‘어떤 집단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이나 관습,
행동 등이 계통을 이루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습은 ‘굳어진 개별적인 행동 양식이나 습관’을 말합니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전해 내려오는 모든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대마다 자기 시대에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을 살려 가면서 창의적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발전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전통과 관습이 있습니다.
박물관과 고문서고에 갇힌 전통이 아니라 이 시대
신앙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며 복음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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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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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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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 7)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물음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반성입니다.
신앙의 빛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정신으로부터
옵니다.
저마다
복음의 자리에서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계명의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그것이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위선에서
벗어나는
참된
길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계명은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
사랑을
만나게 합니다.
계명의 무게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의
무게입니다.
가벼운 전통은
쉬이 왜곡되어
너무 빨리
다른 길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좋은 전통도
좋지만
정신을
곧추세우는
주체는
언제나
계명의 정신입니다.
계명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립니다.
계명은 지식이
아닌
생명입니다.
생명의 발동이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계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의
계명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시대를
유행했던
전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폐기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계명입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랑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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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백 퍼센트 예비 병자들이요 병자 후보자들입니다!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언젠가 파리 기차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루르드로 간 적이 있습니다.
열차에 오르니 한량이 여러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배정받은 칸으로 들어가니 2층 침대에
4명이 함께 누워 자게 되어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갑갑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잠들면 탱크가 울고 갈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고니, 민폐가 될까봐, 도저히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루르드로 들어갔습니다.
막 안개가 걷히고 청량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루르드 성지로 들어서는 순간,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이 어찌 그리 맑아지는지, 그리고 성지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성모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져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루르드에는 저를 포함한 수많은 환자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말끔히 치유되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일으켜세워주신 성모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도 여기저기 몸이 성치 않은 분이시니, 병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십니다.
메시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병자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의 최고 증인은 그분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만나신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지 않습니까?”
“팬데믹 시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집중 치료실에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세상과 단절된 채로 외롭게 맞이하고 있는 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 여러분, 여러분이 병자들 곁에서 사랑과 힘을 다하여 실천하는 봉사는 직업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명이 됩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는 여러분의 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신 손길의 표징이 됩니다.”
“가톨릭 보건 의료 기관은 지속적으로 보호받고 존속되어야 하는 값진 보화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교회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곁에 있음을, 병자들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자 방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하시는 초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와 연로한 이들이 집에서 머물며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치유자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모든 병자와 그 가정을 맡겨드립니다.
그들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의미와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아직 젊고 쌩쌩하니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월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느새 우리 역시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병자 후보자가 100퍼센트 확실합니다.
주변의 병자들이 오늘 겪고 있는 사무친 고통과 외로움을 나 몰라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병자들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각별한 존재, 수난당하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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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 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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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회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었는지 알아보는 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속의 법과 인간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고, 본래의 사명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지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마르코 복음 7,1-13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핑계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코 7,6-7)
예수님께서는 신앙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계명은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코르반이라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통으로 무시하는 지도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영화 ‘대부’는 인간이 자신이 타락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망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마이클은 코를레오네 가문이 하는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군에서 명예롭게 복무하고 돌아온 젊은이로, 아버지인 돈 비토 코를레오네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폭력과 범죄를 통해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쟁 조직의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지자, 마이클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경쟁 조직의 두목과 부패한 경찰서를
살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수였지만, 이 살인은 그를 범죄 조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마이클은 이탈리아로 도피해 한동안 평화로운 삶을 꿈꾸지만,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결국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는 도피한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폴로니아와 결혼하지만, 적들의 복수로 인해 그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힘과 통제에 집착하는 인물로 변해갑니다.
결국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부가 됩니다.
그는 점점 더 권력에 집착하며,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마저
의심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형 프레도를 배신자로 의심하고 결국 제거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마이클이 자신의 형제마저 용서할 수 없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조직을 확장하고 가문의 안전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상실뿐입니다.
