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11
10월15일[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연중 제2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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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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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MLq-6AesDM
[수원교구 김정욱 마태오(고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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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캄캄해도 희망하십시오!>
일반 교우들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정말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님 같이 진한 하느님 체험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곤경 중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 중에 계시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하느님 부재체험을 겪는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성생활의 대가들께서도 우리와 비슷한 그런 체험을 하신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사실 데레사 성녀의 인생에서 묵상과 관상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데레사였지만, 그분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의 깊은 밤을 헤매 다녔습니다.
깊은 하느님 부재체험과 더불어 오랜 방황과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느낌, 고통스러웠던 세월의 흔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세속을 찾아 헤매 다녔습니다. 세속적인 향락에 자신을 던질 때는 하느님께 빚진 것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하느님 일에 종사하면 세속적인 성향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세속 사이에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그렇게 뚜렷하게 들리는데도 나는 그 소리에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영성생활의 대가께서도 오랫동안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조금도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삶에로의 발 돋음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오, 지루하고 고통스런 삶이여! 산다고 할 수 없고 완전히 버림받아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삶이여! 주여, 언제이옵니까? 아직 얼마나 더 계속 되려나이까?”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습니다. 기도 생활 역시 힘 하나 안들이고 에스켈레이터 타고 올라가듯이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발 한발 오르막 계단을 이용해 밟고 올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영혼의 밤, 끔찍한 하느님 부재 체험,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 데레사의 신앙 여정 안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데레사는 영혼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아주 소중한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최고 단계의 완전성은 내적 위로나 고상한 황홀감이나 현시, 예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일시키고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오늘도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하느님 부재 체험을 겪으면서 지루한 영적 투쟁을 해나가는 우리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며 무엇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하느님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하느님 부재 체험, 버림받은 느낌이 다가 올 때 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캄캄해도 희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밝은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길이 막막해도 우선 내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받히고 계심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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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hFYk0j-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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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 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 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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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설득의 3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두 번째는 ‘논리’입니다. 세 번째는 ‘감성’입니다. 열정이 있지만 논리가 없으면 중구난방이 됩니다. ‘호떡집에 불났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가끔 열심히 이야기는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결론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논리는 있지만 감성이 없으면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그런 말도 있었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다.’ 국회의 청문회나, 국정감사를 보면 그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분명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나쁜 때도 있었습니다. 감성은 있지만 열정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가수는 똑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강의와 개그는 늘 새로운 걸 찾아야 합니다. 열정과 논리 그리고 감성이 있으면 나의 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설득의 3단계가 또 있습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리’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좋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이스라엘이 좋다는 뜻이죠?’라고 이야기해 주면 상대방이 좋아합니다. 세 번째는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나의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도 기분 좋고, 나도 기분 좋게 됩니다. 나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면, 내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설득의 3단계를 한번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본당에는 공적인 조직이 있습니다. 사목협의회를 중심으로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분과에는 분과의 성격에 맞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 구역, 교육, 사회사목, 선교, 청소년에 소속된 단체들이 많습니다. 본당의 사목은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례분과에 속한 단체들이 많습니다. 직원회의를 통해서 수도자와 사무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사목회의를 통해서 사목을 기획하고 조정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선행을 베풀거나 도움을 주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말씀이 별로 없고, 행동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소년가장에게 장학금을 주던 분도 있었고, 독거노인에게 추석이나 설날이면 떡을 나눠주던 분도 있었습니다. 본당의 행사에 특히 청소년들의 행사에 남모르게 후원금을 주시던 분도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분들의 치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을의 정자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말은 없지만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보고, 이런 분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제의 기쁨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 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교회는 제도(Institution)와 선포(Kerygma)가 같이 있어야 하느님 백성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제도만 있고 선포가 없으면 빈 그릇이 될 것입니다. 선포만 있고 제도가 없으면 분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율법학자들에게 ‘선포’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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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베풀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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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잔과 접시뿐이겠습니까? 겉은 깨끗하게 보이나 속은 더러운 것은 잔과 접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만 깨끗하게 보이려 하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정작 그들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1,39 참조)
다른 이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만큼 속이 차 있지 않다는 표지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의 수도 규칙서에서, 수도원에서 계절이 바뀌어 갈아입을 옷을 받게 될 때 좋은 옷을 받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그러한 행동으로써 내적인 거룩한 옷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가난하지 못하여서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그릇을 깨끗이 하거나 손을 씻거나 옷을 깨끗하게 입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이 비어서, 속이 깨끗하지 못하여서 그것을 가리려고 겉을 꾸밀 때 그것은 허영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나의 의로움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굳이 손을 씻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모두 유다인 출신이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규정대로 손을 씻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마음을 버리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다고 보여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진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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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속으로도 겉으로도 깨끗해야(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1) 여기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일’은 일반적인 의미의 손 씻는 일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뜻합니다.(마르 7,3) 그 규정은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파의 규정일 뿐이어서, 바리사이들은 철저하게 지켰지만, 바리사이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고, 그 당시 일반 서민들도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규정을 무시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서민 출신이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그 규정을 안 지켰을 것이고, 제자가 된 다음에도 예수님께서 무시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마르 7,2)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예수님께서 정결 예식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바리사이들의 정결 예식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하지 않으시니까 놀란 것입니다.
