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부 스트레스’ 멘털 털리는 선수… “몸 멀쩡한데” 시선에 운다
[위클리 리포트]스포츠 선수들이 말하는 정신건강
승부의 세계서 압박감에 시달려… 현역선수 10명중 3명 불안 등 노출
美 NBA ‘정신 전문가’ 의무고용, 韓 男女프로농구 3개 구단만 운영
박지수 “누구나 공황장애 가능”… 펠프스 “올림픽 때마다 우울증”
《역대 최연소(15세 7개월)로 한국 여자 농구 성인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여자프로농구(W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따내자 안덕수 당시 KB스타즈 감독은 이 선수를 향해 큰절부터 올렸다. 2018년 미국 여자프로농구(WNBA) 신인 드래프트 때는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전년도 우승팀 미네소타에서 이 선수를 지명했다. 한국 여자 농구의 ‘기둥’ 박지수(25·KB스타즈) 얘기다.
2016∼2017시즌 신인상을 받은 박지수는 WKBL에서 6시즌 동안 뛰면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만 3번 차지했고, WKBL 공식 수상자로 44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 때 한국은 3전 전패로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박지수는 슛 블록 1위(경기당 3.3개), 리바운드 2위(경기당 10.7개)에 이름을 올렸다.
그랬던 박지수가 2022∼2023시즌 초반 코트에서 모습을 감췄다. 지난해 비시즌 기간 과호흡 증상을 보인 게 발단이었다. 박지수는 결국 공황장애 초기 진단을 받았다. 국제농구연맹(FIBA) 여자 농구 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있던 박지수는 대한민국농구협회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 현역 선수가 공황장애 진단 사실을 밝히는 건 이례적이다. 자칫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지수 WKBL 제공
지난해 12월 말 코트로 돌아온 박지수는 “구단에서 ‘공개해도 되겠느냐’고 묻기에 바로 ‘그러시라’고 했어요. 제가 나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게 아니잖아요. 저도 제가 이런 병일 줄 모르고 (병원에) 갔거든요. 그냥 몸이 아프니까 ‘이게 뭐지?’ 싶었는데 자율신경계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일을 하는 뇌나 소화기관 같은 곳에 문제가 생겨 흥분하지 않아야 할 때도 흥분이 되고, 불안하지 않은데도 불안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병원에서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얘기해 주셨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 “구단에 멘털 트레이너 선생님이 계세요. ‘트레이너가 있는데 왜 병에 걸렸냐’ 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트레이너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저는 병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앞으로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멘털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라고 했다.
○ 부상처럼 예방, 조기 진단, 치료 중요
미국 프로농구(NBA)는 2019∼2020시즌부터 모든 구단이 정신건강 전문 심리 상담가, 행동치료사를 의무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선수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생긴 변화다. WKBL 6개 팀 중에는 KB스타즈와 삼성생명 두 팀에만 심리 상담 전문가가 있다. 한국 남자 프로농구(KBL) 10개 구단 가운데는 KT에만 관련 전문가가 있다. KT에서 ‘멘털 주치의’를 맡고 있는 강경두 박사는 “박지수 선수를 보며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했다”면서 “구단은 선수들의 몸을 매일 체크하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해 검사하지만 정신의학적인 면을 체크하는 시스템은 아직 부족하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어도 ‘몸이 멀쩡한데 왜 못 뛰냐’는 시선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선수들도 ‘프로니까 이겨내야 한다’며 정신적인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정신의학적인 문제는 버티는 게 오히려 더 큰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공황장애는 감기처럼 1, 2주 쉰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길게는 1년까지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강 박사는 계속해서 “무릎, 발목이 아프면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안 좋은 부분이 있는지 꾸준히 체크해 문제가 있으면 병원과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면서 “리그 차원에서 ‘이 정도가 되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 초기 증상은 약물치료 없이 휴식만으로 회복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정신적인 질병도 초기에 빨리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기권은 ‘용기’의 다른 말
1990년대만 해도 선수라면 신체적인 통증을 참으며 뛰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신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걸 ‘강한 정신력’의 상징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주로 10대 선수가 출전하는 올림픽 여자 체조 경기에서 눈물을 참아 가면서 연기를 펼치는 선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던 이유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시몬 바일스(26·미국)는 자신의 첫 올림픽 무대였던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때 단체전과 개인종합, 뜀틀, 마루에서 금메달 4개를 딴 선수다. 평균대에서도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GOAT(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라는 칭호를 얻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전관왕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첫 경기였던 단체전 예선부터 실수를 연발했다.
