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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떨어졌다.
모자를 눌러 쓰고 탈라닥 탈라닥 <쓰랫빠>를 끌고 집 근처의 재래시장으로 나섰다. 약간 넓은 두 개의 긴 골목과 그 두 골목을 가로 질러 이어주는 작은 골목 서너대여섯 개(정확한 갯수는 모른다)로 구성된 이 골목시장은 항상 붐비는지라, 지나치는 사람들의 어깨나 팔이 부딪는 건 예사이고 운이 좋은 날은 본의 아니게 우아하고 조신한 부인네들의 실팍한 엉덩이나 가슴과 두껍게 닿는 경우도 있어 그 재미 역시 꽤나 쏠쏠하기도 한 곳이다.
1.
시장 초입의 길가에다 파라솔을 펼쳐놓고 그 아래 부실하게 세운 스테인레스 옷걸이와 간이좌판에 옷가지나 악세사리를 팔고있는 아줌마가 있다. 경이 엄마다. 수줍음 많은 성격에 조용하고 고운 자태를 가진 그녀는 게법 규모있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남편의 벌이가 괜찮아 꽤나 호강하며 살았었는데 IMF시절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리고 여태 경험하지 못했던 고생을 시작한 사람이다.
아주 예쁘고 영리한 딸래미 경이는 마눌님의 제자였는데, 집안이 완전히 거덜나는 바람에 대학 진학마저 어려워져 작은 도움이나마 될까해서 우리 애들 가정교사를 시키기도 했고, 경이 엄마에게는 맞벌이로 어수선한 우리집에 파출부로 오랫동안 일을 맡기기도 했는데, 워낙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 그게 고마워 마눌님은 옷이나 음식을 아낌없이 퍼 주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사를 해보겠노라 마눌님과 상의를 하는 것 같았고, 반대하는 마눌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결국 옷가지를 갖다놓고 챙넓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쭈삣거리며 서 있는 그녀를 시장입구에서 보게 된 게 4,5 년 전의 일이다.
그녀의 장사터 근처에서 어쩌다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얼굴을 가리고 황급히 다른 상인들 뒤로 숨어버리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웬 사내랑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좀처럼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사람이라 의아하기도 했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삿대질을 해대며 고함을 치는 모습이 심상찮아 모르는 체 하기도 그렇고 해서 엉거추춤 근처에 서서 타투는 내용을 엿들었다.
그 사내는 그녀의 좌판 바로 앞에 있는 안경점의 주인인가 부다.... 몇 년 동안 서로 마주보며 장사를 계속하다 은근히 친해지게 되었나 부다.... .....
사내가 그녀로부터 돈을 좀 꿔 썼나 부다... 그리고 사내는 요새 딴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도 있나 부다...
그녀가 돈을 돌려 달라는 둥, 그 년과 잘 해보라는 둥...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고 있을 때,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와 몇 번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싸움꾼보다 거칠고 험하게 욕과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싸우는 모습이 오늘 처음은 아닌 듯 했고.
그녀가 변했다. 고단한 삶에 지치게 되면 골목시장 한 뼘 좌판도 영혼의 색을 바래게 하기에 충분한 넓이일까. 모른 체 돌아서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오랫동안 그녀의 윤기없는 고함소리가 내내 따라 왔다.
2.
단골 김치가게는 튀김가게의 한 쪽 구석 두어 평을 칸막음해서 빌어 쓰는 소위 '샵 인 샵(shop in shop)' 형태인데, 각종 김치들로 그득 담긴 다라이들이 서로 포개지고 겹쳐진 채 옹색한 공간을 채우고 있고, 한 켠에서 얼핏 남자처럼 생긴 깡마른 아줌마가 절여진 여러가지 야채에 쉼없이 양념을 치대고 있다. 마눌님이 김치담그기를 때려친 이래 거의 십 년 가까이 우리 집 김치를 담궈주고 있는 순천 아줌마이지만, 여태 날 알아 보지 못한다. 마눌님따라 두세 번 와 본게 전부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
"김치 주까?" "네.. 배추김치..." "한 포기 삼처넌! 주까?" "한 포기는 혼자 먹기에 좀 많은데...반만 주믄 안되남요?" "반 포기도 삼처넌!" "......"
암만 봐도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듯 한데, 계속 반말이다. 젠장.. 누구에게나 다 그러는지 훔쳐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다른 아줌마들과 흥정할 땐 그래도 절반 가량은 경어를 쓰기도 한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저 총각김치도 좀 주시지요." "이처넌어치 갖고 가." "니에..."
비닐 봉지를 꺼내서 김치를 슥슥 담고 손이 안보이는 속도로 봉지를 휙휙 돌리니 포장이 완료된다.