2) 39절의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라는 말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복음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잔과 접시’는 사람의 몸을 뜻하는 말로, 또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하다.’라는 말은 ‘거룩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는 말씀은, “겉보기와 다르게 너희는 마음속에 죄와 악이 가득한 위선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고 감히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고, 사람의 마음속도 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마태 6,4.6.18.) ‘속에 담긴 것’은, 여기서는 ‘재물’을 뜻합니다. 앞에서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꾸짖으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 빼앗은 것들입니다. “자선을 베풀어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불우이웃돕기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물들 가운데에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손해배상도 해야 하고, 자신의 재물들로는 아낌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사용하라는 명령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실천했습니다(루카 19,8).>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진정한 회개와 보속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깨끗함’에(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3)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모든 것’은 ‘겉과 속이 모두’라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신앙인들은 ‘겉’과 ‘속’이 똑같이 깨끗한(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속이 깨끗하다."(거룩하다)라고 자부하면서, 겉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막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예의 없는 짓이고, 그런 사람들도 명백하게 위선자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 나이 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동하라고 권고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티토 2,1-3.6-8.)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즉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답게’ 품위 있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작은 행동 하나라도, 품위 없고, 예의 없고, 저속하기만 한 언행을 하면 안 됩니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똑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물론 ‘속부터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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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뷔페에 가서 접시를 집으려고 하는데, 여러분 앞에 단 두 개의 접시만 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는 접시 안쪽은 깨끗한데 바깥쪽이 더럽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은 깨끗한데 안쪽이 더럽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음식을 담아야 하니 안쪽이 깨끗한 접시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겉보다 속이 깨끗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내면을 가꾸기보다 남들 눈에 쉽게 띄는 겉모습에 더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대비되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청렴한 척해도, 속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축적하며 끝없이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루카 복음에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과 비교하였을 때 눈에 띄게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23,26)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내면의 정결함을 직접 주문합니다. 반면에 루카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11,41)라는 명령으로 이를 대체합니다. 갑자기 자선을 베풀라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탐욕이 가득한 인간의 속내를 비판하셨다면, 이 비판은 그런 탐욕으로 축적해 놓은 재산을 그냥 움켜쥐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부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산을 지나치게 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움켜쥐고만 있으면 잔 속의 얼룩은 더 심해지고 뿌옇게 됩니다. 가진 것을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하여 뿌옇게 얼룩진 잔 속을 깨끗이 닦아 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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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11,41)
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청결이나 청소를 썩 잘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이 죽고 난 뒤 본의 아니게 엄마가 앓아누우신 관계로 부엌일을 하고 학교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거의 매일 장독대를 닦고서 등교했었습니다. 그 까닭은 제 엄마가 늘 상 그렇게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 입회하면서부터 지금도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은 요리보다 설거지입니다. 특별히 그릇을 깨끗이 씻는 일과 관련해서 아주 특별한 기억이 많습니다. 예전 서울 대신학교 시절엔, 수도회 통학생들도 점심 식사만큼은 교구 신학생들과 같이 먹었는데 첫날 점심 식사 후 식기를 세척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이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 때는 자신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으니 아마도 깨끗이 씻었겠지만, 점심때는 식사 자리가 변경되기에 자신이 먹은 식기나 수저 등은 대충 흐르는 물에 담갔다가 이내 행주로 씻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광경은 비단 대신학생 때만이 아니라 미국 유학 시절의 시카고 할렘 공동체에서도, 안식년을 보낸 시드니 공동체에서도, 그리고 벳남에서도 거의 비슷했습니다. 제가 이런 광경을 보고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볼 수 없어서 거의 매일 제가 설거지를 전담했지요. 왜냐고요. 제가 그 식기로 먹어야만 했었으니까요. 처음 중국을 방문할 때도 기름진 음식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식당과 식기의 더러움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보다 잘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일은 바로 설거지하는 일입니다. 이 또한 병이고 위선이겠죠?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끗하다, 는 관점을 외부, 외면의 깨끗함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내면 곧 속의 상태가 어떠하냐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흔한 표현으로 우리는 나이 드신 분들을 볼 때, 저 사람은 참으로 곱게 늙었다. 