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동산장지기이자
내설악의 전설로 불리우는
이경수 선배님이
지난 2월 7일에 타계하셨습니다.
외설악 권금산장의 유창서씨가 '털보파' 산장지기의 대부라면,
내설악 수렴동 대피소에 사는 이경수씨는 '비털보파' 산장지기를 대표한다.
설악의 주릉은 공룡능선이다.
그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서쪽인 내륙쪽을 내설악이라 하고 동쪽인 바다쪽 산자락을 외설악이라 부른다.
그 내외 설악은 '내외'하는 부부처럼 서로 성(性)이 다르며 산세가 다르고 분위기 또한 다르다.
내설악은 집안을 지키는 안사람처럼 푸근한 모성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외설악에서는 엄한 부성으로 다스려지는 서릿발 선 암릉이 연이어진다.
그렇게 다른 내외설악이 금실 좋은 내외처럼 맞붙어 '설악'이라는
하나의 산악 세상을 산사람에게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의 인연도 내외설악은 그 산세만큼이나 다르다.
내설악에는 설악에서 태어난 토박이들이 주로 살고,
외설악에는 설악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설악을 사랑하여 설악으로 찾아들어간 외지인들이 더 많이 산다.
내설악은 설악산 사람들의 삶의 터였고, 외설악은 설악을 찾은 타관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내설악에서 태어나 내설악에서 평생을 보낸 내설악 수렴동 계곡의
이경수씨를 찾아간 1990년의 어느 겨울날은
산자락마다 그리움으로 쌓이던 눈발들과 함께 고스란히 기억된다.
그날 이씨는 꽁치 통조림이나마 안주로 내놓으며
강원도 쪽으로 갈 때마다 마셨던 겨울달-경월 소주를 따르며 맞아 주었다.
"산에서 사람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미안합니다. 죄송하구요."
수렴동이 막 어둠에 잠길 무렵에 나그네를 만나 기뻐서 오히려 미안하다는 이씨는
취해서 죄송하다는 뜻인지 전혀 미안해할 경우가 아닌데도 후렴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주억거린다.
불콰한 낯빛이지만 취한 것은 아닌 듯했다.
시중들던 부인이 저녁 반주 겸해서 소주를 서너병밖에 들지 않았다고 귀띔해줬다.
이씨의 평소 주량은 소주 두되 정도로 알려져 있다.
"술 먹다가 다들 갔지요.
용대리의 술친구들 최운봉이, 광택이, 우춘이 뭐 죄다 술 먹다 죽고 혼자 남았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살아남아 미안하다는 그는 사실이지 인제군 원통면 용대리의 살아 있는 신화라는 이야기를 듣는 설악의 산사람이다.
용대리 태생으로 군복무를 마친 64년 설악산에서 살기 위해 내설악으로 들어왔다가
봉정암에 첫 거처를 정하고 머리를 깎으려다 단념했다.
그 이태 후부터 영시암터.백담사.오세암 등 내설악 계곡에 있는 절간을 전전하다
봉정암 살림살이를 운반하는 일을 도맡아 함서 입에 풀칠을 했다.
지금의 수렴동 대피소와는 70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혼자서 관리해오다가 74년 인제군으로부터 임대받았다.
그 후로 관리권이 국립공원 측이나 강원도 장학회로 넘어갈 뻔했으나 그에게 붙어다니는 '신화적' 이미지와
그가 끝까지 믿어 보겠다는 설악의 산신령이 지켜주었는지,
오늘날 '수렴동'의 이름은 '이경수'와 동격으로 불리고 있다.
"만일 내가 도를 알았다면 봉정암에서 머리를 깎았을 겁니다.
헌데 도를 몰라 하산해 속인이 됐지 뭡니까. 아, 죄송합니다. 한잔 드시죠. 자, 미안합니다. 예, 죄송하구만요.
"슬하에 3남3녀의 자녀를 두고 외손녀까지 본 할아버지이지만 아직 힘이 장사여서 이경수씨에게는
불가사의한 설악의 신화가 여전히 따라 다닌다.
그의 신화적인 힘은 약초를 캐거나 날품팔이 지게짐을 질 때도 한몫 거들지만
어쩌다 내설악 일대에서 조난사고가 발생하면 제대로 빛을 본다.
내설악 산행의 주요 기점인 수렴동을 지금까지 지키면서 조난자 50여명의 목숨을 구해냈고,
이미 절명해 산 아래로 져내린 시신의 수만 30여구를 헤아린다.
조난당했을 때 그의 등에 제대로 업힌 사람은 살아난다.
그러나 하늘을 보도록 등 돌려 업힌 사람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제대로 업어 다시 밟고 살아가야할 땅을 보여줘야 하고,
죽은 이에게는 다시 못 볼 이승의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여줘야죠.
이게 모두 산신령에게서 배운 겁니다. 미안합니다. 쭉 드시고 한잔 주시죠. 죄송합니다."
술병이 덧없이 비어버린 게 자기 탓이라는 듯 미안하다며 다시 일어나서 소주 네병을 꿰어차고 돌아왔다.
껑충한 키에 건장한 몸집의 사내가 술판에 앉을 때는 학이 천년 묵은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는 듯 사뿐거리며 춤춘다.
몇 순배 술이 더 돌자 이씨는 자신의 남다른 힘에 얽힌 일화를 조금씩 털어 놓았다.
그는 한창 때 80kg 나가는 쌀 한가마씩 지고 용대리에서 설악산을 넘어 속초 장터까지 들락거렸다 한다.
"지금도 자신 있습니다. 그런 민족 경기를 한번 열어 보세요. 씨름판보다 더 재미있을 겁니다.
