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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9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You must be born from above.'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개인 소유를 철저하게 내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동참했다. 그들은 나눔의 행복을 깨달았던 것이다. 믿음의 근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종말 사상이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의 세계를 말씀하시지만, 니코데모는 못 알아듣는다.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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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신심이 깊어도 ‘삶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시련은 늘 별개입니다. 가끔은 심한 실패도 겪습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깨달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이끄셨다는 느낌입니다. 고뇌를 배우는 것이지요. ★★★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영적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깨달아질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은총의 이끄심이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
이집트를 벗어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를 헤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나는 길입니다. 머무를 집도 땅도 없었습니다. 가축을 먹일 초원도 물도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탈출의 흥분이 가라앉자 백성들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앞날의 불안에 눌린 그들은 모세에게 항거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새로운 시작 - 전진 신부-
우리의 믿음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관문, 바로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신비의 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죽음은 낯선 체험입니다. 실제로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회사의 영업회의 시간. 영업팀장이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심하게 나무라며 말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남긴 초라한 실적과 변명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당장 이 일을 그만 두더라도, 우리 제품을 판매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도 모집공고를 내면 지원자가 줄을 설 것입니다.” 이어 이 영업팀장은 자신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직원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축구경기에서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선수를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업팀장의 이 질문에 갑자기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질문을 받은 축구 선수 출신의 직원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팀 전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 보통 감독이나 코치를 갈아치웁니다.” 영업팀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지만, 생각해보니 축구 선수 출신 직원의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 개개인을 모아서 조화를 이루고 더 큰 능률을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간부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니까요. 따라서 누가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사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남의 탓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주님 탓도 끊임없이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탓을 하면 할수록 주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는 것이지만, 지금 현대에도 이 완고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요. 어쩌면 과거보다도 더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불신의 마음보다 믿음의 마음을, 원망과 불평의 마음보다는 이해와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데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쉽게 믿는 것은 어른에게 약점이지만 아이에게는 장점이다(C.램).
현세적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뜻 - 오민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김찬선신부-
“바람은 모든 곳에 가 앉는다.”
해산의 고통 -전삼용신부-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피를 흘려야합니다. 예수님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죽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도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립니다. 제왕절개를 해도 마취가 깰 때 많은 아픔을 겪는다고 합니다. 고통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의 고통을 비롯하여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많은 아이들이 헤로데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세가 태어날 때도 파라오에 의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많은 피가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면서부터 스테파노를 시작으로 많은 박해와 순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세계 도처에 순교자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겠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보다도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즉, 새로 태어남은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죄가 씻겨지고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세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피와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성모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는 당신과 함께 성모님도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성모님은 보이지 않게, 두 분이 하나 되시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로운 세대의 아담이 되고 성모님은 하와가 됩니다. 이 두 분의 실제적 피 흘림과 숨겨진 해산의 고통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 들어주고 사죄경만 해 주면 될 것 같지만 죄지은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자주 들어도 실증이 나는데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판공성사 때는 신부님들이 초죽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초죽음으로 신자들이 새로 태어나 평화와 기쁨을 얻어 고해소를 나가는 것을 보면 모든 수고가 보람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주는 유일한 공식입니다. 나의 생명을 짜내어 상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한 번은 성지순례단과 함께 해외성지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들을 가진 신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만 팔팔하고 그 분들은 매우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저만 초췌해지고 신자분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미사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해성사 해 주고 하면서 저는 힘들었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통해 힘을 얻고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달라진 모습들을 보니 몸은 힘들어도 내적인 즐거움은 컸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죽여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제는 샤워젤이 다 떨어졌습니다. 간신히 두들겨서 나오는 아주 조금의 양으로 샤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누나 샴푸도 마찬가지지만 이것들은 자신을 소멸시켜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니코데모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높이 달리셔야 한다며 당신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는 에너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으로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주위를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영 어둠 속에서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통하여 여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결국 빛과 함께 있다가 밤에 예수님을 배반하러 나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음에도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분의 죽음이 헛되고,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건, 눈을 감고 있건 초는 자신의 죽음으로 주위를 밝힙니다. 우리의 희생이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빛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 죽음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결국 죽음 자체는 나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 - 오정순-
가족이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났다. 집에 누군가를 남겨두고 오지 않아 홀가분하게 다니다 보니 마치 내 나라인지 남의 나라인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냥 오래 산다면 나는 내 나라를 떠난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바로 나에게 다가온 단어가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렇게 욕망이 담긴 육적 세계를 떠나 영혼이 자유로운 영적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임을 실감나게 이해했다.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합니다. 즉,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을 그리고 예쁘고 멋진 단풍을 볼 수 있는 가을을 좋아하지요. 더군다나 이 시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생활하기 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 없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하는 계절로 꼽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더운 여름이고, 가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추운 겨울입니다.
