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 자신의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와 옛 터전에 다시 정착하였다. 그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약 6년 이상 방랑 속에서 고통을 겪은 이후의 시간이다.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이 당시 시인이 처한 고달픈 심경과 여건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백석 시인은 방랑의 시간 속에서도 떠나온 고향의 기억과 체험의 원형질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타향의 고생스러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만주 유랑의 세월을 견디었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 시인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비록 가진 것 없는 빈곤의 처지였으나, 마음만은 귀향의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새로운 시련의 세월이 준비되고 있었다. 소련의 절대적 지원 속에 등장한 김일성 정권의 공산주의 체제는 백석 시인의 가치관과 이상에 절대적으로 부합되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일사불란하게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으로 정비되고 구획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는 모종의 불안감을 가졌던 듯하다.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작품에는 공산주의 체제 수립에 대한 외형적 찬탄과 감격이 나타나 있는 듯하지만, 면밀히 작품들을 읽어보면 거기엔 획일화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불안감 따위가 가시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 [갓나물]에서 작중화자인 시인은 홍원 전진의 동태 생선에 비해서 삼수갑산 갓나물이 훨씬 좋다는 것을 순박한 산골처녀의 입을 빌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처녀 아나 모르나' 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백석 시인의 불안감이 서려있는 어투를 감지해 낼 수 있다. [탑이 서는 거리] [제3인공위성] 등에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는 [갓나물]에서의 불안감을 실루엣처럼 읽어낼 수 있다. 사실 백석이 창작활동을 일체 중단하게 된 것은 1962년 10월 경 북한 문화계 전반에 밀어닥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쓴 백석의 시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동식당]이다. 이 작품은 시인의 초창기 작품인 [여우난골족]을 연상케 하는 요소가 있다.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 백석이 북에서 발표한 시작품은 단형 서정시 13편과 동화시 [집게네 네 형제]에 수록된 12편 등 25편만 알려져 왔다. 백석은 평소 가장 아름다운 동화는 반드시 시의 형식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뚜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구비로 전승되어 오는 전래동화의 내용을 줄곧 시로 써간 형태가 [집게네 네 형제]이다. 백석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전체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운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어린이들이야말로 앞날의 주인공으로서 보다 높고 보다 맑은 뜻을 가져야 한다고 늘상 강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연히 찬란하고 공연히 호화롭기만 한 언어를 일부러 멀리 하고 항상 소박하면서도 살아있는 듯 싱싱한 느낌이 드는 말로 동화를 써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하였다.
햇빛은 빛이 없는 듯 오히려 강한 빛을 지닌 것이며, 땅은 소리가 없는 듯 오히려 더 높은 소리를 지닌 것이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백석, [나의 항의 나의 제의], {조선문학}, 1956년 9월
이것은 백석 시인이 시를 이해하는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에는 모두 12편의 동화시가 실려 있다.
[집게네 네 형제] [쫓기달래] [오징어와 검복] [개구리네 한솥밥] [귀머거리 너구리] [산골총각] [어리석은 메기] [가재미와 넙치] [나무 동무 일곱 동무] [말똥굴이] [배꾼과 새 세 마리] [준치 가시] 등이 그 제목들이다. [집게네 네 형제]는 자기 분수에 맞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다루고 있다. [쫓기달래]는 굶주림 끝에 얼어죽은 불쌍한 소녀 오월이가 달래로 태어났다는 슬픈 전설을 다루었고, [오징어와 검복]은 자신의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체성을 일깨워 준다.
[개구리네 한솥밥]는 아름다운 협동의 정신을 가르쳐 주고, [귀머거리 너구리]는 현실의 사정에 어두운 결과가 얼마나 불행한 일을 몰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알려 준다. [산골총각]은 지혜로 악당을 물리치는 용감한 사람을 다루며, [어리석은 메기]는 분수를 잃고 헛된 꿈을 꾸다가 결국 불행에 빠지고 마는 못난 인간을 다루고 있다. [가재미와 넙치]는 포악한 지도자의 통치가 백성의 가슴을 얼마나 멍들게 하는가를 말하고 있으며, [나무 동무 일곱 동무]는 이 세상 어느 누구나 모두 귀한 쓸모가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말똥굴이]는 게으르고 우둔한 인간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으며, [배꾼과 새 세 마리]는 아무리 힘든 역경에 처하여도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기를 이겨낸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끝으로 [준치 가시]는 반찬 투정하는 어린이의 볼멘 소리를 겨냥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어서 그리된 것인데, 시인은 이 사실을 가시가 많은 준치를 통해서 재미있게 알려준다.
이 동화시 12편을 통하여 백석 시인은 자신만이 생각하는 문학의 모든 방법과 신념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었다.
전집 발간 이후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백석의 시작품 발굴을 위해 노력한 경우는 단연 김재용이다. 그는 분단 이후 북한 문단에서 발표된 백석의 시작품을 다수 발굴하여 자신이 편찬한 {백석전집}에 수록하였다. 이로써 백석의 시작품은 일제강점기에서 분단이후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그 윤곽이 정리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작품이 새로 발굴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백석 연구가이자 시인인 박태일이 이 부문에 대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는 창작시 [병아리 싸움]과 [머리오리] 등 두 편을 새로 발굴되어 추가한 사실이 있다.