그의 아내 케이는 그를 떠났고,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가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한다고 믿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단식하는 그날에 제 일을 찾아다니며 일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구나…
너희가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나눠 주고, 집 없는 가련한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에 네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 (이사야 58,3-9)
19세기 프랑스의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부유층과 결탁하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던 교회를 바라보며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교회가 세속의 법에 물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황금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빛나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늘어날수록 나는 세상 법에 오염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립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나 자신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로 둘러싸인 교회는 절대 오염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줄어든다면 그 교회는 분명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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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은 곧 ‘어리석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5-13)”
1) 여기서 ‘조상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의 유명한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 ‘전통’이 아니라, 구약시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는 규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할라카’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실천 방법을 정해 놓은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라카’를 만든 본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그 규정의 본래 의도는 잊어버리고, 그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고 속은 거룩하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당시에 ‘할라카’는 바리사이들만 철저하게 지켰고, 바리사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일반 서민들도 그런 규정은 무시하면서 살았고,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할라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불경한 자들’, 또는 ‘부정한 자들’로 취급했습니다.>
5절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라는 말은, “어째서 당신들은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고 부정한 행동을 하는가?” 라고 시비를 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들은 부정한 죄인들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우리나라의 ‘목욕재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재계’는 원래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씻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몸을 씻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깨끗함’을 이루려고 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도 원래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몸의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착각했고, 결국 몸이 깨끗하면 거룩한 것이라고 우기는 위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는 ‘어리석은 위선’이었습니다(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3) 11절에 언급되어 있는 ‘코르반’ 관습도 원래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민수 30,3).
<하느님께 봉헌한 물품을 함부로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부모 공양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십계명 제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를 안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역시 인간들이 만든 규정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는 짓이라고 꾸짖으십니다(13절).
그런데 만일에 실제로 계명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주일을 지키면 효도를 못하게 되고,
효도를 하면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병하다가 주일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려고 성당에 가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방치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실제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두 계명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 하나로 통합됩니다.
<기도하면서 부모를 간병한다면,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어떤 계명 때문에 다른 계명을 못 지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또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려고 핑계를 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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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7,1-1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분리’하려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즉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길을 걷는 거룩한 사람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하느님께 불의를 저지르는 죄인으로 구분하려고 든 겁니다. 613가지나 되는, 너무나 복잡하고 때로는 서로 상충되기도 하는 율법규정들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며 자기들의 ‘상대적’인 의로움을 과시하는 좋은 ‘무기’가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손 씻는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그 규정은 십계명도 아니고 율법의 핵심 규정도 아닌, 조상들의 만든 전통에 속하는 인위적인 규율입니다. 이교도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에 다녀오면 소위 ‘부정’을 타게 되니 손과 몸을 씻는 예식을 통해 자기에게 묻은 부정을 닦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위생절차’가 아니라, 규정에서 정한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 몸을 씻는 일종의 ‘세레머니’인 셈입니다. 그런 보여주기식 절차를 식사 전과 후, 때에 따라서는 식사하는 도중에도 행했으니 밥 한 번 먹기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손 씻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죄인’취급까지 받아야 하니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참으로 컸겠지요.
하지만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식이나 절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알고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 계명의 근본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단식재나 금육재를 지킴에 있어 노인이나 병자들에게 ‘예외’를 적용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야 계명이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답답한 ‘족쇄’가 되지 않습니다. 죄에 속박되지 않고 영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맘껏 누리게 해주는 주님의 멍에,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는 신앙생활이 ‘코르반 관행’처럼 변질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코르반’이란 하느님께 드리는 서원을 뜻하지요. 내가 가진 재물을 언젠가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이 세상에서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서원을 핑계로 부모님께 마땅히 해야 할 효도를 게을리 한다면 그건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핑계로 하여 그분 뜻을 저버리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되지요. 그 어떤 인간적인 이유도 하느님의 뜻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핑계가 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은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마음과 최선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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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전통의 멍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조건이 있다면 학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행동이 바로 삶의 틀이 되는 것입니다. ‘윗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해야한다.’라는
것은 어린 아이 때부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왜 어른에게 인사를 해야되는지에 대한 정신이 함께 설명되어야
그 아이가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 때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좋은 학습으로 자신의 삶의 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지도자들인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과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학습하는 정신보다 학습된 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왜 하느님께서
쉬셨는지에 대한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쉬셨으니까 쉬어야 한다는 고착된 틀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하느님께서 쉬셨으니까 인간도 쉬어야 한다.’라는 논리에는 정당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왜 인간이 쉬어야 하는가?’라는
명제에는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동등시하기 때문에 맞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쉬셨으니까 인간이 꼭 쉬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본문에
하느님께서 쉬셨으니까 너희도 쉬어야 한다는 말씀은 있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는 예식을 놓고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9)말씀하십니다. 그 정신보다는 그 형식의 전통을
고집하기 때문에 나무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형식에 매우 민감합니다. 외출 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꼭 손을 씻어야 하는 관습이 있었다가 다시 법률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서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씻어야 하니까 뜻도 모르고 그냥 씻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위생학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은 흙이나 바람에 의한 것이고 손을 통하기 때문에 청결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의 먼지나 병균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손을 씻도록 하십니다.
