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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한도인(無爲閑道人)/<무위진인(無位眞人)과 무의도인(無依道人)>
영가 현각선사 - 증도가(證道歌) 제2구 무위한도인
絶學無爲閑道人 (절학무위한도인)
不除妄想不求眞 (부제망상불구진)
불법의 가르침을 모두 초월해 차별분별하지 않고 진여(眞如)의 지혜로 사는 한도인(閑道人)은 망상을 제거하려 하지도 않고 진여의 지혜를 구하지도 않는다.
임제선사-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해탈을 이룬 사람, 깨달음을 얻은 참사람, 세상 잡사에 물들지 않고 구애(拘礙)받지 않은 자유인
제왕 권세 따위 뜬구름 같은 것
글. 손정윤 원로교무
세존달마 불설설 가섭신광 불문문
世尊達磨 不說說 迦葉神光 不聞聞
세존과 달마는 말 없는 가운데 말했고
가섭과 혜가는 듣지 않고 들었다.
평상심시도 제법적체진
平常心是道 諸法體眞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바로 도요
모든 법은 보이는 그대로 진실한 것이다.
무위한도인 재처무종적
無爲閑道人 在處無跡
할 일을 다 마친 한가한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런 자취가 없다.
석가불출세 달마불서래 불법변천하 춘풍화만개
釋迦不出世 達磨不西來 佛法遍天下 春風花滿開
석가모니불과 달마대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도
봄바람에 꽃이 활짝 피듯 불법은 천하에 두루 퍼진다.
부귀문전 수류거 제왕도상 백운부
富貴門前 水流去 帝王都上 白雲浮
부귀공명의 세계는 힐끔 거리지 않고 물 흐르듯 지나가고
제왕의 권세 따위는 뜬구름 같은 것, 결코 미련 두지 않는다.
<무위진인(無位眞人)과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로서, 무의도인(無依道人)과 비슷한 말이고, 역시 임제 선사가 한 말이다.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해탈을 이룬 사람, 깨달음을 얻은 참사람, 세상 잡사에 물들지 않고 구애(拘礙)받지 않은 자유인을 일컫는다.
도를 닦은 마음이 뛰어나서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 사람, 성속의 구별을 초월한 사람, 인연과 업보를 떠난 사람이어서 지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당체, 즉 자리(지위) 없는 참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왜 자리가 없는가. 그 사람을 어떻게 경계 지을 수 없고, 어떤 모습으로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임제 선사가 설법을 함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붉은 살덩어리에 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봐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 선사가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 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선사는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여기서 “적육단(육체, 赤肉團)에는 일무위(一無位)의 진인(眞人)이 내재하고 있어 늘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있다. 인간에게 본래 갖추어진 이 진인을 만나지 못한 자는 빨리 만나 봐야 한다.”라고 했다.
‘적육단’은 인간의 육체, 살덩어리를 말하고, ‘일무위의 진인’이란 부처, 불심, 불성을 말한다. ‘진인(眞人)’은 장자(莊子)가 이상으로 삼았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에 있는 해탈인과 같은 말이다.
인간사회에는 불범(佛凡-성자와 범부), 현우(賢愚), 귀천(貴賤), 미오(迷悟) 등의 차별이 있다. 그러나 ‘무위(無位)’란 이런 잘나고 못남, 똑똑하고 미련함, 귀하고 천함의 차별이 전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경지를 말한다. 그런 무위의 진인이므로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 절대의 경지에 있는 존재, 곧 부처(불성)이다.
사람의 몸속에는 그런 불성이 들어있으며, 늘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참다운 모습은 세속적인 지위나 명예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함을 내용으로 하는 무위진인은 도교사상을 차입한 격의불교((格義佛敎) 용어라 하겠다.
6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 때까지만 해도 주로 양자강 이남에 머물던 선종(禪宗)은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와 ‘참사람[무위진인(無位眞人)]’을 외친 임제 선사의 선풍에 의해 하북에도 널리 퍼지게 됐다.