[병아리 싸움]은 1952년, 즉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서 발간되었던 우파 조직의 간행물에 수록된 작품이다. 북한에 거주하던 백석의 작품이 이러한 잡지에 실린 까닭은 백석 시인과 동향이었던 북한 출신의 한 인사가 분단 이전부터 이 작품의 원고를 소장하고 있다가 월남한 뒤 이 잡지를 통해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굴자 박태일은 추정하고 있다. [머리오리]는 비록 김종한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된 시작품의 형태이지만, 백석 특유의 시적 호흡과 문체의 특성이 매우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그리하여 발굴자 박태일이 백석의 일문 번역시를 백석 시인 특유의 시적 문체와 호흡을 잘 고증한 다음 한국어로 옮기고 다듬어서 위와 같은 형태로 정리하였는데 이를 과연 어떠한 텍스트로 다루어야 할지 좀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 필자는 위에 소개된 두 편의 작품 이외에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백석의 시작품 한 편을 새로 발굴하여 앞으로의 백석 문학 연구를 위한 귀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이 기회에 공개하고자 한다. 연구자의 편의를 위하여 다음에 그 전문을 원문 표기 그대로 수록한다.
■ 신발굴 백석 시(이동순 발굴 자료)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백 석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먼먼 훗날에
세상에선 옛이야기 하나 전해 가리라.
서쪽 나라들에서는--
[그 옛날 어느 동쪽 나라에…]
동쪽 나라들에서는--
[그 어느 산 높고 물 맑은 나라에…]
그 이야기 허두 이렇게 나오리라.
그러나 그 이야기 하나로 흐르리라
[그 나라는 한때 긴긴 밤의 나라,
그 나라 사람들 광명을 못 보고 헤매었더라.
그 나라 독거미 같은, 승냥이 같은 원쑤들에게 눌려
그 나라 사람들 고통 속에 울었더라]
그 이야기 이렇게 이어 가리라
[그 나라에 한 영웅 태여났더라
지혜와 용기 천하에 비할 데 없이,
나라와 인민애의 사랑 불보다 뜨거웠더라.
그 나라 북쪽 높은 산 우에 칼을 갈은 그
눈 속에 자고, 바람을 마시기 열 다섯 해,
드디여 원쑤들의 손에서 잃은 나라 찾고
인민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였더라.]
그 이야기 또다시 이어 가리라
[영웅은 한 가지 진리를 믿어 싸웠더라
가난하고 학대 받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
이 진리 대로 영웅이 꾸민 나라,
이 나라엔 가지가지 기적들 일어 났더라 --
산은 옮겨지고, 강물은 산으로 오르고
하루 밤 새 하늘 닿는 집채 일떠서고
하루 낮에 마른 땅은 오곡으로 물결쳤더라
조화에 찬 기계 소리 온 나라에 울리고
창문마다 밤이면 별 아닌 별들 반짝였더라
이리하여 이 나라 사람들
풍성한 살림 속에 노래 부르고 춤추고
자유와 행복을 누려 나는 새 같았더라.]
수많은 시인과 력사가와 이야기꾼들은
아름다운 말들로 이 이야기 속의 영웅들 찬양하리라 --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이였다고도
햇님이 낳은 아들이였다고도
또는 거룩한 인민의 수령이였다고도.
그리고 그 말들 모두 사람들껜 참된 것들이여라.
서쪽 나라 사람들도, 동쪽 나라 사람들도
천 년, 만 년 이 영웅의 이야기 외워 전하며
그를 흠모하리라,
존숭하리라
그리고 이 영웅을 수령으로 받들었던 인민을
부러워하리라 축복하리라
천년이고, 만년이고 먼먼 훗날
이 영웅을 사모하고 존숭하는 사람들 속에
내 문득 다시 태여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
내 동쪽 나라들에도, 서쪽 나라들에도 가며
내 그들에게 자랑하여 말하리라 --
내가 바로 그 영웅이 세운 나라 사람이였노라고,
내가 바로 진리 위해 싸운 그 영웅의 전사였노라고,
우리 그 이 얼굴 뵈올 때마다 우리의 심장 높이 뛰였더라고.
그 이 음성 들을 때마다 우리의 피는 뜨겁게 끓었더라고
그럴 때면 그 사람들 나의 말을 향하여
열광하는 환호 그칠 줄 모르리니,
이 해일 소리 같은 요란한 소리 자기를 기다려
내 목청 높여 다시 한 마디 이을 말 --
그 사람들 다 알지 못할 한 마디 말 웨치리라 --
[우리들 그 이의 뜻 가는 데 있었노라
우리들 그 이의 마음 속에만 살았노라.
그 이는 우리들의 자유였더라, 행복이였더라
그 이는 우리들의 청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목숨, 우리들의 력사였더라,
그 이는 우리들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였더라!
({당이 부르는 길로}, 조선로동당창건 15주년 기념시집, 조선작가동맹, 1960. 10.1)
동화적 발상과 어투로 전개되어 가는 이 시작품은 해방 직후 북한 사회에서의 김일성 정권의 수립과 정착에 대한 명분과 당위성을 강조하며 설득하는 구조로써 전개되고 있다.
