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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로마서 14:1-15:13
다같이 저를 따라 인사하겠습니다.
“당신도 부족하고 나도 부족하니 부족한 사람끼리 잘해봅시다.”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교회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많은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연약한 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불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으며 세상을 향하여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통하여 서로를 받아줌으로써 화목하고 강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로마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음식 먹는 문제와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 서로 판단하며 불화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먼저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연약한 자를 향하여 명령합니다. 1절을 보시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믿음이 연약한 자 그룹은 주로 유대인출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자유하게 된 것을 알지 못하여 구약에서 금했던 미꾸라지 장어, 돼지고기같은 음식을 여전히 먹지 못하고 음식과 날들에 대한 구약의 규정을 여전히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는 절대 안먹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자들은 대부분 이방인출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자랑하며 할머니 추어탕, 백마강 장어구이, 심청이 삼겹살을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것과 날들에 대하여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먼저 말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또한 “모든 것을 먹을 만큼 믿음이 강한 자는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고 합니다. 또 믿음이 연약한 자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먹는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놓고 판단하고 논쟁하기도 합니다. 주일저녁예배를 드려야 되느냐 안 드려도 되느냐, 교회 올 때 어떤 옷을 입어야 되느냐, 성형을 어느 정도까지 해도 되느냐, 우리도 때로는 옷을 너무 사치하게 입거나 야하게 입으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고급 외제차나 골프를 치고 하면 은근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교정이나 쌍꺼풀은 봐줄수 있는데 양악수술을 하고 콧대세우기뿐 아니라 보톡스 주사를 자주 맞고 거듭하여 성형을 하면 판단합니다. 결혼을 한번하지 않고 두 번 세 번하면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입각하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면 우리도 서로 영접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서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왜 서로 비판하지 말고 받아주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차별 없이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b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가족이며 형제자매입니다. 10절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비판하고 우리가 업신여긴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형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이기 때문에 음식이나 날이나 옷이나 화장이나 헤어스타일이나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이 한 부모 아래서 양육을 받을지라도 첫째와 둘째의 취향이 다르고 맏이와 막내의 취향이 다르고 아들과 딸의 취향이 다릅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옷 입는 스타일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하물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성도들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다른 점들을 인정해 주지 않고 나와 똑같이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성도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나의 형제자매로 영접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으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2)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4절을 보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여기서 ‘남’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세우시는 권능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이요 왕으로 모신 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합니다. 6-9절을 보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킵니다. 또한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기 위해서 보신탕도 먹고 추어탕도 먹습니다. 어떤 분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어떤 분은 조용히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매정하게 떠난 성도를 위해 심방하고 어떤 분은 그 성도가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도록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 때문에 서로 믿어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3) 심판자는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가 행한 일을 직접 아뢰게 될 것입니다. 10-12절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고 형제를 업신여기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들을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데 힘써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한 말과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자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비난과 부정적인 말을 피하고 믿음의 말과 긍정의 말과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성도를 위해 자유를 양보해야 합니다.(13) 이렇게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호소한 다음 바울은 13-23절에서 강한 자를 향하여 권면합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형제가 걸려 시험들 수 있는 어떤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강한 자가 연약한 형제가 보기에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그 앞에서 계속 먹는다면 이것은 그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입니다. 제사에 바쳐진 음식 먹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형제 앞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며 맛있게 먹는다면 믿음이 연약한 형제는 상처를 받고 실족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연약한 성도 앞에서 지도자나 인도자가 꺼림칙하게 생각되는 일을 하나님께는 문제될게 없다고 여시고 한다면 그것도 연약한 성도의 믿음을 무너지게 할 수 있습니다.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피해야 하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자유롭게 되었다해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서 부정한 것은 없다는 것을 주 예수 안에서 확신합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예수님은 레위기의 음식법에 매여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7:18,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제사법과 정결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신자들은 모든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 양심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절제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고, 양심에 꺼리낄 것이 없다고 해서 모두 선하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1)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로운 행동이 연약한 성도를 근심하게 하고 망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면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한 성도를 사랑해야 하고 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란 형제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유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내가 개고기를 먹을 수 있을지라도 개고기를 꺼리는 형제 앞에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2) 만일 강한 자가 이런 문제로 교회 안에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면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를 비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예수믿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17). 의는 하나님과 형제들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희락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 간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의 누리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서로 충돌하면 강한 자가 당연히 양보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자기의 자유보다는 상대방의 유익과 교회의 화합을 더 앞세워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습니다(18).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19).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은 서로 격려하고 세워줌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본질적인 문제인 음식을 인하여 교회 안에서 불화와 불신을 초래하게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형제자매를 위해서 자기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21절을 보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믿음이 강한 자는 음식과 날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먹어도 괜찮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별히 연약한 자가 충분한 확신이 없이 억지로 고기를 먹고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내가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이성교제를 할 수도 있다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으로 하지 않고 남이 한다해서 하거나 의심하며 하는 것들은 나중에 영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살피며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의 연약함을 이해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양보하고 절제하여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도 약한 성도들을 도울 때 성도들의 신앙의 단계를 알고 잘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게 말씀을 먹이고 성도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방향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씀으로 이렇게 순종했으니 너도 그래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는 양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주기도 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서로를 받아줌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깊이 받아주고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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