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친구들>
Goodfellas / 감독 마틴 스코시즈 / 1990년
<대부>와는 다르다. <좋은 친구들>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긴 힘들 것이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좋은 친구들>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와 함께 갱스터 누아르의 양대 산맥으로 거론되지만 속살은 제법 차이가 난다. <대부>가 마피아의 은밀하고 귀족적인 측면을 우아하게 다루고 있다면 <좋은 친구들>은 거리의 갱스터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개봉 당시 <대부>의 안티테제에 가깝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데다 마틴 스코시즈가 현실을 건조하게 포착하는 방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리처드 시켈이 쓴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 중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마피아에게 당신들의 세계를 가장 잘 담은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좋은 친구들>에서 그 남자(조 페시가 연기한 토미)가 ‘내가 우습냐?’라고 말하는 장면”이라 답하기도 했다. <좋은 친구들>은 갱스터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를 사실적으로 담아낼 뿐이다. 이윽고 그것이 해소되지 않고 잔존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 국가의 어둠을 조망하는 것이다. 여러 차례 마틴 스코시즈의 팬임을 자처했던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좋은 친구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윤종빈 감독은 2013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며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가깝지만 촬영은 매우 스타일리시하다. <대부>가 약간 과장되고 판타지가 있다면, <좋은 친구들>은 집단을 합리화하는 명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쿨하고 재미있는 화법”이라고 정리했다. 특히 인물에 따라붙어 인물을 소개하는 트래킹숏은 영화사에 남을 만하다.
<사무라이>
Le Samourai / 감독 장 피에르 멜빌 / 1967년
“장 피에르 멜빌은 나에게 신이었다.” 오우삼 감독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수많은 영화와 인물 중 가장 앞줄을 장 피에르 멜빌을 위해 비워두었다. 소위 홍콩 누아르의 원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일련의 범죄영화들이라기보다는 이후에 영향을 받은 ‘프렌치 누아르’에 가깝다. 장 피에르 멜빌은 “1930년대 미국영화가 없었으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할 만큼 미국영화를 사랑했고 그 결과 필름누아르의 정수를 짙게 물려받아 탄생한 것이 <사무라이>다. 고독한 청부살인업자의 신비한 면모를 강조한 <사무라이>는 필름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가운데 장 피에르 멜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영화는 사건 자체보다 범죄의 준비 과정, 용의자의 심문 등 이른바 인물의 행동들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경찰이 살인청부업자를 미행하고 이를 간파하는 과정을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보여주어 특유의 긴장감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건조하게 상황을 전시하여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다. 오우삼 감독 역시 장 피에르 멜빌처럼 프렌치 누아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고 활용한다. <사무라이>의 영향을 받은 <첩혈쌍웅>(1989)이 적극적으로 헌사를 바치는 대상은 살인청부업자 제프 역의 알랭 들롱이다. 무표정한 얼굴, 단정한 트렌치코트, 예민하고 과묵한 프로페셔널 암살자는 실루엣만으로 고독을 형상화한다. 선악에 무관하게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배우의 한몸에 깃들어 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첩혈쌍웅>의 제프(주윤발)는 그 연장선에 있는 캐릭터다(이름도 똑같이 제프다!).
<사망유희>
死亡遊戱 / 감독 로버트 클루즈, 이소룡 / 1978년
이소룡은 전설이다. 1970년대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아 스타 반열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특출난 무도인이자 절권도의 창시자였으며 사상가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남기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소룡은 32살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이 의문스런 죽음은 그를 전설의 반열에 올렸지만, 역설적으로 갑자기 빛나는 신화가 되어버린 이소룡은 도리어 제대로 조명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업적, 무도인으로서의 역량과 사상은 상당 부분 가려졌고 대중은 강렬했던 이미지로 그를 기억, 혹은 소비해왔다. 이소룡의 유작인 <사망유희>가 바로 그와 같은 영화다. 이소룡이 일부 액션 장면만을 촬영해놓고 사망했기 때문에 본래는 완성될 수 없는 영화였지만 그의 상업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먼드 초우 사장이 밀어붙여 대역을 기용한 뒤 끝내 완성시킨다. 한국 배우 김태정이 당룡이란 중국식 예명으로 캐스팅된 인연도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소룡의 영화 중에서도 결이 상당히 다르고 완성도도 떨어진다는 평이지만 이 모든 아쉬움을 덮을 만한 강렬함이 있다. 바로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층을 오르며 대결을 벌이는 후반부 15분의 액션 시퀀스다. 층마다 적과 대결하고 이를 격파해나가는 노란 트레이닝복 그리고 대망의 쌍절곤 액션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소룡의 상징이 된다. <킬 빌>의 우마 서먼이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오는 순간 구구절절한 설명 따윈 필요 없다. 때로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이미지는 말이나 의미를 뛰어넘기도 한다. 그렇게 전설은 한장의 이미지가 되었다.
