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여호24,1-13)(마태19,3-12)
제1독서 <나는 너희 조상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왔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된 땅으로 데려갔다.> ▥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 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3.08.18.mp3 5.37MB ♣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었지만 열두 지파 연합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데에는 여호수아가 그 모든 것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들이 정복한 땅도 있고 정복에 실패한 땅도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레위지파를 제외하고 열한 지파에게 땅을 차례로 분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뛰어난 영도력을 발휘해서 무사히 땅 분배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켐에 지파들의 지도자들을 모이게 해서 집회를 갖습니다. 거기에서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야곱의 자식들을 이집트 노예의 생활에서 불러내서 사막의 여정을 걷게 하시고 함께 하신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약속대로 각 지파에게 정복한 가나안 땅을 나누어 주신 사실을 아울러 전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이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바리사이들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마태 19,3)라고 항의의 말을 합니다. 자기들 딴에는 모세의 법이 있어 이혼은 합법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8-9)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OECD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동안 단기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쳐 급성장한 경제의 폐단에서 오는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미래에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부로서의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리는 이혼결정들을 보며, 바리사이들이 내세우는 합법적 이혼권리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은 부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인간차원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삶의 중대한 사항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용하며 바리사이들에게 대답하신 창세기(2,24)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까요?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4-6)
새로 탄생한 부부의 한 가정은 결혼 후부터는 부모의 예속이 아니라 독립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은 옥이야 금이야 기른 아들이 결혼 후에 부모에게 전화 한 통도 없고 그분들의 표현에 의하며 ‘마누라에게 푹 빠져 부모도 모른다.’라고 한탄하는 연세가 지긋한 부부의 슬픈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노부부와 차를 마시다가 마침 책상 위에 성경이 있기에 창세기의 이 대목을 가리키며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은 다 잃고 ‘왜 저희들에게 이것을 읽으라고 하느지요?’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라는 대목을 읽어주며 ‘부모를 떠나서’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고 속상한 것은 우리.’라며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가 그래서 그럴까요? 지금은 많이 변하기는 해도 아직 우리는 너무 자식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모로서 결혼 자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야 없겠지요. 그런데 자식을 자신의 소유라고 스스로 매어놓아서 그 족쇄를 벗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식대로 생각하고 내 식대로 챙겨 준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지요. 그런 고리가 어긋날 때, 받지 않아도 되는 섭섭함과 상처를 달고 사아야 하는 것이지요. 고생을 사서한다고 할까요? 성경에서 왜 ‘부모를 떠나서’라고 했을까요? 결혼한 자식은 어엿한 독립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부모가 책임 질 일이 아니고 부부가 헤쳐 나가야 과제인 것이지요. 결혼한 자식은 닥치는 문제와 어려움을 통해 더 성숙한 부부가 되고 틀이 잡히 가정으로 다지지요. ‘콩 놔라 팥 놔라.’라는 식의 참견은 자식의 가정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결국 의존형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신 선물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지요. 거기에는 권리와 책임도 짝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은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특징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자식들에게 소유욕에서 빚어지는 속박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가정은 하느님의 축복과 함께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