시몬 바일스 동아일보DB
바일스는 이후 ‘트위스티스(twisties·공중에서 기술을 선보일 때 부상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상태)’를 겪고 있다고 털어놓으며 “세상이 기대하는 것을 무작정 해내려 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보호하겠다”며 기권을 선언했다. 이후 공중 기술을 구사할 필요가 없는 평균대에만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메달보다 자기 자신을 선택한 바일스의 행동은 믿기 어려울 만큼 용감했다”면서 “바일스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다른 시각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고 평가했다. 영국 BBC방송 역시 “기권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면서 “바일스가 체육계의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일스와 함께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동료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체조 대표 조던 차일스(22)는 단체전 은메달을 따낸 뒤 “바일스가 없었다면 우린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바일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그가 왜 많은 선수들에게 롤 모델인지 알려준다. 바일스에게 이 메달을 걸어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NBA가 정신건강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케빈 러브(35·클리블랜드)의 용기 있는 고백 덕분이었다. ‘드림팀’ 일원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2018∼2019시즌 개막을 앞두고 선수들이 자기 이야기를 직접 전하는 ‘플레이어스 트리뷴’을 통해 자신이 공황장애를 겪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케빈 러브 AP 뉴시스
러브는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려운 일들을 겪는다. 이를 묻어두기만 하면 스스로를 아프게 할 수 있다. 내면의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또 도움이 필요한 남에게 다가갈 기회도 잃게 된다”고 썼다.
NBA 올스타로 다섯 번 뽑혔던 존 월(33·LA 클리퍼스) 역시 자신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은 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사실을 털어 놓으며 “평생을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 모두 다 헤치고 왔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어’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럴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스트레스
마이클 펠프스 마이클 펠프스 인스타그램
올림픽 역대 최다(23개) 금메달리스트인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38·미국)는 “올림픽에 나설 때마다 우울증을 겪었다. 오랜 시간 나는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수영 선수로만 생각했다”면서 “한때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겪었지만 전문 상담을 통해 극복했다”고 고백했다. 펠프스는 그러면서 “선수들이 몸과 마음 둘 다를 돌보지 않는다면 100% 해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은퇴를 선언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42·스위스)는 최근 강연에서 “선수들은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투어는 이동, 연습, 시차 적응의 연속이다. 그런데 누구도 ‘피곤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곧 약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문제를 호소하는 선수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선수 시절에는 계속해서 다음 연습, 다음 경기, 다음 이동을 생각해야 한다. 인지는 못했지만 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있다. 은퇴하고 나서야 그 스트레스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박지수는 지난 시즌 팀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고 MVP까지 차지하며 최고의 한 시즌을 보냈다. 시즌 중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박지수는 “늘 긴장 속에 살다 원하던 걸 다 이루고 마음이 편해지니 오히려 증상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프로야구 정규시즌 MVP 이정후(25·키움) 역시 ‘번아웃’을 경험해 “쉬는 날만 기다려졌던 날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역 선수들의 정신건강 관리를 맡고 있는 전 세계 임상의사, 심리학자 20인으로 구성된 ‘IOC 정신건강 워킹그룹 분석’에 따르면 현역 선수의 33.6%, 전직 선수의 26.4%가 불안과 우울증세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인의 약 13%가 정신건강 관련 증세를 보인 것보다 최소 두 배 이상으로 높다.
이 연구에 참여한 한덕현 중앙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선수들은 이기고 지는 스트레스 상황에 매일 노출된다. 직장으로 본다면 직장스트레스 강도가 매우 센 상태”라면서 “선수들은 매번 잘하고 싶고, 기계보다도 더한 초인이 되고 싶어 한다. 슬럼프를 극복해 나가는 게 선수로서의 재미가 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또 슬럼프에 빠지면 안 돼, 힘들어지면 안 돼’ 하면 오히려 스스로를 슬럼프로 밀어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LG 선수들의 심리 코칭을 전담하고 있는 그는 “LG에서 선수들을 상담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상담을 한 번도 받지 않고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 나를 만나면 ‘약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여겨 멀리하는 선수도 있다”면서 “선수들이 피지컬 트레이닝을 받듯 마인드 트레이닝을 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고, 전문가들도 구단과 선수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임보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