<패리스의 해방>
Ferris Bueller’s Day Off / 감독 존 휴스 / 1986년
마블 CEO 케빈 파이기는 고향으로 돌아온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을 제작하면서 “존 휴스의 영화처럼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포스터는 존 휴스 감독의 <패리스의 해방>과 <조찬클럽>(1985)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존 휴스 감독은 이른바 청춘 코미디물의 대가다. 특히 <패리스의 해방>은 80년대 청춘의 귀여운 일탈과 반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아담한 체격, 귀여운 인상의 매튜 브로데릭을 일약 하이틴 스타로 만든 이 영화는 고교생이 벌이는 단 하루의 일탈을 통해 순식간에 지나갈지도 모를 삶의 순간을 즐기라고 권한다. 방식도 단순명료하다. “인생은 너무 빨리 흘러간다. 가끔씩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지 않으면 인생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대사를 충실히 수행하면 그뿐이다. 특히 비틀스의 <twist and Shout>를 부르며 춤추는 명장면이 압권이다. 제4의 벽을 깨고 패리스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엔딩 장면은 <데드풀>(2016)에서 고스란히 패러디했다. “아직도 거기 있니? 끝났어. 어서 가.” 감당하기 어려운 귀여움이 폭발한다.
<샤프트>
Shaft / 감독 고든 파크스 / 1971년
일처리는 저돌적이고 거리낌이 없다. 대화할 시간에 주먹이 먼저 나가고 항상 남성 우월적이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여느 영화라면 쉽게 소비되고 잊혀지겠지만 주인공이 흑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도 1970년대에 말이다. <샤프트>는 어니스트 타이티먼의 탐정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탐정물이다. 자기중심적인 매력으로 무장한 반항아의 등장에 당시 흑인, 백인 구분 없이 열광했고 상업적인 성공을 기록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던 아이작 헤이스가 부른 주제곡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흑인 시저〉(Black Caesar, 1973), 〈흑인 드라큘라〉(Blacula, 1972) 등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백인 경찰에서 흑인으로 주인공이 바뀐 덴젤 워싱턴의 <더 이퀄라이저>(2014)에도 영향을 미쳤다. <샤프트>는 2000년 새뮤얼 L. 잭슨 주연의 동명 리메이크가 제작됐다.
<블레어 윗치>
The Blair Witch Project / 감독 다니엘 미릭, 에두아르도 산체스 / 1999년
1999년 선보인 <블레어 윗치>는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이 기발한 공포영화는 관객을 속이며 영화 역사상 제작비 대비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둬 기네스북까지 올랐다(제작비 6만달러, 전세계 흥행수익 2억4863만달러). “1994년 10월, 세명의 영화학도가 메릴랜드주 버키스빌숲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던 중 실종됐다. 1년 후 그들이 찍은 필름만이 발견됐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마치 실제인 양 관객을 속인다. 이른바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탄생이다. 이후 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의식의 지평을 넓힌 쇼크는 한번으로 족했다. 다만 이러한 트릭으로 인해 영화의 영토가 한층 확장된 것은 분명하다. 가깝게는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 넓게 보면 <클로버필드>(2008)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맷 리브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세계가 변했다”.
<레인맨>
Rain Man / 감독 배리 레빈슨 / 1988년
<레인맨>은 외로운 천재라는 서번트 증후군(자폐의 일종. 의사소통 능력이 낮지만 특정 분야에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을 소재로 한 영화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장애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형제애는 영화 속에 반복되는 소재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한 영화 안에 적절히 조합한 건 <레인맨>이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톰 크루즈가 집을 떠났던 동생 찰리 역, 더스틴 호프먼이 자폐를 겪는 형 레이먼드로 출연한다. 찰리는 아버지가 레이먼드에게만 남긴 유산의 절반을 챙길 욕심에 레이먼드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둘은 변호사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2017)과 같이 형제의 호흡이 핵심이지만 넓게 보면 <말아톤>(2005)이나 <아이 엠 샘>(2001)처럼 장애인과 가족에 대한 영화도 <레인맨>의 영향 아래 있다. 레이먼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하나는 나쁘고 둘이 좋다”.