저 사람은 추하게 늙었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 또한 눈에 보이는 겉모습(=얼굴, 체구 등)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말투, 행동, 표정 등을 통해 느끼는 그 사람의 과거-현재의 삶을 내용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가면서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여러분은 어떤 아름다움을 가장 으뜸가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시며 어떻게 그 아름다움 내지 깨끗함을 간직하고 유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깨끗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이다.”(11,41) 하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잔과 접시의 겉만 강조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아니 저에게 예수님은 “어리석을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11,40)라고 질책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속 깊은 뜻을 알아차린 사도 바오로는 할례를 받고 아니 받고,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5,6)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겉도 깨끗하고 깔끔해야겠지만 마음이 곱고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뵈올 것입니다. (마태 5,8 참조)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20세기 아이콘으로, 세기의 미녀로 그리고 유명인의 부와 명예 대신 굶주리는 난민 아이를 품에 안고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펼치던 소셜테이너의 선구자로서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을 인용하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내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늘 성녀 대 데레사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신학생때부터 성녀의 저서를 즐겨 읽었기에 늘 스페인 ‘아빌라’를 가고 싶었죠.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두 번씩이나 ‘아빌라’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 아빌라! 더 아름다운 것은 바로 성녀 데레사의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더 높은 영혼의 성을 향한 불같은 열정과 투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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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본당 신부님은 외국 신부님이셨습니다. 키도 크고 호리호리한 외형, 머리 색깔도 다르고 피부색깔 또 눈색깔도 다른 외국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다른 외모에 처음에는 거리감도 많이 느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잘 놀아주셔서 지금은 포근함과 따뜻한 분으로 신부님의 모습을 기억의 한 편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기억입니다. 이 외국 신부님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완성형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 절대 실수란 없을 것 같은 분,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를 계산해 보니 30대 초중반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50대 중반이니 저 역시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투성이입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더 첨가되었습니다. 노화로 인해 눈도 잘 안 보이고, 잘 뛰지도 못합니다. 헛된 고집만 세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 줄도 몰랐는데 자각할 틈도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았을 뿐인데 어느새 지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완성형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후퇴는 해서는 안 될 텐데 점점 뒤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몸의 후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후퇴는 있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반대편에 살면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요? 몸뿐 아니라 마음도 후퇴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뒤로 가는 삶이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씨지 않는 것을 보고서 놀랍니다. 단순히 유다인의 관습일 뿐인데,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고 꾸짖으시면서, 자선을 베풀라고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위선적인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후퇴의 길이 아닌 완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참으로 깨끗해진다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면서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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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예물 준비를 하면서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 6,4참조)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수녀회원에게 타이르는 말씀을 하셨는데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 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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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씻습니다>
루카 11,37-41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나를 씻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나는
먹습니다
밥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삶을
그래서
먹는 나를
깨끗이 씻습니다
나에게
기꺼이 먹히는
모두를 위하여
나는
먹힙니다
밥으로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삶으로
그래서
먹히는 나를
깨끗이 씻습니다
나를
기꺼이 먹는
모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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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카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하나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이처럼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 깨끗해지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그 자체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원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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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의 나눔으로 비우게 하소서!