백석의 시작품에서 원용되고 있는 문화사적 제반 분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농촌 정서를 현장감이 나도록 묘사하고 있으므로 북관 지역 농촌생활사적 자료를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방언학과의 관련이다. 실제로 백석의 전체 시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평북방언사전이나 함북방언사전 등의 자료 동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로서도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관서 관북 지역에서 성장하였고, 한국전쟁 시기 월남한 이주민들과의 담화를 통하여 희귀한 방언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완전한 의미파악에 도달하지 못한 시어가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셋째로는 북관 지역의 식생활 문화사적 자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백석의 시에는 유달리 식생활 문화와 관련된 작품들이 꽤 풍부하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음식물과 관련된 소재만 하더라도 무려 150여 종이 넘는다.
네 번째로 관심을 끄는 부분은 북관 지역의 각종 무속의식과 관련된 풍속들이다.
다섯 번째로는 설화, 아동유희, 자녀교육과 관련된 훈계, 속담, 민간전설 등 다양한 구비문학적 문화인류학적 자료들이다.
여섯 번째로는 향약, 즉 민간의약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들이다.
이러한 자료에 대하여 광범한 수집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읽어낸 경험이라 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시인이 이처럼 민족문화사의 전통적 자료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작품에 응용하려 했던 까닭은 이질적인 외래문화의 기습적 공격 앞에서 덧없이 파괴되어 가는 사태를 위기의 현실로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김소월이 백석과 마찬가지로 외국유학 체험을 가진 뒤에도 오히려 전통적 율격과 정서에 집착을 느끼고 고전의 세계로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체험을 작품으로 육화시켜 갔던 사례와도 적절한 비교가 된다. 소월이 전통적 율격과 정서의 확보에 주력했다면 백석의 경우 민족문화사적 각종 자료의 적극적 응용과 시적 형상화에 주력한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3. 해방 이후 한국의 문화계는 식민지시대에서부터 은연중에 전개되어 오던 이념대립의 양상이 한층 격화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대립은 서로 각자의 섹트의 빛깔을 지닌 채 분파주의적 대결로 발전되었다.
모든 대립은 주도권 쟁탈로 이어지고, 제각기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파쟁적 현실로 전개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민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민족개념은 항시 자신들의 명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써 활용되었다.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상호불인정, 상호파괴의 논리만 난무하는 험상궂은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분단시대의 냉전적 특성은 이미 해방시기에서 그 토대가 정착되어 분단고착화의 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조화와 공존은 더 이상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였고, 분리와 구별, 비판과 매도만 난무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의 특징은 이러한 성격을 수렴한 상태에서 점차 악화 변질되어갔다. 문학사 해설에서 다룰 수 있는 것과 다룰 수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구획이 지어졌고, 다룰 수 없는 자료에 대해서는 철저히 금지와 봉쇄의 강압이 내려졌다. 분단시대 문학사의 불구성은 바로 이러한 통제와 강압, 구획을 그 성격의 기본으로 하였다.
백석이라는 문학인의 존재와 그가 남긴 모든 작품들도 분단시대 문학사의 불구성 때문에 유통을 금지 당하였다. 남한문학사에서 금지의 명분은 월북문학인이었다. 하지만 백석의 생애와 문학적 성격에 대한 자료가 거의 밝혀진 지금 백석을 월북문학인이라 섣불리 규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일제말 만주를 떠돌다가 해방직후 고향 평북 정주로 되돌아왔으므로 특별히 서울로 남하해야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않았다. 단지 서울로 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백석을 월북시인의 반열에 밀어 넣는다면 그것은 매우 악성의 매카시즘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지 재북시인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재북시인이란 용어조차도 납월북 문학인들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에 비로소 제기된 용어였다. 남쪽의 이데올로기로 북쪽의 모든 문학인들을 일괄해서 재단하거나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분단은 그 자체가 빚어내는 온갖 모순들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계각층으로 파고들어 그 모순을 더욱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빚어내고 있다. 분단이 하루빨리 극복되어야 하는 명분은 이로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백석의 시작품을 찾아서 전집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분단 이후 필자에 의해서 최초로 시도되었고, 그 성과는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으로 학계와 문단에 제출되었다. 이 전집의 발간은 당시 정부에 의한 월북문학인들의 해금조치 이전에 기획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여기엔 나름대로 불안과 주저를 극복해야하는 용단이 필요하였다.
막상 백석의 시전집이 출간되자 학계와 문화계, 언론계에서의 반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대다수의 보도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들은 '잃어버린 문학사의 중요자료를 되찾았다'는 평가들로 일관되었다. 지금은 타계한 원로시인 김광균은 직접 친필 편지를 보내어 격려를 해주었다. 백석의 시전집 발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것이 {정지용전집}과 {김기림전집}이다. 이 분위기를 타고 {이태준전집} 등이 속속 발간되었다.
현재까지 납월재북, 혹은 러시아로 옮겨간 문학인의 작품을 포함하여 해금문학인의 시작품이 전집으로 발간된 시인으로서는 백석을 비롯하여, 정지용, 김기림, 임화, 김상훈, 이용악, 오장환, 조명희, 조명암, 권환, 이찬, 조벽암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필자의 주도로 발간된 전집은 {백석시전집}(1987), {권환시전집}(1998), {조명암시전집}(2003), {이찬시전집}(2003), {조벽암시전집}(2004) 등 다섯 권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종류의 시전집 발간에 대해서는 더 큰 의욕을 갖고 있다. 아직도 민족문학사의 복원을 위해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거나 시급한 전집 발간의 대상 시인들은 박세영을 비롯하여 김북원, 김병호, 상민, 김우철, 김조규, 김창술, 김철수, 민병균, 박석정, 박팔양, 설정식, 신고송, 양우정, 여상현, 유도순, 유완희, 유진오, 윤복진, 이병철, 조남령, 조허림, 허민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해방 이후 북한 문단에서 등단하여 현재까지 활동해온 시인들에 대한 자료 정리와 소개도 전집 발간 사업 못지 않게 중요한 현안들 중의 하나이다.