<흑사회>
黑社會 / 감독 두기봉 / 2005년
홍콩영화는 두기봉이란 옷을 갈아입고 새로 태어났다. 갱스터영화는 때론 폭력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전시하고, 때론 인간 내면의 어둠을 조망한다. 장르적인 표현이나 스타일에 집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환점에 놓인 영화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대의 공기를 투영한다는 것이다. 두기봉의 <흑사회>는 홍콩의 중국 반환 뒤 권력의 재편과 그에 따른 불안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갱스터 에픽’이라 할 만하다. 힘에 매료되어 괴물이 되어가는 조직원들의 이전투구는 인간의 내면부터 이를 질식시키는 시대의 분위기까지 두루 스며들어 있다. 정성일 평론가의 평을 빌리자면 “타란티노도 울고 갈 만한 장면이 즐비하다. 아마도 유위강의 <무간도>(2002)에 이어지는 새로운 연작.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미래”다. <무간도>를 통해 홍콩 누아르가 부활을 알렸다면 <흑사회>를 기점으로 홍콩 누아르는 한 차례 도약한다. 이 멋들어진 다크 판타지의 영향력은 국내외 불문이다. 가령 적어도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2)는 정서적인 측면에선 <무간도>보다 <흑사회>에 좀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창>
Rear Window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1954년
앨프리드 히치콕에게 있어 오마주란 일종의 조건반사 혹은 동음이의어가 아닐까 싶다. 브라이언 드 팔마를 비롯해 거장이라 불리는 숱한 감독들이 히치콕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앞다투어 고백한다. 특히 서스펜스 스릴러의 교본이랄 수 있는 <싸이코>(1960)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드레스드 투 킬>(1980)이 오마주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히치콕의 근간이랄 수 있는 관음증적 시선, 본다는 것의 긴장감을 <이창>만큼 세밀하게 구현하고 있는 영화도 드물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2016)에서 아파트 너머 창문을 응시하는 숏들은 시선이 어떻게 권력관계를 구축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 역시 초기작 <안녕, 엄마>(1970)나 <현기증>과 <이창>을 버무린 <침실의 표적>(1984)을 통해 끊임없는 존경을 드러낸다. “영화는 카메라라는 눈을 통해 대상을 응시하는 작업”이라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단순명료한 소회가 <이창>이 계속해서 소환되는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약간 과장하자면 시선과 권력의 관계를 포착한 거의 모든 영화가 <이창>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어렵다.
<스카페이스>
Scarface / 감독 하워드 혹스, 리처드 로슨 / 1932년
브라이언 드 팔마 이전에 하워드 혹스가 있었다. <스카페이스>의 주인공 토니 몬타나는 “현대 미국영화의 가장 중대한 인물 중 하나”(로저 에버트)로 꼽힐 만큼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거칠고 잔인하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인물이 바닦에서 어둠의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추락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토니는 갱스터의 한 전형으로 자리잡으며 영화를 넘어 게임, 소설 등 각종 이야기 매체 속 갱스터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토니의 원모델은 금주법 시대의 갱스터 알 카포네다(알 카포네의 실제 별명이 ‘스카페이스’였다).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는 엔딩에 “이 영화를 하워드 혹스와 벤 헥트에게 바친다”는 헌정 문구를 새겼다. 드 팔마만큼 고전영화를 사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화에 차용한 감독도 드물 것이다. <스카페이스> 역시 그 원류는 1932년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에 있다.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가 주인공 토니의 정서적인 불안과 신화적 모티브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반면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는 갱스터를 영웅처럼 그림으로써 역설적으로 현대 도시의 단면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정확히는 1930년대 갱스터영화의 관습을 다진 세편의 영화 <리틀 시저>(1930), <공공의 적>(1931), <스카페이스> 모두 어둡고 소외된 도시의 밤 그 자체를 형성화한다. 특히 폴 무니가 맡은 토니 카몬테는 갱스터의 총, 여자, 성공, 폭력으로 압축되는 전형을 완성했다. 슈트를 잘 갖춰 입고 유머러스함을 뽐내는 한편 잔혹함을 과시하는 모습은 이후 알 파치노에 의해 재해석된다. 