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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기 - 미국월드컵에서의 첫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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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월드컵 당시 골을 넣고 기뻐하는 클린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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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FA 홈페이지 자료 사진 | 90년대 초반, 현대축구에 압박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우승으로 장식했던 독일의 당시 경기력은 '명불허전'이었다. 3-5-2 포메이션에 기반을 둔 중앙압박능력과 철통 같은 수비력, 거기에다가 결정력 높은 공격진을 갖추고 있었던 그들에 견줄 만한 국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우승과 유로 92 준우승의 경기력을 바탕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사상 첫 월드컵 4회 우승을 노렸던 독일의 행보에 걸림돌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거칠 것 없어 보인 그들의 행보는 '장애물 투성이'로 판명되었다. 볼리비아와의 개막전에서 경기초반 상대팀 에이스 에체베리아가 석연치 않은 퇴장을 당하는 행운을 얻었는데도 독일은 1-0 신승을 거두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는 한국에 후반 경기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는 졸전 끝에 3-2의 만족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16강전에서 만난 벨기에도 3-2로 어렵게 승리한 독일은 결국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1-2로 치욕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사실 당시 독일팀의 선수 구성은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공격진에는 선수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었던 클린스만과 헤슬러 그리고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지만 독일축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평을 들었던 푈러가 건재했다.
독일팀의 전통적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중원에는 설명이 필요 없는 마테우스와 이미 강력한 중원장악력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던 에펜베르그 등이 버티고 있었다. 유럽최고의 골키퍼 일그너와 브레메·쾰러 등에 신예 잠머가 가세한 수비진의 위용도 다른 포지션에 못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수 균형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8강 진출이 그들이 받은 성적표의 전부였다. 물론 월드컵 같은 단기전에서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고서도 조기탈락하는 비운을 맞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2006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여준 독일의 경기력은 불운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우선 실점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것도 세계 최정상급의 팀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 불가리아·한국·벨기에 등에게 2골 이상의 득점을 허용한 것은, 적은 실점으로 경기를 승리하는 독일팀의 전통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미식축구장을 개조한 운동장에서 그것도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뛴다는 것이 팀의 다수를 이룬 노장선수들이 감당하기에 벅찼다는 평이 있었지만 덥기는 다른 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위보다 더 큰 부진의 원인은 1990년 월드컵 우승 이후 전력과 전술운용이 상대에게 너무 노출·모방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체격과 체력을 앞세워 중원을 장악하는 독일 축구의 스타일은, 라이벌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 더 이상 유별날 것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현실에 안주해 90년 우승신화의 선수들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은 '자승자박'이었다.
마테우스를 비롯한 선수들이 예전의 위용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적들은 그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몰락의 전조 - 망한 부자를 3년간 먹여살려준 '마티아스 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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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활약하던 시절의 마티아스 잠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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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efa 홈페이지 | 미국월드컵 실패 이후 독일팀은 분명 세대교체를 단행해야만 했다. 사실 그러한 작업은 1994년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포그츠 감독을 비롯한 독일 축구 운영자들은 또다시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푈러와 같은 영감님(?)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선수들은 신예선수들의 위협 없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월드컵에 세 차례나 우승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세계최강으로 인정받은 적은 1990년밖에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8년에는 푸스카시가 이끄는 헝가리가 단연 세계 최강이었고, 1974년에는 크루이프의 네덜란드가 최고의 팀이었다. 축구팬들은 독일의 우승을 언제나 '이변'으로 이해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우승을 '이변'이라고 말하는 축구팬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만들어 낸 선수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에펜베르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른을 넘어선 미드필더들의 무뎌진 활동력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수비수를 늘려 선수들의 동선을 중앙선 아래로 내리는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유로 96은 이러한 독일의 전술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회였다. 1-4-4-1이라는 수비에 치우친 포메이션을 채택한 그들은 확실한 한방이 가능한 클린스만과 결승전 골든골로 혜성같이 등장한 비어호프의 활약으로 몰락의 속도를 잠시나마 늦출 수가 있었다.
특히 스위퍼를 담당했던 잠머의 활약이 없었다면 독일의 우승은 요원했을 것이다. 잠머는 이미 유럽 최고의 리베로로 인정받고 있던 선수였다. 그의 탁월한 수비 지휘능력과 활발하고 정확한 공격가담으로 독일은 수비수가 다섯명이어서 공격수가 부족한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은 경기당 1.17골이라는 극심한 빈공을 펼치고도 우승트로피를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로 96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독일이 우승해서는 안 될 대회였다. 지나치게 수비에 치중한 나머지 그들의 팀 속도는 너무 느렸고 '부동의 원톱' 클린스만의 선수생명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대교체와 다이내믹한 전술운용을 더디게 만든 장본이기도 한) 잠머가 전력에서 이탈할 경우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승은 이 모든 결점들을 잠재우는 명분이 되었다. 199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고 그해 유럽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던 절정기의 잠머에게 다가온 '치명적 부상과 갑작스러운 은퇴'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그에게 의존한) 독일팀에 분명한 재앙을 가져다 줄 터였다. |
2006-07-05 15:15 |
ⓒ 2007 OhmyNews | | |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 언능가서 2편봐야지 ㅋ
좋은글이네요 잘읽었습니다.
잠머 같은 선수 왜 요즘에는 독일에 안 나올까요ㅠㅜ
잠머도 부상만 아니었다면 은퇴도 멋지게 했을텐데 잠머가 94년 96년에 독일을 살렸죠 에펜베르크 잠머에게 불운만 없었다면 독일은 그때 한번 우승도 할수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