문학사 연구를 위한 기본 텍스트를 마련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전집 발간보다 중요한 사업은 없다. 위에 예를 든 분량보다 훨씬 많은 시전집이 계속 발간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한 출판인들의 이해 부족과 관심의 퇴조로 말미암아 전집 발간은 점점 어려운 여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형편이다.
중국의 경우 세상을 떠난 시인과 작가의 전집 발간은 후대 문학인들의 기본적 경로와 의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고, 엄청난 분량의 전집이 발간되고 있는 현실에 비견해 보면, 우리의 경우는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 요청되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이미 그들의 작품이 전집으로 발간된 문학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최남선, 이광수, 김동인, 김팔봉, 김석송, 심훈, 김동환,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김소월, 나혜석, 주요한, 홍사용, 이장희, 김영랑, 이상, 서정주, 김광균, 노천명, 김용호, 윤동주, 김수영, 박목월, 박남수, 김춘수, 고은 등이 모두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주요한전집}의 경우처럼 주요 유족들로 구성된 편집자의 편향된 해석과 안목으로 일제말에 쓴 친일시를 제외하는 전집 발간 사례로 있었다. 이러한 전집은 전집으로서의 구실은 전혀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문학사적 자료 수집과 해석의 보편성을 해칠 우려마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아직 생존해 있는 시인들의 경우에 전집이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발간되는 사례도 있지만 이 또한 시인의 지명도와 인기에 영합한 상업주의적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모름지기 전집이라는 명분에 걸맞는 것은 일단 대상 문학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라야 적절할 것이다.
앞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다가오게 될 민족통일을 앞두고 우리는 민족문학사 복원을 위해 과연 무엇을 준비하였던가? 이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너무 나태와 안일한 시간 속에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만 하더라도 이미 통일을 예견하면서 통독 30년 전부터 통일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들에 비하여 우리는 통일을 위한 준비가 너무도 소홀할 뿐만 아니라 현재도 무관심하다. 전집 발간 사업은 이처럼 통일을 위한 문학사 쪽에서의 준비라 할 수 있다. 통일이 된 이후에 착수하게 된다면 그만큼 늦어지게 된다.
백석의 시전집 발간을 기점으로 하여 그 동안 우리 문학사가 잃어버렸거나, 고의로 외면했던 문학인의 존재성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제기되게 된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세인들의 관심이란 것은 그야말로 찰나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어서 해금조치 이후에 납월재북 문학인들에 대한 관심이 약 2년 정도 지속되다가 곧 원래의 무관심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출판인들의 취향이나 촉각은 항시 독자들의 관심과 행보를 뒤쫓는 것이므로 그들의 행태를 비판할 수만은 없으나, 독자들의 감각적 말초적 취향과 흥미 위주의 관심은 너무도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문학사가 잃어버린 문학인들과 그 작품을 찾아내려는 일에 지속적 노력과 의지를 갖고 있는 학자, 비평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문학사는 분단시대의 제한성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다룰 수 없거나, 타성적으로 외면해온 부분이나 문학인이 꽤 많았다. 그것은 첫째로 이념성과 관련된 경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카프 계열 문학인과 그들의 작품성에 관한 연구와 논의가 한때 일시적 흥미 위주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적이 있었으나, 곧 쇠퇴한 이후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와 더불어 분단 이후 월북한 문인을 포함하여 납월재북 문학인들의 광범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활동은 계속 이어져가야 한다.
민족문학사의 복원과 정리를 위한 또 하나의 활동으로 우리는 그 동안 고의적으로 외면하였거나 소홀히 다루어왔던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풍토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첫 번째의 대상이 친일문학 관련 자료일 것이다. 종래에 발간되었던 초창기 문학사 자료들의 집필자들이 대개 친일문학과 관련된 핵심적 인사들이었으므로 그러한 서술의 한계와 제한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이후에 발간된 문학사 자료들도 이전 연구자들의 서술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은 어찌 된 노릇인가?
필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시 장르의 범위를 좀더 확대해야 한다는 간곡한 의도를 갖고 있다. 사실 현대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현대문학사 중 시 관련 자료들은 양적으로 몹시 빈약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 시조, 가사, 동시 등을 포함하여 한시까지 시 장르의 내부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분야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시대에 발표되었던 가요시 작품들이다.
주로 시인들과 문학인들이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노래 가사 만들기는 당시 하나의 대중문화 운동으로서의 집중성을 띠고서 봇물처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격조 높은 가사의 수준과 당시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과 작용력은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요시 작품을 시 장르로 생각하지 않았고,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가 최근 집중적으로 조사 정리해본 경험에서 볼 때 우리의 민족문학사 정리에서 이 가요시 장르와 그 풍부한 자료들은 마땅히 문학사의 내부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문학사가 잃어버린 자료들을 복원시키려는 노력을 갖도록 해준 시발점으로서의 의미가 바로 {백석시전집}의 발간이었다.