이번 설악제 때 열릴 수 있도록 주선해주시면 제가 꼭 우승해 보이겠습니다.
상금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술 한잔만 받아주시면 됩니다. 아, 미안합니다.
죄송하구요."
힘이 아직 남아 있어 죄송하다는 그는 용대리에서 쌀 한가마씩을 지고 대청봉을 넘어
외설악의 설악동까지 누가 먼저 가는가 하는 대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용대리와 설악동에서 등짐지며 살아가는 여러 후배들이 죄다 출전하겠지만
아직은 자신이 우승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도 거듭 고개를 숙이며 죄송스러워했다.
술잔을 너무 쉽게 비워서 죄송해 하다가는 술잔을 받으면 더욱 미안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뒤쪽 가야동에 가면 제가 토굴 하나를 파 뒀습니다.
오전 1시면 어김없이 산신령이 동쪽으로 좌정하여 나타나는 그 토굴에 어느날 선녀 같은 아가씨가 들어왔지 뭡니까.
그 아가씨가 지금의 제 작은 처입니다. 나이는 제 반밖에 안 됐는데도 아이를 벌써 둘이나 낳았지요. 아, 미안합니다.
죄송스럽군요."
집사람이 둘이어서 미안하다는 것인지, 본처 자식들과 모두 합치면 아이들이 8명이나 되어서 죄송하다는 소리인지,
계속 죄송해하면서 그는 연달아 술잔을 비웠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이경수씨를 만난 다음날이었다.
봉정암을 거쳐 소청봉산장과 중청 그리고 설악의 정상인 대청봉에 이르기까지 '수렴동 이경수의 신화'는 따라왔다.
설악의 정상에서 만난 산사람들에게 이경수씨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들은 매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 사람 요즘도 술을 마십니까. 저런 술을 끊었다더니….".
"그 사람 아마 웅담을 댓개나 먹었다지. 수백년 묵은 산삼은 물론이고. 그래서 힘이 엄청나다는 게야.".
중청산장에서 만난 한 산악인은 이경수씨의 불가사의한 힘은 웅담 덕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 양반 웅담 먹고 곰이 됐지 뭡니까.
한창 때 술 마시고 힘쓰는 걸 보면 옛날 곰골에 우글거리던 시커먼 곰들을 보는 것 같았어요.".
사실 이경수씨가 태어나고 자란 용대리에 사는 노인들은 거의 웅담을 맛 본 장사들이다.
60대 이상 주민들이 젊었을 땐 내설악 일대에서 곰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며, 곰 사냥은 불법이 아니었다.
그들은 곰을 잡으면 죽은 사람도 살려 놓는다는 웅담을 팔지 않고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먹었다.
웅담은 나무 한짐 얹은 지게를 제대로 못 지는 약골도 80㎏이 넘는 쌀 한가마를 거뜬히 들어올리는
장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용대리에서는 웅담 구경도 못한 젊은이들 대신
웅담 먹은 할아버지들에게 힘쓰는 일을 부탁한다.
"아! 가야동의 그 토굴요? 그곳에 '작은 부인'을 숨겨뒀다죠. 누가 가봤다는데 기막히게 꾸며놨다고 합디다."
"처음에는 같이 못 살게 하려고 이경수씨의 아들들이 그 처녀를 흠씬 두들겨 패곤 했답니다.
그런데도 처녀가 토굴을 떠나지 않자 이제는 본부인도 배다른 갓난아기를 돌봐줄 정도로 잘 대해 준답디다."
"설악에 자살하러 들어온 여자랍니다. 봉정암에 머물다 어느 날 봉정연봉으로 올라가 바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뒤따라온 한 산악인에 의해 구조됐답니다. 그 산악인은 처녀를 연모하게 됐다던데…. 인연은 따로 있는 거지요.
아참, 그 산악인도 얼마 전 설악의 울산암에서 떨어져 죽었답디다.
자살이란 얘기도 있고, 등반 도중 추락했다는 소문도 돌던데, 어쨌건 애석한 일입니다.
설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죠."
이경수씨나 그의 작은 부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은 대청봉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성했다.
혹시 이런 풍문 중에 이씨에 대한 험담이 섞여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소주를 됫병으로 마시며
쌀 한가마를 지고 설악산을 오르내리는 그의 불가사의한 힘을 누군가 시기하고 있는 것이다.
- 박인식 <소설가. 前 '사람과 산'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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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유목민 대장이 수도권에서 뜨겁게 리딩하던 시절인 2003년에 쓰던 수렴동 산장 안내 글입니다>
[수렴동산장]
백담산장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수렴동 산장은
구곡담 계곡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처음 만나는 산장이다.
구곡담계곡, 가야동계곡, 용아장성 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오세암, 망경대, 옥녀봉 등 내설악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특히 가을철 단풍이 아름답다.
지도상에 잘 표시되지 않은 오세암을 바로 질러 가는 지름길이 있어,
대청봉 - 구곡담계곡으로 하산, 영시암을 경유, 마등령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는
불필요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수렴동산장은 1987년 7월에 지어졌으며, 앞 건물은 통나무로 되어 있고,
뒤 건물은 돌로 외장재를 마감한 설악산의 전형적인 산장의 모습이다.
앞, 뒤 건물 내부는 모두 3단 침상 마루로 되어 있으며,
수용인원은 약 150 명 정도이다.
☞ 이용요금 : 1인 3000원이며, 침구 대여료는 담요 2000원.
☞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사전예약도 가능하다.
☞ 관리처 : 개인(이경수).
☎ 사전예약 : 033-462-7576.
첫댓글 세월 앞에 장사없다고 했나요.
별이 됐으니 후배들 등불이 되겠지요.
삼가명복을빕니다