헌데 무위진인은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경지를 넘어선 말이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무위진인은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하건만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은 것에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차별이 있으면 가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스님이 말귀도 못 알아듣고 “무위진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가 “(너 자신이 무위진인 것도 모르고)어떤 것이 무위진인이냐고 물은 것이냐, 어디 한 번 대답해 봐라.” 하고 다그쳤다. 그러나 알 턱이 없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가만히 있으니까. 똥 막대기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무위진인을 알 턱이 없지 하고, 방장실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무위진인은 남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인간은 대개 무엇엔가 의지하고 집착하는데, 무위진인은 자기의 본래마음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해탈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즉,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꺼들리지 않은 사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을 일컫는다. 무위진인, 무의도인은 범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헌데 선종사를 되돌아볼 때, 대체로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에 와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말해서 성(性)보다 작용의 뜻이 있는 심(心)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하여 백장(百丈懷海, 749-814), 황벽(黃壁希運, ?~850) 선사에 이르기까지 심(心)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임제(臨濟) 선사 때에 이르러서 인(人)자를 많이 사용하게 됐으니, 인(人)자는 성(性)과 심(心)보다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제 선사는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사인(無事人), 청법저인(聽法底人), 승경저인(乘境底人) 등을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보통으로 말하는 흔한 그런 인간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본래 항상 스스로 일어설 수 있고, 스스로를 의지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잡다한 것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부모에 의지하고, 자식에 의지하고, 처와 남편에 의지하고, 재물에 의지하고, 명예에 의지하고, 직위에 의지하고, 직장에 의지하고, 하다가 종교에 의지하고, 심지어 출신지에 의지하고, 나라에 의지하고… .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것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의지하던 것이 없어지면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것은 청정한 자성(自性)에는 없던 병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하면 철저히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다. 비구는 6물만 가지라고 하셨다. 즉 발우, 좌복(깔게), 물병, 대가사(큰옷-이불대용), 중가사(춘추용), 소가사(여름용), 거기다가 주장자 하나를 더 들고 다니도록 했다.
그래서 초심자는 불교에 입문 순간부터 버리기 시작한다. 부모자식간의 정을 버리고, 애정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재물도 버리고, 가진 걸 다 버리고, 오직 자비심만 남겨둔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자유스럽고,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죽음이 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작은 ‘나’는 사라지고 거대한 ‘나’만 존재한다. 아무 것도 없으니 의지할 것도 없다. 그래서 참나, 무의도인(無依道人)이 되는 거다.
임제 선사가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서,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무의도인(無依道人)’이었다. ‘무의도인’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경계를 조정하고 나타내는(뛰어넘는) ‘사람’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임제 선사는 바로 이 속성을 ‘승경(乘境)’, 즉 ‘경계(境界)를 탄다’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표현했다.
임제 선사가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황벽 선사는 ‘무의무주(無依無住-의지할 바 없으며 머무를 바도 없다)’라고 했다. 또 영가 현각(永嘉玄覺) 선사는 “무위절학(無爲絶學)의 한도인(閑道人)”이라 했다.
그밖에 선가의 ‘참된 주인’이며, 자성천진불(自性天眞佛)이며, 자성불(自性佛)이며, 명백리인(明白裡人-해탈자) 등이 모두 동어동의(同語同義)이다. 이와 같이 진인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나 그 의미는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무애한 경지에 있는 진정한 해탈인을 가리는 것으로 같다.
※무위절학(無爲絶學)---무위(無爲)의 진리를 깨쳐 지식이나 학문을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 무위의 진리를 깨친 사람에게는 언어문자는 군더더기 같은 것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위(無爲)의 진리’란 모든 분별 망상을 여읜 부처님 법, 절대 진리를 말한다.
무위진인이므로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절대경지에 있는 각자(覺者-부처)이다. 인간의 육체에는 해탈인으로서의 부처가 내재해 있어서 항상 인간과 동거하며 생활을 함께 한다. 중생은 그 내존불(內存佛)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보라!’고 간절하게 말했던 것이다. 항상 자기를 자주 응시하고 내재해 있는 진인(부처), 참사람을 만나야 한다. 무위진인이라는 주체성이 자각되고 확립돼야 한다.
그러나 참사람(眞人)은 보통의 현실에 외재하는 것은 아니다. 참사람은 바로 현금에 주체가 돼있는 절대 현재(現在)를 말한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어디서든지 주인이 되라고 했다(隨處作主). 항상 서있는 자리, 현실에서 진실하라(立處皆眞)고 했다.