분단시대의 문학사가 놓치고 있는 문학인과 작품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 정리하는 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임무로써 유효하다. 왜냐하면 문학사의 체격과 형식은 원래의 형태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학사는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불구적 기형적 편향적 체제와 성격에 구속되어 있다. 이러한 문학사의 유통이 거듭되면 될수록 악순환과 모순은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학사의 불구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관습과 삶의 타성에 젖어서 종래의 방식으로 문학을 교육하고, 문학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남북한 양쪽이 문학사에서의 금기와 제한을 선도적으로 해체하는 열린 자세가 아닌가 한다.
남한 문학사에서는 납월재북 문학인들과 그 자료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문학사 체제 내부에서 수용하고 위상을 정리해야 한다. 북한에서의 문학사 서술도 마찬가지로 월남 문학인들과 숙청 문학인들에 대한 자료를 새롭게 정리하고 자리매김을 해야한다. 현재의 불완전한 문학사 서술체계로는 문학교육을 위한 그 어떤 기회에도 유용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분단시대의 매몰문학인들에 대한 자료를 새로 발굴하여 소개했을 때 낯설고 서먹서먹한 인상을 계속 받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매몰시인들의 전집 발간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새롭게 발굴 정리된 매몰문학인들의 자료를 기존의 문학사 서술체계 속에서 그 위상의 정리와 가치 평가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학자 비평가들이 모여서 문제의 구체성에 대한 활발한 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러한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사실상 시급하다.
백석의 시전집이 1980년대 후반 학계와 문단에 제출된 후 그 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학사적 자료에 대한 신선한 인상과 친근감의 확대는 백석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무려 2백여 편이 넘는 논문과 평론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백석의 시작품은 1930년대 문학사에 매우 자연스럽게 복원되는 과정을 겪었다. 1930년대 문학사에서 백석이라는 한 시인의 새로운 부가는 의미의 증폭과 해석공간의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는 백석의 경우에서 보듯 보다 많은 매몰시인들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문학사의 원래 자리에 복원시키는 활동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우리의 문학사는 식민지를 거치면서 제국주의자들의 통제와 억압에 의한 문학사 왜곡을 한 차례 강요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곧이어 전개된 분단의 폭풍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문학사의 자료가 유린과 왜곡을 또 다시 강요받게 되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두 차례의 산사태 앞에서 문학사는 형편없이 위축되고 일그러져서 원래의 형태와 성격을 현저히 상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왜곡된 문학사를 올바르게 교정하고 바로잡는 문학사 바로 쓰기에 대한 요청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시점에 우리는 다다라 있다. 사상과 이념에 대한 편견을 모두 극복한 상태에서 오직 잃어버린 모든 문학사 자료를 제 자리에 되찾아 옮겨놓고, 전체의 윤곽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민족문학사를 수립하는 일이 새로운 시대의 문학인들에게 부과된 과제인 것이다.
4. {백석시전집}이 발간된 1987년은 분단시대 남한에서의 냉전적 인식이 차츰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 이듬해의 국제올림픽 경기대회를 앞두고 있던 분위기와 여건의 작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내적인 갈망과 의욕이 강렬했었던 것이다.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로 이동해 오면서 한국사회는 분단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진 상태에서 표현의 욕구와 자유는 상당히 제약과 제한을 받게 되었다.
문학에서의 이념성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고, 개인주의와 내면추구의 작품 인식은 종래의 안일성을 극복해갈 방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출판에 대한 자유의 억압과 압수, 유통의 금지, 구속, 출판사의 등록취소 따위가 잇따라 발생하였으며, 문학인 스스로가 작품의 표현 수위를 조절하고 농도를 절제하는 심리적 위축이 수반되었다.
이런 시기에 납월재북 문학인들의 자료를 소지하고, 관심을 가지며, 출판을 하게 되는 사실 자체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유신시대와 전두환 정권을 거쳐오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었다. 말하자면 냉전시대의 전형적 특성이 전개되었고, 민중들은 이 경색된 분위기에 혐오와 피곤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백석시전집}의 발간은 바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의 후반에 이루어졌다. 정식으로 해금되기 이전이어서 많은 용기와 위험이 수반되었지만, 발간은 결행으로 옮겨졌다.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이 발간된 이후로 백석 시인 개인의 자료만 중점적으로 다룬 단행본 자료들이 속속 발간되었다. 1988년에는 백석의 시선집 {가즈랑집 할머니}가 김학동 편으로 발간되었고, 이어서 1990년에는 김학동 편 {백석전집}이 발간되었다. 송준은 1994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란 이름으로 백석 시인 일대기란 부제를 달아서 상하 두 권을 펴내었다. 또 1995년에는 {백석시전집}(송준 편)을 발간하였다. 정효구는 1994년 기존의 전집 작품에다 이후의 여러 글들을 모으고 평전을 덧붙여 {백석}을 발간하였다.