사랑만이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져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그 뜻을 퍼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게 하시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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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유>
-자유롭게 하는 사랑-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시편42,2ㄴ-3)
어제는 회개에 대해 나눴고 오늘은 자유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수도생활은 더 큰 자유에로의 내적 여정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진정 영적성장은 사랑의 성장이요 자유와 함께 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하느님의 자유이시다’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 오래전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을 본다
텅비어 있는 하늘
자연스럽게 뻗은 나뭇가지들
하늘은 사랑이다
하늘은 자유다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1997,3.>
하늘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요 하느님은 사랑이자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깨끗한 사랑입니다. 이런 참 사랑이 서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 바오로의 사랑이, 성인들의 사랑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자유로운 모습이 약여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얼마나 율법이나 관습에 매여 있는지 예수님께서 식사전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깨닫습니다. 본말전도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표리부동의 위선적 어리석은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래서는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겉은 걱정안해도 됩니다. 무슨 옷을 입든 어울리며 화장도 성형도 불필요합니다. 사랑의 내적 아름다움과 향기는 저절로 밖으로 스며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자선으로 속의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낼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내외적으로 깨끗한 삶에, 참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입니다. 참사랑과 함께가는 자유요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자유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대자유인 바오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모범이 됩니다.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서두 말씀과 후반부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사랑과 깊이 연루되어 있는 자유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했으니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고 참자유를 누리라는 말씀인데 답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할 때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우리들이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신비가 대데레사 역시 참으로 자유로운 성녀였습니다. 현실적일수록 영적이라 했는데 성녀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성녀는 참으로 낙천적이었고 쾌활했으며 유머도 풍부했습니다. 성녀에 대한 일화도 무수하지만 나누고 싶은 것은 널리 회자되고 있는 성가가 ‘아무것도 너를’ 이란 고백시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 대데레사 성녀의 사랑과 자유의 비밀이 다 드러납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했기에, 하느님만으로 아쉬울 것이나 부족함이 없었기에, 하느님만으로 두려움과 불안이 없었기에, 초연한 사랑, 초연한 자유의 참행복한 삶이 였습니다.
성녀는 1582년 여행도중에 병으로 쓰러지고, 1개월 만인 10월4일, “주여,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긴채 사망하니 향년 67세입니다. 선종후 32년 지나 1614년에 시복되었고, 8년후인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300여년 후인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녀를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으로는 최초 교회학자로 선포합니다. 여기에 성녀 소화 데레사와 성녀 힐데가르트가 추가됩니다. 성녀 대 데레사를 ‘기도의 박사(Doctor Orationis)’, 성녀 소화 데레사를 ‘사랑의 박사(Doctor Amoris)’로 일컫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상 뛰어난 신비가인 성녀의 대표적 저술에는 자서전인 “천주 자비의 글”,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있고 이외에도 무수한 편지와 책이 있습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안팎으로 깨끗하게 하므로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사랑의 자유인으로 변모시켜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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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을 살 것인가? 법을 살 것인가?>
오늘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아주 준엄한 선언을 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기고 은총에서도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이것을 보며 이 얼마나 끈질긴 인간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와 단절하게 하려고 하신 주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님을 반대하여 주님의 제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돌아서서 이젠 주님처럼 율법주의와 단절케 하려는 바오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라티아인들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서고 오늘 우리도 그러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우리의 단체들에서 봅니다. 무엇을 할 때 주님의 뜻보다는 법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 욕심대로 하려다가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그때라도 주님 뜻을 찾기보다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니,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도 법을 끌어들여 자기가 옳다고 또 주장하겠지요.
이렇게 법을 가지고 서로 공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으로 자기가 의롭게 되겠습니까? 또 의롭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자기가 의로운 것입니까?
서로 법으로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밖에 아니고,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그리스도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모두 은총에서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영적인 차원에서나 구원 차원에서 공멸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율법적인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 주님께도 정결례 법을 가지고 감히 대듭니다.
정결례 법적으로 자기들이 옳고 주님은 그르다는 것 아닙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이렇게 나무라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말씀이 제게는 이렇게 읽힙니다. 사랑이 있어야지 사랑은 없이 법적으로만 옳으면 그것은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뿐인 것이 아니겠냐?
아무튼 은총은 주님에게서 오지, 법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은총 안에서 살겠습니까?
자기 의로움으로 살겠습니까?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으로 살기로 마음을 먹겠습니까?
법이나 따지며 계속 살아가겠습니까?
이런 질문도 받고 선택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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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본질에 충실하자!>
오늘 복음(루카11,37-41)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시는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정녕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9-41)
율법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 근본을 이루고 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613개나 되는 또 다른 율법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십계명과 모세오경이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본질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에 충실하였습니다.
마음 속을 깨끗이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마음 속에 탐욕과 사악한 것들을 쌓아놓고서, 겉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식과 규정에만 머물지 말고,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충실하지 말고, 마음 속을 깨끗이하는 본질에 더 충실합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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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아래로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가을들판의
벼이삭을 봅니다.
기도로 힘을
얻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충실했던
아빌라 데레사의
삶입니다.
감춰진 신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안 풀리는 삶도
찢어지는 이
마음도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선택의
절제된 여정입니다.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
신앙의 참된
여정입니다.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깊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씻는
회개입니다.
회개없이는
깨끗해지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일치를 체험합니다.
기도는 열매를 맺고
회개는 고개를
숙이는 정화가 됩니다.
우리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로
나아갔던
아빌라 데레사
성녀처럼
오늘도 그분께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날 되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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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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