그래서 임제 선사가 시중하여 말하기를 “수행자들이여! 불법은 힘쓸 곳이 없다. 단지 평소 무사(無事)하면 된다. 똥 누고 오줌 누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밖에서 추구하면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고 했다. 네가 우선 어디서나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진실이다. 어떤 대상도 너를 어찌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밖의 대상에 꺼들린다. 좋은 차를 보면 사고 싶고, 남들이 나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분노에 치를 떤다. 그러나 좋은 차나 나를 욕하는 소리는 모두 객(客)이다. 번뇌는 주인인 나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깥대상인 객에서 생긴다. 이것을 객진번뇌(客塵煩惱)라 한다. 반면에 주인은 내 마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항상 대상에 휘둘리면서 번뇌에 휩싸여 살아간다. 만약 내 마음이 주인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것이지 헛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며,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돼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이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 각자가 제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잘 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법은 멀리 있지 않다. 즉, 네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풀어진다고 했다. 한마음 돌이키면 그 자리 모두가 진리인 것이다.
비슷한 말에 “입처즉진(立處卽眞)”이란 말이 있다. 마조(馬祖) 선사의 말씀인데, “서 있는 곳이 곧 진리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처작주(隨處作主)라 어떤 경우에도,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곳이 곧 참된 곳, 진실한 곳이라(立處皆眞)이란 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현재 인식되는 ‘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부처가 되면, 혹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되면,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고 정토이이며 극락이고 열반의 세계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꺼들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누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입니까?”
임제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다만 언제 어디서나 범부의 경지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경지에도 들어가며, 오염된 데도 들어가고 청정한 데에도 들어가며, 모든 부처님 국토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어디서나 모두 그 국토를 나타내며, 이루어지고 머물고 부수어져 없어지기도 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서 큰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셨지만, 가고 오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며, 그 태어나고 죽는 것을 찾아도 마침내 찾을 수가 없다. 문득 태어남이 없는 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다니다가 화장세계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공한 모습을 보고, 이어서 다 실다운 법이 없는 것을 죄다 본다.
오직 법을 듣고 있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바로 부처님을 낳는 어머니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에 의지함이 없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도 또한 얻을 수 없소이다. 만약 이와 같이 보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되고 올바른 견해’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의지함이 없는 도인’을 들어 답했다. 이른바 무의도인(無依道人)은 임제 선사가 내세우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또 다른 이름으로 주체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본질 그 자체로서 어디에나 통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이다. 이것이 시공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일체 물리적 현상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생사(生死)에도 자유롭고 열반(涅槃)에도 자유로운 것이다. 한정 지을 수 없고 특정 지을 수가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라고 답해 준다.
선(禪)에서의 정견(正見)이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해(知解) 속에 정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종취(宗趣)를 터득해야 정견이 될 수 있다. 흔히 종통(宗通)이라 하는데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직관적인 통찰이 단도직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해를 금기시킨다. “이 문으로 들어오면 지해를 두지 말라(入此門來 莫存知解)”라고 했다. 또 임제종(臨濟宗) 황룡파의 개조(開祖)인 황룡 혜남(黃龍慧南) 스님의 제자 황룡사심(黃龍死心, 1043∼1114) 선사는 “안다는 한 글자(知)가 온갖 화를 불러오는 문(知之一字 衆禍之門)”이라 했다.
다만 이 임제 선사의 법문에는 <화엄경> 용어가 나온다. 미륵누각이나 비로자나법계 그리고 화장세계가 <화엄경> 용어다. 법신 비로자나는 깨달음 자체를 의인화해 나타낸 말이다. 선의 견성(見性)이 바로 비로자나 법신을 보는 것이다.
끝 부분의 말에 ‘무의를 깨달으면 부처도 없다(若悟無依 佛亦無得)’라고 했다. 이는 무소득의 경지를 말한 것으로 부처가 되면 부처가 없다는 말로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차별 없는 참 사람이, 나의 면전을 통해서 출입한다. 왜 나는 보지 못하는가. 죽지도 아니하고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파랗지도 아니하고 하얗지도 아니하고 늙지도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그 불생불멸의 참사람은 어디 있는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바로 그런 참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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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經行(무위경행)
無爲閑道人 무위한도인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여
在處無蹤跡 재처무종적
어디 있어도 자취가 없도다
經行聲色裏 경행성색리
행함이 성색 속에 있더라도
聲色外威儀 성색외위의
소리 빛깔 밖의 행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