과거 백석의 20대 청년 시절의 연인이었던 김자야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이 1995년에 발간되었다. 이어서 박혜숙이 {백석─우리 문화의 원형탐구와 떠돌이 삶}(1995)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96년에는 백석의 시전집 {여우난골족}과 새로 증보한 시전집 {모닥불}이 필자의 편집으로 발간되었다. 백석의 문학에 대한 대표적 비평과 논문을 수록한 고형진 편 {백석}이 1996년에 발간되었다. 김재용은 북한에서 발표된 백석의 모든 시작품을 발굴하여 1997년 {백석전집}을 펴내었고, 증보판을 2003년에 다시 발간하였다. 박주택은 1999년 백석의 시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어서 {낙원회복의 꿈과 민족정서의 복원}이란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김영익도 박사학위논문을 다시 단행본으로 편집한 {백석시문학연구}를 2000년에 발간하였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단행본으로 발간된 백석 시인 관련 연구자료들은 모두 15권 내외로 확인되고 있다.
참고로 백석의 시문학과 관련된 각종 연구사를 모두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목록의 정리도 완전하지 않다.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제출된 석, 박사 학위 논문들을 모두 조사 정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자료들은 모두 조사하여 목록에 보완될 것이다. 이 글의 말미에 현재까지 정리된 백석 문학 연구 자료 총목록을 덧붙인다.
5. 1987년 백석 시인의 존재가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시전집이 해방 이후 최초로 발간되자 각계 각층의 방향은 뜨거웠다. 대부분 진작 알려졌어야 할 자료가 뒤늦게라도 문학사에 편입되어 복원을 기다리는 격려와 고무적 의견들이 많았다. 하지만 백석의 시세계에 대한 몰입과 흠모가 정도의 수위를 넘쳐서 인식의 균형감각마저 상실한 경우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사례는 송준으로서, 그는 백석을 대뜸 '세계 최고의 시인'으로 추켜세우며 맹목적 찬사를 남발하고 있다. (송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시인백석일대기①), 지나, 1994) 이 책의 경우 본문 속표지의 부제로써 '세계 최고의 시인 백석 일대기'란 구절을 특별히 덧붙여 존경심의 극치를 드러내었다. 같은 책의 33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시인'이란 말을 서슴없이 남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존경의 맹목성과 근거 없는 추켜세움은 시인의 위상에 대한 훼손으로 이어질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시인 이시카와 다꾸보꾸와 단편작가 아꾸다가와 류노스케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물아일체의 훌륭한 문학적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의 작가라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본이 자랑하고 자랑하는 또 다른 천재작가인 다까야마 쵸규조차도 넘어본 적이 없는 위대한 문학성의 결정체인 백석은 정말 한국이 자랑할 만한 유일한 천재시인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시인이자 수필가요 소설가이며 번역가인 천재작가 백석의 이야기는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천재화가의 작품처럼 나의 눈자위 앞에 선연히 펼쳐지고 있다.(송준, 백석시전집, 1995, 학영사)
백석의 문학세계가 지닌 훌륭함에 대해서는 대다수 동감하는 바이거니와, 그 훌륭함의 까닭과 근거를 논리적 비평적 문장으로 정리하고 제시하는 것이 비평가와 문학사 연구가의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경우는 무조건적 칭찬과 몰입으로 이어져 있고, 그 칭찬의 배후에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런 표현 이외에도 '위대한 천재시인' '한국 최고의 시인'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세계 최고의 시인' '생의 마지막 시련인 최후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지혜롭고 훌륭한 세계 최고의 시인' 따위의 찬사를 마구자비로 남발하고 있다. 진정 훌륭한 수준의 문학은 굳이 이런 찬사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이미 높은 수준의 반열에 올라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존경심과 학문적 객관적 평가는 엄정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평자는 백석 시에 대한 작품론 중에서도 이숭원의 글을 주로 다루면서 '본격적이고 수준 높은 연구' '맥을 정확히 읽어내는' '훌륭한 지적' '훌륭한 논문' '시적 변이와 그 전모를 최초로 밝힌 ×××의 예지와 노고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따위의 편집증적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런 경우에도 여러 분석가들의 글을 다루되 균형 잡힌 서술로 이끌어가야 다루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미숙함이나 허술함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평자 자신의 비평적 안목과 능력의 부족 때문이다. 단지 특정 시인에 대한 맹목적 존경심에 기초하여 오직 자신이 선택한 시인만이 한국문학사, 아니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발군의 문학인이라는 발상은 매우 독선적이고도 천박한 속류 민족주의 계열의 상투적 인식과 저급한 스타일과 다를 것이 없다.
이 평자는 백석 연구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왜곡을 통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작자가 불분명한 타인의 시작품을 백석의 시작품으로 추정하여 자신이 편찬한 전집에 포함시키는 왜곡을 의미한다.
그 실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만선일보에 '한얼생'이란 필명으로 발표되었다는 [고독(孤獨)](1940.7,14일자), [설의(雪衣)](1940.7.24일자), [고려묘자(高麗墓子)](1940.8.7일자) 등 3편을 백석의 시작품으로 규정한 것이다. 송준은 이 세 편의 시작품을 섣불리 백석의 것으로 추정하여 아무런 객관적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뜸 자신이 엮은 시전집에 수록하였다. 이 세 편 가운데 그래도 백석의 시작품과 유사한 분위기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 들어있는 작품은 [고독]이다. 하지만 이 작품도 중반부의 문체가 아무래도 백석의 투가 아니다. 백석의 시적 문장에는 어딘지 모르게 백석적인 문체의 리듬과 호흡이 분명히 깃들여 있다.