"근데, 이거 익었남요?" "이제 막 치댔는데 으째 익어! 우린 익은 건 안팔어. 집에 갖고가서 밖에 뒀다가 내일 냉장고에 너어부러. 그럼 맛있을랑게." "글믄 팔다가 남으믄 어찌하요? 담날 파실라믄 익어버릴 거 아닌가배." "그건 못팔제. 익은 걸 팔믄 쓰간데? 고아원이랑 갖다 주는 데가 있응께 걱정 마러." "돈은 안받고요?"
힐끗 째려보는 눈빛이 험하다. 까딱하믄 한 소리 들을 뻔 했다. 내 생각 같으면 장사 마칠무렵의 잔량을 최소화하고 그래도 부득이 판매재고량이 생기면 그렇게 처분해도 충분한 선행일 듯 한데, 이 냥반은 그런 것 없댄다. 아예 하루 만드는 양의 4분지 1쯤은 당연히 거기로 보내야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 좀 전에 샀던 사과 봉지를 열어 사과 두 톨을 꺼내서 건냈다. 힐끗 보곤 냉큼 받아 구석에 굴려 놓고는 다른 손님이랑 흥정을 시작한다. 고맙단 소리도 없다.
3.
돼지국밥집에 앉았다. 이 집은 시장안에 있는 몇 군데의 돼지국밥집 가운데에서 가장 의자가 편안한 집이다. 시장이란 곳이 원래 그러하지만 구경할 것이 여북 많고, 한 번 훑었던 곳도 다시 가보면 못보고 지나친 게 그제서야 눈에 띄기도 하는지라 한 번 갈 때마다 걸음량이 만만찮은 법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 온 게 틀림없어 편안한 의자가 장땡이다. 이 집에 올 때마다 반복하는 고민이 난 늘 못마땅하다. 소내장국밥을 먹느냐.. 돼지국밥을 먹느냐.. 둘 다 맛이 기막힌데, 고르기가 늘 어렵다. 사실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그걸 선택하고 들어 왔어야 옳다. 항상 들어 와 자리에 앉고서야 고민을 시작하니 욕쟁이 할매가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다.
"뭣 하나 드릴까?" "어, 그게..그러니깐.. 가만 있자... " "염벵! 아무꺼나 처묵어라. 돼지? 내장?" "음.. 내장.. 아니 아니 돼지.. 아냐, 내장으로 할까.." "지랄을 허네.. 바빠 죽것꾸마는.. 빨리 시키라!" "소내장으로 주소. 욕 좀 하지말고.." "문디거튼 소리 하지마라.. 욕도 양념이구마."
소내장을 청하는 그 순간, 돼지국밥 시킬 걸 하는 후회가 동시에 일지만 더 이상 욕 들을 용기가 없어 꾹 참는다. 젠장..난 욕하는 여자들에게 왜 이리 약한겨..
시에라 마에스트라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채 밀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며 고전을 하던 반란군 체 게바라는 더 이상 두 개의 베낭을 짊어질 힘이 그에게 없다는 걸 깨닫고 고민했다. 반란군내의 유일한 의학도로서 그의 동반자였던 의약품이 든 베낭과 탄약이 든 베낭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는데, 그는 결국 의약품이 든 베낭을 버렸다. 이 간단한 그의 행동이 차후 미래를 완전히 달리하는 궤도가 되었다... 그는 무장한 혁명가가 되었지 않은가.
난 뭐냐.. 그깟 소내장국밥과 돼지국밥 가운데 하나를 선뜻 선택 못해 시장바닥에서 할매에게 욕이나 듣고 말이지... 시바!
"할매, 쐬주도 한 병 주소!! 참이슬루다가."
술의 종류만큼은 단호하게 선택했다. 가만.. 차라리 막걸리로 달라 칼 걸 그랬나?
시장 풍경 - 최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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飄風... 좋은 명절 한가위입니다. 넉넉하고 풍성한 시간 보내시길 빕니다.
첫댓글 옴니버스를 타고 시장 한 바퀴 잘 돌고 갑니다... 경이엄마와 쐬주 한 잔 하고 싶은 마음과... 무뚝뚝한 아짐씨한테 김치 한 쪼가리 얻어먹고.. 욕쟁이 할무이 한테.. 욕으로 버무린 내장탕 한 그릇..... 언젠가...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환경따라 그렇게 쉽게 변할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고요..tv를 끄고 나니 명절은 먼나라 얘기같고 조용해서 좋은 시간입니다.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飄風님과 고미님 그리고 자연님도 해피추석
안경점에 돈은 머하러 빌려주노? 문디 콧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일일이 다 겪어보고 알려면 과외비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드네요 시장 구경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