대화를 하십니까? - 김우정 신부-
사람들이 일상을 풀어나가는 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가 오가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여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며, 때로는 생각지 않은 이익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익한 대화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며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양승국신부-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도 체험해보지 못하고, 위로도 받아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죽으라고 ‘쌩고생’만 하다가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축복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다행스럽게도 물로 세례를 받으며 두 번째로 태어나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성령의 불로 또 다시 한번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진정 ‘위로부터’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축복은 또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처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흘러갑니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모든 세상만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물건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지루하고 고달프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매일 다가오는 갖은 형태의 십자가들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세상이 바뀝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거치관도 바뀝니다. 내 인생 전체,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독서> : 믿음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
-김웅태 신부-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믿음 -김유철 신부- 예수님에게는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이성주 신부- 오늘도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아니었지만 율법을 공부하는 열심한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기는 어려운가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는 자기의 생각이 맞다고 무조건 우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틀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 아직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이 공부해야 되고, 지켜야할 율법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외우고, 또 실천까지 해야 되기에..... 그렇게 이름이 난 니코데모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것이고 그냥 외울 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은 외워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로 나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시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아니 기도문도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이해하지는 않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성령의 힘으로 부활신앙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도문이 마음으로 와 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스승 니코데모가 율법을 외우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손수 인간이 되신 그 사랑을 알고 싶고, 받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갔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 나야 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니코데모는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을 끌고 오지 않은 성전경비병들에게 질책하는 수석 사제들과 다른 바리사이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51-52).”라고 핀잔을 주는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4장이 전하는 독서의 말씀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는 자기가 남들보다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율법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랑표현입니다. 부활신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고,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힘을 받아드리는 용기입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이 주는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가야 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귀를 활짝 열고서 들어야 되고, 또한 주님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청해야 됩니다. 아멘.
"새로 나야된다." -양승국신부-
<적어도 80까지는>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택시를 탔습니다. 개인택시 기사님의 서비스는 제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습니다.
꽤 연세가 지긋해 보이셨던 기사님(아마도 제 부친 뻘 되어 보이시는)께서 아직 새파란 제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시는 바람에 갑자기 저는 무안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갑자기 요즘 보기 드문 "과잉친절"을 받은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진심으로 감사 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그 어른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일흔이 넘었지만 자식들 신세지지 말고 건강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뛰어야지요. 개인 택시, 이거 이래봬도 무시 못합니다. 슬슬 해도 하루 칠 팔 만원은 거뜬히 벌지요. 하긴, 택시 몰다보면 별 사람 다 만나고 속상하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요? 나이 들수록 허세 부리지 말고, 뒤로 빼지도 말고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80까지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성실의 미덕을 지니신 기사님의 삶은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새로 나야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올해로 종신서원한지 몇 년짼데" "이 몸이 올해 몇 살인데" 하는 마음먹지 말고 매순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사젠데" "내가 수도잔데" "내가 누군데" 하는 마음 갖지 말고 매일 겸허하게 자신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나이 들수록 삶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교만해지지 말고 조심조심 시작했던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순간순간 우리라는 작은 자아를 포기하고 크신 주님의 머물기 위해 모든 집착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죽는 순간까지 새 마음, 첫 마음, 소박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은 지 오래된 뿌리만 남은 나무등걸에서도 새순이 돋게 하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살 썩는 냄새만이 진동하는 라자로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갖은 죄와 악행으로 오염된 우리 영혼에게서도 생명수가 솟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새로 나야 된다. -정민수 신부-
◆예수님이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체적인 재생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은 영적 재생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짤막하게 성령론을 펴십니다.
바람같은 자유인 -강영구신부-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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