손을 씻는 예식으로 변하였는데 그 자체는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관습을 지키느냐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청결보다는 남들이 그 법을 지키느냐에 대해 더욱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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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으로 써가는 내 삶의 법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씻는 인습에 관한 논쟁(1-7절)과 코르반 인습에 관한 말씀(9-13절)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있었던 충돌을 반영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인의 삶과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의 삶의 상이한 단면을 알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런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윤리규범들을 삶을 위해 해석하고 적용해 왔다. 그런데 기원전 4-5세기 전부터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런 도덕적 원칙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실생활에 세목별로 적용하고, 정의를 내리고 수많은 규칙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구전되어오다가 서기 3세기에 이르러 집약해서 기술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율법에 따르면 오늘 복음의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손 씻는 것은 종교의식행위로 해야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모든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하며, 씻는 물을 특별히 큰 동항아리에 넣어 두어야 하며, 그 물은 정결 예식 외에 달리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손을 처음 씻을 때에는 양손은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다 달걀 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양손이 젖어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걱으로 문지른 다음에, 손과 손가락 끝을 아래로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부정하며 악령이 침범하고 가난해지며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형식보다 사람을 위하는 삶의 속살을 중요시하셨다.
‘크르반’은 히브리어로, 유대교인이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 속인(俗人)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을 말한다. 그런데 부모와 사이가 나쁘면 코르반 서원문을 이용하여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수가 있었다.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짓밟는 짓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법(2,27), 십계명 가운데 인간에 관한 계명(10,19),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라는 사랑의 이중계명(12,28-34)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에서 벗어나 재물을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겨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바리사이들은 약속된 구원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까지도 철저히 지키도록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세심한 사람들은 복잡한 규칙을 엄수하느라고 하느님의 중요한 계명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는 위험과 세칙을 엄수함으로써 자만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는 위험도 없지 않았다(마태 23,23 참조).
이런 모습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곧 외적 형식과 규범 준수에만 몰두하여 성경 말씀의 실천에는 소홀하거나, 규범을 잘 지키고 있으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마음의 지향이요 순수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 대신에 인습만을 고수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셨다. 곧 하느님 계명의 엄수를 핑계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형식주의나 법규준수에 얽매이지 말고 그 속살인 법의 정신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도록 하자!
법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의 삶으로 향기로운 법을 써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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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대체로 좀 지저분하고 품위없는 차림새와 허술하고 어눌한 언변 등 신사답지 못하다는 것이 세인들의 정평입니다. 양말도 잘 안 신고 샌들을 질질 끌고 다니고, 수도복도 지저분하고 수염도 잘 안 깎고, 옷도 싸구려 점퍼차림이 잘 어울리는 남정네들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한편에서는 그게 바로 매력이라고 위안도 해주더군요. 그래서 저희 수도회 회원중에 정상적인 품위를 갖추기만 하면 저희 수도회에선 신사로 손꼽히기도 하지요. 저희와 비교해 보면 교구신부님들이나 예수회원들은 그야말로 신사들이시죠. 깔끔하고 멋지신 모습들이 참으로 품위있어 보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오늘 복음의 이 말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랍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가 밖에서 놀다 뛰어들어와 씻지도 않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면, 그 부모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행여 밖에서 묻혀온 세균이 음식과 함께 입에 들어가 여린 몸에 병이라도 날까봐 겁이 더럭 나겠지요. 그래서 얼른 데리고 가서 씻겨 주며 잘 타이르겠지요. 손을 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한 만큼, 왜 그래야 하는지 알아듣게 해주고 싶을 겁니다. 사랑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켜야 할 관습"(마르 7,4)을 소홀히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비난의 날을 세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이 세기를 거치며 해석이 더해지는 동안 "조상들의 전통, 지켜야 할 관습, 사람의 규정, 사람의 전통,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정신은 어디 가고 형식만 견고히 남아버렸습니다.