ⅰ)우리는 아모런 警戒도 必要업시 금모래 구르는 淸流水에 몸을 담것다
---[고독] 부분
ⅱ)雪衣는
邪念업는 꼿입피런가?
오직 神仙이 사는 東方에서만 피고
그 젊은 女人은 달을 부끄릴만큼 玲瓏한
眞珠알을 품은 이바다가 가장 애끼여마지안는
貝類로다
(중략)
華美한 女心을 山넘으로 훔처보는 太陽의
戀情을 나는 同情해도 좋다
---[雪衣] 부분
ⅲ)그리다 이곳 변죽을 億萬年 두고 직히려
자랑스러운 歷史의 旗幟 꼽어두고
---[高麗墓子] 부분
이 인용은 사실상 백석의 시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할 만한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타인의 시작품을 맹목적 숭배심과 백석 자료에 대한 공연한 집착과 욕망에 의하여 백석의 시작품으로 강제 편입시킨 악성의 사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여기에 몇 대목을 적출해서 옮겨 보았다. 위의 인용을 검토하기 전에 백석의 다른 시작품들을 먼저 읽어본 다음 한번 찬찬히 감상해 보게 되면 이 작품들이 전혀 백석의 것이 아니라는 직감과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작품들이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까닭을 다시금 엄밀히 분석해 보자.
우선 백석의 창작 스타일은 관념적이고 난삽한 한자어휘를 어떤 경우에서건 연결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인용작품에서는 이러한 연결형 한자어투가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ⅰ)에서 '境界도 必要업시'와 같은 부분은 분명 백석의 어투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백석은 공연히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언어사용의 습관은 거의 결벽증이라 할 정도로 치밀하고 고도로 계산된 결과만 추출하여 어떤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사용하였다.
ⅱ)에서도 사념(邪念)이란 한자어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백석의 시어가 아니다. '화미(華美)한 여심(女心)'이란 어투는 완전히 습작기 특유의 관념적 문체로 여겨진다.
ⅲ)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歷史)의 기치(旗幟)'란 어투는 백석의 어떤 작품세계를 두루 검색해 보아도 시인의 전형적 문체를 현저히 벗어나 있다. 당시 백석은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등과 같은 세련되고 능숙한 언어의 교직을 보여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얼생'이란 필명은 아직 좀더 규명해 보아야할 당시 재만(在滿) 동포시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분명 백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준이 이 한얼생의 시작품 3편을 자신이 엮은 편저에 무모하게 편입시키게 됨으로써 이후 상당한 혼란이 발생하도록 여건을 조성하였다.
상당수의 후속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에 대해서 아무런 판단력도 행사하지 않은 채 송준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여 무조건 백석의 시작품으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사례로는 이은봉의 경우를 들 수 있다.(이은봉, 백석 문학의 바르고 온전한 이해를 위하여, 시와 생태적 상상력, 소명출판, 2000, 180면) 그는 자신이 시를 창작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시작품과 '한얼생'의 시작품이 지닌 차이점에 대한 최소한의 식별력을 갖추지 않고 수용적으로 판단하였다.
김재용의 {백석전집}에 대한 서평에서 이은봉은 전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여타의 전집(송준이 엮은 책:필자 주)에서 익히 찾아볼 수 있는 [고독] [설의] [고려묘자] 등의 시작품 등이 빠져 있다고까지 터무니없는 지적을 감행하였다. 이은봉의 이런 그릇된 판단은 이후 혼란을 줄곧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박주택의 논문에서도 [고독] [설의] 등을 백석의 다른 시작품들과 함께 인용하여 이 작품이 마치 원래부터 백석의 시작품이었던 것처럼 슬그머니 분석 평가함으로써 더욱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박주택, 낙원회복의 꿈과 민족정서의 복원, 백석 시 연구, 시와시학사, 1991) 이 책의 63면에는 '한얼생'이란 필명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해설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착란적 서술로 빠져들고 있다.
이 시는 [힌 바람벽이 있어] [북방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이 백석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어 그의 현재적 심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같은 책 193면에서도 한얼생의 [고독]을 백석의 시 [바다] [팔원] [목구] 등과 함께 인용하여 [고독]이 마치 백석의 시작품인 것처럼 아무런 주석도 없이 해설하고 있다. 같은 책 208면에서는 한얼생의 [고독]과 [설의] 등 두 편을 백석의 시작품 [멧새소리] [정주성] 등과 함께 인용하여 앞의 경우와 동일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은봉과 박주택의 경우는 그들의 불성실한 판단과 잘못 엮어진 전집 자료에 의거하여 백석 문학 연구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런 착란의 가장 절정은 오양호의 자료가 아닌가 한다. 그는 발간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백석의 평전 제목을 아예 [한얼생 백기행(白夔行)의 시와 마도강]이라 표제에서부터 고정시키고 있다.(오양호, 한얼생 백기행의 시와 마도강(원고본))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백기행의 필명을 아예 백석과 한얼생으로 못박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목차에서는 '소월과 한얼생'으로 표기하여 한얼생이 마치 백석인 것처럼 아무런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소설적 상상과 심증에 의탁하여 무조건적 규정을 하고 있다. 원고의 결말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추론마저 등장한다.
