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굴 심사한단 말인가" 탈코르셋 원조는 이것
▲ 2000년 4월 18일 <한겨레>에 실린 기사 |
ⓒ 한겨레 |
2000년 4월 18일자 <한겨레>에 제2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소식이 실렸을 당시, 나는 그 대회의 관객도, 출전자도 아닌, 스태프였다. 두 번째 행사만큼은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었기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축제 준비 실무진 일찌감치 참여했다. 첫해에 '입장 실패'라는 쓴맛을 맛본 경험 때문이었다.
1999년 서울 중구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제1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은 1000명이 넘었다. 행사장 규모가 400석이어서 돌아가야 했던 사람만 수백 명이었다.
설립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는 잡지사인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에서 첫 단행본 출간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작은 이벤트였기에, 주최 측도, 무대에 오르는 출전자도, 관객들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축제에 함께하려고 대기하다 결국 입장에 실패하고 되돌아간 관객이었다.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수백 명의 여성들을 목격하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안티, 미스코리아
▲ 2000년 5월 20일 KBS 뉴스에 소개된 제2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
ⓒ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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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당시의 자료집은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지향하고자 했는지 잘 보여준다.
▲ 제2회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 자료집 |
ⓒ 조박선영 |
- 왜 심사위원이 아니고 격려단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심사한단 말인가? 왜 꼭 대상과 주체로 분리시켜서 경계를 나누고, 등급을 매겨야 하는가? 누구나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 격려단은 단지 이번 행사에 출전한 이들의 용기와 그들이 뽐내는 아름다움을 격려하고 싶을 뿐이다.
- 왜 심사기준 하나 번듯하게 없는가?
사람들은 자꾸 우리에게 강요한다. 미인대회가 그렇듯이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도 이렇다 할 선정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야 권위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한다고. 그러나 우리도 할 말은 있다. 우리는 미인대회의 강박적인 심사기준을 거부하기 위해서 '안티' 행사를 마련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도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자꾸 기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심사하고 우열을 가리고 열등감을 느끼게 하라니 말이 되질 않는다. 모름지기 모든 대회나 경선은 '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벗어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정말 객관적인가. 이성을 차리고 생각해보자. (2000 anti misskorea festival 자료집 '심사유감' 중)
박미라 이프 초대 편집장이 쓴 '심사유감'은 이 축제가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재미있게 놀고 서로 격려하기 위한 행사라는 점을 구구절절하게 밝히고 있다. 유난히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되는 억압적인 기준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성'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며, 철저하게 주관적인 존재들이 숨 쉬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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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공연. 성형 수술과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한 '성형클론' |
ⓒ 오마이뉴스 |
▲ 제5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열린 행사장은 시작전부터 발디딜 틈없이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
ⓒ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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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미를 둘러싼 고정관념은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라는 무대에서 충분히 비판받았고 대중의 호응도 얻었다. 그 결과 2002년 공중파 방송에서 미스코리아 대회가 더 이상 생중계되지 않았다. 그건 분명 승리였다. TV에서 수영복과 요란한 파티복 입은 여성을 점수로 매기고 품평하는 장면이 공공연하게 방영되지 못하게 됐다는 건 속이 다 시원해지는 일이었다.
▲ 2004년 5월 9일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격려위원단이 '굿바이 미스코리아, 고별행진'을 하고 있다. |
ⓒ 오마이뉴스 |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문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축제는 6회(2004년)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표면적으로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더 다양하고 집요하게 자리 잡은 우리 안의 억압들은 이야기되지 못한 채.
페미니즘 리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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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내 눈이 번쩍 뜨인 건 2015년 페미니즘 커뮤니티인 '메갈리아'의 탄생을 보면서부터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논란들이 신선했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느새 나는 메갈리아의 유저가 됐고, 그곳에서 여성의 이미지들이 불법적으로 촬영돼 범죄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 이희훈 |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 어느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중략)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공감대가 형성되자, 다시 페미니즘이 떠올랐다.(중략)
그 과정에서 내가 목격한 온라인의 담론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갖겠다는 요구들이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모토로 '나의 몸은 나의 것'이라는 문구가 퍼졌다. 대학로와 광화문에서는 2018년 일년 내내 여성들이 모여 불법촬영 규탄 시위를 열고 '여성의 몸을 함부로 찍어 유통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 동안 여섯 차례 모였던 참여자의 누적 집계 수는 약 36만 명에 육박한다.
(중략)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 있는 사회적 폭력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대안을 주장하고 요구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이 지속적으로 모일 수 있다는 건 분명 '힘'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할 수 있겠다,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자존감이 살아나는 경험이었다.
(중략)
탈, 코르셋
▲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온라인 계정에 부러뜨린 립스틱, 잘라버린 머리카락 사진을 올리고 '꾸미지 않을 자유'를 외쳤다 |
ⓒ pexels |
이제 여성이라면 누구든 '탈코르셋'이라는 단어의 상징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코르셋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2020년이다.
단언컨대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코르셋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여성의 정의를 새로 쓰는 여성들의 행동과 연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