독서에서는 어제에 이어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사랑'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돕고 도움이 되도록 순서지어 만드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되도록, 그리고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고 가꾸도록 말입니다. 연약하고 가난한 피조물이 강한 피조물에게 기꺼이 양식(밥)이 되어주는 큰 사랑의 질서를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질서는 일곱째 날 쉼으로 축복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실 사람에게 부여하신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한은 태초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는 '가꿈, 보살핌, 돌봄'의 의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 중심의 탐욕이 끼어들면서 '상하 위계와 불평등, 착취와 억압'이라는 권력의 때가 묻어버렸지요. 이 외형에 집중하는 동안 처음 부여하신 사랑의 정신은 의미가 변질된 문자의 틀에 눌려 질식되고 맙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
이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헤아려 봅니다. 당신은 분명 사랑으로 시작하셨는데, 인간의 전통과 규정은 세기를 거치면서 당신의 뜻과 점점 격차가 벌어지니, 아무리 하느님 사랑이 뻔히 아시고도 번번이 속아주는 사랑이라지만, 그래도 안타깝고 허탈한 마음이 들어 하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많이 바쁘고 허기졌나 봅니다. 저렇게 씻지 않고 급히 먹다 탈 날까봐 걱정됩니다." 이랬으면 참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안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심보가 들어 있지 않나요? 누군가 내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말, 윤리도덕의 관점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되거든 오늘 말씀을 꼭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반응을 하는건지 아니면 내가 형식이나 틀에 매여 있어서 그런건지...
사랑은 그 사람의 약함을 치유시켜주고 변화시켜 줍니다. 단순한 평가와 단죄는 결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나의 영혼에도 분노와 생채기를 남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국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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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큰 기쁨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는 삶
<2025.2.11> 아침을 여는 묵상 (눅 2:1~20절)
❝큰 기쁨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는 삶❞
❚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시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 주님 나라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약속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1~7절).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또한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일하십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호적 등록을 하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였습니다(1~2절). 사람들은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고향으로 갑니다. 요셉도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약혼자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가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3~5절). 그런데 첫 아들을 출산 곳이 없었습니다. 포대기에 싸서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에 아기를 눕히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6~7절). ‘구유’는 지극히 낮은 곳이며,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목자들을 위하여 아기 예수를 바로 찾도록 하기 위함이며 아울러 가난의 상징입니다. 즉,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듬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아니하시고...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빌 4:6~7절)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구 조사를 하는 진정한 목적은 로마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하게 알려주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의 일상적인 발걸음이 역사적인 발걸음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생활이 우리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나 뜨거움이 식어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생활이 나의 인생에 놀라운 전환점을 가져올 역사적인 날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재료로 삼으셔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통해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셔서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신 하늘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평화를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8~14절).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하게 아무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한 채 오셨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솔직히 별 볼일 없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사실 다른 이들에게 큰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자 두려워했습니다. 천사는 그들을 위로하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8~11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 되겠다(12절)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라고 수많은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주가 되십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조차 구주가 되심으로 큰 기쁨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자리에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구원의 큰 기쁨의 소식’을 당당하게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삶은 하늘 시민이라는 신분과 함께 이 땅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어야 하며, 사람들에겐 평화의 메신저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세상이 다 알 수도 없는 그 평화가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 가운데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 생명의 의미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평화의 도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15~20절).
천사들로부터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할지라도 목자들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광스러움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바로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냈습니다(15~16절). 목자들은 그들이 들에서 만난 천사로 하여금 전해들은 구원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17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18절).. 마리아는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일들을 마음에 새기고 깊이 묵상했습니다(19절). 목자들은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20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행동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내 속에는 주저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세상 앞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행동할 때, 주님은 행동하는 그 자리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은 삶으로 살아낼 때만이 나타나고,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듣고, 보고, 경험한 그 모든 것들을 당당하게 세상 속에 전하는 도구로 살아가므로 하나님이 내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임한 영광스러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세상 속에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듣고, 보고, 경험한 복음의 모든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전하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2:1~2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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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 하느님과 사람의 법이 충돌될 때에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3&id=2110725&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50211.07:45 ㅣNo.179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