일본식 창씨개명이 만주에까지 퍼지기 시작하던 1940년대에 백석이라는 잘 알려진 이름을 '한국의 얼'이라는 순수한 한국어로 바꾼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제말기의 이런 시인의 처신은 지사적 행위에 해당하는 민족운동의 한 상징이 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규정을 섣부르게 하는가?
오양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시 [고독]을 언급하고 있는데 백석의 시작품 [북방에서]와 동일한 시적 발상과 고백적 형식이라는 명분으로 한얼생을 백석의 필명이라 여기는 것인가? 이는 너무 성급한 발상이다. 오양호는 만선일보 1940년 11월21일자에 수록된 한얼생의 시 [아까시아]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백석의 시작품이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도 한자 어휘의 남발이 많고 시적 어투도 백석의 시작품으로 보기엔 너무도 주저되는 바가 많다. 백석은 시어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결벽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旣往 萬年을 足히 살어왓고
將次 億年을 더살리라는 듯
둔덕위의 錚錚한 아까시아 한그루 시공을 해집고 그 한복판에서서 生과 歷史를 어제도 오늘도 諦念하다
----한얼생의 [아까시아] 부분
백석의 다른 시 어느 대목에서 위와 같은 표현의 미숙성과 한자 어휘의 남발이 있는가?
기왕에 알려진 백석의 시작품 분량에다 다시 발굴된 자료를 보태고자 하는 글쓴이들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것을 마치 백석의 신발굴 작품인 것처럼 소개하고 평가하는 것은 몹시 위험천만한 발상이자 행동이다. 평자에 의해 터무니없이 조작된 백석 평전의 섣부른 발간으로 말미암아 백석의 개인사와 문학성에 심각한 혼란과 무분별을 초래하는 왜곡은 이제 더 이상 계속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료가 발간된다 할지라도 현명한 독자들은 여기에 기만당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혼란들은 모두가 송준의 전집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서 맨 처음 발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혼란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자꾸만 확대되어 가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오양호의 경우는 그의 글에서 송준을 '한얼생의 대표 연구자'로 추켜세우며 이해를 함께 하고 있다. 그의 글은 분명히 백석의 시작품과 관련된 연구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를 포함한 선행연구자들의 성과와 업적을 의도적으로 참고문헌에서 배제하고 있다. 모름지기 물줄기의 근원이 맑아야 하류쪽 강물의 맑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선행연구자란 사람들이 이처럼 착란과 무분별로써 후속연구의 풍토를 혼탁하게 만드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할 것이다.
백석 연구에서 또 하나의 혼란과 무분별은 저널리즘에서의 보도 내용이다. 2003년도 대입수능시험에는 백석의 시 [고향]이 지문 중 하나로 출제되었다. 그런데 <주간조선>(2003.12. 8)의 기사 타이틀은 <'수능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이었다. 백석 시인의 시작품이 대입수능시험 지문으로 출제된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며, 거기엔 완전한 해금과 문학사에서의 복원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사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백석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올 대입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서 일어난 복수정답 파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영역 17번 문항은 백석이 1938년에 <삼천리문학>에 발표한 시 '고향(故鄕)'을 지문으로 제시하고 여기에 나오는 '의원(醫員)'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을 보기(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와 미궁의 문' 대목)에서 고르라는 것이었다. 시험을 출제한 교육과정 평가원 측은 오지선다형 중 정답을 처음에는 ③으로 했으나 이후 ⑤도 정답으로 함께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왜 저널리즘에서는 하필 수능시인이라 표시하고 있는가? 수능시험에 지문으로 출제되면 모두 수능시인의 범주에 드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저널리즘에서의 이런 용어 설정은 참으로 천박하고 부적절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시인의 문학성을 경박하게 만들고 훼손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백석의 시작품이 처음으로 대입수능시험에 출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능시인이라 호칭한다면 이는 난센스라 아니할 수 없다.
6. 1987년 {백석시전집}이 발간된 이후 남녘 땅 독자들에게 백석 시인의 시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더불어 그의 시전집은 2004년 현재 무려 20쇄를 넘기는 발행 부수를 돌파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백석의 문학을 흠모하고 추종하려는 많은 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기존의 문학사가 지니는 공간의 협애성(狹隘性)을 백석이라는 매몰시인의 복원을 통하여 새롭게 확장시키게 된 것은 분명히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 존경심과 숭배심으로 말미암아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한 작품도 백석의 작품이라 속단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편집한 시전집에 버젓이 수록한 불성실하고 비양심적인 자료들의 출현과 유통은 백석 문학 연구 풍토에 커다란 그늘과 수심을 드리웠다.
단적으로 지적하면 송준의 책에 수록된 [고독(孤獨)] [설의(雪衣)] [고려묘자(高麗墓子)] 등과 오양호에 의해 소개된 [아까시아] 등 4편은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발표된 '한얼생'의 시편으로 문체나 표현방법, 전반적인 창작의 스타일로 보더라도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평자들은 우격다짐으로 백석의 시작품으로 편입시켜 이후의 백석 연구풍토에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주었다.
전국의 석사, 박사 학위 논문과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다수의 저서들에서 이 한얼생의 작품을 백석의 시작품으로 속단하고 분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금후로 계속 발생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석 시문학의 문학사적 복원을 최초로 시도한 본 연구자로서는 이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부정확하고 검증이 되지 않은 그릇된 자료 유통의 혼란과 무질서를 지적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분명한 수정을 학계와 문단에 엄중하게 촉구 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