애초에 <스카페이스>의 리메이크 프로젝트 자체가 알 파치노에 의해 시작됐으니 캐릭터에 의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 감독 해럴드 래미스 / 1993년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들이 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히는 타임루프물은 로맨스와 결합할 때 효과적인 시너지를 발하는 아이디어 중 하나다. 심지어 영미권의 <이프 온리>(2004), 일본의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2016), 한국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 등 국적을 가리지도 않는다. 이런 타임루프물과 로맨스영화간 장르 이종교배의 원조 격인 영화가 있다.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이다. 기상 리포터 필(빌 머레이)은 2월 2일 성촉절을 맞이해 마을 축제를 취재하러 갔다가 폭설로 발이 묶이는데 거기서 하루가 반복되는 체험을 한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 갇힌 빌은 놀랐다가 좌절했다가 결국엔 지쳐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는데 이조차도 불가능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필은 의외의 행보를 시작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상황 아래서 익숙한 장소들을 만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숨겨진 사연들을 속속들이 알아내 사람들을 위로하던 필은 그렇게 하루를 쌓아 가장 완벽한 하루에 도달한다. 로맨스, 코미디, 성장물의 적절한 배합을 이룬 이 영화는 장르를 넘어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다수의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타임루프 호러영화 <해피 데스데이>(2017)에서는 종탑, 베개 등 <사랑의 블랙홀> 속 장치들을 비틀어 활용할 뿐 아니라 대사 중 <사랑의 블랙홀>을 직접 인용한다.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의 경우 일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지만 더그 라이먼 감독이 인터뷰에서 수차례 <사랑의 블랙홀>을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어떤 기발한 소재와 장르라 할지라도 원점은 일상의 소소함을 담아낼 줄 아는 시선에 맺히기 마련이다.
<블리트>
Bullitt / 감독 피터 예이츠 / 1968년
<베이비 드라이버>의 에드거 라이트 감독은 수많은 레퍼런스 위에서 영화의 집을 짓는다. <프렌치 커넥션>(1971), <베니싱 포인트>(1991), <겟어웨이>(1972) 등 목록만 추려도 빽빽하다. 그 중심에 월터 힐 감독의 <드라이버>(1978)가 있다. 에드거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월터 힐 감독에게서 영감을 얻었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리고 카체이싱 영화의 걸작 <드라이버>는 바로 <블리트>에 빚지고 있다.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는 최초의 본격 레이싱영화다. 주인공 스티브 매퀸의 차 머스탱 390 Gt가 굉음을 뿜으며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장면은 차와 사람 중 누가 주인공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1968년작인 이 영화는 100% 실제 촬영과 편집만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감의 자동차 액션을 선보인다. CG로 없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는 오늘날까지도 <블리트>의 앵글과 편집은 교본과도 같이 여겨진다. 월터 힐 감독은 <블리트>의 조감독을 맡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한단계 나아간 <드라이버>를 탄생시켰으며 가장 최근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폴리스 스토리>
警察故事 / 감독 성룡 / 1985년
이른바 ‘성룡 액션’의 정수가 이 한편에 담겼다. 성룡은 스스로 액션 앞에 사람 이름을 대명사로 붙일 수 있는 희귀한 사례로 거듭났다. 굳이 풀어서 설명하자면 애크러배틱한 동작, 위험을 불사하는 아날로그 액션, 대역 없이 모든 상황을 소화하는 리얼리티, 슬랩스틱 코미디와 결합된 과장된 몸짓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성룡이 주연을 맡은 영화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다시 말해 액션이 곧 영화의 몸체다. 경관으로 강등된 강력계 형사가 악당을 일망타진한다는 비교적 간단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액션 퍼레이드가 장식되어 있다. 1980년 <배틀 크리크>의 실패로 할리우드에서 한차례 쓴맛을 봤던 성룡은 <폴리스 스토리>의 성공에 힘입어 다시금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애크러배틱과 슬랩스틱이 결합된 성룡 액션이 숱하게 인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성룡 자신도 캐나다 합작영화 <홍번구>(1995)나 본격 할리우드 진출작 <러시아워>(1998) 시리즈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변주해내기도 했다. 글 송경원 2018-04-09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