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까『뭐든 해 봐요』김동현 판사
많이들 하는 간단한 시술 도중 발생한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IT 전문 변호사를 꿈꾸던 로스쿨 재학생 김동현에게, 상상도 해보지 못한 시련이었다. 당연히 분노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곧 시각 상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시각장애인이 된 사실이 끝이 아니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다시 공부에 도전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김동현 판사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인생의 시련을 맞닥뜨린 모든 이들에게 담담하게 건네는 응원, 『뭐든 해 봐요』를 쓴 김동현 판사와의 서면 인터뷰를 전한다.
글쓰기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쓴다는 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예전부터 책을 써 보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책이냐 싶어서 안 썼죠. 그런데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가고 나서 반응이 좋았고 제 이야기를 더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분량 때문에 인터뷰나 방송에서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어서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고요. 쓸 땐 힘들었지만 쓰고 나니 뿌듯합니다.
의료사고로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셨는데요. 갑작스러운 시련에 절망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해요. 하지만 책에서는 판사님이 느꼈던 절망과 분노, 우울의 감정들은 짧게 언급되고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들에 대해서는 좀 더 길게 쓰셨더라고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판사님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절망과 분노, 우울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어렵죠. 빠져나올 대책을 세우려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죠. 그런 현실적 해결책을 고민하는 과정이 빨리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그 때의 절망과 분노, 우울 같은 것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고 누구나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 어떤 느낌일지 아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부분은 길게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의료사고를 낸 의사를, 용서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누워서 할 일이 없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되는데요. 이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다른 사람 입장에서도 이 상황을 평가해 보는 거죠. 물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을 해 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죠. 용서는 마음 속의 응어리진 감정이 풀려야 하니까 훨씬 오래 걸리고요. 제 경우에는 상대방 태도도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그 쪽에서 책임을 부정하거나 회피했다면 저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었겠지요.
시각장애인이 된 판사님에게 도움을 준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셨어요. 인상적인 부분은, 도움을 준 분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도움을 주고, 판사님도 그런 도움을 받는 일을 부끄럽거나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만 대하지 않는 거였어요. 인간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내용들이었어요.
판사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나요? 도움을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주고받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부터 자연스럽지는 않았어요. 예전에 누군가 그러셨는데 도와줄 만하니까 도와주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말라고요.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자기가 느끼는 것입니다. 도와주시는 분들은 그럴 여력이 되고 그러고 싶어서 하시는 것이거든요. 그냥 그분들의 선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활용하면 되는 거죠. 누구라도 어려운 순간을 겪어요.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부끄럽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스타일은 아니고 누군가가 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기 때문에 미안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고요. 나중에 그 분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와 드리면 되지요.
「소소한 성취감이 쌓여 괜찮은 삶을 만든다」 챕터가 좋았어요. 작고 사소한 성취감이 판사님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작은 것이라도 성공을 해서 성취감을 맛봐야 그 기쁨을 알게 되거든요. 그래야 자존감도 생기고요. 실패가 거듭되면 자괴감만 들고 그 일을 지속하기 어려워져요. 작은 것에서 성공의 기쁨을 느끼고 ‘난 할 수 있다’, ‘난 잘 하고 있다’는 마약을 지속적으로 주입하면 그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이겨 나갈 힘이 됩니다. 사람 성향에 따라서는 채찍질이 더 빠른 효과를 보일 수 있지만 그러면 그 과정이 행복하지는 않잖아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괜찮은 삶을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요?
시작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학업을 지속해서 판사가 되고, 일상 적응 훈련을 통해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히고, 마라톤을 하고, 쇼다운 국가대표가 되고 그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셨는데요. 그렇게 새로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판사님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한 것도 있지만, 사회가 제공한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 덕분이라고 하셨어요.
판사님에게 도움이 되었던 사회적 도움이라면 어떤 것이 있었나요? 그리고 장애인에 대해서 사회가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눈이 안 보이게 되면 불편한 점이 엄청나게 많죠. 그렇지만 접근성이 확보되어 있으면 자기가 적응해서 해결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하는 부분은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활동지원과 근로지원이 제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스스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그래서 구체적 내용을 책에 담았습니다. 장애인에게 접근성과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장애인이 신체적, 정신적 손상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과 동일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미리 접근성을 갖추어 두면 누구나 어려움 없이 쓸 수 있고, 접근성이 부족하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서 장애를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죠.
3부에 판사님의 공부 얘기 재미있었어요. 특히 판사님의 '포기하기' 관련한 이야기는 재미도 있었고 또 생각해볼 대목인 것 같더라고요. 카이스트에서 학점이 안 나와서 도피성 전과를 하고,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행정고시에서 로스쿨로 방향을 바꾸고, 공부할 분량이 너무 많으면 과감하게 양을 줄이는 것이 누가 보면 끈기 없고 잔머리 굴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안 되는 것이 뻔한 걸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는 없거든요.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끈기와 인내'만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고 가끔은 잔머리도 필요한 것 같은데(웃음), 판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확히 보셨네요(웃음). 열심히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걸로 바꿔야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 하는지 경험해보지 않고 정확히 알기 어려워요. 세상에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전력을 다해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돌아가는 것도 용기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있어서 자기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해요. 사람마다 특성이 달라서 잘 맞는 방법이 있고 아닌 방법이 있거든요.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열심히 하면 힘만 들고 성과를 얻기 어려워요.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조인이 갈 수 있는 길이 다양하다는 건 잘 모르던 내용이었어요. 일반인은 드라마에서 보는 판사나 검사, 또는 대형 로스쿨 변호사의 모습이 법조인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저는 공익 변호사의 일이 흥미로웠어요. 대형 로펌 변호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가장 큰 점은 돈이 되는 사건을 하느냐 안 되는 사건을 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 로펌을 선임하시겠죠. 그런데 그런 수임료를 부담할 여유는 안 되지만 법률서비스가 필요한 분들이 있거든요. 공익변호사는 주로 그런 분들을 지원합니다. 로펌에 있다 보면 의뢰인들 요구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가 가끔 생기는데요. 그럴 일이 별로 없고 어려운 분들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일하는 보람도 큰 것 같아요. 그래도 마냥 빈손으로 일할 수는 없으니까 공익변호사들이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잘 갖추어지면 좋겠습니다.
판사가 가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어요. 어떤 판사가 되고 싶은가요?
좋은 재판을 하는 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기록을 꼼꼼히 읽고 법리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예단을 가지지 않고 당사자의 이야기를 잘 들으면서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도 내가 내린 결론이 일방에게 너무 가혹하다면 과연 합당한 결론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누군가의 인생에 중대한 갈림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법부는 인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까지 소홀하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면 참 좋겠습니다만 뭐든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뉴스를 봐도 답답한 소식들뿐이죠. 경쟁이 있는 이상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어요. 그래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 합니다.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성취감을 맛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대박도 터지고 괜찮을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감과 연대는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는 과정에 이 책이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
첫댓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 !
있는 자는 더 얻을것이요?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감사가 있는자는) 더 얻을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